느끼며(시,서,화)

[스크랩] ‘석지 채용신’이 그려낸 한국 초상화의 아이덴티티

Gijuzzang Dream 2011. 3. 7. 19:00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 그려낸 한국 초상화의 아이덴티티1)  

 

 

 


1. 프롤로그


 

예부터 오묘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지 않은데,

물건을 형상함이 비록 공교해도 사람은 형상하지 못했네,

오직 석강께서 모사한 것이 생동하여, 한 집에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였네

(全來妙畵不無人 像物雖工未像人 猶有石江摹寫活 一堂合席古今人) 2)

 

인간은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존재에 영원을 부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초상화를 선택하였다. 특히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거나 인물의 위대함을 보존하기에 효과적이었던 초상화는 문자가 가질 수 없는 시각적 위엄과 상상력까지 자극함으로써 시공간의 한계를 해체시켰다. 이런 점에서 초상화는 인간과 미술, 역사와 미술의 관계를 필연적인 관계로 맺어 준 '역사의 중매자'이기도 하다.


 

한국 초상화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현재까지 오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지만, 미술사적으로 가장 많은 인물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는 역시 조선시대이다.


 

오늘날 수많은 초상화가 유실되어 그 위대함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작품들의 독창성과 탁월한 회화성만으로도 조선시대를 초상화의 전성시대로 기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비록 중국(명 청조시대) 초상화로부터 표현양식과 제작의 기본 정신(傳神寫照)은 빌렸지만, 결코 모방적 아류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정신과 품격이 담긴 독자적 기법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한국적 초상화의 전통을 세운 우수함은 자랑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화단에서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는 작가와 작품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급변하는 세계 미술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역사인물화에 대한 무관심마저 당연한 시대적 조류로 받아들이기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이런 점에서 500년의 조선 역사가 무너지고, 일제강점기라는 고단한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전통회화의 고유한 정신과 화법을 계승하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그려나간 화가들의 노력은 근대 한국미술의 역사를 곧추세우는 진정 의미 있는 활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 <그림1>
 

 

이에 본 글의 서술목적은 현존하는 많은 초상화 중에서 우리의 전통을 계승하고, 동시에 근대적 조형성을 추구한 화가의 작품을 통해 한국 초상화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이러한 의도에 따라 활동시기, 전통계승, 근대적 조형성 등에 중점을 두고, 한국초상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추구한 화가로 석지 채용신3)의 회화관과 작품세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채용신(1850~1941)은 지금까지 면밀한 미술사적 접근이 부족한 상태에서 객관적인 평가 없이 다루어진 부분이 많아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화가이다4). 채용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을 통한 신문화의 수용에 몰입했던 시대적 화류(畵流)에 밀려 지극히 개인적으로 활동했던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화맥을 중시하던 화단의 전통으로 볼 때 당대 화가를 대표하는 화원출신도 아니었던 만큼, 독자적으로 이룬 채용신의 예술세계는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해 소홀하게 평가되었던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품세계가 갖는 미술사적 가치와 예술적 평가의 불확실성에 있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 초상화분야의 연구와 관심이 극히 제한적 범위에서 이루어져, 초상화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면밀한 접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에 내재한 예술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해서는 한층 면밀한 조형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에 나타난 회화적 특징은 동시대 작품을 포함한 여러 유형의 초상화와 비교하여 그의 초상화가 가진 동질성과 차이를 재평가하여야 한다. 이는 채용신 회화의 개별성이 인정되는 것과 더불어 그의 작품이 지닌 독자적 회화성이 어떠한 미술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느냐의 또 다른 판단의 준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상기하며 채용신 초상화의 특성을 역사성, 전통성, 근대성이라는 시각에서 통찰하고자 한다. 다만, 역사성은 초상 주인공들의 상호관계성에, 전통성과 근대성은 대표작품들의 비교를 통해 표현기법과 형식의 고유성, 새로운 화법과 사진술의 합리적 구성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채용신의 작품에 나타난 양식적 측면에서의 패턴화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고, 이와 함께 채용신 작품에 내재한 한국 초상화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드러내고자 한다.

 

 


2. 역사성   전통성   근대성 그리고, 아이덴티티

 


공의 그림은 실로 천진(天眞)스러우니, 보지 않아도 보는 것과 같아 오묘함이 신(神)의 경지에 들었네,

신성과 선왕과 충신과 효자와 순종하는 자손이, 은근히 뒷사람에게 감흥을 일으키네

(公之圖寫實天眞 不見見同妙入神 先聖先王忠孝順 慇懃起興後來人)5)

 

 

채용신은 초상화뿐 아니라,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등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주된 예술적 평가는 역시 초상화 작품을 통해서이다.


한국에 현전하는 초상화는 400여 점으로 추정되는데, 대표적 작가로는 이명기, 김홍도, 안건영, 이광좌, 한정래, 임희수, 장경주, 조중묵, 이한철, 유숙, 이창옥, 김은호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현전하는 초상화 작품 수로만 본다면 채용신과 견줄만한 작가는 없다. 박물관을 장식하는 역사적 초상화도 작자 미상이거나 동일 작가의 한두 작품에 불과한 것이 많다. 반면, 채용신은 문헌기록과 현전작품들을 합치면 적어도 130여 점 이상 확인되고, 이 작품 수 역시 일정기간 즉, 50~80세에 이르는 30여 년간에 직업화가로 활동한 시기에 제작한 작품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더 많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채용신은 현전하는 많은 작품 수만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로 평가 받을 만하다. 적어도 우리 미술사를 통해서 그만큼 많은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색을 분명하게 드러낸 화가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채용신이 화가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고종에 의해 어진화가로 발탁되어 태조를 비롯해 7조 어진을 모사하면서부터였지만, 직업화가로서의 삶은 1907년 정산군수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익산, 변산, 고부, 나주, 칠보 등 전라도 지역을 거점으로 약 30년간 작품제작에 전력을 다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채용신 초상화의 특징은 여러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데 우선, 초상화 속 인물들은 조선말기 나라를 이끌었던 우국지사들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채용신이 그렸던 초상화 속 주인공들의 상호관계, 채용신과 그들과의 관계를 살피는 것은 채용신의 작품제작 동기와 시대상황 및 역사적 의미를 함께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채용신의 초상화 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이다.

척사(斥邪)의 거두로서 조선말 개화파와 대립하는 입장에서 당대 유림들을 이끌었던 최익현은 채용신이 정산군수 시절에 만난 인연을 토대로 이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면암 가족의 청으로 최익현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된 채용신은 이후 여러 차례 이모를 통해 그의 정신과 모습을 재현하였다6). 이러한 최익현과의 만남은 이후 면암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초상 주인공들의 공통된 사상과 채용신의 정신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면암의 제자인 의병장 임병찬(林秉瓚, 1851~1916)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비롯해 항일지사인 김직술(金直述), 김영상(金永上,1836-1911), 박해창(朴海昌,1876-1933) 송병우(宋炳雨,1874-1943), 기우만(寄宇萬,1846~1916), 이덕응(李德應, 1866~1949), 오준선(後石 吳駿善, 1851~1931), 김성규(金星圭, 1864-?), 심원표(沈遠杓, 1853~1939), 이병순李秉巡, 1876~1942), 신기영(申基永, 1858~1907) 등 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초상 주인공들이 한말에 시작된 혼돈의 시기에 의병활동이나 항일 투쟁의 의지를 표명한 우국지사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1911년에는 호남 기호학파의 거유로서 의병활동보다는 내수를 우선으로 할 것을 주장했던 전우(田愚, 1841~1922)의 초상화와 경술국치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절명시 4수를 남긴 채 자결했던 황현(黃玹, 1855~1910)7)의 초상화는 그 작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그들이 보인 우국충정의 정신성을 귀감으로 삼고자 했던 채용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8).


채용신이 당시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채용신과 이들의 관계가 단순히 작품 제작상 만나는 화가와 주문자로 머물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석강실기에 기록된 최익현과, 전우9)와의 교유 및 제자들과 왕래한 글(書)10)에서도 그 관계성이 드러난다.


그가 남긴 우국지사의 초상화 중 특별히 면암과 간재의 초상이 여러 차례 이모 되거나 새로 모사된 것도 그의 정신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초상화를 지속적으로 그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상에 동화되어 우국충정의 마음이 더욱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내가 비록 늙어 혼몽하지만, 충효의 화상을 그리는 것이 진실로 소원’11)이라며, 평소 인간의 근본도리를 강조했던 그의 소망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당대 화가들은 문인이나 정치인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거나 은연중 동화되는 행적을 보였다. 예컨대 오세창과 안중식, 장승업, 지운영 등 여러 화가와 문인들이 그들의 사상과 행동에 따라 얽히고설켜 있었다는 점에서 화가들은 자신이 지지한 인물을 중심으로 초상이나 화훼작품을 남겼음을 짐작하게 한다12).

 

한편, 채용신은 개인적 친분이나 선택에 의한 제작 외에도 어진화가였던 그의 명성을 따라 조상의 초상화를 그려 받고 싶어 하는 주문자들의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일 제작한 초상화가 역사적 인물이나 사상가 이외도 재력가나 일반인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신분적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층 확대된 의미에서 시대의 인물상이 채용신의 붓끝에서 재현된 것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는 급변한 사회변동 속에서 화가로서의 삶에 보다 충실한 결과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채용신 스스로 주문제작 광고까지 펼치며 초상화제작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행적이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그가 남긴 예술적 흔적은 조선말기 가장 급변한 역사의 전환기에 살았던 인물들의 삶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갖는다.


채용신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역사적 인식과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고, 의병활동에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채용신의 초상화가 지닌 역사성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할만한 이유가 된다. 한편, 그의 작품이 서양문물을 활용한 조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특히,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신문물을 배척하는 인물들로 채웠지만, 정작 그들을 표현한 방법에서는 서양문물에 기대어 있는 점에서 그의 초상화에는 문물로서의 개화지만 사상으로서는 척화라는 대립이 담겨있다.


이렇듯 채용신의 초상화는 조선말기 우국지사들의 정신과 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도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의 긍정적 교훈을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역사성에 의존하여 예술적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어진 글에서는 채용신이 초상화를 제작할 때 가장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점이 초상 주인공의 사실적 모사에 있었던 만큼 초상화의 완성을 위해 예술가의 본성에 충실했던 화가로서의 태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차례로 삼부자의 화상을 모사하니, 십분이나 비단 표면에 엄숙히 정신을 머물렸네,

이 시대의 오묘한 솜씨 천년토록 내려가리니, 우리나라에 채공과 같은 이 다시 몇 사람이 있으리?

(次第摹三夫子眞 十分 面儼留神 一時工妙垂千載 東土如公更幾人)13)


 

초상화 제작은 일차적으로 그리는 인물의 사실적 재현에 중점을 두지만, 지역 · 시기 · 기법 · 재료의 차이에 따라 엄격한 차이가 있고, 전신상 · 반신 · 좌상 · 입상 · 측면상 · 정면상 등 표현양식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인다. 또한, 동서양이라는 지역적 차이에 따라 초상화의 형식과 내용이 다르고, 그 의미와 특징도 달라진다.


예를들어 사실적 재현, 즉 외형의 완벽한 닮음을 중시하며, 인물의 재현에 집중하거나, 때로는 인물이 지닌 사회적 신분에 따라 그 위대함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서양의 초상화라면, 동양의 초상화는 인물의 정신과 감성을 중시하며 그림을 통해 인물의 품성, 인격, 정신 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초상화제작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신사조는 ‘터럭 한 올이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一毫不寫 便是他人)’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 초상화의 제작과정에서도 최우선으로 꼽았던 자세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채용신에 이르기까지 초상화를 제작할 때 그리는 대상의 생김새를 화가가 임의대로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치 오늘날 사진을 통해 더 보기 좋은 모습으로 이미지를 바꾸거나, 성형을 통해 단점을 감추는 것과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김없이 사실적으로 모사하였다. 그래서 채용신의 초상화를 포함한 조선시대 초상화는 그림을 보고 인물의 성격은 물론 지병까지 진단할 만큼 대상을 옮기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는 전신사조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채용신 역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이고, 이에 대한 결과가 그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데 역할을 했음은 당연하다.

 


옛 사람이 칠분(칠분: 70%)도 오히려 진상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데

지금 공(채용신)께서는 십분(십분: 100%)의 형상을 만들어 오히려 진실함을 얻었던 것이다.

옛사람에게 구해보아도 그 무리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나로 하여금 조상을 위하여 백세의 뒤까지 이 화상에 절을 올리게 하였으니,

(조상 앞에서 자손이) 종종걸음을 하는 듯하다.

채공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 백가지로 생각해도 그 은혜를 갚기가 어렵다.14)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전신사조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채용신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본질 없는 형식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초상화를 제작함에 있어 작품의 영속성을 획득하려면 그리는 인물의 심성과 인격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사람의 형상은 그리되 마음조차 그리기는 어렵다는 전신사조의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채용신의 기예(妓藝)는 분명 뛰어난 것이다. 예시된<그림1><그림2>15)에서 보면 조선시대의 초상화와 견주어 얼마나 정교하고 세세한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공감할 수 있다. <그림2>의 궁인상만 보더라도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초상 인물의 품성과 기품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얼굴의 섬세한 표현을 보면 터럭 한 올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과 그가 추구하던 전신사조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16).

 

 

▲ <그림2>

 

 

채용신 초상화에서 전신사조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한 얼굴묘사는 정면관이라는 자세와 연관하여 그 의미가 더욱 확연히 나타난다.


정면관(正面觀)의 초상화는 중국 청대에 크게 성행하던 형식으로 한국초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상화작품들은 완전한 정면을 피한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독 정면관을 고집한 채용신의 선택이 시선을 끈다. 

정면관 형식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자세로 매우 엄숙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준다. 부동자세의 무표정한 정면관 초상화를 예의, 근엄, 권위와 같은 개념과 같이 보는 시각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정면관의 특징은 한국 초상화의 대표작으로 꼽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엄격한 정면관과 정면을 향한 시선을 권위와 신성의 강력한 상징으로 여겨왔으며, 청말에 이르기까지 초상화 제작 시 변함없이 선택되었던 자세이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천안문광장에 걸린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화에서도 정면관 그대로 반영되어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는 정면관으로 표현한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거부감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사실 정면관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의 초상화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였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척 클로스(Chuck Close, 1940~)와 같은 화가에 의해 정면관이 외형과 내면을 드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7).

특히 <그림3>18)의 척 클로스 작품(왼쪽에서 첫 번째)처럼 대형 초상사진을 대하 듯 현대인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이런 점에서 채용신이 선호했던 정면관은 인물의 성격과 품격을 관람자에게 강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기에 효과적이기에 선택된 것으로 여겨진다. 

 

 

▲ <그림3>

 

사실 채용신이 고집한 정면관은 얼굴 묘사 시 일반적으로 명암처리가 쉽지 않은 자세이다. 따라서 형식상 정면관을 취하면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초상화를 완성하려면 그에 적합한 명암처리가 필수적이다. 이에 당대의 화가들은 얼굴묘사에서 사진적 효과를 적극적 도입하였다.

그러나 채용신은 이 문제에서 안면의 돌출부위에 속하는 콧날이나 이마의 눈두덩 부위를 가장 밝게 처리하는 방법(highlight)을 사용했을 뿐 현대미술에서 입체적 표현을 위해 선택하는 명암법이나 사진적 효과의 직접적 도입에는 거리를 두었다. 예를 들어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사진적 조명효과를 활용하거나 인물의 돌출된 부위부터 점차 흐릿하게 처리하는 단계적 변화기법(gradation)을 사용하지 않았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이 인물의 사실적 묘사와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 이러한 기법을 활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채용신은 확실하게 차별화된 자신만의 얼굴 묘사법을 갖고 있었다.


예시한<그림3>19)에서도 채용신의 묘사법은 중국 청대 문관초상의 얼굴표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초상화는 우선 채용신의 작품(가운데)에 비해서 사진적 효과를 최대한 살려서 입체적인 양감이 뚜렷하다. 그러나 중국문관의 얼굴표현은 사진적 효과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오히려 색채의 부족함이 보인다. 즉, 사진을 보고 얼굴 부분만 강조하다 보니 화려한 의복과 어울리는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이 부족하게 표현되었다.


반면, 채용신의 초상화는 한국적 초상화의 특징을 잘 살린 분위기와 조화로움이 느껴진다. 먼저, 얼굴묘사는 전통적으로 이어온 배채법으로 그렸다. 그리고 전통기법위에 한층 사실적 모사를 위해 얼굴 근육과 피부 살결(肉理紋)을 따라 세필로 하나둘씩 겹쳐 올린 듯한 정밀세필을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얼굴묘사의 화룡점정( 龍點睛) 이라 할 수 있는 눈동자는 반사점까지 그려내어 초상 주인공의 정신성을 살리려는 정교함까지 보였다.


이러한 점에서 극세정치(極細精緻)한 화법으로 인물의 사실적 표현 에 뛰어난 작품을 남긴 채용신은 현대미술의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고 불릴 만큼 시대를 앞선 화가였다.


사실 얼굴표현과 관련한 정면관이나 극사실주의적 표현은 사진초상이 보편화되면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진초상은 사실적 재현이라는 최대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색과 크기라는 한계성 때문에 초상화를 완벽하게 대신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사진초상은 채색과 크기에서 초상화만큼 생동감과 전통성이 없었다. 반면 초상화는 화려한 색채와 크기로 초상 주인공과 마주하는듯한 인물의 재현적 접근성이 높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상화가 지닌 고유성은 여전히 지속될 수 있었고, 채용신과 같은 초상화가는 한층 독자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채용신은 시대적 변화의 물결 속에 놓였던 회화를 초상사진이 지닌 사실적 재현의 장점을 합리적으로 구성하여 효과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화가였다.


기본적으로 초상화 자세는 정면관을 고집했고, 얼굴 묘사에 사용한 명암법도 사진적 효과보다는 육리문에 바탕을 둔 필법과 전통적인 배채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중국은 물론 동시대의 다른 작가와 차별화된 독자성으로 완성미를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대상의 형태나 의복의 착용모습을 임의대로 바꾸지 않았던 것은 당시 복식형태에 가장 근접하고자한 작가의 노력이 배여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정장관복상(正裝官服像)을 그릴 때 혁대(革帶)가 흉배의 위쪽으로 올라가 있으며, 옷고름이 혁대 위로 젖혀져 있게 그린 것은 채용신 초상화만의 특징이기에 앞서 당시 초상사진 촬영 시 가장 일반적인 복식차림에 근거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그림4>20)를 보면 당시 사진초상의 인물과 채용신의 초상화 인물들의 혁대착용 모습이 똑같은 것에서 증명된다. 이처럼 채용신의 초상화작품의 바탕에는 근대성을 추구하면서도 내면에는 전통적 이미지를 계승   발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성이다. 이러한 의지는 그가 전통적인 화면구성을 위해 취한 또 다른 시도에서도 드러난다. 

 

 

▲ <그림4>

 

 

성현의 영정이 십분 똑같으니, 능히 무리에 뛰어나 홀로 정신을 보냈네,

오도자가 앞에서 달려가며 가르침을 생각한 뒤에, 조용히 이 사람에게 허여 하였구나

(聖賢幀像十分眞 會得遇倫獨往神 道子前驅思訓後 從容唯若古今人)21)

 

 

초상화에 인물의 신분, 성격, 교양, 인품 등과 초상 주인공과 관련된 상징적 지물(attribute)을 그려 넣어 대상을 상징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보편화된 표현방법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지물은 일반적으로 종교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서양미술의 많은 초상화에서도 인물을 상징하는 지물이 묘사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채용신의 초상화에서도 지물의 적극적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지물은 우선 화면구성이나 손의 자유로운 표현을 위해 의식적으로 도식화한 구성으로 보인다. 또한 배경에 사용된 지물(병풍, 서책, 돗자리) 역시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물에 표현된 지물이나 배경에 사용한 지물은 조선말기 지식인의 모습과 한국의 전통적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이 역시 채용신의 의도적인 구성을 짐작하게 한다.

예시한 <그림5>22) 중앙의 강위(姜瑋 1820-1884) 사진에는 당시 사진관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우선, 사진 속 배경을 보면 인물을 제외한 특별히 드러나는 사물은 없지만, 한 가지 발아래 깔려진 카펫(carpet)이 눈에 띈다. 그런데 돗자리가 아니어서 인지, 전통적인 의복을 갖춘 사진 속의 인물과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같은 사진관의 분위기는 사진초상이 대중생활 속으로 자리잡아가던 시기라는 점에서 동시대 제작한 다른 화가의 초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림5> 김은호의 작품(왼쪽에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작품)에서 화가는 돗자리 대신 당시 사진관에서 사용하던 카펫을 그대로 묘사했음이 나타난다. 예시된 작품이 1914~15년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에 활동했던 채용신의 초상화와 비교할 때 화가에 따라 그림에 표현하는 문화수용의 차이를 알 수 있다. 

 

 

 

▲ <그림5>

두 화가 모두 서양화법과 사진적 효과를 활용했지만 김은호가 실물 그대로의 모습, 즉 당시 사진관의 모습과 똑같이 재현하는데 치중했다면, 채용신은 전통적인 화면구성에 한층 무게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첫 번째, 두 번째 작품) 이른바, 김은호의 작품이 시대적 변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표현했다면, 채용신 작품의 배경처리는 당시의 문화적 변화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채용신의 투철한 역사의식의 발로이며, 전통계승을 위한 노력이라고 치켜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진화가로서의 자존심과 조선시대 마지막 황제의 은혜를 입은 채용신으로서 전통적 분위기를 버리면서까지, 사회적 변화에 절대 순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적 이미지와 관련하여 채용신의 작품 중 표현양식과 형식에서 색다른 작품으로 꼽히는 운낭자(雲娘子二十七)상이나 일반 여성을 그린 노부인상도 그의 전통적 화면구성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실례가 되는 그림이다.


<그림6>23)은 우선 서양미술과 달리 여성상이 극히 드물었던 시대적 배경에서 여인상을 제작한 점에서 시선을 끈다. 운낭자상의 특징은 얼굴 표현 등이 전체적으로 전통 화법과 담채에 의한 음영법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특히 옷 주름에 가해진 입체감 등에서 서양화법의 활용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운낭자상은 마치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주로 언급됐는데, 그 형식과 표현으로 보면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림6>

 

 

운낭자의 전체적인 동세나 표현기법이 좌측에 그려진 여신상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는데 좌측의 여인상 역시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미인도이다. 이 여인상이 바로 운낭자 그림의 기본적인 밑그림, 즉 하나의 모본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여러 부분에서 비슷한 형태가 감지되지만, 특히 오른팔의 포즈, 저고리와 치마의 처리기법, 한쪽 버선발을 내민 동작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채용신이 그린 미인도는 현존하는 미인도(동아대박물관에 소장)나 기산풍속화첩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여인상이다.


노부인상 역시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한국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당시 사진관에서 촬영한 왕실여인과 비교하면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한층 한국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왕실여인 사진도 앞서 살펴본 강위사진과 같이 카펫(carpet)이 깔렸지만, 채용신의 그림에서는 돗자리가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채용신의 전통적 화면구성의 선호도를 실감할 수 있다.

 


붓을 휘둘러 놀림에 자연스레 천진스러우니, 오도자와 용면거사만 홀로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네,

전상과 후현이 손에 따라 그려지니, 지금 세상에 공과 같은 이 과연 몇 사람일까?

(揮豪弄筆自然眞 吳道龍眠不獨神 前聖後賢隨手左 如公今世果幾人)24)

 

 

채용신의 초상화에 담긴 작가의 제작의도와 그에 따른 조형적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도출된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초상화 작품들에 나타난 패턴화된 양식이다.


이에 채용신의 초상화에서 주목할 마지막 한 가지는 초상화의 제작과정에서 형성된 패턴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이 부분은 채용신의 초상화를 비판적 시각에서 논의할 때 줄곧 문제시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채용신 초상화의 패턴화 양식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그가 주문제작방식을 도입하고 난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채용신은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개소하여 광고를 통해 초상화를 주문받아 제작하는 방법을 취했는데, 그의 주문제작방식을 1940년대 배포한 광고지로 기준을 삼는다 해도, 한국미술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970년대와 비교할 때, 몇 십 년을 앞서는 근대적 형태의 미술품제작방식을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채석강도화소발행의 광고문에는 채용신의 이력을 시작으로, 초상화 주문제작 시 지불해야하는 각 유형별 요금이 세분해서 기술되어 있고, 또 다른 광고지에는 ‘서화 주문’ 이라는 제하에 초상화와 관련한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첨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옷의 착용, 자세, 지물착용에 대한 내용, 송부할 사진이 없을 경우 사진사를 보내어 찍어 오겠다는 내용, 사진으로 초상화를 그릴 때 만약 닮지 않을 경우에는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 등이 명시되어 있다25).

 

이러한 광고문 내용만으로도 채용신이 초상화 제작에 사진을 직접적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초상화를 제작할 때 실물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사진에 의한 주문제작방식으로 제작했다면 실재로는 각 초상화마다 독창적인 화면구성으로 제작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패턴화된 양식에 사진얼굴부분만 다르게 삽입시키는 형식으로 제작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추측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7, 8>26)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을 제외하면 특별히 구분이 어려울 만큼 패턴화된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패턴화된 양식만으로 보면, 채용신의 예술성은 도식화된 형태의 반복성, 지나치게 복잡한 화면구성에 따른 간결성과 대담성 부족 이라는 지금까지 지적된 비판적 평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다만, 초상화라는 장르적 특성이 갖는 한계성과 시대적 상황, 작가정신과 작품형성배경, 근대적 조형성 등 채용신과 관련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 반영된 결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 <그림7>

 

 

미적 가치와 예술론이 달라지면 화가의 재현방식과 형식이 변화하고 그 안에 담긴 내용 또한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인간의 사는 방식과 표현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단지, 그 방식과 표현이 어떤 것을 중심으로, 언제,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시기와 내용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 <그림8>

 

이것이 이 시대의 화가들과 채용신을 바라보는 가장 큰 차이점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의 이해가 선행된다면 채용신의 작품에 나타난 패턴화된 양식도 다른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에 채용신의 초상화는 화가의 주도적 역할이 개입되어 표현한 결과물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된 아이덴티티는 어떤 무의미한 형태의 조합이나 자기고집에만 만족하는 표현이기 보다는 초상화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에서 인간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예술 일반의 고유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시각적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의 화가 중에서 <그림9>27)와 같이 전통적 화법을 활용하여 한국인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캔버스에 직접 영상을 투사하여 대형인물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식의 한층 발전한 과학적 기법을 활용하거나 다양한 재료를 동원하여 새로운 시각에서 창의적인 인물화를 시도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현대미술의 거침없고 다양한 표현양식들 속에서 채용신의 초상화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 <그림9>

 

 

결과적으로, 채용신은 한국 초상화의 전통적 특징과 근대적 기법을 합리적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외적 완성도를 높이고, 동시에 초상화의 전신사조 의미를 역사의 전환기에서도 잃지 않고, 한국성을 지닌 초상화로 계승   발전시킨 화가였다. 이것이 바로 채용신이 추구하고, 그려낸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3. 에필로그

 


대성인(大聖人)의 영정은 대고수(大高手)의 진품이니, 중천의 밝은 해처럼 더욱 정신이 나네,

사당에 들어옴에 애모되어 다시 보는 듯하니, 뒤에 석강(石江)이란 사람을 항상 말하리

(大聖遺幀大手眞 中天昭日更精神 入廟楸然如復見 後來常說石江人)28)

 

 

진정한 역사적 해석과 미학적 비평은 일치해야 한다며 역사와 미술의 상호 관계적 중요성을 지적한대로29) 미술을 통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접근은 언제나 온전한 비평적 안목과 객관적 미의 가치판단을 정립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현란한 변화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어쩌면 역사의 거울에 비친 시대상에서 진정 우리의 자화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술작품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단지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듯, 채용신 초상작품의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진실성은 개인적 관계성이 아닌 우리 역사 속 인물로서 정신적 관계를 새롭게 맺어 주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쌓여진 역사의 시간 속에 켜켜이 묻혀있는 우리의 전통과 감성을 꺼내들고, 그것을 조형화하는 일은 화가의 몫일 수 있지만, 화가가 그려낸 새로운 정신세계의 다양한 이미지시퀀스를 만나고, 공유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점에서 채용신의 초상화는 스스로 추구하는 미적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창조적 과정에서 축적한 노력과 열정의 깊이가 그려낸 시대의 인간상이며, 역사의 거울이다.


이 순간, 채용신의 초상화를 따르며 만났던 많은 인물의 정신과 삶이 한 화가의 붓끝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시대를 통찰하는 한국적 아이덴티티로 또 다른 예술적 완성을 시도하는 많은 화가들의 화폭에서 진정한 ‘홀로서기’로 되살아난 한국 초상화의 진면목을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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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글에서 identity는 독자성, 주체성, 본질을 포함한 한국적 정체성의 의미이다.


2) 全來妙畵不無人 像物雖工未像人 猶有石江摹寫活 一堂合席古今人

    : 문재희(文載凞)의 시, 이두희, 이충구 공역『석지 채용신실기』국학자료원. 2004. p.77 인용.

 

석지 채용신의 탁월한 예기는 비단 그가 남긴 초상화만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석지의 친지에 의해 실상이 기록된 저술’이라고 불릴 만큼 채용신과 관련 있는 내용들로 엮여있는 <石江實記>를 보면 그의 위대한 화업과 뛰어난 화기를 짐작할 수 있다.

5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남긴 석강에 대한 경찬문(慶讚文)과 찬시(讚詩)는 지금까지 채용신에 내린 평가와 사뭇 다른 내용들로 채워져 새삼 그의 화업(畵業)을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글의 성격상 내용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채용신이 모사(摹寫)한 흡족한 작품에서 받은 주문자의 감흥이 배어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보면 결코 표현적 과장에 마음을 상할 것도 아니라고 느껴진다.

이에 본 글에서는 채용신의 예기(藝妓)에 관한 세세한 언급을 대신하여 그에 관한 몇 편의 찬시를 옮겨 적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3) 채용신은 본관이 평강(平康)이고, 본명이 동근(東根), 아명이 용덕(龍德)이다.

자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이다.

용신이라는 이름은 무과에 급제한 후인 37세 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석강은 고종의 사호이다.

정산은 충성도 고을 이름으로 채용신의 마지막 관직이었던 정산 군수의 지역을 호로 사용한 것이다.

채용신의 생애는 크게 관직 생활과 직업화가로 살았던 삶의 행적에 따라 2기로 구분 할 수 있다.

제1기(1850~1906): 출생~정산군수까지의 관직생활 / 제2기(1907~1941) : 직업화가의 삶.

이 구분은 채용신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이 근대 전환기의 시기와 매우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채용신의 생애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평생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그가 그린 10폭의 자전병풍도 ‘평생도’에는 채용신의 생애를 집약해서 기록한 제문이 있다.


4) 석강 채용신에 대한 관심은 허영환, 조선미, 이태호 등을 비롯하여 최근의 몇몇 학자들까지 지속적인 노력과 뜻있는 미술 비평가들의 기획전시에 힘입어 조명되기 시작했다. 영원히 묻힐 수도 있었던 채용신과 관련한 소중한 사료적 자료와 작품들의 보존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상당부분 성과를 일궈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들로 생각한다. 특히, 석강의 실상을 살필 수 있는 <石江實記>의 번역이 완간된 것은 그와 관련된 연구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러한 선행연구는 본 연구자의 연구에 실질적인 모본이 된다.

전시는 채용신 사후 서울 화신화랑에서 50여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열렸던 ‘故石江蔡龍臣氏有作展’(1943년 6월 4일~10일)과 60년이 지난 2001년 6월 27일에서 8월 26일까지 ‘석지채용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에서 60여점이 출품되어 열렸던 전시가 석강과 관련한 독립적 전시였다.


5) 公之圖寫實天眞 不見見同妙入神 先聖先王忠孝順 慇懃起興後來人

    : 한태복(韓泰福)의 '칠언절구' 이두희, 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실기』국학자료원. 2004. p45


6) 최익현의 초상화는 1905년에 제작한 반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1본과 1923년에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정면전신 정장관복본 교의좌상(正面全身 正裝官服本 交椅坐像, 개인소장 및 포천 채산사 소장)이 3본 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제작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털모자를 쓴 초상은 면암이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그린 면암의 초상화 중에서도 차별화된 초상으로 평가된다.


7) 채용신의 초상화가 사진을 토대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작품 중 하나.

 ‘梅泉 黃玹像’은 1962년에 준공된 매천사(전라남도 구레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에 보관되어오다 작품의 보존을 위해 지금은 황현 후손이 소장(현재 매천사에 있는 황현상은 인쇄복사본)이다.


8) 한편, 192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작품들의 초상 주인공들이 지역의 부호와 증산교 인물, 원불교 인물들이라는 것을 통해 채용신의 관심이 동학혁명과 의병활동, 증산교와 원불교 등의 민족종교에도 미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실재 채용신의 작품에서는 척사파 인물들외에 개화파인물들의 초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은정, 「채용신 유림 초상의 인물과 사상에 대한 연구」인물미술사학. 2006. p.219-220. 참조.


9) 간재 전우초상 역시 여러 본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의 한 작품이 최근 지역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출품작중 최고가(3천5백만원)로 낙찰되기도 했다.


10) 경술년(1910년 8월 25일)과 경신년(1920년 6월 16일) 전우가 석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권상실의 비통함을 적어 보내거나, 고종황제의 영정을 볼 수 있게 한 채용신의 神筆의 模寫를 칭송하는 마음과 함께 그에 대한 바람을 적어보내기도 했다.


11) 앞의 책, p.50


12) 조은정, 앞의 글 p.181. 주내용 참조


13) 次第摹三夫子眞 十分 面儼留神 一時工妙垂千載 東土如公更幾人

      : 안락진(安洛鎭)의 七言絶句, 앞의 책. 국학자료원. 2004. p33


14) 유영선(柳永善)의 書,『석지 채용신실기』국학자료원. 2004. p48


15) <그림1> - 조선시대초상화 (얼굴부분)와 채용신 초상화 중(얼굴부분)

      <그림2> - 채용신,<궁인성상>, 1913년. 견본채색, 90×60cm, 화정박물관 제공


16) 궁인성상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손의 모양이다. 단순히 서책과 부채를 잡은 다른 초상화의 패턴화된 처리에 비해서, 안경을 붙잡은 손의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17) Jan Stuart, "Facing Forward : Meaning in ter Frontal Gaze in Chinese Portraits",

경계를 넘어서 한 · 중회화 국제 학술 심포지엄. 국립중앙박물관. 2008.


18)

-왼쪽: 척클로즈

-중앙: 채용신,1923년, 종이에 색, 00.8×52.0cm의 부분(얼굴),「조선시대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p.183

-오른쪽: 중국청대 문관초상, 견본채색, 117.5×64.5cm의 부분(얼굴).「명청대인물화」통도사성보박물관. p.37(얼굴부분 확대)


19)

-왼쪽: 척클로즈

-중앙: 채용신, 1923년, 종이에 색, 00.8×52.0cm의 부분(얼굴)「조선시대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p.183

-오른쪽: 중국청대 문관초상, 견본채색, 117.5×64.5cm의 부분(얼굴). 「명청대인물화」통도사성보박물관. p.37(얼굴부분 확대)


20) 흑백사진

-왼쪽: 강화도 조약체결 무렵의 조선측 고관사진, 1876, 최인진 「한국사진사」눈빛. p.111

-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종필>옥천당사진관 촬영, 1910. 기로소용사진. p.148

-오른쪽: <김윤식>옥천당사진관 촬영, 1910. 기로소용사진. p.87


21) 聖賢幀像十分眞 會得遇倫獨往神 道子前驅思訓後 從容唯若古今人.

      : 이도묵(李道)의 七言絶句, 앞의 책. 국학자료원. 2004. p45


22)

-첫번째: 채용신, <정해일상>, 1914년. 견본채색, 119×63.5cm. 국립현대미술관「석지채용신」삶과 꿈. p.101

-두번째: 채용신,<유공근상>, 1933년. 견본채색, 개인소장, 107×54cm. 국립현대미술관「석지채용신」삶과 꿈. p.93

-중앙: 촬영자 미상 <강위>, 1880년, 최인진 「한국사진사」눈빛. p.111

-네번째: 김은호, <최제우상>, 1913년. 견본채색, 개인소장, 144×82cm. 이규일「우리근대미술뒷이야기」돌베게. p.100

-다섯번째: 김은호, <김연국상>, 1915년. 견본채색, 개인소장, 144×82cm. 이규일「우리근대미술뒷이야기」돌베게. p.103


23)

-첫 번째: 전(傳) 채용신, <팔도미인도> 중 부분, 20세기 초. 송암미술관, 면본채색, 130.5×60cm. 국립현대미술관「석지채용신」삶과꿈. p.125

-두번째: 채용신,<운낭자상>, 1914년.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소장, 120.5×61.7cm. 국립현대미술관「석지채용신」삶과꿈. p.121

-세번째: 채용신,<노부인상>, 1932년. 견본채색, 호암미술관장, 98×55.7cm. 국립현대미술관「석지채용신」삶과 꿈. p.123

-네 번째 : <전신좌상으로 촬영한 왕실 여인>, 1900년대, 최인진「한국사진사」눈빛. p.175


24) 揮豪弄筆自然眞 吳道龍眠不獨神 前聖後賢隨手左 如公今世果幾人

     : 한예은의 ‘칠언절구’ 이두희, 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실기』국학자료원. 2004. p46


25) 이원복 소장, 주문제작시 요금

; 100원-남조복제입상, 여화관 입상, 남학창의 입상, 남양복 입상, 여양복 입상

: 90원-남전복 입상, 남평상복 입상 및 여평양복 입상

: 80원-남양복 반신상 및 여양복 반신상.

: 그의 산수대병12폭은 100원, 화초대병 12폭인 45원 등 초상화만이 아니라 산수, 화조 등도 주문 제작했었음을 알 수 있다.


26) 채용신 작

-<그림7>正面野服本 全身交椅坐像,흑백사진-오세창작자미상.1880년대. 최인진 「한국사진사」눈빛. p.71

-<그림8>채용신작-正面野服本 全身 坐像, 正面全身立像


27) 김호석

-왼쪽(상): 항일의 맥(부분도), 1990, 170x110, 수묵채색, 가나화랑 소장

-왼쪽(하): 고부에서 만난 노인(부분도), 1990,140x98, 수묵채색, 개인 소장

-중앙: 고향을 지키는 농부(부분도), 1991, 32x92, 수묵담채, 작가 소장

-오른쪽: 마지막 농부의 얼굴(부분도), 1991, 128x83, 수묵채색, 가나화랑 소장 http://www.kimhosuk.com/


28) 大聖遺幀大手眞 中天昭日更精神 入廟楸然如復見 後來常說石江人

     : 이진철(우천 이진철)의 칠언절구. 이두희, 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실기』국학자료원. 2004. p.33

 

 

 

 

출처 미술나라 바카백 | 바카백
원문 http://blog.naver.com/artwkpark/100063486307

 

 

 

 

 

 

 

 

 

 

 

 

 

 

 더보기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759

  

그림으로 망국을 개탄한 어진화사, 채용신 

   : http://blog.daum.net/gijuzzang/5140399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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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과 운현궁사람들> 다양한 고종의 초상(肖像)

   : http://blog.daum.net/gijuzzang/513388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이채 초상화 / 이재 초상화

   : http://blog.daum.net/gijuzzang/2659290

  

 ●왕의 초상화 - 조선시대 어진(御眞)에 대하여

  http://blog.daum.net/gijuzzang/373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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