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실학박물관 특별전]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Gijuzzang Dream 2010. 12. 31. 22:14

 

 

 

 

 

 

 사행(使行), 문화교류와 실리외교의 길을 가다! 



 

 사행(使行)조선 사신이 중국으로 파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행(使行)이란 '사신행차'의 줄임말로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연행도(燕行圖)>중 일부.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조선 연행사들이 말을 타고 북경성을 향해 가는 모습.

 

  정기 사행

 

정기 사행은 동지를 즈음해서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신년 축하를 위한 정조사(正朝使),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사(聖節使),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천추사(千秋使)가 있는데, 이를 '절행(節行)'이라 하였다.

천추사는 숭덕(崇德) 연간(1636~1643)에 '세폐사(歲幣使)'라 이름이 바뀌었다.

임시 사행

 

임시 사행은 '별행(別行)'이라 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파견하는 사행을 말한다.

중국의 대조선 정책이나 외교적 처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사은사(謝恩使),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거나 청원하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황제 즉위나 칠순ㆍ팔순, 황자(皇子) 탄생 등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進賀使),

황제를 비롯한 황실에 상이 났을 때 가는 진위사(進慰使),

국장(國葬)에 분향하는 진향사(進香使),

중국이 조선에 대해 오해하고 있거나, 역사서를 비롯한 공식 문서에

조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기재한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변무사(辨誣使),

중국 황실에 정변이 있거나 황제가 요동 지역을 순행할 때 가는 문안사(問安使),

조선 국왕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가 있다.

 

청나라가 심양(瀋陽)에서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다음해인 1645년(인조 23)부터는

정조(正朝)ㆍ동지(冬至)ㆍ성절(聖節)의 3절사와 세폐사를 아울러 하나의 사행으로 만들어

동지사(冬至使) 또는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으로 이름하여

해마다 한 차례만 사신을 보내게 하였다.

‘조천행’과 ‘연행’

 

조선에서 명나라로 가는 사행은 천자(天子)를 뵙고 온다[朝會] 하여 조천행(朝天行)이라고 한다.

한편 청나라로 가는 사행은 수도인 연경(燕京: 北京)을 다녀온다 하여 연경행(燕京行),

줄여서 '연행(燕行)'이라고 한다.

「항해조천도」중 일부. 사행단이 떠나는 모습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양의 칸과 북경의 황제를 만나러 가다!


조선과 청이 형제의 의를 맺은 정묘호란부터 임금과 신하[君臣]의 의를 맺은 병자호란 때까지

육로로 심양의 칸[汗]을 만나러 가는 사절과

해로(海路)로 북경의 황제를 만나러 가는 사절이 공존했다.

 

이때 심양으로 가는 사절은 1년에 2회씩 소식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에서

'춘신사(春信使)'와 '추신사(秋信使)'로 불렸으며, 문관(文官) 대신 무관(武官)이 사신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1년 3공(貢)이라 하여,

정조사ㆍ동지사ㆍ성절사와 같은 3회의 정기사행을 허락했다.

1531년(중종 26)부터는 정조사ㆍ동지사ㆍ성절사에 천추사가 추가되어 1년 4절행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조선 초기(1392)부터 임진왜란 직전(1591)까지

명나라에 보낸 사행은 정기 사절이 477회, 비정기 사절이 576회였다.

세종 연간의 예를 들어보면

조선은 198회, 명은 36회의 사신을 파견하여, 약 5배가량 조선 사절이 많았다.

북경 천도 후부터 조선 개항까지 612회를 가다


조선이 칸을 황제(皇帝)로 인정한 1637년(인조 15)부터 청 사이에 정상적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후 심양으로 총 61회의 사행이 있었고,

1644년(인조 22) 북경으로 천도한 뒤에 조선이 개항한 1876년까지 총 612회의 사행이 있었다.

명 때에 비해 사행 횟수가 적은 것은 청이 조선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4절행을 하나로 만들어 ‘동지사(冬至使)’라 칭하고, 1월 1일에 맞추어 들어오도록 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청나라에서 조선에 보낸 사행, 곧 황제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전달하는 칙사(勅使)는 총 165회로 약 4배 가량 조선 사절이 많았다.

 

조선시대 사행은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한 사행이 규모에서나 횟수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조 말까지 800여 차례에 걸친 사행이 이루어졌고,

사행 때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왕명으로 짧게는 넉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 동안 멀고 먼 험로를 왕복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와

그들을 수행하는 역관(譯官), 하급관원, 군관, 시종, 상인 등 온갖 직분의 구성원들이

사행단을 꾸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인원으로 구성된 사행단은

그 관심사항과 경험치가 제각각이었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견문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넓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사행은

여러 사람들에게 중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안목을 느끼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보고 들은 것, 새롭게 느낀 것들을 적는

‘사행록(使行錄)’을 적어 보고서로 올렸다. 또한 사사롭게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길은 실로 의식을 전환시키는 길이었다.

중국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목격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변화해야 할 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여정에 녹아 있다.
또한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제도와 문물이 더 뛰어난 것이 무엇인지도 발견해갔다.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국에서 그들의 행위와 산물을 지켜보면서

동북아시아를 포괄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나갔다.


우리 선조들은 사행이 먼 길을 가는 힘들고 고된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세계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어 꼭 가고자 했다.

또한, 상인들은 사행길을 따라 가며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소문이 난 인삼과 목면을 거래해

이익을 올렸고, 조선의 사신들이 회동관에서 시장을 열면

중국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모두 인삼을 구하기를 청했다.

이렇게 조선의 사신들은 새로운 세계로의 소통의 기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길을 가는 동안 곳곳에서 열리는 역관무역과 상인들의 사무역을 통해

국익을 우선시 하는 실리외교를 했던 것이다.

 

 

 

 대중사행(對中使行)

 

근대 이전,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을 굳게 닫고 있던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이웃의 명ㆍ청과 집중적으로 교류하던 방식이다.
조선의 대중 사행은 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되는 사대주의로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행은 국제 정세를 통찰한 결과,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책봉 정책으로, 청나라 때는 조공 정책으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조선의 국가안보를 보장받음과 동시에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고,

우리가 가진 인삼ㆍ종이ㆍ청심환 등을 공무역, 사무역등을 통해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일본으로는 중국의 물자를 팔고, 일본의 은을 들여오는 중개 무역을 통해서

한층 많은 경제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 서책과 선진 문물을 도입하였고, 중국 선비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조선 선비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 넓은 세계관을 가진 실증적 사고를 갖출 수 있도록

변해갔고,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자아 성찰의 계기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사행’이었다.

따라서 사행이라는 행위를 단순한 사대 외교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문화 교류와 실리 외교의 주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껏 사행 및 사행록에 대한 연구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나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 18세기의 작품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행 기록을 통사적으로 정밀하게 읽다 보면,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변치 않는 일관된 흐름을 잡을 수 있고,

그 흐름 속에 쉬지 않고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들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읽기위해 학제적 연구를 통한 입체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제까지는 사행록을 중심으로 한 문학 연구가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사행은 근본적으로 정치ㆍ외교적 행위이며 동시에 경제 교역과 문화 교류 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정치ㆍ경제ㆍ문화예술ㆍ군사ㆍ지리ㆍ인류학 등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사행 노정의 현장은 지금도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답사를 비롯한 현장론적 연구도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방면의 연구를 통해 사행을 재평가하고,

연행 노정 현장에 서서 과거 조선의 지식인들이 했던 고민을 떠올려 봄으로써,

앞으로의 대중관계를 헤아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대명관계 외교

 

 책봉조공의 관계

 

14세기 말 몽고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제,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을 가져왔던 사행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강력한 항의를 접한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물러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문서를 매개로 한 외교활동


대명관계는 조선 사신이 공물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는 '부경사행(赴京使行)'

칙사가 황제의 명을 조선에 직접 전달하는 '명사출래(明使出來)' 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경사행과 명사출래는 모두 문서를 매개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하들끼리는 대화[通交]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문서를 전달하는 것 외에 별도의 교섭을 벌이는 것은 참람한 행위로 여겨 문책을 받았다.

그래서 사행원은 문서 전달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제외하고는 매우 제한적인 활동 범위를 허락받았다.

문서를 전달하고, 전달된 문서에 대한 확인과 답서에 대한 청구,

명나라 관원을 만나 외교적인 교섭을 벌이는 일, 사행원의 제반 일정에 관한 사항을 확인하는 일,

본국에서 매매하도록 명을 받은 물품을 매매하는 일 등은 모두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이 담당했다.

 

 

- 대청관계 외교

 

 

 

 주변국과 조공관계를 맺은 청나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승계하기는 했지만 통치구조가 달라 외교관계까지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중국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던 18세기 후반의 기본틀은 다음과 같다.

 

만주와 중국 본토와 대만은 직할령으로 직접 다스렸고,

내몽골ㆍ외몽골ㆍ청해(淸海)ㆍ티벳과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는 ‘번부(藩部)’라 하여

간접통치 구역으로 삼았는데,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직접 통제하였다.

그밖에 조선ㆍ오키나와(琉球)ㆍ베트남(安南)ㆍ미얀마(면전, 緬甸)ㆍ타이(섬라, 暹羅)ㆍ잉글랜드(英吉利)ㆍ러시아(俄羅斯)ㆍ서양(西洋) 등은 ‘번속(藩屬)’이라 하여 일정한 조공 관계를 맺는 나라로 삼았다.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게 된 조선과 청나라

 

여타의 번속 가운데 조선은 청나라와 가장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서 외교관계의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교린의 한 대상에 불과했고,

청나라에게 조선은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일이 잘못되면 돌아갈 만주(滿洲)에 인접한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다.

청나라는 1627년과 1636년의 두 차례 침공으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끊고,

1637년 조선과 확실한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여진족의 중국 지배가 성립되는 1644년까지

인질ㆍ원군 파병ㆍ포로 송환ㆍ통혼(通婚)ㆍ세폐 등 청나라의 위압적 태도는 계속되었다.

164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인질이 돌아오고,

중국의 남부를 소란하게 했던 삼번(三藩)의 난이 진압되는 등 체제의 불안요소가 사라지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도 점차 안정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한 조선

 

청나라를 쳐서 병자년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北伐) 논의,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가 청국의 공한지(空閑地)에서 경작ㆍ채벌을 하는 범월(犯越) 문제,

북방의 영토선을 확정 짓는 백두산(白頭山) 정계 등 우호 관계를 위협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오면 양국 관계는 안정되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청나라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사행 참여 인원의 견문(見聞) 기록과 서장관과 역과의 보고서[別單]를 통해

중국의 국내사정, 황제에 대한 관심, 황실 내부 사정, 민심의 동향,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등이

자세하게 전해진다. 일군의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개항으로 사라진 사행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면 조선과 청나라의 전통적 종속관계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심대하게 위협받았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면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야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조선이 개항(1876)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행은 종말을 고했다.

 

 

 

 사행록(使行錄)

 

사행(使行)이란 '사신행차'의 줄임말로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행은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한 사행이 규모에서나 횟수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조 말까지 800여 차례에 걸친 사행이 이루어졌고,

사행 때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왕명으로 짧게는 넉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 동안 멀고 먼 험로를 왕복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와 그들을 수행하는 역관(譯官), 하급관원, 군관, 시종, 상인 등 온갖 직분의 구성원들이 사행단을 꾸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인원으로 구성된 사행단은 그 관심사항과 경험치가 제각각이었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견문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넓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사행은 여러 사람들에게 중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안목을 느끼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행단이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체험한 것 등을 써놓은 기록이 사행록(使行錄)이다.

 

따라서 사행록은 고려부터 조선왕조 까지 칠백여 년 동안 일본과 함께 양대 교류국이었던 중국에 나가

보고 들은 견문과 선진문물에 대한 체험들을 자유롭게 기록한 것이다.

이에 그 기록 속에는 한국과 동아시아, 동아시아와 세계와의 외교 역학 관계, 공식 및 비공식의 국제 무역과 경제적 상황, 중국인의 의식주 및 사상, 문학, 예술 등의 문화 교류와 학술 교류 등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사행록은 비슷한 임무를 가지고 오랫동안 변화가 거의 없는 동일한 길을 숱한 사람이 지나간 이야기다.

따라서 그 기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차에 단조로운 내용이 반복되기 쉽다.

하지만, 사행록의 내용이 비단 사행단의 여정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록자의 견문과 경험 이후에 일어나는 문화교류나 의식변화처럼

기록자의 내면적 변화 내용도 많이 담고 있어서 그 내용이 풍부하다.

 

 

중국 원(元)나라로부터 명(明)나라를 거쳐 청(淸)나라까지

조선 외교사절단의 공식 및 비공식 기록인 <사행록(使行錄)>은 시대별로 부르는 이름에 차이가 있었다.

먼저 원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 기록에는 <빈왕록(賓王錄)>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명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 기록에는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의미의 조천(朝天)이라는 말을 넣어 <조천록(朝天錄)>이라 이름 붙인 경우가 많았다.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조천이라는 말이 오랑캐를 떠받드는 의미가 되어

 소중화(小中華)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냥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의 옛 이름인

연경(燕京)을 넣어 그 사행 기록을 <연행록(燕行錄)>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 따른 사행록 종류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는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후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사행 기록을 남긴 황여일의 사행록에 『조천록』이라 제목을 붙인 것처럼

명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록에 <연행록>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른 구별보다는

빈왕록, 조천록, 연행록을 통칭하여 <사행록(使行錄)>으로 명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사행록>의 종류

 

사행록은 주로 한문으로 적었고, 한글로 적은 것도 있었는데,

같은 저자가 하나의 사행록을 한문과 한글로 적은 경우도 있었다.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는 한문본으로 주제별로 편집되었고,

한글본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우아한 궁서체로 날짜를 따라 써내려간 문학적 일기이다.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행록은 사행을 다녀오는 동안의 여정과 감상, 새로운 발견, 체험, 공무, 문화교류, 역사, 지리, 풍속,

과학, 무역 등 다양한 주제로 사행을 다녀온 생생한 기록을 적었다.

책문에서 호랑이를 경계하기 위한 불을 피워놓고 장막을 친 뒤에 그 안에 들어가서 찬 땅에 몸을 뉘이고

하룻밤을 지새우는 과정, 수레를 빌리지 못해 며칠씩 한 곳에 머무르는 일,

권마성을 외치는 사행단을 보며 웃고 따라하는 중국의 어린아이들 모습 등

사행록 속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대중국 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볼 수 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 제일층에 취후에 높이 앉아

갈석산을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 행색이 누구의 탓이라 하리오.

- 홍대용의 시

 

 

하늘이 사람을 내매 쓸 곳이 다 있도다.

나와 같은 궁생은 무슨 일을 이뤘던가?

등불 아래에 글을 읽어 장문부(장문부)를 못 이루고

말 위에서 활을 익혀 오랑캐를 못 쏘는 도다.

반생이 녹록하여 진사(?)에 잠겼으니

비수를 옆에 끼고 역수를 못 건넌들

금?이 앞에 서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山海關)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望海亭) 제일층에 취후에 높이 앉아

묘갈을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초 행색이 누구의 탓이라 하리오.

 

 

 

 

사행록 - 당시 동아시아 정황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대한 기록

사행록은

북경까지의 사행 노정ㆍ제반 사행 의식과 절차ㆍ중국의 역사와 전통과 제도ㆍ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ㆍ

북경의 서적 정보와 학술 활동ㆍ중국의 전통 연희와 서양의 최신 연희ㆍ서양 문물과 서양 서적ㆍ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ㆍ그리고 민정ㆍ풍속ㆍ언어ㆍ지리 등을 기본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다.

 

한편 사행록에는 중국 쪽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기록들과

중국 쪽에서 소홀하게 기록한 것을 그들보다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적은 기록들도 적잖이 존재한다.

때문에 사행록은 사행 당시 동아시아의 정황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하고 방대한 기록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사행록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현황에 대해 임기중(林基中)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그는 1271년(원종 12)부터 1893년(고종 30)까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통문관지(通文館志)』,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에 있는 관련 기록으로 보아 총 사행 회수가 579회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원대(1271~1368)에 1회, 명대(1368~1636)에 82회, 청대(1637~1912)에 497회인데

이 통계를 토대로 보면 사행록은 최소 579종 이상이 전승되어야 한다.

게다가 1회 연행할 때마다 2종 정도의 사행 기록을 남겼다면

최소 1천여 종의 사행록이 전승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행록의 전승현황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임기중의 연구를 살펴보면

독립성을 가진 사행록은 모두 418건에 이른다.

이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원대가 1건, 명대가 141건, 청대가 294건이다.

 

 

 

 

 

 

국수집 광고 문안을 오해하다

기상새설(欺霜賽雪)

 

신민(新民)에서 글씨를 자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더니, 주인은 이게 아니라고 했다.

<기상새설>은 마음이 깨끗하고 고매함이 찬 서리와 흰눈과 견줄 만하다 라는 뜻.

나는 촌놈이 뭘 아냐며 투덜거렸다.

 

다음날 연산관(連山關)의 한 상점에서 글씨 자랑을 하는 남자를 보니

필법이 옹졸하고 간신히 글자 모양을 갖출 뿐이어서

“내가 글씨를 뽐낼 순간이다”라고 생각하고

먹을 들어 거침없이 커다랗게 <신추경상(新秋慶賞)>이라 써 갈겼다.

“조선 사람이 글씨를 잘 쓰네.”라며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수식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붉은 종이를 가져와 내게 글씨를 써달라고 했다.

그러기에 전날 전당포 주인에게 써준 <기상새설(欺霜賽雪)>을 또 써주고

“이게 적당하지 않을까요?”물었더니

“저희 가게는 여인들의 장신구를 파는 집이지 국숫집이 아닙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전에 한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얼버무렸다.

“저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단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입니다.”

 

이전에 요양의 어느 점포에서

<계명부가(鷄鳴副珈)>라는 글씨를 금가루로 써서 걸어놓았던 간판을 퍼뜩 떠올렸다.

그 점포와 이 가게가 한 업종일거라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부가당(副珈堂)>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귀하의 가게에서는 부인들의 장신구를 전문으로 취급한다고 하셔서,

『시경(詩經)』에 나오는 ‘부계육가(副笄六珈)’라는 말에서 따와서 쓴 것입니다.”

일러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4글자가 써있으면

반드시 국숫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자기의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국숫집의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하는 뜻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눈보다 흰 밀가루를 ‘진말(眞末)’이라고 부른다.

-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사행 노정(使行 路程)

사행 노정(使行 路程)은 조선 조정이나 사신들이 자유롭게 정하거나 바꿀 수 없었다.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진공로(進貢路)’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정해놓은 대로 따라야 했다.

자연히 중국의 정치에 변동이 있으면 사행로도 변화하였다.

고려 1368년(공민왕 17) 고려는 사신을 배에 태워 남경(南京)으로 보냈다.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북경)을 포위공격한 다음 해였다.

당시 해로(海路)서해를 가로질러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려 한참을 내려갔다가 양자강 하구로 들어가 거슬러올라 남경에 이르는 긴 노정이었다.

 

험난한 바닷길은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조난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고려는 명나라에 육로(陸路)로 다닐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잔당을 핑계로 좀처럼 허락을 하지 않다가,

공양왕 1년(1389)이 되어서야 요양(遼陽)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요양에서 산해관까지는 역참(驛站)을 설치되어 있었다.

역참에는 숙소와 수비군이 있어 고려의 사신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는 길은 버려진 땅으로, 역참이 없는 원나라 때의 옛길을 이용해야 했다.

역창참(驛昌站: 지금의 단동)→탕참(湯站)→개주참(開州站: 지금의 봉성)→사열참(斜烈站: 지금의 설례)→용봉참(龍鳳站)→연산참(連山站)→첨수참(甛水站)→두관참(頭館站)→요양  

 

1640년(세조 6)에 이르자 이 지역에 북방 민족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그 지역에 새로운 길을 내고, 주요한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여 병사들을 상주시켰다.

또한 요동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하여 마을을 이루게 하였다.

이후 1480년(성종 11)에는 명의 군사력은 봉황산(鳳凰山)까지 이르게 되었고,

다음해 6월에는 압록강변에 진강보(鎭江堡)가 설치되면서 조선의 의주(義州)와 마주보게 되었다.

 

 

마침내 구련성(九連城)이라고 부르던 진강보(鎭江堡)에서 시작하여→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

진동보(鎭東堡)→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까지 이르는 교통로가

확정되었다. 이 길을 요양 동쪽의 여덟 참이라는 뜻인 '동팔참(東八站)'이라고 불렀다.

 

 

- 사행 노정의 변천

 

1409년(태종 9)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으로 바닷길에서 육로로 사행로가 변경되었다.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 설류참薛劉站, 송참松站)→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동(遼東: 요양遼陽)→안산(鞍山)→해주위(海州衛)→우가장(牛家庄)→사령(沙嶺)→고평역(高平驛)→반산역(盤山驛)→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薊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1621년(광해군 13)년

명나라와 후금(後金) 세력이 충돌하면서 요양을 거쳐서 가는 육로가 막히게 되었다.

이에 산동반도의 등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 열렸다.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 혹은 함종(咸從) 혹은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철산(鐵山) 가도(島)→거우도(車牛島)→녹도(鹿島)→석성도(石城島)→장산도(長山島)→광록도(廣鹿島)→삼산도(三山島)→평도(平島)→황성도(皇城島)→조기도(鼂磯島)→묘도(廟島)→등주(登州)→황현(黃縣)→황산역(黃山驛)→주교역(朱橋驛)→내주부(萊州府)→회부역(灰埠驛)→창읍현(昌邑縣)→유현(縣)→창락현(昌樂縣)→청주부(靑州府)→금령역(金嶺驛)→장산현(長山縣)→추평현(鄒平縣)→장구현(章丘縣)→용산역(龍山驛)→제남부(濟南府)→제하현(濟河縣)→우성현(禹城縣)→평원현(平原縣)→덕주(德州)→경주(景州)→부성현(阜城縣)→부장역(富庄驛)→헌현(獻縣)→하간부(河間府)→임구현(任丘縣)→웅현(雄縣)→신성현(新城縣)→탁주(涿州)→양향현(良鄕縣)→대정점(大井店)→경도(京都)

 

배를 타고 3,760리, 다시 육로(陸路)로 1,900 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선천의 선사포까지 올라가지 않고 증산(甑山)의 석다산(石多山)에서 배를 띄웠다.

한편 1637년(인조 15)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1645년(인조 23)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할 때까지는 조선 사신은 심양(瀋陽)까지만 왕래하였다.

1645년 황제가 북경의 자금성에서 생활하면서 조선 사신은 심양을 거치지 않고

요양(遼陽)→안산(鞍山)→경가장(耿家庄)→우가장(牛家庄)→반산(盤山)을 거쳐 광녕(廣寧)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하였다. 1661년(현종 2) 심양에 성경봉천부(盛京奉天府)가 설치되었고,

1665년(현종 6)부터 조선 사신은 심양을 지나야했다.

 

1679년(숙종 5)

청나라가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우가장에 진지를 설치하면서, 조선 사신들은

성경(盛京)에서 고가자(孤家子)→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에

이르는 길로 돌아가야 했다.

이로써 요양→심양→광녕에 이르는 청나라 때의 기본 노정이 확정되었다.

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책문(柵門)→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 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遼陽)→십리보(十里堡)→성경(盛京)→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 주류하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 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薊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한편 조선 사신이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연장한 일이 2번 있었다.

그것은 1780년(정조 4)의 건륭제 고희 축하사절과

1790년(정조 14)의 건륭제 팔순 축하사절 때의 일이다.

 

1780년에는 북경에서 고북구(古北口)→밀운(密雲)→난하(河)를 거쳐 열하로 갔는데,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가서 유명해진 길이다.

 

한편 1790년에는 북경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어

심양에서 주류하(周流河: 거류하巨流河)를 건넌 뒤에 신점(新店)→세하(細河)→의주(義州)→조양현(朝陽縣)→건창현(建昌縣)→평천주(平泉州)→홍석령(紅石嶺)를 거쳐 열하에 이르는 노정이었고,

돌아올 때는 고북구를 거쳐 북경으로 내려와 귀환했기 때문에

조선 사신의 발길이 단 한 차례만 남겨진 길이 되었다.

 

 

 조선 사신들이 사행 노정에서 꼭 들렀던 주요 도시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행을 가던 사신들은 15세기 들면서 육로로 정착된 노정을 갔다.

사행 노정은 의주를 지나 압록강을 건넌 후 책문에서 대대적인 통관 절차를 거친다.

그 후 구련성에서 호랑이를 쫓는 불을 피워놓고 한뎃잠을 자는 노숙으로 시작하였다.

 

책문에서부터 북경까지는 모두 30여개의 참(站)이 있었는데,

각 참마다 찰원(察院)을 설치하여 조선사신이 머물게 하였다.

심양에서 광녕, 산해관을 거쳐 풍윤현 근처의 고려보를 지나 계주를 지나 북경으로 들어갔다.

혹은 박지원처럼 황제가 휴가를 간 청나라 여름궁전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사행 노정 속에서 만났던 산과 강, 고개

 

 

중국으로 가는 사행노정 중 압록강에서 요양까지는 8개의 참이 있었는데 이를 동팔참이라고 한다.

동팔참은 분수령 한 가닥이 둘로 갈라지면서,

한 가닥은 북쪽으로 달려가서 안산 ㆍ천산 등의 산이 되었고,

한 가닥은 송골ㆍ봉황 등의 산으로 되었다.

 

분수령 동쪽의 큰물은 팔도하(八渡河)로서 중강(中江)에 들어가고,

서쪽 큰물은 바로 태자하(太子河)로 삼차하(三叉河)에 들어가서 요하(遼河)에 통한다.

산해관 밖의 큰물은 금주의 대릉하ㆍ소릉하와 심양의 혼하(渾河)ㆍ주류하(周流河)와 합하여

발해만(渤海灣)으로 들어갔다.

이는 모두 동팔참의 물이며, 강물줄기가 매우 급하여 조금만 비가 오면 사람들이 통하지 못하였다.

 

또 중국의 산천은 준험한 영(嶺)과 큰 하수가 많은데, 청석령(靑石嶺)은 가장 험한 고개였다.

또한 이곳은 병자호란 후에 봉림대군이 끌려가다 읊은 시조로 유명해졌다.

광녕의 의무려산을 지나 사행노정의 꼭 절반이라 하는 십삼산(十三山)을 거쳤다.

너무 험해서 북경 가는 길에는 잘 오르지 않았던 각산에 있는 각산사를 김창업은 구경하고 갔었다.

 

 

 

 

 사행(使行) 단계

 

 

- 사신이 정해지고 한양을 출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압(李)의 『연행록(燕行錄)』에 자세하다.

■ 삼사(三使)를 결정하다

1777년(정조 1) 7월 11일 벼슬아치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키거나 면직을 결정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열렸다. 이날 겨울에 출발하는 동지겸사은사의 삼사를 결정하였는데,

이압은 부사에 1순위로 올라 낙점을 받았다.

삼사가 혜민서에서 회동좌를 열어 인사를 나누다
같은 달 26일에는 정사로 뽑힌 하은군 광()과 서장관에 뽑힌 이재학과 함께

혜민서(惠民署)에서 회동좌(會同坐)를 열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사신의 명칭이 정해지다
9월 20일 영의정 김상철이 조정에서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홍인한과 정후겸(鄭厚謙) 등을

사형에 처한 일을 중국에 알리자는 건의한다.

정조는 이를 재가하여, 동지사 편에 역적을 처벌한 일을 기록한 토역주문(討逆奏文)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리하여 사신의 명칭은 사은진주겸동지사(謝恩陳奏兼冬至使)로 정해졌다.

 호조에 나아가 방물을 포장하다
10월 16일에 호조(戶曹)에 나아가 청나라에 보내는 방물인 세폐를 포장하였다.

 의정부에 나가 방물을 봉하여 싸고,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하다
10월 24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의정부에 나가 방물(方物)을 봉하여 싸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삼사가 모여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했다. 사대란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6부에 바치는 자문(咨文)을 살펴 틀린 글자가 있는지

나중에 외교적인 문제가 될 표현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로,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3번, 도중에 3번을 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날 사대에는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애초에 문서를 만들었던 승문원(承文院)의 제조가

참여하여 꼼꼼하게 살폈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인 표문(表文)

 삼사가 왕에게 하직을 고하는 숙배(肅拜)를 행하다
10월 26일에는 삼사가 대궐에 나가 왕을 하직하는 숙배(肅拜)를 행했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삼사를 맞은 정조는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담피가죽으로 된 귀싸개[耳掩] 2개와 쥐가죽으로 된 귀싸개를 가져오게 하여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겨울철 사행에 반드시 필요한 방한구였다. 3사는 공경히 받아 사모 위에 쓰고 나왔다.

승정원으로 물러나오니 별감이 나라에서 주는 납약(臘藥) 5종과

단목(丹木)ㆍ백반(白礬)ㆍ호초(胡椒)를 전해주었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다시 사대를 행했다.

좌의정, 예조 판서, 공조 참판, 병조 참의, 형조 참의 등이 함께 하였다.

가마를 타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자 호조에서 작별의 연회를 베풀었다.

배웅 나온 친척들과 예전에 근무하던 관청의 하급자들과 일일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오후 4시에 길을 떠났다.

 

 

**** 이압(李押)의 『연행록(燕行錄)』

 1777년(정조 1)에 파견된 진하사은진주겸동지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연행(燕行)하였던 이압(李押, 1737 1795)의 일기 연행기사(燕行記事) 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세손시절 자신을 위협하였던 洪麟漢 鄭厚謙 등의 벽파세력을 제거하였는데

본 사행은 이 사실을 청에 보고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본래는 토역주문(討逆奏文)을 전달하기 위한 사신이 별도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곧  절사가 가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 편에 함께 보내게 되었다.

당시 사행의 正使는 河恩君 李, 書狀官은 兼執義 李在學이었다.  

본서의 저자인 이압은 본관이 延安, 자는 信卿이다.

1769년(영조 45)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해  정언에 임명된후

교리 · 수찬 · 대사간 · 이조판서 · 공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사행 당시에는 이조판서에 재직하고 있었다.

 

본서는 내용상 1∼2책은 일기,  3∼4책은 견문잡기(聞見雜記)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777년 7월 11일 저자가 동지겸사은부사에  차출된 후 1778년 3월 29일 귀국하기까지

약 9개월간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10월 26에 입궐하여 肅拜한 후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말미에는 [표부자문주본급방물세폐수(表副咨文奏本及方物歲幣數)]

[삼절방물이준수(三節方物移准數)]  [삼절방물이준외잉여수목(三節方物移准外剩餘數目)]

[토역주문(討逆奏文)]이 실려 있다.

 

11월 27일의 기사 뒤에는 [관서연로각읍병참관(關西沿路各邑幷站官)]과 함께

[일행인마원액(一行人馬員額)] [팔포도수(八包都數)]가 실려있어

당시 사행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사행의 인원은 세 사신을 포함하여 총 338명이었으며 말은 223필이 동원되고 있다.  

팔포수는 당상관 1인당 天銀 3,000냥, 從事官 1인당 2,000냥 등으로 계산되어 83,000냥이며,

여기에 內局과 尙房 등의 무역에 필요한 別包가 별도로 10,000냥 책정됨으로써 총 93,000냥이 된다.

 

이 밖에 일기의 중간 중간에

[노정기(路呈記)] [회송례단(回送禮單)] [상은분정기(償銀分定記)] 등이 실려 있다.   

[견문잡기(聞見雜記)]는 청에서 견문한 사항을 소주제별로 분류하여 다시 정리한 것인데

연경의 연혁, 의관제도, 과거제도, 청의 풍속, 외국의 사정 등

102항목에 걸친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들 내용으로 볼 때 저자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화이관을 지니고 있던 인물로 보이지만

반면 수레, 工匠의 기술 등  조선이 배워야 할 사항도 함께 기록하고 있어

18세기 후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던 북학적인 분위기도 드러나고 있다.  

이 밖에 외국조에서는 러시아 · 몽고 · 西洋國 등에 관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서양국의 풍속을 "길에 흘린 것을 줍지 않고 밤에 문을 닫지 않으며,  

혹은 교역할 때 물건이 서로  틀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조사하여 도로 보내는 등

모두 忠信을 중하게 여긴다"고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 여정기(旅程期)

 

먼지가 날리고 찬바람이 부는 고단한 여정의 시작
「평양감사향연도」, <연광정연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행단에게 연희를 베풀었던 연광정

한양에서 의주까지 잘 닦여진 길과 깨끗한 숙소, 지방관들의 융숭한 대접을 누리던 사행사들에게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의 길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평양감사향연도」, <부벽루연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떠나는 사행단에게 연희를 베풀던 부벽루

짧으면 석 달, 길면 반년이 걸리는 긴 여정은 여러 가지 불편하고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안개가 자욱했고, 안개가 걷히는 낮이 되면 요동벌의 먼지가 살 속으로 파고들고,

저녁부터는 북방의 찬바람이 뼛속으로 사무쳤다.

언덕과 물의 연속, 동팔참


구련성에서 요양까지의 동팔참은 언덕과 물의 연속이었다.

특히 마천령과 청석령의 두 고개는 하루에 넘어야만 했다.

또한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강을 건너야 했다.

눈이 가득 쌓인 고개를 넘다보면 수레바퀴는 미끄러져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얼어붙은 강도 얼음이 깨지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움직여야 했다.

늪과 개펄로 하루 10리 길밖에 가지 못하는 일판문~이도정 구간


심양에서 신민(新民)을 지나 만나는 일판문(一板門)과 이도정(二道井) 구간은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강물이 사방으로 흘러 넘쳐 늪으로 변했고,

얼어붙은 땅이 녹는 봄에는 개펄처럼 푹푹 빠져 하루에 겨우 10리 밖에 못가는 악명 높은 구간이었다.

연산역과 고교보 구간에서 물이 나빠 고생한 조선 사신들


중국인들은 본래부터 수질이 좋지 않아 차(茶)로 물을 마시는데 비해, 조선 사람들은 생수를 마신다.

중국과 요동과 하북 지역은 물이 좋지 않은데,

특히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부근에 있는 연산역(連山驛)과 고교보(高橋堡) 구간은 가장 심했다.

많은 조선 사신들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물에 대한 고통을 남기고 있다.

먼지와 모래바람으로 고생한 계주~북경 구간


계주(薊州)에서 북경까지의 지역은 먼지가 많아 하늘이 깜깜할 지경이라고 했다.

서북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黃砂]의 위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 북경 입경기(京期)
 

<연행도>,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북경에서 활동하는 조선 사신의 모습.

 

예부의 회동관에 조선 사행 도착을 알리다


사행이 북경에 들어가는 날에는 청나라 쪽의 영송관(迎送官)과 아역(衙譯: 통역관)이

앞의 참(站)에서 먼저 달려가 조선 사신의 북경 숙소인 예부(禮部)의 회동관(會同館)에

조선 사행의 도착을 알린다.

나중에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불리는 회동관 소속의 아역 몇 사람이 나와

동악묘(東岳廟)에서 조선 사행을 맞이한다.

이때 삼사는 공복을 갖추어 입고, 행렬의 앞을 인도하는 전배(前輩)와 타고 오던 교자(轎子),

해를 가리던 일산(日傘)을 없앤다.

 

사행은 아역의 인도를 받아 제화문(齊華門)으로 들어가 회동관으로 향한다.

회동관에 다른 나라 사신이 들어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

관소에 이르면 책임자인 제독(提督) 이하 여러 아역들과 행정을 맡은 하급관리,

심부름을 하는 일꾼[館夫]와 종[皁隷]들이 문 앞에 줄을 지어 있으면서 사신을 맞아들였다.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예부에 나가 표문과 자문을 바치다


관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정사 이하 모든 공식 인원이 공복을 갖추고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로 나아갔다.

예부 상서와 낭중(郎中)과 함께 공복을 갖추고 삼사를 맞이하였고,

삼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표문과 자문을 바쳤다.

홍려시에서 황제를 만나기 위한 의식을 연습하다

 

삼사는 조회에서 황제를 만나기에 앞서 홍려시(鴻臚寺)에서 의식을 연습하였다.

정사 이하 공식 인원 모두가 참여했으며,

몸이 아파 결원이 있으면 만상군관에게 옷을 입혀 대신하게 하였다.

삼사신이 맨 앞줄에 서고,

당상역관부터 압물관에 이르기까지 27명은 9명씩 3줄을 이루어 그 뒤에 차례로 섰다.

절하라는 소리에 맞춰 일제히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하였는데,

한 사람도 틀리지 않을 때까지 연습해야 했다.

태화전에 나가 황제를 알현하다


정월 초하루 새벽 황제가 태화전(太和殿)에 나아가면,

조선 사신은 몽골을 비롯한 다른 외국의 사신들과 함께 서반(西班)의 뒷자리에 서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정사가 1품의 왕족이면 궁전 안에 들어가

청나라의 5등 제후(諸侯)의 말석에 앉아 차(茶)를 마시고 파하기도 하였다.

가지고 간 방물과 세폐는 당상역관과 압물관이 품목별로

호부의 창고와 황궁의 내탕고(內帑庫: 황실의 창고) 등에 바쳤다.

물건을 받은 곳에서는 각기 예단을 내어주었다.

사행의 노고를 치하하는 하마연을 베풀어주다


황실에서는 조선 사행이 노고를 치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를 하마연(下馬宴)이라고 한다.

명나라 때에는 사신의 숙소인 회동관에서 이루어졌고, 청나라에서는 예부에서 이루어졌다.

예부 상서가 나와 주재하는 이 연회에서는 음악이 연주되었고, 술이 나왔으며,

연극과 마술과 같은 잡희(雜戱)가 베풀어졌다.

사행이 돌아가기 전에 베풀어주는 잔치를 상마연(上馬宴)이라 하는데, 하마연(下馬宴)과 같은 절차였다.

사행이 귀국하기 전에 황제가 상을 내리다


사행이 귀국하기에 앞서 황제는 조선 사신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명나라 때는 새벽에 황궁에 들어가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와 예부에서 받았고,

청나라 때에는 황궁에 들어가기는 하나 예부를 비롯하여 해당 관청의 책임장에게 예물을 받았다.

삼사, 당상역관 3명, 압물관 24명의 순으로 물건을 받고, 감사함을 표하는 예를 올린 후 파했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숙소에서 무역을 행하다


사행은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숙소에서 무역을 행하였다.

예부에서는 매매의 한쪽 당사자에게 이익이 쏠릴 것을 막기 위해,

관리를 임명하여 매매를 감독하여 공평하게 교역하도록 하였다.

특히 병기(兵器: 무기), 화약의 원료인 염초(焰硝), 활의 재료가 되는 우각(牛角) 등

무역금지품목의 거래를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예부에서는 산해관과 봉황성에 공문을 보내 사행 도중에 교역하는 것을 방지시키기도 하였다.

예부에 출발한다는 글을 올리고 조선을 향해 출발하다


사행의 일이 끝나면 예부에 출발한다는 글을 올렸다.

명나라 때에는 황궁에 나아가 떠난다는 인사[辭朝]를 하였는데,

청나라 때에는 상통사를 예부에 보내 자문(咨文)을 받아오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해당 관청에서 역마ㆍ마부ㆍ말ㆍ차량과 음식물을 관례대로 내어주면, 사행은 조선을 향하여 출발했다.

 

 

- 북경 체류기

 

<연행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 북경의 모습.

 

북경의 관소에서 머무르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조선 사행은 북경의 관소에 40일만을 머무를 수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어졌는데,

1703년(숙종 29)에 이르러서는 60일이나 머무르는 일도 있었다.

청나라에 이르러 바깥출입이 허용되다

 

명나라에서는 사신들이 숙소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엄격하게 금지시켰지만,

청나라에 이르면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사행의 바깥출입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삼사는 공식 일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을 비롯한 이단 사상이나 청나라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는 혐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될 수 있으면 관소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북경 시내를 구경하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의 감상도 자세히 표현하지도 않았다.

 

1832년 서장관으로 연행한 김경선은 정사ㆍ부사와 함께 서양 선교사들이 포교하던 서천주당(西天主堂),

책력(冊曆: 달력)을 찍는 시헌국(時憲局), 코끼리를 기르는 상방(象房)을 구경하고,

책과 문방구를 팔던 유리창(琉璃廠) 거리,

 송나라의 충성스러운 장군 악비(岳飛)를 모신 사당 악왕묘(岳王廟)를 둘러보고 있는데,

앞서 연행했던 김창업ㆍ홍대용ㆍ박지원 등의 기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감을 대신하고 있다.

반면 천하의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여 자제군관으로 따라 나선 일군의 학자들,

김창업ㆍ홍대용ㆍ박지원 같은 이들은 관소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서양 문물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천주교 성당인 천주당(天主堂),

서양인 신부가 책임자로 있던 국립관상대인 흠천감(欽天監),

러시아 사신들이 묵는 악라사관(顎羅斯館) 등을 방문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그곳에서 서양인들의 의식주와 풍속ㆍ기예ㆍ학문ㆍ종교와 관련된 다양한 견문을 얻었다.

보다 적극적인 사람은 서양에서 만들어진 기구와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서적을 얻어오거나

서양선비[西士]로 불리우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통역을 통하거나 한문을 이용한 필담으로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물어 답을 얻기도 하였다.

 

 

유명한 학자와 만남을 시도하다

 

문장과 학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북경에 있는 유명한 학자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기윤(紀昀)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만나보고자 하던 대표적인 청나라 학자였다.

1790년의 유득공(柳得恭)과 박제가(朴齊家), 1794년의 홍양호(洪良浩)와 홍희준(洪羲俊) 부자,

1799년의 서형수(徐瀅修) 등이 그를 만나 시와 글을 주고 받았다.

 

책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책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유리창에 가서 직접 책을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 있는 경우에는 현지의 서반(序班)이나 중국의 지인에게

목록을 주어 구매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 귀국길(사조)

 

동악묘에서 편복으로 갈아입고 가다

 

북경성의 조양문(朝陽門)을 나선 사행은 입성할 때와 마찬가지로 동악묘에 가서 편복으로 갈아입었다.

외교 현안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행은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기를 바라는 부담 없는 길이었지만,

제대로 일을 끝내지 못한 사행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신분ㆍ지위ㆍ계절ㆍ노정에 따라 달라진 사행 복식

: 노정에서는 ‘편복’ , 북경 입경 후 의식과 공식 행사 시에는 ‘공복’.

사행을 떠나는 일 전체가 공적인 일이긴 하지만, 풍찬노숙의 연행 노정에서는 대개 편복(便服)을 입었다.
편복이란 평상시에 간편하게 입는 옷, 곧 사복(私服)이므로 일률적으로 그 구성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도포에 술띠를 띠고, 큰 갓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행한 상인들이 매매가 덜 끝나면 출발이 지연되었다

 

1864년(고종1, 동치3)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왔던 장석준(張錫駿)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듬해 2월 4일 북경을 떠나기로 했던 사행은 동행한 인삼 상인[蔘商]들이 매매가 덜 끝났다고

출발을 미뤄달라고 하자, 닷새를 늦춘 9일에 출발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은 여전히 매매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더 이상 북경에 머무를 수 없던 사행단은 이들로 하여금 뒤따라오게 하고 우선 길을 떠났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풀리면서 만들어진 진창길과 물난리를 겪으면서 힘들게 책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인삼 상인들의 화물을 실은 수레는 쉽사리 도착하지 않았다.

사행단은 책문에서 보름을 더 기다려야했다.

3월 5일 장석준은 도강에 앞서 수행원들의 짐을 점검하였고,

그 과정에서 몰래 숨겨놓은 인삼[潛蔘] 490근을 적발하였다.

장석준은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을 모아 놓고 불법 인삼을 모두 불태워 사절의 기강을 세웠다.

 

고국을 코앞에 두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 3월 17일 결국 사람만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짐바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 22일 상사와 부사를 먼저 출발시켰고,

책문에 사람을 보내어 빨리 올 것을 재촉했다.

4월 7일 오라는 짐바리는 도착하지 않고, 앞서 떠난 상사와 부사, 그리고 아들의 편지와 짐바리를

사검(査檢)하지 않고 먼저 도강한 잘못을 물어 서장관을 파직한다는 명이 내려왔다.

의주 부윤은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행에 대해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장석준은 “사행에서 짐바리가 함께 오거나 뒤에 오는 것은 흔히 있던 일이다.

의주에서부터 함께 경성에 올라가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해명하면서,

의주 부윤이 고지식하게 장계부터 먼저 올려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철산→선천→평양→황주→개성→장단→홍제원을 거쳐 한양에 도착한 장석준은

궁궐에 들어가 고종에게 사행하면서 작성한 견문록과 일기를 바치는 것으로 사행을 끝마쳤다.

 

 


 사행단 구성  

 

 

사행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구성 인원

 

사행의 구성 인원은 사행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1645년(인조 23) 동지(冬至)를 경축하는 동지행(冬至行)

새해 첫날[正朝]을 함께 맞는 정조행(正朝行),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행(聖節行)을 합친 삼절행(三節行)

세폐(歲幣)를 내는 연공행(年貢行)이 합쳐져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으로 통합된다.

 

매년 음력 11월에 출발하여 이듬해 4월에 귀국하는 이 사행을 흔히 ‘동지사(冬至使)’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정기 사행이다. 이를 기준으로 사행의 구성 인원을 알아보자.

사행 인원 중의 정식 관원을 정관(正官)이라 하는데,

이 정관은 청나라 황제를 알현할 때에 조복(朝服)을 갖추어 참석할 뿐만 아니라

청나라 예부(禮部)가 베푸는 접반(接伴)의 대접을 받았으며,

청 황제가 선사하는 회사품(回賜品)을 받았다.

 

 

동지사 정관의 구성과 인원 수

 

구성 인원 비고
 정사 1 정2품(종1품)
 부사 2 정3품(종2품)
 서장관 1 정5품(종4품)
 
역관(총19명)
 당상(역)관 2 원체아(元遞兒) 별체아(別遞兒) 관주관(官廚官) 3명
장무관(掌務官) 1명
상통사 2 한학(漢學: 중국어) 청학(淸學: 만주어)
질문종사관 1 교회(敎誨)
 압물종사관 8 연소총민(年少聰敏) 1명, 차상원체아(次上元遞兒) 1명, 압물(押物元遞兒) 1명, 별체아(別遞兒) 2명, 우어별체아(偶語別遞兒) 1명, 청학(淸學被選) 1명, 별체아(別遞兒) 1명
압폐종사관 3 교회(敎誨) 1명, 몽학별체아(蒙學別遞兒) 1명, 왜학교회(倭學敎誨)와 총민(聰敏) 중 1명
압미종사관 2 교회(敎誨) 1명ㆍ몽학원체아(蒙學元遞兒) 1명
청학신체아 1 청학역관
의원 1 양의사의원
사자관 1 승문원(承文院)ㆍ규장각(奎章閣) 관원
화원 1 도화서(圖畵署)
 군관 7 삼사신 자벽
우어별차 1 한학ㆍ몽학ㆍ청학 중 1명
 만상군관 2 역관 또는 의주부 소속 군관
총계 35  


 

 


 절행(節行) : 공식 인원 - 총 35명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정사ㆍ부사는 사신에게 주어진 외교상의 임무인 사사(使事)만 담당한다.

서울에서 북경을 오가는 행차에 수반되는 일[行中事]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관여하지 않았다.

정사와 부사는 반드시 귀한 집안의 저명한 사람에서 뽑았다.

황궁에서의 의식을 책임지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서장관은 관료 가운데 평소 명망을 쌓아 도덕과 규율[風憲]을 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뽑았다.

대간(臺諫)의 임무를 띠고 일행을 규찰ㆍ점검해야 했으며,

날마다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였다가 귀국한 뒤에 보고서로 꾸며 승문원(承文院)에 제출해야 했다.

정사는 정2품을 종1품으로, 부사는 정3품을 종2품으로, 서장관은 정5품을 종4품으로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 파견했다. 이를 '결함(結銜)'이라 하였고, 올려진 품계를 '가함(假銜)'이라고 하였다.

사신으로 보내기에 마땅한 고위직 인물이 없을 때,

그보다 낮은 등급의 인물을 보내면서 가함을 쓰게 한 것이다.


■ 당상역관(當上譯官)
당상역관은 사행의 일을 총괄하여 살피고 공무를 주관하였다.

사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실질적인 총책임자로서 여러 원역(員役)을 지휘했으며,

나아가 사행 중에 일어나는 공적인 일도 주관하였다. 이처럼 지위가 막중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사행을 갈 때나 조선에서 청나라 사신[賓客]을 맞이할 때[接伴] 비록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당상역관에게 곤장이나 태형(笞刑)을 가하지 않고

일을 다 끝내고 돌아온 뒤에 죄를 논하는 것으로 법으로 규정했다.


■ 상통사(上通事)
상통사 2명으로 중국어 역관 1명과 만주어 역관 1명으로 구성된다.

상통사는 당상역관을 보좌하면서 사행 업무와 사행이 지나는 여러 관문(關門)에 주는 예단을 관장하였다.

또한 상의원(尙衣院)에서 왕실의 의복을 짓는데 필요한 원사(原絲)와 옷감,

그리고 각종 사치품 및 약재를 수입하는 일을 대행했다.


■ 질문종사관(質問從事官)
질문종사관은 1명인데, 통문관(通文館: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는 교회(敎誨) 가운데 역과(譯科) 급제를 먼저 한 사람을 뽑았다.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에서 중국에서 온 문서에 쓰인 이어(吏語)나 방언(方言) 중

난해한 것만을 초록하여 주면,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내어 주석을 달아 오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조천관(朝天官)이라 하여 문관을 뽑아 보내다가,

1537년(중종 32)에 통문관의 역관으로 교체했다. 질정관(質正官)으로도 불렸다.


■ 압물(押物)ㆍ압폐(押幣)ㆍ압미종사관(押米從事官)
압물ㆍ압폐ㆍ압미종사관은 방물(方物)ㆍ세폐(歲幣)ㆍ세미(歲米)의 운송 관리ㆍ감독[押]하는 역관들이다.

한 사행이 중국에 가지고 가는 물화는 수백 태(?)에 달했고,

그것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수백 마리의 말과 마부(馬夫)를 이들이 관장했다.


■ 청학신체아(淸學新遞兒)
청학신체아 1명은 만주어 역관으로 청나라의 각 관문을 출입하고 및 찬물(饌物)의 지급을 담당했다.
당상 역관에서 청학신체아까지 총 19명의 역관 가운데

3명을 관주관(管廚官)으로 뽑아, 각각 3사행의 양식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한 1명을 장무관(掌務官)으로 뽑아 사행 중에 휴대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맡도록 하였다.

숫자가 적은 압폐종사관이나 압미종사관에서 관주관이나 장무관이 나오면,

압물종사관 8명 중에서 압폐나 압미의 일로 옮겨보게 하였다.


■ 의원(醫院)
의원 1명은 궁에서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內醫院)과

오늘날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는 혜민서(惠民署)에서 번갈아 임명했다.


■ 사자관(寫字官)
사자관 1명은 승문원(承文院) 서원(書員)에서 뽑았고,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表文)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사행 도중 현지에서 작성하여 올리는 문서의 글씨를 쓰게 했다.


■ 화원(畵員)
화원1명은 그림을 맡아보는 도화서(圖畵署)에서 데려왔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사행을 기록했다.

■ 군관(軍官)
군관은 총 7명이었다. 정사는 4명을 데려가는데, 그 중에는 서장관이 추천한 한 사람이 들어가야 했다.

부사는 3명을 데려갔고, 서장관은 1명이었다. 사신들은 모두 스스로 후보자를 추천했다.

지방의 고위 관료를 할 때 수하에 두었거나 잘 알고 지내던 전직 무관(武官)을 데려갔으나,

개중에는 자제군관(子弟軍官) 또는 자벽군관(自辟軍官)이라 하여

손아래 친인척으로 세워 외로움도 달래고 그들로 하여금 견문을 넓히게 하였다.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나 몽고어ㆍ만주어 학습을 위하여 우어별차(偶語別差) 1명을 뽑아 보냈다.

만상군관(灣上軍官) 2명은 연행 노정에서 3사행이 머무르는 곳을 정돈하고,

사행 중에 들어가는 식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의주(義州) 사람으로 정했다.

이상 35명을 ‘절행(節行)’ 이라고 한다.

절행에게는 중국 조정에서 숙식은 물론 상급(賞給)까지 내려야 했으므로 인원이 적을수록 좋으니

늘 숫자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한 사행에 여러 임무가 겹쳐지면

그만큼 담당자가 있어야 했으므로 인원을 추가하는 일이 잦았다.

정기 사행인 동지사(冬至使)의 정원은 반드시 매년 6월 15일에 차출하는 것이 법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차례를 빼앗는 자와 차례가 왔는데도 책임을 피하려는 자는 곤장 100대를 때렸다.

연행을 하면서 얻게 되는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부류와

그런 이득에도 불구하고 반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하려는 부류가 늘상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철도, 비행기 등 교통이 발달한 지금이야 약간 불편하고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풍찬노숙을 해야 하는 그 시대에 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별행(別行) : 임시 사행

 

동지사보다 사신의 품계를 높여 보내는 것이 관례여서,

정사는 정승급의 대신(大臣)이나 정1품의 왕족(종실)을 임명했다.

부사는 종2품을 정2품으로, 서장관은 정4품을 종3품으로 결함했다.

사은과 진하처럼 고마움과 축하를 전할 때는 왕실의 인물들이,

주청과 변무처럼 의전(儀典)보다 실제 성과를 얻어내야 할 때는 명망이 높고 글을 잘 짓는 실무형 인물들이

차출되었다.

반면 진위사와 진향사는 동지사행보다 한 단계 낮추었다. 진향사와 진위사는 관례상 겸하기 때문에

정사는 진위사가 되고, 부사는 진향사가 되며 서장관은 이를 겸하여 검찰했다.

고부사와 문안사는 부사를 빼고, 정사와 서장관만 보냈다.

사은사에서 문안사까지를 별행(別行)이라고 부르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차출했다.

사행의 일이 특별하지 않고 정행과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지면 이를 겸임하는데,

사신의 관품은 사은사의 행차에 준하고 인원의 정원수는 절행에 따랐다.

 

 

  삼사 : 사행의 우두머리

 

삼사 가운데 정사와 부사는 의전을 책임지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서장관이 실제 사행의 책임자라 할 수 있다.

정사는 주로 현직 정승이나 판서, 아니면 전임 대신(大臣)을 임명했다.

이들은 대개 연로하기 마련인데, 2,000리가 넘는 여정에 겨울 한철을 포함하여 6개월간의 객지 생활을

감당할 만한 체력을 지닌 인물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연행 길에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거기에 청나라를 오랑캐로 폄하하는 사고를 지닌 인사들은 병자호란에 죽거나 고초를 겪었던 조상들을

들어 임명을 사양했다. 실제로 그렇게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 중 일부는 고역을 면해보려는 핑계이기도 했다.

인평대군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사로 가장 많이 중국에 다녀온 인물이다.

19살에 심양에 들어가 1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한 이래, 37살에 죽을 때까지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었다.

1642년 청나라 군대가 금주(錦州)를 함락시키자, 이를 축하하는 진하사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다.

이듬해(1643) 청 태종이 죽자 진향사가 되어 심양에 들어가 조문했다.

이때 인질로 있던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과 함께 우모령(牛毛嶺)으로 사냥을 다녀왔다.

심양에 돌아와 함께 왔던 사신 일행은 먼저 귀국시키고, 인질로 잡혀 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청은 북경에 입성한 뒤, 1645년 소현세자를 돌려보냈다.

이에 인평대군은 청나라가 하북(河北)을 평정했음을 진하하는 사절이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1647년에는 사면해 준 것[頒赦]을 사례하기 위해 북경을 다녀오면서

외교력을 발휘해 해마다 청나라에 바치는 폐백의 양을 줄였다.

1650년에는 두 번이나 북경에 다녀왔다.

아버지 인조의 장례를 치르던 6월에는 청나라의 실력자 다이곤(多爾滾)에게 의순공주를 시집보내는 일로 상복(喪服)을 벗고 다녀왔고, 11월에는 세 신하의 일을 진주(陳奏)하는 일을 자청했다.

청나라에서 정승 이경여와 이경석, 판서 조경이 청나라와 화친을 반대했다며 극형에 처할 것을 주문했으나,

조선에서는 금고와 유배(안치)형으로 타협을 봐야 했기에

청나라 고위층과 친분이 각별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651년 늦은 봄에 돌아와 잠시 쉬다가 11월에 칙사를 보내준 것에 대한 사례와 동지사를 겸했고

1652년에는 역시 칙사에 대한 사례로 북경에 다녀왔다.

1654년 8월 강희제가 심양으로 와서 성묘한다는 소식에 문안사가 되어 나가다가

평양에 이르러 거둥이 중지되었다는 말에 그대로 돌아왔다. 11월에는 책봉진하의 일로 북경길에 올랐다.

1656년에는 사대부들이 화를 입은 것을 진주하는 일로,

1657년에는 화약 만든 것을 사죄하는 일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잦은 사행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 사행의 책임자, 서장관


서장관(書狀官)은 날마다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행에 대한 보고는 조선 건국 초기에 조말생(趙末生)이 귀국하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기록하여 조목별로 보고서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된다.

서장관은 압록강 도강을 앞두고 의주부윤(義州府尹)과 함께 사절단의 휴대품을 검속하였다.

일행 인마와 금지 품목―금과 은ㆍ진주ㆍ인삼ㆍ담비 가죽[貂皮]― 및 허가받은 액수 이상의 은자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서장관은 압록강을 건너가게 되면 곧 힘을 잃는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을 역관에게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제군관: 사신의 친척으로 따라간 단기 유학생


사신들이 자제군관을 세우는 일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배경에는

북경에서 사신들의 활동 폭이 넓어진 사정과 관련이 깊다.

명나라 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신을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1521년 역관 김이석(金利錫)이 국외 반출이 금지된『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구입하려다 적발된

사건을 계기로 숙소의 문을 잠궈 놓고 일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공무가 있을 때에 한하여 표첩을 휴대하면 출입을 허용하게 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출입금지 조치가 심할 때는 숙소의 담장 위에 가시울타리를 올릴 정도로 엄격했다.

의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도 정해진 곳으로만 이동했고, 현지인과 말을 주고받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다.

당대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던 북경에 가서도 아무런 문화 활동을 할 수 없다보니

사행은 소득 없이 힘든 임무로 여겨졌고,

큰 세계에 대한 동경이 크지 않던 지식인들은 구태여 힘든 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청나라는 대륙 통치에 자신감이 생기자 사신들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았다.

사신들은 숙소에서 나와 북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견문을 넓혔다.

유리창(琉璃廠)의 방대한 서적은 물론 천주교와 선교사로 표상되는 서구 문명과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던 일군의 젊은이에게 연행은 큰 배움의 길로 인식되면서,

어떻게 하면 연행을 갈 수 있을까 고심하게 만들었다.

광대한 요동벌의 자연과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의 인문지리를 보려 연행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건국 초기에 오랑캐니 할아버지의 원수니 하며 사신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조선후기 연행록의 3대 명편이라 할 수 있는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담헌연기(湛軒燕記)』(『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작가인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 모두가 자제군관(子弟軍官)인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역관 : 외교 실무자 ㆍ 상인 ㆍ 문화중재자


역관(譯官)은 사신을 수행하여 외국에 다녀오는 것이 곧 출세요, 치부의 방법이었다.

사역원 소속의 역관은 매년 600명 선을 유지했으나, 역관이 나갈 수 있는 관직은 76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정3품직을 받더라도 참하관의 녹봉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아예 녹봉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행에 참여하는 정관(正官)에게는 인삼(人蔘) 80근을 휴대하는 팔포(八包),

상의원(尙衣院)과 내의원(內醫院) 등 관아를 대행하는 별포(別包),

사행에 필요한 기밀비(機密費)를 조달하되

중앙 및 지방 관아의 은자(銀子)를 대출받는 공용은 차대(公用銀借貸)의 방법으로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여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은 수개월 간의 노고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다.

 

18세기 초까지 대중ㆍ대일 무역은 사행에 따른 공무역뿐이었고,

청-조선-일본의 중계무역이 성황을 이루어 역관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1707년 책문후시가 열리면서 사상(私商)의 자유 무역이 허용되고,

1680년 후반을 기점으로 청과 일본의 직교역로가 열리면서 역관들의 수익이 줄긴 했지만,

사치품 수입 사업으로 여전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역관들은 청의 정세를 파악할 주요 관서의 문서(文書)를 구해오는 것[求得]으로도 상을 받았다.

주로 반란이나 고위 관직의 비리, 주변 제국과의 마찰 등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약화되었다거나

그렇게 되려는 징후를 알리는 자료를 높이 쳐줬다. 그들이 그런 문서를 구하기 위해서

청의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빼오거나, 아예 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하였다.

『통문관지』에는 외교적 역량을 과시한 역대 유명 역관들이 소개되었는데,

인조ㆍ효종ㆍ헌종ㆍ숙종 때의 장현(張炫)과

숙종ㆍ경종ㆍ영조 때 활약한 이추(李樞)가 가장 많은 도강 횟수를 다툰다.

 

장현(張炫)은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해서 일찍이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축년 소현세자를 배종하여 심양에 가서 6년 동안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다.

수임(首任)으로 있던 40년 동안 30여 번이나 연경을 다녀왔으며, 역관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여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역관 가문의 명가로 만들었다.

 

이추(李樞)는 변무(辨誣)로 이름을 얻었다.

『명사(明史)』에 인조반정의 일이 잘못 적혀있는 것을 고치는 일로 13번이나 계속해서 사신이 갔는데,

그는 임금의 추천으로 그때마다 동행했고 마침내 영조 14년 인쇄본을 받아보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가 33회나 연경을 드나들면서, 6번 주청을 성사시켰고, 9번 진주를 허락받았으며,

10번 황제와 사신간의 대화를 통역했으며, 황실의 말을 3차례나 하사받았다.

역관에게는 임시 품직만 주고 녹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추에게는 특별히 숭록대부 지중추부사를 임명하여 종신토록 그 녹을 타게 했다.

 

 

사자관과 화원 : 지금의 워드프로세서와 사진사


사자관(寫字官)은 사행에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쓰는 사람이다.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을 전하는 외교문서에서는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글씨를 잘 써야 했다.

애초에는 사자관 2명과 화원 1명이 차출되었다.

하지만 불법 무역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자관 1명을 줄여버렸고

그 후에 화원도 이익이 없고 빚만 지게 된다 하여 스스로 원하여 나아가지 않으니,

단지 사자관 1명만 들어가게 되었다.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쓴 것으로 유명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연경에 갔을 때

사자관이 눈병이 매우 심해져서 전혀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마침 군관(軍官)으로 들어온 다른 사자관이 있어 겨우 글 쓰는 일을 대행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원을 들여보내는 대신 사자관을 1명 더 보내는 것으로 바꿨다고 했다.

화원(畵員)은 평소 국가 의식이 진행되는 과정과 절차, 행렬, 소용되는 기물을 그려 의궤(儀軌)를 만들어

기록으로 남기 듯, 사절을 수행하면서 중요했던 일을 그렸다.

정묘호란으로 요동의 길이 끊어지자 뱃길로 명나라에 가던 장면을 그린「수로조천도(水路朝天圖)」나

연행 노정을 차례로 그린 「연행도(燕行圖)」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법으로 국외로 반출할 수 없거나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할 수 없는 중국의 서적의 그림이나 지도를

모사하는 일도 화원의 몫이었다.

이이명은 1704년 삼절연공행의 정사였는데,

연행 중에 「주승필람(籌勝必覽)」이라는 책과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라는 지도를 보게 된다.

의주에서 요동을 지나 산해관ㆍ계주ㆍ북경으로 이어지는 육로와 산동반도에 이르는 해로의 지형과

군사시설을 낱낱이 알 수 있는 요긴한 자료였다.

「주승필람」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었으나, 지도는 국외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구입할 수 없었다.

화원으로 하여금 똑같이 베껴 그리게 하여 국내로 가져왔다.

비변사에서 보다 정밀하게 그려 10폭짜리 병풍으로 만들어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라 이름을 붙이고, 왕에게 바쳤다.

 

 

서기 : 유능한 사람들


영조ㆍ정조 때에 이르면 절행의 일원이 아닌 모호한 직책의 인사들이 출현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ㆍ이덕무(李德懋)와

평생을 수행비서로 지낸 조수삼(趙秀三)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 글재주와 식견을 갖추고 있지만, 양반 신분이 아니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홍대용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절강(浙江)의 세 선비와 친구의 인연을 맺은 것을 본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은 중국에 가는 것을 소원했다.

그러던 중 1778년 동지사에 채제공(蔡濟恭)이 정사로, 심념조(沈念祖)가 서장관이 되자,

이덕무는 평소 친분이 있던 심념조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고, 박제가는 채제공을 따라갔다.

두 사람의 주된 목적은 중국 구경이었으므로

북경의 선비들을 만나고 천주당이며 유리창의 서점을 구경하는 일로 소일했다.

조공(朝貢)이 허락되자 역관들과 함께 방물을 궁전으로 나르는 일에 하면서, 황제의 궁전을 구경하였다.

또한 서장관이 구입한 서적을 검열하여 포장하고 봉함하는 일도 했다.

박제가는 이때의 견문을 토대로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었다.

그는 이후 세 차례의 연행을 더 하게 된다.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을 맞아 유득공과 함께 연경에 들어가고,

그 해 10월 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연경에 들어갔다.

그리고 1801년 『주자서(朱子書)』 구매를 목적으로 마지막으로 연행하였다.

세 번째 연행은 독특한 경우인데, 건륭제가 정조의 세자 탄생을 축하했음을 들은 정조가 박제가에게

군기시정(軍器寺正)의 직함을 주어 별주(別奏)를 이끌고 앞서 출발한 동지사를 따라 가라고 했던 것이다.

이들 검서관들처럼 문관을 군관이나 역관과 같이 취급할 수 없어 따로 만든 직책이 질정관(質正官)이다.

『패관잡기(稗官雜記)』를 보면 조선 전기에 문관 1명을 조천관(朝天官)으로 임명하여

사신을 따라 들여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질정관으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이어(吏語)와 방언(方言) 중 해독하지 못하는 것을 뽑아 주어 주석(註釋)하게

하였는데, 그 관호(官號)를 쓰는 것을 꺼려하여 압물관(押物官)에 채워 넣었다.

나중에는 사역원의 관원으로 바꿔 임명하여 ‘질문관(質問官)’으로 바꿔 불렀고,

관직에 따라 종사관의 서열을 정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질정관은 조헌(趙憲, 1544~1592)이다.

조헌은 1574년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보좌하여 조천을 다녀온 후,

명나라의 문물제도의 번성함을 관람하고 조선에 반영하기에 알맞은 계책 여덟 가지를 먼저 아뢰고

나중에 또 16개 조항을 간추려 선조(宣祖)에게 바쳤다.

후에 이 두 가지 상소문을 합하여 『동환봉사(東還封事)』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박제가는 이를 두고 “중국의 문물을 보고서 우리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며

극찬했고, 자신의 『북학의』도 그런 취지로 만들었음을 이야기했다.

 

 

  마부와 하인

 

이름 모를 마부들은 역관들보다 더 자주 연행길에 올랐다.

네팔의 셀파들이 히말라야에 오르는 등반객의 짐을 나르는 것을 업으로 삼듯

국경도시 의주에는 사행 정관의 견마잡이로 평생을 보내는 마부들이 있었다.

홍대용을 수행했던 세팔(世八)은 28번째 연행이라 했고, 평생 40번을 오갔다는 견마잡이도 있었다.

사람을 태운 말의 고삐를 잡는 견마잡이는 적어도 말에 탄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아는 것도 많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다. 같은 마부라도 짐말[刷馬]을 모는 마부는 수준이 더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관가에서 노자[行資]로 쓸 은자(銀子)가 지급되었지만,

길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모두 주어 버리고 빈손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은 일행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물론 길 가의 상점ㆍ민가ㆍ과수원ㆍ채소밭에 들어가

걸리는 대로 훔쳐다 먹었다. 그래서 연행로의 중국 사람들은 이들 마부들을 도둑처럼 여겼고

때로는 사행에게 잡아와서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점잖은 사신들의 체면을 깎기도 했다.

 

- 이동 수단

계절ㆍ개인의 성향ㆍ사행단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이동수단


사행의 이동수단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계절ㆍ개인의 성향ㆍ사행단의 재정 상태에 따라 또 달라진다.

대개 정사와 부사는 쌍교(雙轎)를 탔다. 가교(駕轎) 또는 쌍마교(雙馬轎)라고도 불린 쌍교는

대감(大監)이라 부르는 2품 이상과 승지(承旨)를 지낸 사람에게만 타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왕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도성 밖에서만 타게 하는 최고의 가마였다.

쌍교는 가마를 사람이 메지 않고 말 두 마리가 앞뒤로 끌었다.

앞뒤로 길게 뻗은 끌채를 앞뒤 말의 안장 좌우에 걸고,

좌우로 짧게 뻗은 끌채를 양쪽에서 가마꾼들이 잡아 균형을 잡았다.

그러므로 정사와 부사에게는 따로 4명의 가마꾼[駕轎扶囑]이 공식 수행원으로 인정되었다.

<연행도>,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가마, 말, 도보로 북경성 앞에 이르렀던 사행단의 모습

 

품계가 낮으면 탈 수 없는 쌍교

 

정사나 부사보다 품계가 떨어지는 서장관은 쌍교를 탈 수 없었다. 서유문(徐有聞)은 좌거(坐車)를 탔다. 좌거는 말이 끄는 수레인데, 수레 위에 가마처럼 벽과 지붕을 얹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수레 몸체의 길이는 다소 길었고, 뒤에 두 바퀴를 달았으며,

앞으로 긴 채를 만들어 말의 안장에 연결하였다.

따로 균형을 잡아주는 가마꾼들이 필요 없어 인건비가 덜 들었지만, 안정성이 떨어졌다.

길이 평탄하면 별 문제가 없었지만, 비탈길이나 돌무더기 위를 지나게 되면

바퀴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나면서 상하좌우로 흔들려 지붕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좌우 벽에 뺨을 스쳐 생채기를 입기도 하였다.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타기도 했다

 

명ㆍ청교체기에 해로로 중국에 갔던 홍익한(洪翼漢)은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탔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호란을 겪던 조선은 돈이 부족했고,

북방에서 청나라와 밀고 밀리는 전쟁을 벌이던 명나라는

조선 사행을 지원해 줄 경제적ㆍ행정적 여유가 없었다.

역관들이 중국에서는 낮은 벼슬아치[小官]들도 반드시 뚜껑이 있는 가마[屋轎]를 탄다며 말렸다.

 

사행의 위신을 고려한 측면도 있지만, 서장관이 노새를 타는 마당에

자신들이 그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을 탈 수 없어 말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홍익한은 아직 근력이 세고 말 타는 것에 익숙하다며, 좋은 노새를 구해 타고 갔다.

하지만 음력 9월은 찬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20일을 버티던 홍익한도 오한이 심해지자 은자 6냥을 주고 가마로 갈아탔다.

심양과 북경성에서는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옛날 청나라 황궁이 있던 심양과 현재 황제가 있는 북경성에서는 쌍교나 좌거를 탈 수 없었다.

성 밖에서 편복에서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움직였다.

누런 기[黃旗]를 꽂은 자문(咨文)을 실은 수레가 앞장서고, 말에 탄 3사가 그 뒤를 이었다.

「항해조천도」,<등주부를 지나며> 이덕형 사행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을 탔던 역관과 군관

 

역관과 군관은 대개 말을 탔다.

당상통관과 상통사, 의관ㆍ화원ㆍ군관에게는 역마(驛馬) 1마리와 마부 1명이 원칙적으로 배정되었던 것.

하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은 짐을 싣는 것으로 쓰고 태평거(太平車)라는 수레를 빌어 탔다.

수레 위에 나무를 얽어 둥근 집을 만드는데,

앞부분의 3분의 1은 비워두고 발과 휘장을 쳐놓고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다.

집 안쪽은 남색 베를 발랐고, 양쪽 옆으로 한 변이 30cm 정도의 유리창을 달아

밖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서로 등을 맞대면 두 사람까지 탈 수 있지만, 대개 혼자 탔다.

물을 건널 때도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던 사행단

 

육로로 가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다리가 있는 강은 약간 돌아가더라도 다리로 건넜다. 수심이 얕고 폭이 넓지 않으면 걸어서 건넜다.

 

삼사를 비롯한 정관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다.

하인들이 알몸으로 메고 건너는 가마를 타기도 했고, 하인의 목을 타고 건너고,

나무로 뗏목을 엮어 하인들에게 메고 건너게 하고, 그냥 말을 타고 건너기도 하였다.

하인들은 말안장이며, 중요한 짐이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 위에 짐을 얹어 여러 번 물을 건너야만 했다.

 

사행단에게 지급되던 비용 

사행에 참여하는 인원에게는 노비(路費)가 지급되었다.

기본이 되는 경외 노비(京外路費)는 호조에서 하사하는 의자(衣資)와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의 형태로 지급된다.

 

-의자(衣資)
의자(衣資)란 의복 등의 물자를 말한다.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각기 백저포(白苧布: 흰 모시) 5필,

백면주(白綿紬) 6필, 목면(木棉)ㆍ정포(正布) 각각 15필을, 따로 쌀[賜米]15가마를 받았다.

 

-반전(盤纏)
반전(盤纏)이란 노자(路資)를 말한다.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으로 나뉜다.

원반전에 포함되는 품목은 백저포, 백지(종이), 청서피, 호초(후추) 등이 있다.

별반전은 녹피(사슴가죽), 수달피, 소연죽, 지삼초(담뱃잎), 장연죽 등이 포함된다.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

사행에 참여하는 인원에게는 노비(路費)가 지급되었다.

기본이 되는 경외 노비(京外路費)는 호조에서 하사하는

의자(衣資)와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의 형태로 지급된다.

별간구청은 별구청(別求請)으로 사신이 외국에 나가거나 돌아올 때

경유하는 지방 관아에서 관례로 받는 경비 외에 따로 더 청하는 여비를 말한다.

은장도와 청서피, 백지, 소갑초, 의롱, 초석(돗자리) 등이 있었다. 

 

 

지역[外方]에서 관례상 보내는 노자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ㆍ함경도는 사행 노정에 비껴있기 때문에 각 고을별로 수송하여 바쳤다.

경상도와 전라도[兩南]에서 보내는 쌀이 각각 321석, 290석으로 총 611석이다.

이를 정사 305석 7두 5승, 부사 229석 7두 5승, 서장관 76석으로 차등을 두어 나누었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사행이 지나는 길에 바쳤다.

 

 

사행원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사미(賜米)와 노자
사미(賜米)와 의자(衣資)는 사행원이 각각 스스로 받아서 사용하였다.

원반전ㆍ별반전과 8도에서 보내오는 노자를 모아

북경으로 가는 노정의 해당 지역에서 사용할 예단을 확보해 놓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삼사 이하 역졸에 이르기까지 사행 구성원 모두의 노비로 삼았다.

다만 호조와 선혜청에서는 별도의 청구 절차 없이 관례에 따라 지급하였다.

 

경상도 이하 6도에서는 사행이 각각 여러 고을에 서신을 보내어 노자를 요구했다.

그러나 각 고을마다 경제적 여건이 다르고, 고을 수령의 뜻도 달라

어느 지역에서는 물건이 풍족하게 오고, 어느 지역에서는 적게 보냈고,

빨리 보내주는 곳도 있었지만 사행이 출발하도록 보내오지 않는 곳도 있었다.

결국 도강하는 날까지 사행단의 노비를 확정지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행 노정의 해당 지역에 보내는 예단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행은 원칙적으로 조선의 왕과 중국의 황제 사이의 일이었으므로

사행단과 각 지방 관원과의 교류는 엄금했다.

그러므로 뇌물수수를 규례처럼 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서로 남겨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예물을 주지 않으면 발목 잡힌다!
본래 사행 노정에 있는 각 지방 관청과 명나라의 예부(禮部)에 주는 예물은

부채와 모자 등의 물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광해군 때에 주청(奏請)하는 일로 은자 수만 냥을 뇌물로 보낸 뒤로

중국의 관리들은 조선 사신의 행차를 이익을 구할 수 있는 기회[奇貨]로 여기게 되었다.

각 지방 관청의 책임자는 물론 사행을 보호하기 위해 차출된 군사들, 북경 숙소의 관리자들은

공공연하게 갖고 싶은 물품의 목록을 보냈고, 목록에 있는 물품 가운데 빠진 것이 있거나

요구하는 수량만큼 주지 않으면 갖은 핑계를 써서 사행단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사행단의 노비는 중앙 정부에서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신이 개인적으로 각 지방 관아에 청구해서 받아 써야 했다.

늘 부족했기에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번번이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궁여지책으로 사행에 참여한 역관과 상인들에게 융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관과 상인은 이를 벌충한다는 핑계로 교역에 필요한 시간과 명분을 얻게 되어,

사행을 고의로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명ㆍ청에 바쳤던 조공품, 방물(方物)

 

방물(方物)이란 본래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바치는 예물을 말하는데,

마찬가지로 책봉을 받는 곳에서 책봉을 하는 국가에게 바치는 예물도 이에 포괄된다.

여기서는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朝貢品)을 말한다.

 

사행의 방물은 사행의 목적과 종류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며,

또한 황제ㆍ황태후ㆍ황제비ㆍ황태자 등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들 품목은 조선의 토산품이면서 또한 중국에서 요청한 물품 가운데

최상의 품질을 가진 물품을 선별하여 보냈다.

 

호조(戶曹)ㆍ선혜청(宣惠廳: 조선시대 대동미와 대동목, 대동포 따위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ㆍ

장흥고(長興庫:조선시대에 둔 돗자리ㆍ종이ㆍ기름종이[油紙]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ㆍ

공조(工曹) 등 해당관청으로 하여금 시기에 맞추어 이 방물을 마련하게 하였다.

사행이 출발에 앞서 호조에서 방물을 간품하는 날짜를 잡았고,

그 날짜에 맞추어 각 소관 관청의 담당관이 방물을 가지고 호조에 모였다.

호조의 당상관과 실무자[郎官], 삼사신이 함께 입회하여[眼同],

방물의 품질을 살펴보고[看品], 방물을 봉해서 짐바리에 맞게 쌌다[封裹].

방물을 포장한 다음에는 해당 물건을 수령하여 가는 관원과

차사원(差使員: 방물 수송을 위해 임시로 파견된 관리)이 이를 함께 감독하여 길을 떠났다.

 

 

공물에 상응하게 지급하는 회사물(回賜物)

 

사신이 중국에 가서 공물을 바치면, 중국에서는 그 품질과 수량을 점검하고

공물의 품질에 따라 그 값에 상응하는 중국의 물화를 지급하였다. 이를 회사물(回賜物)이라 한다.

회사물(回賜物)은 조선 국왕에게 회사한 물품과 사행 구성원 개인별로 회사한 물품으로 나뉜다.

회사물은 중국의 규정에 정해 놓은 대로 지급되었다.

 

왕실에 보낸 물품은 절차에 따라 상통사가 수령하여, 귀국한 후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 바쳤다.

왕실에는 주로 견직물과 은자, 준마가 지급되었다.

동지사의 은자 250냥은 1729년(영조 5) 청나라 예부에서 황제의 뜻에 따라

은자 150냥은 담비 가죽 100장으로, 은자 100냥은 내조장단(內造粧緞) 4필과 운단(雲緞) 4필로 바꾸었다.

이후 성절ㆍ정조ㆍ연공의 사행도 이와 같이 하였다.

회사물품은 견직물과 은자, 짐승의 가죽, 말 등이 주를 이룬다.

단(緞)은 비단(緋緞)의 준말로 두텁고 광택이 나는 견직물로 보료(솜이나 짐승의 털로 속을 넣고,

천으로 겉을 싸서 선을 두르고 곱게 꾸며, 앉는 자리에 늘 깔아 두는 두툼하게 만든 요)나 이불요,

겨울용 의복에 많이 사용되며, 화려한 색상과 문양을 넣는 이중직 견직물이다.

궁중을 비롯한 사대부 계층 이상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금(錦)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치는 견직물이다.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고 없고 또는 색을 썼는가 안 썼는가에 따라 채단(綵緞)과 소단(素緞)으로,

무늬의 크기에 따라 대ㆍ중ㆍ소단(大ㆍ中ㆍ小緞)으로 구분한다.

또한 무늬가 없는 소단은 나중에 공단으로 불리면서

매끄럽고 광택이 있는 특성으로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장단은 직물 표면 전체나 일부분을 긁어 보풀을 만든 비단이다.

주(紬)는 실을 굵게 꼬아서 만들어 질겼기 때문에 외출복과 겉옷에 많아 사용된 비단이다.

견(絹)은 비교적 성글고 얇으며, 무늬가 없고 명주 그 자체로 짰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때나 봄가을옷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다.

청포(靑布)는 명나라 때에 주로 사용되었던 일반적인 복식 재료인데,

중국 남방의 남경(南京)ㆍ송강(松江) 등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주로 압물관 이하에게 하사되는 것을 보면 그다지 고급 직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단의 수량을 표리(表裏)와 표(表)ㆍ필(匹)로 구분해서 적어 놓고 있다.

표리란 옷감의 겉감[表]과 안감[裏]을 말하며, 표는 겉감을, 필은 길이의 단위이다.

‘표리’로 받았다면 예복(禮服)을 지어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역 형식

 

 

사행길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사행 무역(使行貿易)은 중국으로 가는 사행의 여정 중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말한다.

사행 무역의 형식은 공무역(公貿易)ㆍ사무역(私貿易)ㆍ밀무역(密貿易)이 병행되고 있었다.

 

공무역은 일반적으로 조공(朝貢)과 회사(回賜) 형식을 취한 물화의 수수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른바 증여무역(贈與貿易)이라고 한다. 개시(開市)라 칭하기도 한다.

사무역은 좁게는 사행 역원(譯員)의 팔포 무역(八包貿易)과

상의원ㆍ내의원 및 각급 관아의 무역을 이르고,

넓게는 일반상인들이 상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행에 따라가 개인적으로 교역하는 경우를 이른다.

밀무역은 사상들의 불법적인 상거래를 지칭하는 것으로, 후시(後市)라고 한다.

이는 뒷장[後市]에서 나온 말로, 공무역인 개시(開市)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증여무역형식으로 변화한 대중 무역

 

병자호란 이후 중국과의 무역 형식은 조공ㆍ회사라는 증여무역 형식을 취하게 된다.

물화 보완의 형식으로서의 조공은 그 수량이 많아지면서 무역의 성격을 가미하게 된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부터 조선의 고종 11년까지 사절(使節)

238년간에 999회로서 연평균 4.2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에 청사(淸使)는 165회로서 연평균 약 1.4회 정도로 적은 것이다.

 

이것을 양국 간의 사신파견 빈도수를 보면 조선이 약 6배나 많이 파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정기적인 사절의 파견부터 기타 사신의 파견에 이르기까지 많았던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당시의 우리 국력이 약한데 그 원인이 있다.

이렇게 사절의 파견 횟수가 많음은 그만큼 예물을 많이 가지고 가야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조선 측의 경제적인 손실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대명관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는 증여 무역의 내용적 특성인 것이다.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간 역관


조선 사회가 16세기 말 17세기 전반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었음에도

신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무기류 생산을 통한 광공업 발달과 대동법의 전국적인 확대 실시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일간의 중개무역이 활기를 띤 데 힘입고 있었다.

이 중개무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청나라에 오갔던 부연사행(赴燕使行)이며,

이를 주도한 것이 부연역관(赴燕譯官)이었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부터 조선의 개항(1876)까지

청나라로 간 사행(使行)은 총 673회에 이르는데,

이는 조선에게는 대청무역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대청무역에 참여하여 청ㆍ일간의 중개무역을 주도한 역관의 본래 임무는

사행 중 통역과 행중사(行中事)를 처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역관은 언어가 소통되는 점과 사행 중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

조선 정부의 역관제도 및 정책이 지닌 한계와 허점을 이용하여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갔다.


 

사행 역원(驛員)에게 주어지던 인삼과 팔포무역


조선전기부터 사행 역원(驛員)에게 은화를 가지고 가도록 하여

행중(行中)의 여비 및 무역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세종 때에 명에 대한 금(金)ㆍ은(銀) 세공(歲貢)이 면제되면서부터,

사행 역원이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대신 정부가 사행역원 한 사람마다 인삼(人蔘) 10근씩을 지급하여 가지고 가도록 규정하였다.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사행 역원에게 일정액의 한도 내에서의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한 것이다.

 

인조 6년(1628)에서 22년(1644)사이에 해당하는 명말(明末) 숭정(崇禎) 연간에 이르러

사행로가 험난해지면서 종래 한 사람 당 인삼 10근씩의 정액을 80근으로 증가 책정하였으며

그 인삼을 10근씩 팔포(八包; 여덟 꾸러미)에 나누어 싸게 하여 이를 팔포(八包)라 부르게 되었다.

'팔포무역(八包貿易)'

사행역원이 사사로이 마련한 인삼 80근을 사무역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말한다.

 

부연역관(赴燕譯官)들의 무역활동을 확장시킨 것은 관아 무역(官衙貿易)의 대행이었다.

서울의 각 군문이나 아문이 북경에서 수입해야 할 각종 물품은 재고량과 수요량을 고려하여

매년 동지행(冬至行)과 역행(曆行)의 부연역관에게 자금을 지급하여 수입하였다.

이를 '별포무역(別包貿易)'이라고도 한다.

역관들은 사행을 통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역관들은 신분타파를 주장하고

신문화의 수입과 의식의 개혁에 앞장서 근대화의 선구적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개시(開市)와 후시(後市)를 중심으로 한 민간무역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은 조선의 철저한 쇄국주의 정책으로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주로 역관들에 의해 행해졌던 중국과의 무역은 임진왜란 중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강(中江) 지역의 개시(開市)가 이루어지면서 민간무역의 길이 열렸다.

개시(開市)는 두 나라의 사정에 따라 폐지된 적도 있지만

중강 이외에 회령ㆍ경원 등지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상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개시는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등 그 제약이 심해,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는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후시무역(後市)가 이루어졌다.

 

즉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의주상인인 만상은 사행원, 특히 역관과 감독관 등과 결탁하여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

책문(柵門)에서 청국 상인인 요동의 차호(車戶)와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책문 후시(柵門後市)'라고 하였는데,

책문에서의 무역은 사상(私商) 중에서도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만상 후시(灣商後市)'라고 불렸다.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 만상(灣商)

 

만상(灣商)은17세기 말 이후 대청 무역활동을 한 의주(義州)상인으로,

유만(柳灣)ㆍ만고(灣賈)라고도 한다.

 

책문후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무역의 중심도시가 되고,

만상은 이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금ㆍ은ㆍ인삼ㆍ우피 등을 청국 상인의 비단ㆍ당목ㆍ약재ㆍ기타 보석류와 거래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은, 사행원이 개인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만큼 경제력이 없었고,

사행의 실무 담당자인 역관의 경제적 대우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만상은 청나라와의 무역에 있어서 개성상인(開城商人)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만상이 중국시장에서 상품을 구입해 오면

국내 최대 규모의 상인인 개성상인은 이것을 국내에 팔고,

반대로 개성상인이 생산지에서 매점(買占)한 국내 물품의 중국 수출은 만상이 담당하는

무역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후시는 청국 상인들과의 부채 문제 등 부작용을 들어 금지되기도 하였다.

만상 후시는 1787년(정조 11) 혁파되기도 했으나, 1795년(정조 19)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상들은 개항 후 침투한 외래 자본에 밀려 해체의 길로 갔다.

 

 무역장소

대청 무역과 관련된 사행 노정의 주요 구간은

중강(中江), 책문(柵門), 성경(盛京: 심양), 중후소(中後所) 모창(帽廠), 북경 회동관(會同館)이다.

 

중강
중강은 압록강 서쪽 1리쯤에 있는 소서강(小西江)에서 서쪽으로 4리쯤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영의정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遼東)의 미곡을 구입해서 기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명(明)에 개시(開市)를 요청했다.

이에 1593년(선조 26) 중강 개시(中江開市)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은을 주요한 지불수단으로 하여, 구리ㆍ수철ㆍ면포 등을 미곡과 군마 등과 교환했다.

하지만 약탈 등의 폐단으로 1601년에 혁파되었다.

이듬해 명과 조선은 수세(收稅)를 통해 국가경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중강개시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무역상의 불리함과 잠상(潛商)의 인삼교역 등 폐단이 발생하여 1609년(광해군 1) 다시 폐지했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 이후 후금에 대하여 많은 물품을 바쳐야 했던 조선과,

직물 등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했던 후금의 필요에 따라 1628년 2월 다시 중강 개시가 시작되었다.

김경선은『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중강 개시는 사실상 팔고 사는 무역이 아니라

국경 지대의 청인들에게 거저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후 중강 개시는 점차 무역 체제와 무역품이 정례화 되어감으로써 불평등한 요소가 해소되어 나갔다.

공무역인 중강 개시는 의주부윤의 감시 하에 사상(私商)의 출입을 금지했고,

교역횟수ㆍ개시시기ㆍ교역기간ㆍ교역품목 등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가 점차 약화되고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대청교역은 자유무역처럼 되었는데,

이를 중강 후시라고 한다. 일종의 밀무역으로 개시 이후 50년간 성행하였던 중강 후시는

현종 초 장소를 책문(柵門)으로 옮겨 행하여졌다.

 

 

책문
압록강에서 책문까지는 110리에 달한다.

책문은 사행이 청으로 들어갈 때와 북경에서 돌아올 때 무역이 활발히 일어났던 지역이다.

이 책문에서 일어난 대청 무역의 형식을 책문무역(柵門貿易)이라고 부른다.

책문은 가자문(架子門) 또는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압록강 건너 만주의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있다.

봉성 장군(鳳城將軍)이 그 여닫기를 맡아 한다. 이곳에서는 1660년(현종 1)부터 사무역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해 상인들이 마부로 변장하여

은과 인삼을 가지고 강을 건너가 책문에서 밀무역을 했기 때문에

책문 후시(柵門後市)란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 중강개시가 폐지된 뒤에 책문후시는 더욱 번창하여 대청 무역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금하였으나, 단속기관인 단련사(團練使)까지 이에 가담하여

단련사 후시(團練使後市)라는 이름으로 더욱 성행해지자 1755년 공인하게 된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에 따르면,

책문후시는 1년에 4?5차례에 걸쳐 열리고 한 번에 은 10만 냥이 거래되었다고 하며,

청나라의 보석류ㆍ비단ㆍ약재류 등을 들여오는 데 따른 비용으로

조선의 은이 연간 50~60만 냥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정조 때에는 후시를 일체 금지하려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으며,

책문 후시는 청국 세폐사의 파견 중지 조치가 있은 개항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경
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십리보→성경까지는 540여 리인데,

조선 사행은 성경에서 예물 및 표문을 내는 등 외교적 의례를 가졌고,

이를 위해 들어간 조선 측 관리와 상인에 의한 공무역과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성경에서 소흑산, 관령을 거쳐 산해관까지 이르는 노정 중에 동관역에서 18리 떨어진 곳에

중후소(中後所)가 있다. 중후소는 모자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조선 사행은 연경으로 들어갈 때 이곳에서 모자를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자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이 모자 무역은 주로 역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를 관모무역(冠帽貿易)이라 부른다.

 

김경선은『연원직지』에서 중후소의 「모창기(帽廠記)」를 따로 두었는데,

“모창이란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다.

중국 사람이 쓰는 모자와 우리나라의 관모(冠帽)는 모두 여기서 생산된다고 한다.”고 하고는,

밤에 직접 가서 본 모자 만드는 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북경 회동관
성경에서 북경까지는 1,509리였다.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부르는 회동관(會同館)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연행사들은 표문과 자문을 청나라에 제출하는 의식인 표자문정납(表咨文呈納),

정사 이하 모든 정관이 홍려시(鴻臚寺) 패각(牌閣) 앞에서 3궤 9고두를 연습하는 홍려시연의(鴻臚寺演儀),

사행 정관이 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참(朝參), 방물과 세폐를 바치는 방물세폐정납(方物歲幣呈納),

숙소인 회동관에서 열리는 하마연(下馬宴),

청나라가 조선의 왕과 삼사신 및 원역에게 주는 회송예물(回送禮物)을 받는 영상(領賞),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해 마련하는 상마연(上馬宴) 등 각종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동안 회동관 뜰에서는 이른바 회동관 개시(會同館開市)가 실현되었다.

회동관 개시는 상마연이 끝난 뒤, 청나라 예부에서 관원이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잠매자 및 거래 금지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告示)한 뒤 시작되었다.

고시 후 북경의 각 점포 상인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 역관 및 상인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 길에 오를 때는 반드시 사신 일행이 무역한 물품의 포수(包數)를 기록하여

청나라 아문(衙門)에 제출하고 아문에서는 그 수를 점검한 뒤 북경을 떠나게 하며,

그것을 예부에 보고하여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함으로써

사행의 귀환 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 무역품

 

중국과의 사행 무역에 있어서,

조선의 수출품은 금ㆍ인삼ㆍ종이ㆍ우피(牛皮)ㆍ명주ㆍ저포(苧布)ㆍ모물(毛物)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ㆍ당목(唐木)ㆍ약재ㆍ보석류ㆍ문방구ㆍ신발류 등이다.



만상의 사무역을 허가하다!

조선 후기 정부는 만상의 사무역을 정부 감독 하에 인정하여 세입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만상 후시(灣商後市)를 허용하는 대신 그 수량 등을 제한하였다.

즉 만상이 수입해오는 연복 잡물의 수요를 절사 1만냥, 별행 5,000냥, 자행(咨行) 1,000냥으로

규정하는 한편, 은ㆍ인삼의 교역을 금지하고,

피물(皮物)ㆍ종이ㆍ주(紬)ㆍ저포(苧布)ㆍ면(綿) 등을 교역대상 물품으로 규정하고 급여하도록 했던 것.

 

이에 따라 정조 말에는 사행정사(使行正使)가 의주에 도착한 뒤

의주부윤과 상의해서 연행상금절목(燕行商禁節目)을 합의하여 작성하고

이를 기준해 만상의 무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정한 정액 무역권을 만포(灣包)라고도 불렀다.

 

 

연경 반입이 금지된 품목인 인삼

 

박사호(朴思浩)는 『심전고(心田稿)』에서,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물건으로

금, 인삼, 담비가죽[貂]과 수달피[]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인삼(홍삼) 꾸러미는 처음에는 40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해마다 늘어서 5000근에 이르렀음에도 연경 사람들은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한다고 하였다.

대개 5000근 꾸러미의 삼 이외에는 단 한 근도 금물이어서,

사행이 의주로 들어가던 날 밤에 의주 부윤이 샅샅이 뒤져서

일행 중의 정관(正官) 고경빈(高景斌)ㆍ이정식(李廷植)ㆍ김성순(金性淳)ㆍ이호기(李好基)가 잡혔고,

찰방 현운서(玄雲瑞)도 붙잡혀 돌아가게 된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연계기정(燕薊紀程)』 무자년(1828, 순조 28) 11월



한편, 박사호는 책문에서 이루어지는 대청 무역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수레가 일제히 도착하였다.

큰 수레 6, 70대가 책 안에 죽 늘어서니 마치 돛대들이 무수히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매년 사행(使行) 때에 은과 인삼이 연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중국의 잡화로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으로,

비단 등과 약재나 바늘ㆍ모자ㆍ책 같은 쓸 만한 것 이외에 구슬ㆍ 부채ㆍ향(香)ㆍ당나귀ㆍ노새ㆍ앵무ㆍ융전(氈: 모직물)ㆍ거울ㆍ허리띠ㆍ종이ㆍ벼루ㆍ붓ㆍ먹 따위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건들은

나라의 보배가 아니라 부질없이 작은 나라의 사치하는 풍습만 조장하게 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금물(禁物)은 금ㆍ삼ㆍ초피와 수달피이고

저 사람들의 금물은 병서(兵書)ㆍ무기[兵器]ㆍ낙타[駝]ㆍ말쇠[金鐵]ㆍ상모(象毛)ㆍ

흑각(黑角: 무소뿔) 등의 물건인데, 모두 수색 검사한 후에 책문을 내보낸다.

그래서 잠상배(潛商輩)들의 눈을 치뜨고 모면하려는 꼴이란 가증스럽고 가소롭다.
―『연계기정(燕薊紀程)』 기축년(1829, 순조 29) 3월 9일

 



중국에서 유명했던 무역품, 조선의 종이

그 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선의 종이는 고려 이후 오랜 무역품이었다.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

조선의 백추지(白錘紙: 결백 (潔白)하고 질긴 백면지(白面紙))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였다.

그런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고려지는 두껍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그대로는 거칠어서 글씨 쓰기에 적당하지 않고, 다듬이질을 하면 지면이 너무 굳고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먹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하였다.

 

송나라에서 고려지를 최상품으로 여겼던 것은

그 당시에 고려에서 송나라에 공폐(貢幣)로 보내던 종이가 국내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한 것으로 특별히 제조된 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김경선(金景善)은『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중국의 종이 만드는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큰 맷돌을 설치하여 그 네 변두리를 높이고 황수(黃水)를 그 가운데 댄 다음,

두 필 혹은 세 필의 말에다 멍에를 메워서 닥나무 껍질을 간다.

그리고 그 곁에 벽돌담을 쌓되 가운데를 비운다. 그래서 그 가운데에 석탄을 태우면,

양면이 온돌과 같은데 거기에다 젖은 종이를 붙이면 경각에 마르니, 이것은 겨울용이다.

대개 중국도 역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나 다만 갈아서 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질기지 않다.

우리나라는 문드러지도록 찧기 때문에 털이 생긴다.
― 김경선(金景善)『연원직지(燕轅直指)』 「유관별록(留館別錄)」


 


사대부 부유층의 수요로 대량 수입되었던 중후소의 모자

 

모자는 요동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모자창(帽子廠)에서 생산되었는데,

주로 양털을 재료로 써서 제조한 방한용 모자였다.

18세기 후반 모자는 1년에 600척(隻)에서 1,000척 가량 수입될 수 있었다.

수량으로는 60만~100만 립(立)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수입된 털모자를 사용한 계층은 주로 사대부가의 남녀를 비롯한 부유층으로 추정된다.

 

정조 4년(1780) 중국에 다녀왔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모자를 만드는 법은 매우 쉬워서 양털만 있으면 우리도 만들 수 있는데,

리나라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은 해가 다 가도 고기 맛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온 지역의 남녀가 수백만 명 이하는 아니며, 이들이 모자 하나는 써야 겨울을 넘긴다.

그러므로 동지사(冬至使)나 황력 재자관이 가지고 가는 은화(銀貨)를 계산하면

10만 냥이 못 되지 않으니, 이를 10년 동안 통산한다면 100만 냥이 된다.

모자는 한 사람이 삼동(三冬)을 지내기 위한 것으로 봄이 되어 낡으면 이를 버린다.

천 년이 가도 부패하지 않는 은으로 삼동이면 낡아서 버리는 모자를 바꾸고

산에서 캐낸 한정된 물건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보내다니,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가.”라고 하였다.

 

김경선은『연원직지』에서 박지원의 말을 인용하여 모자 무역의 폐단을 언급한 후에,

양을 길러서 그 털은 모자를 만들고 그 고기를 먹으면

모자로 은을 소비해 가며 타국에 의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흉년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홍량호(洪良浩) 역시 1회성 소비재인 모자 수입을 경사 어디에서도 예법을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라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과학(科學)


 

망원경, 총포, 자명종을 들여오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서양 과학 수용은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정두원(鄭斗源) 등이

천리경(千里鏡)ㆍ화포(火砲)ㆍ자명종(自鳴鐘) 등을 들여오고,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 J. 로드리게스(Johannes Rodriquez, 육약한: 陸若漢)로부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 利瑪竇)의 천문서(天文書)와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천문도(天門圖)』 등의 서적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 것을 든다.

이 당시에 들여온 것중 가장 중요한 서양 문물을 꼽으라면 망원경, 서양식 총포, 자명종 등을 들 수 있다.


 

아담 샬에게 서양 문물을 얻어 온 소현세자


소현세자가 북경에 있던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탕약망: 湯若望)로부터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인조의 맏아들인 그는 1625년(인조 3) 세자에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그러다가 명이 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한 1644년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아담 샬과의 친교로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지식을 배워

천문ㆍ수학ㆍ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ㆍ천주산(天主像)을 들여왔다.


 

국내에 유입되었던 서양 천문학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이미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

이수광은 명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등을 가지고 들어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한국에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수많은 조선 사신들이 중국을 방문했고,

그들에 의해 상당한 분량의 서양 과학 내용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실용적인 분야에 특히 큰 관심을 끌어 비교적 일찍 수용된 서양 과학 분야로는

서양 천문학을 들 수 있다. 소현세자 등의 귀국과 더불어 조선에도 역법개정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1644년(인조 22) 관상감 제조 김육(金堉)은 시헌력을 채용하자면서,

청나라에서 시헌력에 관한 서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중국 흠천감의 실제적인 협조를 얻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선에서는 천문학자 김상범(金尙范) 등을 사신 가는 편에 북경에 파견하여

정보를 얻고 연구하게 하여 1653년(효종 4)부터 국내에서도 이를 시행했다.


 

자명종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던 조선

 

 

 


청에서 들여온 자명종

 

세종대의 『칠정산(七政算)』은 이미 수백 년이 지나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양식 역법을 채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헌력 말고는 서양 과학문물 가운데 조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웃 중국에서는 자명종이 깊은 관심 속에 수없이 많이 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자를 양성하여 서양식 자명종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른다.

또 일본에서도 서양의 자명종은 제작 기술을 자극하여 이것이 일본에 소위 화(和) 시계를 크게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서양의 자명종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종 시대에 밀양의 유흥발이 일본인에게서 얻은 자명종을 연구하여 그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밖에도 여러 실학자들이 자명종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조선의 경우 중국, 일본과는 달리 자명종(서양식 시계)을 받아들여 비슷한 것 또는 같은 것을 제작하려는 노력을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은 듯하다.

서양 과학에 대한 일부 실학자의 관심과 이해


이런 문화와 지적 환경 속에서 일부 실학자 등이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사상에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러하다.

그 가운데 홍대용은 그의 연행록인 『연기(燕記)』를 통해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보이는 한편,

서양 과학을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전개하였다.


 

남천주당에 방문해 망원경을 구경한 홍대용
 


천리경

홍대용의 『연기』 가운데 주목할 것으로 북경 남천주당에서

서양 신부들과 필담한 유포문답(劉鮑問答)이다.

유(劉)는 유송령(劉松齡)이요

포(鮑)는 포우관(鮑友官)이니, 모두 독일인이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와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의 뒤를 이어 중국에 천주교(天主敎)를 전하러 온 선교사들로, 천문(天文)ㆍ역상(曆象)에 정통하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흠천감(欽天監)으로 등용하였다.

유송령의 본명은 Augustinus von Halberstein이고,

포우관의 본명은 Antonius Gogeisl이다.

중국에 온 지 이미 26년이 되어

유(劉)는 62세가 되고 포(鮑)는 64세가 되었다.

모두 중국어문에 능통하였다.

 

유송령과 포우관은 남당(南堂)에 거처했는데, 이곳은 산학(算學)이 더욱 뛰어났고, 궁실과 기용은 4당중에서 으뜸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었다.

연행에 참여한 첨지(僉知) 이덕성(李德星)은 일관(日官)이어서 역법(曆法)을 대략 알았다.

이번 연행에서는 조정의 명령으로, 두 사람(유송령ㆍ포우관)에게 오성(五星)의 행도(行度)를 묻고, 겸하여 역법의 미묘한 뜻을 질문하며, 또 천문을 관찰하는 모든 기구를 구매하려 하였다.

홍대용은 그와 함께 일을 하기로 약속하고, 유송령과 포우관을 직접 만나 천문에 관한 문답을 하고 관측기구를 구경하였다.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을 토론한 박지원

 

홍대용에 이어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서양의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인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는

그런 박지원의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박지원은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額)ㆍ왕민호(王民)ㆍ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박지원은 그의 지우(摯友) 홍대용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지식층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일깨우지 못하다

 

지도와 천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들은 17세기 초부터 갈릴레이의 천문도 등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소개하였다.

물론 지동설을 지지하지는 않고 여전히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천문학 발달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또 남반구에도 북반구 못지않게 수많은 별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 별들의 그림이 서양 천문도에 의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서양의 천문도가 조선 지식층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망원경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세계관과도 연관된 일이다.

1631년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들여온 망원경 혹은 천리경은 그리 언급되지 않다가

1세기 뒤인 이익(李瀷)이 망원경을 얻어 하늘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는 기록으로 다시 전해진다.

물론 1766년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이 그 제도를 자세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실록(實錄)』등은 물론이고, 19세기 초 천문학자 성주덕(成周悳)이 쓴 『서운관지(書雲觀志)』에도

천문 관측에 망원경을 사용한 관례는 보이지 않는다.

 

 


 연희(演戱) 

 

  

연행 노정 속 다양한 종류의 극장


중국에서는 송(宋) 대부터 극장 건축이 나타나

청(淸) 나라에는 곳곳에 여러 형태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극장의 다양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북경과 연행 노정의 도처에 다양한 종류의 극장 건축물이 산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 극장은 그 세워진 장소에 따라 분류한다.

궁정극장(宮廷劇場)은 화려하고 장대하다.

희대는 3층으로 된 것도 있고, 황제와 비빈, 근신들을 위한 객석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의 상업극장(都市 商業劇場)은 도시의 번화가에 위치하여 실내 객석을 갖추었다.

향촌극장(鄕村劇場)은 희대 건물만 촌락의 광장이나 노변(路邊)에 세운 것이 일반적이다.

사원극장(寺院劇場)은 사묘(寺廟)의 부속 건물로 대개 정전(正殿)의 맞은 편에 건설한 희대이다.


   이화원 덕화원의 대희대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가 3층으로 구성된 대형 궁정극장은 청나라 때 4군데 있었다.

열하 피서산장 동궁(東宮)의 청음각(淸音閣),

북경 원명원(圓明園) 동락원(同樂園)의 청음각(淸音閣)과 수강궁(壽康宮)의 희대,

자금성(故宮) 영수궁(寧壽宮)의 창음각(暢音閣), 이화원(和園) 덕화원(德和園)의 대희대 이다.

앞의 둘은 이미 사라졌고, 뒤의 둘은 지금도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단층 희대를 갖춘 소규모 극장이 자금성과 원명원에 여러 곳 있었다.

대형 궁정극장은 연극을 상연하는 희대, 관람하는 전각, 이 둘을 연결하는 양쪽 곁채로 구성된다.

 

 

1790년 건륭 황제의 80회 생일잔치에 참가한 서호수(徐浩修)는

7월 16일 열하 피서산장에서 연희를 관람하였다.
 

우리는 이어 두 시랑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두 문을 지나서,

연희전(演戱殿) 서서 협문(西序夾門) 밖에 있는 조방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조금 있다가 전상(殿上)에서 음악 소리가 났다.

시랑(侍郞) 철보는 우리에게 뒤따르라고 하더니 스스로 진하표(進賀表)를 받들고 서서

협문을 거쳐서 전정(殿庭)에 섰다.

전(殿)은 2층으로 가로로 7칸인데 아래층 정중앙에 있는 1칸이 어좌(御座)이다.

남쪽 창을 활짝 열었는데 좌우의 6칸은 조각한 창을 달고 유리(琉璃)로 막았다.

보니 비빈(妃嬪)이 창 안에서 내왕하고,

밖에는 공급(供給)하는 중관(中官)이 가득히 모여 있다.

전 동쪽과 서쪽에 각각 곁채[서(序)] 수십 칸이 있는데 이는 곧 연회를 배설할 곳이다.

전 남쪽에는 3층 각(閣)이 있는데, 맨 위층에는 ‘청음각(淸音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다음 층에는 ‘운산소호(雲山韶護)’, 아래층에는 ‘향협균천(響叶勻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곧 음악을 연주하고 유희(遊戱)를 설행(設行)하는 곳이다.

전계(殿階) 좌우에는 분화(盆花)와 분송(盆松)을 벌여 놓았다.

계단 남쪽에는 고동(古銅) 화로를 안치하였는데, 침향(沈香) 연기가 오르고 있다.
― 서호수, 1790년(정조 14) 7월『연행기(燕行紀)』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少頃, 殿上樂作. 鐵侍郞使余等隨後, 自擎進賀表, 由西序夾門, 立殿庭. 殿爲二層而橫七間, 下層正中一間爲御座, 而洞開南?. 左右六間, 關以雕窓, 障以琉璃. 觀之人妃嬪來往於?內, 供給之中官 簇立於窓外. 殿東西各有序數十間, 卽宴筵排班處. 殿南有三層閣, 最上層扁曰淸音閣, 此層扁曰雲山韶護, 下層扁曰響協勻天, 卽作樂設戱處. 殿階左右列盆花盆松, 階南安古銅大?, 升沈香烟.

 


열하 피서산장의 청음각

열하 피서산장 동궁의 청음각은 3층 희대(戱臺) 건축물이다.

서호수는 희대를 따로 희각(戱閣)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연희전’이라고 이름 붙인 건물은 정확히는 청음각 북쪽에 객석을 설치한 2층 건물로서 간대(看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북에 희대와 관람용 전각이 마주 서고, 그 동서에서 둘을 연결하는 건물이 곁채인 서(序)이다. 가운데 마당은 노천이다.

 

극장은 연희전과 희대, 동서의 곁채로 구성되며,

전체는 사각형을 이룬다.

이 극장은 1945년 실화로 소실되어 지금은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이 곳 극장의 구조는 이화원 극장과 같고 크기만 조금 작을 뿐이다.

서호수는 원명원의 극장을 묘사하면서 극장 전체를 설희전(設戱殿) 또는 관희전각(觀戱殿閣), 희대를 희각(戱閣)이라 했다.

희원(戱園)과 희관(戱館)이라 불리는 상업 극장


송대부터 주루(酒樓)와 다관(茶館)에서 희곡 등 각종 공연예술을 연출하던 전통 위에서

청대의 대도시에는 건륭 연간부터 희원(戱園) 또는 희관(戱館)이라고 불리는 상업 극장이

활발하게 생긴다.

 

1828년(순조 28)에 북경을 여행한 무명씨의 『부연일기(赴燕日記)』에는

“성 안팎에 광대놀이 하는 누가 수백 곳이나 되며, 집 제도가 웅장하고 기구도 화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행사절의 일원은 이들 상업 극장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에 대해서도

기록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연행사절 가운데 최초로 북경 시내의 극장을 방문한 조선 선비의 기록일 것이다.

 

홍대용은 1766년(영조 42) 1월 4일 북경의 정양문(正陽門) 밖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와 관람 절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홍대용의 기록은 중국의 그 어느 문헌보다도 극장의 규모와 상연제도를 잘 설명한다.

1,000명 가까운 관중이 극에 몰입하다 순간 환호하면 건물이 무너질 듯한 현장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향촌과 사원의 희대(戱臺)


연행 노정 중에 향촌과 사원의 희대(戱臺)도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었다.

1712년(숙종 3)에 출발하여 이듬해 돌아온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향촌과 사원의 소규모 희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김창업은 영원(寧遠)에서부터 마을과 사원에 희대가 많다고 하였다.

영원은 요녕성(遼寧省)의 최남단 지역이다.

 

명청대에는 부유한 개인의 저택과 향촌 각지에 희대 건축이 활발하였다.

강서성(江西省) 낙평시(樂平市)에는 명ㆍ청대에 건축된 희대가 217곳이나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김창업은 귀국길에 고려보를 지나면서 마을의 희대(戱臺)를 보았다.

편액이 걸린 누각(樓閣) 형태의 희대이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단청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는데,

서유문(徐有聞)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는 이를 채각(彩閣)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희대는 대개 마을마다 있기 마련이며,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 건축물만 있고 객석 건물은 따로 짓지 않는다.

이와 달리 판자와 갈대를 엮어 임시로 지은 희대도 있다. 김창업이 필옥(篳屋)이라고 부른

이 건축물은 땅바닥에서 2m 정도 올려서 폭과 깊이가 3~4m에 불과한 다락마루를 만들고

지붕과 벽은 갈대를 엮어 막는다. 이런 임시적인 무대를 초대(草臺)라고도 한다.

길가 광장에 지어 노천에 걸상과 탁자를 늘어놓고 앉아 또는 주위에 둘러서서 연극을 구경한다.


 

붕(棚)과 희막(戱幕)

 

이밖에도 연행사절들이 목격한 중국의 극장에는 붕(棚)과 희막(戱幕)으로 불리는 형태가 있다.

 ‘붕(棚)’ 은 지상에 높다랗게 올린 다락마루 형태의 무대이고,

‘희막(戱幕)’은 영희(影戱: 그림자놀이)를 상연할 때 그림차가 비치는 천을 가리킨다.

그림자놀이의 희(戱)자는 이 막 안에서 인형을 놀리면서 노래와 대사를 하기 때문에

희막(戱幕)은 영희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호수의 『연행기(燕行記)』에는

채붕(彩棚)과 노대(露臺)라고 하는 연희(戱) 건축물이 기록되어 있다.

‘채붕(彩棚)’은 길거리에 설치한 임시무대이며,

‘노대(露臺)’ 역시 노천에 설치한 간단한 무대이다.

명ㆍ청대 남방에서 활발히 건축된 개인 저택의 희대를 제외하면,

연행록에는 당시 중국에 존재한 거의 모든 형태의 희대와 극장 건축에 대한 견문이 들어 있다.

 

■희옥(戱屋), 희자옥(戱子屋), 희자각(戱子閣), 붕(棚)

  :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관희전각(觀戱殿閣), 설희전(設戱殿), 연희전(演戱殿), 희각(戱閣), 채붕(彩棚), 노대(露臺)

  : 서호수(徐浩修), <연행기(燕行記)>

■희대(戱臺), 연희청(演戱廳) : 박사호(朴思浩), <심전고(心田稿)>

■희대(戱坮) : 이해응(李海應), <계산기정(薊山紀程)>

■희루(戱樓) : 서경순(徐慶淳),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채각(彩閣) : 서유문(徐有聞),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창희지루(倡戱之樓), 희루(戱樓), 희막(戱幕) : 무명씨(無名氏), <부연일기(赴燕日記)>

(참고: 이창숙,「연행록에 실린 중국희곡 관련 기사의 내용과 가치」, 『연행록연구총서』3, 학고방, 2005)

- 연희 종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연행사들이 연행 기간 중에 보았던 연희이다.

 

각희(脚戱) - 씨름놀이

등희(燈戱) - 등불놀이

서양추천(西洋鞦韆) - 서양 서커스

수희(獸戱) - 동물놀이

잡희(雜戱) - 가면희 곧 가면놀이와 환술

장희(場戱) - 조선의 산대희(山臺戱), 곧 산대놀이

지포희(紙砲戱) - 불꽃놀이

창우희(唱憂戱) - 광대놀음, 희자놀음

회자정희(回子庭戱) - 외줄타기 묘기

환희(幻戱) - 요술, 마술

 

이를 빈도수별로 나열해 보면 환희 13회, 창우희 10회, 연희 7회, 등희와 잡희가 각각 6회, 기악과 수희가 각각 4회, 완구희와 지포희가 각각 2회, 각희ㆍ근두희ㆍ상악ㆍ서양추천ㆍ장희ㆍ풍악ㆍ회자정희ㆍ희자습의가 모두 각각 1회씩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4백여 년간 조선 연행사들이 명ㆍ청에서 가장 많이 즐겨 보았던 연희는 환희였다.

 

 - 환희(幻戱)에 대한 기록

연행록에서 환희는 연행사들이 가장 선호한 볼거리였다.

환희의 구성을 규모별로 제시하여 보면

33종의 환희(1회), 20종의 환희(1회), 11종의 환희(2회), 5종의 환희(1회)로 나타난다.

가장 큰 규모의 환희는 김경선이 본 33종의 환희이고, 그 다음은 박지원이 본 20종의 환희다.

가장 보편적으로 구성된 환희는 11종과 9종의 환희였으며, 단종의 환희를 볼 때도 있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 청나라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한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연경에 간 박지원의 글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환희기(幻戱記)」에서, 그가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에서

홍려시 소경(鴻?寺少卿) 조광련(趙光連)과 같이 구경한 20가지의 환희를 기록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묘사된 20종 환술
김경선의 『연원직지』에 기록된 옥하관의 33종 환술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은 뒤에 얼굴을 정제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치고 이리저리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은 환약을 만지고 이나 벼룩을 잡듯이 마주 비비니,

갑자기 가느다란 물건이 생겨 겨우 좁쌀낱만 했다.

연거푸 이것을 비비니 점점 커져서 녹두알만 해지고 차차 앵두알만 하다가

다시 빈랑(檳?)만 하더니 차츰 달걀만 해졌다.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니 둥근 것이 더 커져서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만 해졌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차차로 커지지 않고 별안간 수박만 하게 된다.

요술쟁이는 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벌리고 더 빨리 비벼 장고를 끌어안은 듯

팔뚝이 아플 만하여 그치더니, 이내 탁자 위에 놓는데 그 몸뚱이는 둥글고 빛은 샛노랗고,

크기는 동이만 한 것이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이며, 무게는 들 수가 없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돌도 아니요 쇠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요 가죽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둥근 것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만치

제공(帝工) 같았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 물건을 만지는데,

부드럽게 굴리고 가만히 쓰다듬으니 물건은 부드러워지고,

손을 슬며시 대니 가볍기가 물거품 같아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서,

잠깐 사이에 다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져 버린다.
― 박지원, 『열하일기』, 「환희기(幻戱記)」


김경선이 쓴 『연원직지(燕轅直指)』에 있는 「환술기(幻術記)」는

연행록에 보이는 환희 기록 가운데 가장 상세하다.

김경선은 1832년(순조 32) 12월 19일에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여 무료하게 보내던 중,

12월 28일 옥하관으로 환희하는 사람을 불러 환희를 구경한다.

요술쟁이는 도합 세 사람이었다. 용모는 용렬하고 옷과 모자가 남루하니,

대개 배우는 천품(賤品)이다. 그들은 요술 기구를 짊어졌다.

한 사람은 그 상자를 풀어서 그것을 지키고,

수행자 한 사람은 붉은 칠을 한 높은 탁자를 뜰 가운데 설치하였다.

탁자 위에 붉은 담요를 먼저 깔고 담요 위에는 또 검은 베로 만든 작은 보자기를 깐 다음,

손으로 문질러 펴서 담요와 보자기가 탁자 면에 편평히 붙게 하였다.

그런 다음, 요술쟁이는 홑적삼과 홑바지만을 입고 모자를 벗어서 땅에 두고는,

탁자 앞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서 손바닥을 계속 쳤다.

대개 그 말은 탁자와 담요가 깨끗하여 다른 물건이 없다는 것과

기술의 묘한 점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上

대개 그 요술은, 드러내기는 해도 숨기지는 못하고,

어떤 것이 오게끔 요술을 부릴 수는 있어도, 어떤 것이 가게끔 요술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장차 그 요술을 부리려면 반드시 미리 밖에 장치를 하여

남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요술을 부려서 오게 한다.

하지만, 그가 도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수종자를 따르게 하여 능히 그 형상을 숨기지는 못하니,

요술에 통색(通塞)의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上

 

이것은 환희에 관한 저자의 총평이라 할 수 있다.

환희는 드러낼 수는 있어도 숨길 수는 없는 것이며,

오게 하는 환의는 할 수 있어도 가게 하는 환희는 없다는 것이다.

작자는 이 환희를 본 다음에 백운관(白雲觀)에서 정식으로 가설된 환희 무대에서

수많은 환술꾼들이 더 탁월한 솜씨로 진행하는 환희를 보았는데,

이때 비로소 관소에서 본 환희가 흉내만 내는 약식 환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환희에 더 큰 관심을 가지면서 환희사[幻史]를 짓는다고 하였다.

 

 

 

- 연희 기록

 

16~17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대부분의 16~17세기 연행록에서 연희(演戱)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허봉(許葑)의 『조천기(朝天記)』에 가면희(假面戱)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18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연희에 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이다.

이 시기 이후 대부분의 연행록에서 연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 연행록에 보이는 연희 관련 기록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 최덕중(崔德中)의 『연행록(燕行錄)』

1712년(숙종 38) 북경 예부(禮部)의 풍악(風樂)과 잡희 정재(雜戱呈才),

북경 숭문문의 장난감 솔개놀이와 장난감 원숭이놀이를 기록하고 있다.
-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

1712년(숙종 38) 북경 십산산 찰원의 원희(猿戱)와 견희(犬戱)를 기록하였다.
- 서호수(徐浩修)의 『연행기(燕行記)』

1790년(정조 14) 열하 피서산장의 연희전(演戱殿)

그곳에서 본 연제(演題) 16장의 연희(演戱) 2종,

북경의 원명원에서 본 연희 서유기(西遊記)와 연제 16장의 연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김정중(金正中)의 『연행록(燕行錄)』

1791년(정조 15) 연 4일간이나 계속된 해전(海甸)의 등희(燈戱),

정조 16년(1792) 북경의 유리창에서 본 3가지의 창우희(唱憂戱),

그해 원명원에서 본 각희(脚戱)ㆍ서양추천(西洋鞦韆)ㆍ회자정희(回子庭戱)ㆍ등희(燈戱)

4장의 연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1798년(정조 22) 연광정과 백상루의 기악(妓樂), 청나라 왕실의 희자습의(戱子習儀),

유리창의 광대놀이[唱戱]와 환술(幻術) 등이 기록되었다.

19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연희 기록
19세기 연행록에 보이는 연희 관련 기록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다.

- 박사호(朴思浩)의 『심전고(心田稿)』

1828년(순조 28) 황주의 기악(妓樂), 유리창과 옥하관의 연희, 원명원의 등불놀이,

원명원의 연희 곧 가화우선의 춤ㆍ씨름놀이ㆍ사자춤ㆍ홍봉환축(紅棒環逐)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사호는 북경 원명원에서 본 등불놀이를「태평춘등기(太平春燈記)」라는 별도의 독립 항목으로

기록하고, 원명원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의 불꽃놀이를「매화포기(梅花砲記)」라 기록하였다.

그는 연희청과 각종 연희에도 두루 관심을 보였는데,

「연희기(演戱記)」에서 연희의 유래, 연희청, 연희의 제목, 내용, 관객 등에 관해서도

상세하게 적고 있다.

 

- 저자 미상의 『부연일기(赴燕日記)』

1828년(순조 28) 북경 광대놀이의 음절(音節), 중국의 상악(喪樂), 연산관과 북경의 광대놀이,

다른 연행록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연희 잡희(雜戱)를 소개하고 있다.
-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燕轅直指)』

1832년(순조 32) 북경 정양문의 장희(場戱)와 풍악놀이, 원명원의 지포희(紙砲戱),

원명원의 등희(燈戱), 옥하관의 웅희(熊戱), 청나라의 악공과 악기, 청나라의 기예(技藝),

백상루의 기악(妓樂)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옥하관기」, 「장희기(場戱記)」, 「제희본기(諸?本記)」, 「원소등화기(元宵燈火記)」, 「지포기(紙砲記)」, 「웅희기(熊戱記)」라는 별항을 설정하여

연희에 대한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연희기를 체계적으로 작성하였다.
- 서경순(徐慶淳)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1855년(철종 6) 극장(劇場)과 배우 곧 희자(戱者), 심양의 등희(燈戱), 요동성의 등희(燈戱)

관해서 쓰고 있다.

18~19세기 연행록의 연희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정상적 외교 관계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한ㆍ중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문화적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참고: 임기중, 『연행록연구』, 일지사, 2002 )

 

- 연희 종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연행사들이 연행 기간 중에 보았던 연희이다.

 

각희(脚戱) - 씨름놀이

등희(燈戱) - 등불놀이

서양추천(西洋鞦韆) - 서양 서커스

수희(獸戱) - 동물놀이

잡희(雜戱) - 가면희 곧 가면놀이와 환술

장희(場戱) - 조선의 산대희(山臺戱), 곧 산대놀이

지포희(紙砲戱) - 불꽃놀이

창우희(唱憂戱) - 광대놀음, 희자놀음

회자정희(回子庭戱) - 외줄타기 묘기

환희(幻戱) - 요술, 마술

 

이를 빈도수별로 나열해 보면 환희 13회, 창우희 10회, 연희 7회, 등희와 잡희가 각각 6회, 기악과 수희가 각각 4회, 완구희와 지포희가 각각 2회, 각희ㆍ근두희ㆍ상악ㆍ서양추천ㆍ장희ㆍ풍악ㆍ회자정희ㆍ희자습의가 모두 각각 1회씩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4백여 년간 조선 연행사들이 명ㆍ청에서 가장 많이 즐겨 보았던 연희는 환희였다.

 

 - 환희(幻戱)에 대한 기록

연행록에서 환희는 연행사들이 가장 선호한 볼거리였다.

환희의 구성을 규모별로 제시하여 보면

33종의 환희(1회), 20종의 환희(1회), 11종의 환희(2회), 5종의 환희(1회)로 나타난다.

가장 큰 규모의 환희는 김경선이 본 33종의 환희이고, 그 다음은 박지원이 본 20종의 환희다.

가장 보편적으로 구성된 환희는 11종과 9종의 환희였으며, 단종의 환희를 볼 때도 있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정조 4) 청나라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한

연행사절의 일원으로 연경에 간 박지원의 글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환희기(幻戱記)」에서, 그가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에서

홍려시 소경(鴻?寺少卿) 조광련(趙光連)과 같이 구경한 20가지의 환희를 기록하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묘사된 20종 환술
김경선의 『연원직지』에 기록된 옥하관의 33종 환술

요술쟁이가 대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하게 닦은 뒤에 얼굴을 정제하고 사방을 돌아보면서,

손바닥을 치고 이리저리 뒤집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은 환약을 만지고 이나 벼룩을 잡듯이 마주 비비니,

갑자기 가느다란 물건이 생겨 겨우 좁쌀낱만 했다.

연거푸 이것을 비비니 점점 커져서 녹두알만 해지고 차차 앵두알만 하다가

다시 빈랑(檳?)만 하더니 차츰 달걀만 해졌다.

두 손바닥으로 재빨리 비벼 굴리니 둥근 것이 더 커져서 노랗고 흰 것이 거위알만 해졌다.

조금 있더니 이번에는 차차로 커지지 않고 별안간 수박만 하게 된다.

요술쟁이는 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벌리고 더 빨리 비벼 장고를 끌어안은 듯

팔뚝이 아플 만하여 그치더니, 이내 탁자 위에 놓는데 그 몸뚱이는 둥글고 빛은 샛노랗고,

크기는 동이만 한 것이 다섯 말 들이는 되어 보이며, 무게는 들 수가 없고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돌도 아니요 쇠도 아니며, 나무도 아니요 가죽도 아니며 흙도 아니요,

둥근 것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만치

제공(帝工) 같았다.

요술쟁이는 천천히 일어나 손뼉을 치면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그 물건을 만지는데,

부드럽게 굴리고 가만히 쓰다듬으니 물건은 부드러워지고,

손을 슬며시 대니 가볍기가 물거품 같아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서,

잠깐 사이에 다시 손바닥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비비다가

한 번 튀기니 즉시 사라져 버린다.
― 박지원, 『열하일기』, 「환희기(幻戱記)」


김경선이 쓴 『연원직지(燕轅直指)』에 있는 「환술기(幻術記)」는

연행록에 보이는 환희 기록 가운데 가장 상세하다.

김경선은 1832년(순조 32) 12월 19일에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여 무료하게 보내던 중,

12월 28일 옥하관으로 환희하는 사람을 불러 환희를 구경한다.

요술쟁이는 도합 세 사람이었다. 용모는 용렬하고 옷과 모자가 남루하니,

대개 배우는 천품(賤品)이다. 그들은 요술 기구를 짊어졌다.

한 사람은 그 상자를 풀어서 그것을 지키고,

수행자 한 사람은 붉은 칠을 한 높은 탁자를 뜰 가운데 설치하였다.

탁자 위에 붉은 담요를 먼저 깔고 담요 위에는 또 검은 베로 만든 작은 보자기를 깐 다음,

손으로 문질러 펴서 담요와 보자기가 탁자 면에 편평히 붙게 하였다.

그런 다음, 요술쟁이는 홑적삼과 홑바지만을 입고 모자를 벗어서 땅에 두고는,

탁자 앞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서 손바닥을 계속 쳤다.

대개 그 말은 탁자와 담요가 깨끗하여 다른 물건이 없다는 것과

기술의 묘한 점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었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上

대개 그 요술은, 드러내기는 해도 숨기지는 못하고,

어떤 것이 오게끔 요술을 부릴 수는 있어도, 어떤 것이 가게끔 요술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장차 그 요술을 부리려면 반드시 미리 밖에 장치를 하여

남의 힘을 빌지 않고도 요술을 부려서 오게 한다.

하지만, 그가 도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수종자를 따르게 하여 능히 그 형상을 숨기지는 못하니,

요술에 통색(通塞)의 이치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연원직지(燕轅直指)』 제3권, 「유관록(留館錄)」上

 

이것은 환희에 관한 저자의 총평이라 할 수 있다.

환희는 드러낼 수는 있어도 숨길 수는 없는 것이며,

오게 하는 환의는 할 수 있어도 가게 하는 환희는 없다는 것이다.

작자는 이 환희를 본 다음에 백운관(白雲觀)에서 정식으로 가설된 환희 무대에서

수많은 환술꾼들이 더 탁월한 솜씨로 진행하는 환희를 보았는데,

이때 비로소 관소에서 본 환희가 흉내만 내는 약식 환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환희에 더 큰 관심을 가지면서 환희사[幻史]를 짓는다고 하였다.

 

 

 

 

 

 

 

 중국과 중국 문화

 

 

 

중국의 성곽 제도

 

중국을 여행했던 연행사들은 중국의 성곽(城郭)과 시사(市肆) 등 건축 제도의 웅장함과 정묘함

그리고 그 화려함에 크게 놀라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는 그 제도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중국의 성곽 제도는 네모반듯한 것이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높이 수십 척, 두께 5, 6보(步) 가량 되는데, 그 위에 내외의 여장(女墻: 성 위에 만든 작은 담)을 만들었다. 요동의 각 진보(鎭堡)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요충지에는 모두 성문 밖에 또 하나의 성을 쌓아 놓았는데, 이를 나성(羅城)이라고 한다. 이 성들은 모두 벽돌로 되어 있어서 매우 튼튼하다. 벽돌은 모두 같은 모양이어서 다듬고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없어 여러 날을 걸리지 않고도 손쉽게 성이 완성된다.

   

 ■ 북경성

북경성(北京城)은 둘레 40리, 남쪽 중성(重城)은 28리인데, 그 높이와 너비는 다른 성의 배나 된다.

통주성(通州城)은 둘레 8, 9리로 서쪽에 중성이 있고, 계주(州)와 영평부(永平府)의 성은 둘레가 모두 8, 9리인데 나성은 없다.

금주위성(錦州衛城)은 둘레 8리로 동쪽에 나성이 있고, 영원위(寧遠衛)에는 내성과 외성이 있는데 둘레 8리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 7, 8리로 동, 서 나성(羅城)이 있다.



■ 산해관

산해관(山海關)은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몽염(蒙恬)이 성을 쌓을 적에는 유관(楡關)에서 그쳤다고 한다. 홍무(洪武) 17년(1384)에 성을 다시 짓고 관을 확장하여 그 이름을 산해관으로 고쳤다.

관에서 남쪽으로 바다까지는 거리가 15~16리이나, 지형이 대체로 평평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으니, 그 웅장함이 천하에 뛰어난 곳이다.

 

관에는 내외의 성이 있고, 그 사이에는 다시 중성(中城)을 쌓아 그 구역을 막았다.

중성 가운데에 3층 처마로 된 큰 패루(牌樓)가 있고 사방으로 모두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 밖에는 다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에는 문루[譙樓]가 없고

입구에 세 철판으로 문짝만 만들어 그 둥근 문지방[虹楣]에 ‘위진화이(威振華夷)’ 넉 자를 새겼다.

옹성 문에서 패루의 동서 양 문과 서성(西城) 문까지 합하면 칠중(七重)이나 되므로,

칠중관(七重關)이라고 한다.

 

제1관은 4층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홍미(虹楣)에 ‘산해관(山海關)’ 석 자를 새겼다.

제2관은 3층 적루로 되었는데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편액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연기(燕記)』에서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고 중국 대륙에 들어가보고자

하는 소망을 시로 남긴 바 있다.

시장 점포는 북경이 제일 번화하고 심양ㆍ통주ㆍ산해관이 그 뒤를 잇는다.

북경 정양문(正陽門) 밖 유리창(琉璃廠)이 특히 번화하고 고루가(鼓樓街)가 그 다음으로 풍성하여

아로새긴 창틀이며 조각으로 된 문호(門戶)가 다 금빛 찬란하다.

모든 점포에는 각각 간판이 붙어 있다. 5, 6장(丈)은 됨직한 긴 나무의 네 면을 깎아 내고

거기다가 점포 안에 있는 물건의 이름들을 써 놓았다.

글자 색깔은 검은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으며 때로는 금으로 쓴 것도 있다.

또 처마에는 모두 표지(標識)를 달아 놓았는데 이것이 바람에 날리면

여러 가지 색깔이 휘황하게 빛난다. 저녁이 되어 뜯어 내릴 때 역시 쟁그렁거리는 소리가 난다.


중국의 패루

마을에는 모두 패루(牌樓)가 있다. 그 제도는 우리나라 영은문(迎恩門)같이 되었는데,

목재로 지은 것도 있고 혹은 석재로 된 것도 있다.

양식은 기둥이 둘, 마룻대가 하나이고 혹은 홑처마 혹은 겹처마로 지은 것도 있다.

■ 조가 양패루(祖家兩牌樓)

조가 양패루(祖家兩牌樓)는 조씨 집의 패루(牌樓)로서, 조선 사신들이 일컫는 연행 기관(燕行奇觀) 중의 하나이다.

성안 네거리에 패루를 맞대어 세웠는데 서로의 거리가 100여 보(步)이다.

패루는 모두 처마와 문이 모두 셋이다.

그 앞에 돌사자[石獅子]가 앉아 있다. 그 나머지 들보ㆍ마룻대ㆍ서까래ㆍ창ㆍ난간ㆍ용마루 등도 모두가 백석(白石)으로서 투명하였다.

조대수(祖大壽)의 패루는 숭정(崇禎) 신미년(1631, 인조 9)에 건립되었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다.

맨 위층 안팎의 현판(懸板)에는 ‘옥음(玉音)’ 두 자를 새겼고,

제2층 전면에 ‘원훈초석(元勳初錫)’, 후면에 ‘등단준열(登壇駿烈)’이라 새겼다.


조대락(祖大樂)의 누각은 숭정 무인년(1638, 인조 16)에 건립되었는데,

높이는 조대수의 누각보다 조금 낮다.

최상층 안팎에 ‘옥음(玉音)’ 두 글자로 편액(扁額)하고,

제2층 앞뒤에 ‘사세원융소부(四世元戎少傅)’를 새겼으며,

제3층의 전면에 ‘확청지열(廓淸之烈)’, 후면에 ‘충정담지(忠貞膽智)’라고 새겼다.

 

조대락의 아버지는 조승훈(祖承訓)으로, 우리나라 임진왜란 당시에 요동 총병(遼東總兵)으로서

3천기(騎)를 거느리고 와서 제일 먼저 구원해 준 자이다.

그 동생이 조승교(祖承敎)로 조대수의 아버지이다.

이들 종형제는 4대째 장수로서 청인들이 관문 밖을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믿어 누각을 세우고, 그 기이하고 새로움을 다투어 힘쓰다가

끝내 자신들은 포로가 되고 집안의 명성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오직 그 패루만이 남아 있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이 패루의 장대함에 놀라면서도 명나라의 멸망을 아쉬워하곤 하였다.


■ 고북구패루

박지원의 명문장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등장하는 고북구(古北口)는 연경(燕京)에서 열하(熱河)에 이르는 길목으로,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는 장성의 험한 요충지이다. 이 야출고북기의 현장에 자리 잡은 고북구 패루는 처마와 문이 모두 셋으로, 조가 패루의 양식과 흡사하나 그 규모와 화려함은 그보다 못하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 당시 패루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사찰과 묘당


마을에는 반드시 사찰(寺刹)과 묘당(廟堂)이 있다.

요양ㆍ심양ㆍ산해관 등지에 가장 많고, 또 북경으로 가면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의 수가 인가에 비해 거의 3분의 1은 된다.

그러나 한 사찰에 승려의 수는 큰 절이라 해도 얼마 되지 않고 도사(道士)의 수는 더욱 드물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고, 도승(度僧) 제도가 엄격하여

사찰마다 일정한 인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왕묘(關王廟)에서는 반드시 부처를 받들고, 절에서는 또 관운장(關雲長)을 받든다.

이처럼 관운장과 부처를 하나로 높이 받들어 구별이 없다.

또한 민간에서는 낭랑묘(娘娘廟)ㆍ약왕묘(藥王廟)ㆍ문창묘(文昌廟) 등을 높이 받든다.

‘낭랑’은 생산(生産)을 주장하는 신(神)이고,

‘약왕’은 신농(神農), 편작(扁鵲)과 같은 고대 의약(醫藥)의 비조이다.

문창성(文昌星)은 천하의 문장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별로, 선비들이 높여 존중하였다.



■ 독락사

사찰 가운데 독락사(獨樂寺)는 그 제도와 규모가 커서 연행사들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옥전에서 계주성에 다다른 박지원은 독락사를 중점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서문 안에 있는 독락사는 와불을 모시고 있어 와불사(臥佛寺)로도 불린다.

2층으로 된 홍문(紅門) 안에 처마가 세 겹으로 된 정전(正殿)이 있다. 상방(上)은 ‘관음각(觀音閣)’이라 하고, 그 아래에 ‘태백(太白)’이란 두 글자가 쓰였는데, 이태백(李太白)의 글씨이다.

전 서쪽에 벽을 겹으로 하여 그 가운데 판자 사다리를 설치했는데,

북으로 향해 수십 계단을 오르다가 또 돌아서 남으로 수십 계단을 오르면 상루(上樓)에 이른다.

그 가운데에 난간을 빙 둘러서 설치했는데, 불신(佛身)이 위로 솟아나와 있다.

어깨는 난간과 가지런하고 이마는 들보를 버티고 있으며,

머리 위 사방으로 빙 둘러서서 작은 부처 12개가 붙여져 있다.

아래에서 볼 적에는 그 길이를 알 수 없으나 상루에서 난간을 따라 돌아 오르면

그 형상이 다 보인다. 어깨 이상만도 2장(丈)쯤 되니, 그 전신의 길이를 추측할 수 있다.

독락사는 당(唐)나라 때 건축했으나

요(遼)나라 때에 중건해서 현재 요나라 3대 사원의 하나로 꼽힌다.

 

 

중국의 민속놀이와 세시 풍속


 

■ 중국의 생활모습

 

연행록에는 총 150여 종의 음식 재료가 등장한다.

이는 당시 한ㆍ중의 식생활을 비교하는 긴요한 자료가 된다.

미곡(米穀)에 대한 표현은 17가지로 그 가공법 및 용도에 따라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은 미곡보다는 잡곡류가 많았고, 특히 조와 수수가 주요 곡물이었으며,

콩은 품질이 우리 것만 못해서 주로 말의 먹이로 사용하였다.

땅콩은 당시 우리나라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조석 식사로 밥 또는 죽을 먹는데, 밥그릇은 찻잔만하다.

대개 4~5명 혹은 6~7명이 같이 한 탁자에 둘러앉아 먹는다.

먼저 나물과 장(醬) 같은 것을 놓고 사람마다 밥그릇과 찻잔을 하나씩 마련해 놓은 뒤에

사발을 가져다 밥을 담아 주고, 다음에 끓인 국과 구은 고기를 내 온다.


음식은 모두 젓가락으로 먹는다.

숟가락은 사기로 만들고 자루가 짧으며 구기는 깊어 국을 떠먹을 때 쓴다.

손님 대접을 할 때는 모두 식탁에 둘러앉는데,

각 사람 앞에 젓가락 1쌍과 술잔 1개, 찻종[茶鍾] 1개씩을 놓아둔다.

모시는 이[侍者]가 차를 따르고 다음에 술을 따르는데, 술은 마시는 대로 따라 놓는다.

그리하여 열 몇 잔이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더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잔을 엎어 놓으면 더 따르지 않는다.


중국의 식생활에 관해서는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와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연행사들은 중국의 가옥 제도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대부분의 연행록에는 조선과는 다른 중국의 주거 생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개되어 있다.

연행사들이 본 중국의 가옥제도는 단순히 이국 문물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18세기 이후 대부분의 연행사들은 중국의 가옥제도와 우리나라의 가옥제도를 상세히 비교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벽돌을 사용하여 지은 중국 가옥의 실용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모범으로 하여 조선의 가옥제도를 혁신시킬 것을 주장한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는 그 대표적 논의라고 할 수 있다.

- 일자형 토옥


[일자형 토옥]
책문 안쪽에서부터 고려총(高麗叢)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띳집이고, 요동 이후는 띳집과 기와집이 반반이며, 여양역(閭陽驛)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는 흔히 들보 없는 흙집들이다. 초옥의 제도는 풀이나 수수깡을 쓰는데 모두 엮지 않고 묶어서 덮는다. 흙집을 꾸리는 방식은 먼저 벽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들고, 이 벽 위에 서까래를 가로질러 놓았을 뿐 들보는 쓰지 않는다.

일자형 토옥(一字形 土屋)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 따르면

“주류하로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土屋)이 많다.

토옥이 나타난 이후로는 이따금 와가(瓦家)는 있어도 초가(草家)는 결코 볼 수 없다.

이을 풀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아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옥은 들보[樑]를 얹지 않고 지은 집을 무량옥(無樑屋)이라고 칭했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도 “토옥의 제도는 벽돌을 쌓아 네 벽을 만들고,

이 벽 위에 서까래를 가로질러 놓았을 뿐 들보는 쓰지 않았다.”고 하여

서까래만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옥의 지붕 맨 윗부분은 진흙을 평평하고 두껍게 쌓아두는 정도이다.

그래서 사행인들의 눈에는 풀이나 기와도 얹지 않은데다 구배도 없이 평평하면서도

지붕 처리를 한 것이 이상하게 보여 비가 오면 샐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정중의 『연행록(燕行錄)』에는 무량옥의 지붕 만드는 법을 설명하면서

바닷물이 든 짠 흙이나 백회를 지붕 위에 바르기 때문에 새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김경선의 『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는 토옥이 빗물이 샌 흔적이 있다고 지적하며

농촌의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합원


[사합원]

 

중국의 가옥(家屋)은 모두 일자(一字)형 집으로 되어 있어,

구부리거나 연이어 덧붙이거나 하는 법이 없다.

첫 번째 집채는 내실(內室), 두 번째는 중당(中堂), 세 번째는 전당(前堂), 네 번째는 외실(外室).

각 집채마다 전면 좌우에 곁채[익실(翼室): 좌우에 잇는 날개집]을 지어,

낭무(廊: 정전 아래에 부설한 바깥채)와 요상(寮廂: 광과 행랑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각 집채의 정 가운데 한 칸으로 출입하는 문을 만들었는데

반드시 앞문과 뒷문이 똑바로 마주보도록 하였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내실 문으로부터 외실 문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지원은

“‘저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라. 내 마음이 그와 같아라!’라는 말은 바로 사람의 곧바름을

집으로 비유한 것이다.” 라고 한 바 있는데, 이는 일자형 가옥 구조의 특징을 잘 드러낸 말이다.

일자형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은 북경의 사합원(四合院)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 가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사합원은 일직선상에 건물이 가지런하게 세워져

안정감 있고 질서정연하다. 북경의 사합원은 도시 개발과 함께 대부분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는데,

근래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중점 보호문물로 지정돼 ‘문물보호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짓는 방법
중국의 집을 짓는 방법을 보면, 대지를 청소하고서 달구로 다진 다음에

다시 평탄하고 바르게 땅을 깎은 뒤에 대(臺)를 쌓았다.

대의 기초는 모두 돌이며 일층 또는 이층ㆍ삼층으로 쌓았다.

어느 것이나 벽돌을 쌓고서 바윗돌을 다듬어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기초 위에 집을 지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대(臺)를 쌓지 않고 주춧돌을 놓는 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이 변형되거나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지붕의 기와는

궁전ㆍ관청ㆍ사관(寺觀)이나 친왕(親王)과 부마(駙馬)의 집들은 모두 원앙와(鴛鴦瓦)를 쓰고,

일반 사가(私家)에서는 암키와만을 쓴다.

기와는 한 번은 젖혀 깔고 한 번은 엎어 깔아 서로 암수가 되게 하며,

회(灰)를 이용하여 기와 틈을 메운다. 한 켜 한 켜 사이를 단단하게 붙이기 때문에,

진흙을 이용하는 조선과 달리 참새나 뱀이 지붕을 뚫지 못한다.



- 중국의 온돌 제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각별한 관심을 보인 중국의 온돌 제도를 살펴보면,

먼저 한 자 남짓 높이로 온돌의 기초를 쌓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른다.

그런 다음 벽돌을 잘라 바둑돌을 놓듯이 굄돌을 놓고서 그 위에 벽돌을 깐다.

방고래는 높이가 겨우 손을 뻗쳐 드나들 정도이므로 굄돌이 번갈아가면서 불목구멍이 된다.

불이 불목구멍을 만나면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넘어 들어간다.

불꽃이 재를 휘몰아서 세차게 들어가면 많은 불목구멍이 번갈아 삼켜 연달아서 전해주므로

거꾸로 나올 겨를이 없이 굴뚝에 이르게 된다.

굴뚝에는 깊이가 한 길이 넘는 고랑이 하나 파져 있다.

재는 언제나 불길에 휩쓸려 방고래 속에 가득 떨어지는데,

3년에 한 번씩 온돌을 열어 그 일대의 재를 쳐 낸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온돌 제도를 자세히 설명한 뒤에,

진흙과 돌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온돌 제도의 6가지 결함을 제시하고

견고하지 못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조선 온돌 제도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가옥 형태
중국 가옥의 문에는 반드시 발[簾]을 쳤다.

재료는 말총으로 짠 것이나 청포(靑布) 혹은 흰 바탕에 오색 비단으로 가를 두르기도 한다.

길이와 너비는 문호(門戶)와 꼭 같아서 바람이 몹시 불어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잠자는 온돌에는 모두 장막을 친다.

무명을 쓰거나 베를 쓰는데, 낮에는 걷어 올렸다가 밤이면 다시 내려친다.

온돌방에는 여름에는 대자리, 겨울에는 담요를 까는데,

길이와 너비는 온돌 크기에 맞추며 꽃무늬가 현란하다.

객당(客堂)에 벌여 놓은 의자와 탁자들은 모두 붉은빛을 띠고 결 고운 무늬목으로 된 것을 쓴다.

의자는 자단(紫檀)을 소재로 제작한 남관모의(南官帽椅)로 등받이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구유ㆍ보료 등 각색 짐승 털로 만든 담요를 깔기도 한다.

탁자의 다리는 네 개로 사각을 이루고, 높이가 세 자 이상이다.

연회를 열 때는 반드시 의자나 긴 의자에 둘러앉게 되는데,

이때 중앙에 탁자를 설치하여 술잔이나 그릇을 올려놓는다.

정원(庭園)은 모두 벽돌을 깔기 때문에 비가 내려도 질퍽거리지 않는다.

가난하여 벽돌을 깔 수 없는 중국 민가의 오래뜰[문정(門庭): 대문 앞의 뜰]에는

유리와(琉璃瓦) 부스러기나 물가에 있는 조약돌을 가져다 깔아 진흙이 질퍽거림을 막았다 한다.

 

 

■ 조선의 것과 비슷한 중국의 민간 놀이

 

중국 민간의 놀이는 조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장기ㆍ바둑ㆍ주사위[骰子]ㆍ투호(投壺)와 활 쏘는 것 등은 모두 우리나라 법과 거의 같다.

민간에서 즐기는 놀이 가운데 연행사들의 눈길을 끈 것으로는 지패(紙牌)를 들 수 있다.

지패는 종이로 만든 패를 이르는 것으로, 놀음에 사용하는 기구이다.

대개 그 노는 방식은 우리나라 화투와 같은데,

종이 쪼가리 100장을 오려서 그 안팎에 모두 중국 속담[唐諺]을 썼다.

20장을 좌중에 놓고 4명이 각각 20장씩 나누어 가지고 빙 둘러앉아 각각 한 장씩 내고

가운데 있는 것을 한 장씩 뒤집는다. 대부분 그 판이 끝나기 전에 승부가 결정된다.

 


■ 운명을 점치거나 관상 보기를 좋아하는 중국인


중국의 도시와 변방을 막론하고, 운명을 점치거나 관상을 보는 자가 많다.

거리에다가 조그마한 점옥(簟屋)을 만들어 그 속에 의자를 놓아 걸터앉고

산통(筒), 술서(術書)를 탁상 위에 벌여 놓는다.

혹은 행인이 보고 찾아들도록 깃대를 점옥 앞에 세우기도 한다.
중국의 시장 거리에서 한쪽 어깨에 2개의 둥그런 통을 메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통에는 잡스러운 채색을 하고, 그 안에는 삭도(削刀), 크고 작은 빗[], 세수그릇[洗盆],

물을 끓일 수 있는 노관(爐罐) 등의 기구가 갖춰 있다.

이들은 사람들의 귀 소제, 복사뼈의 굳은 때 긁기, 세발, 삭발 등을 일삼는 자다.

비록 비루한 일이지만 그 꺼리지 않는 것에서,

조선의 연행사들은 중국의 인물의 번성함과 삶이 고됨을 통찰하기도 하였다.

 


■ 중국의 세시 풍속


중국의 세시 풍속(歲時風俗)은 연행사들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는데,

이압(李押)의 「연행기사(燕行記事)」에 자세하다.

정월(正月) 원조(元朝)에는

백관(百官)이 조하(朝賀)하고 민간에서도 향을 피워 천지에 예를 하며 조상께 제사한다.

어른께는 세배하며 일가친척이 서로 답례하는데, 이를 배년(拜年)이라고 한다.

입춘(立春) 하루 전에 동교(東郊)에서 봄을 맞고

다음 날 새벽에는 토우(土牛: 흙으로 만든 소)에게 채찍질을 하여 풍년을 기원한다.

2월 2일에는 집집마다 훈소병(葷素)을 만들어 기름으로 지져 남녀가 모여 앉아 먹는다.

3월 3일에는 술을 싣고 들에 나가 물가에서 마시며 노래한다.

청명일(淸明日)에는 남녀가 버들을 머리에 꽂고

소분(掃墳: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 조상의 무덤에 제사지내는 일)한 뒤

술그릇을 메고 저전(楮錢: 종이로 만든 돈)을 걸고 꽃을 찾아 즐겁게 마시고 돌아온다.

4월 1일부터 8일까지는 여러 절 명승지에 가서

욕불회(浴佛會: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맞아 불상의 먼지나 때를 물로 씻어내는 것)를 하고,

10일부터 18일까지는 고량교(高樑橋)ㆍ초교(草橋)ㆍ홍인교(弘仁橋)ㆍ염계산(髥髻山)에서 논다.

5월 5일에는 창포(菖蒲)를 달아매고 쑥을 꽂는다.

어린 여자는 신령한 부적을 차고 석류나무가지를 꽂는데 이것을 ‘여아절(女兒節)’이라고 한다.

한낮에 온 가족이 창포주(菖蒲酒)를 마시고 천단장(天壇墻) 아래에서 말을 달리며 유희를 한다.

6월 6일에는 천자의 수레인 난가(鑾駕)를 햇볕에 말리고, 민간에서는 모두 의복을 말린다.

3복일(三伏日)에는 부녀자가 모두 머리를 감는다.

그러면 머리에는 기름기가 없고 때도 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에 고양이나 개까지도 목욕을 시킨다.

7월 7일에는 부녀자들이 물에서 볕을 쬐는데,

한낮에 수막(水膜: 물의 표면장력에 의해 생기는 막)이 생길 때 수침(繡針)을 던져

이것이 뜨게 되면 다투어 물 밑을 본다.

그리하여 바늘 그림자가 아름다우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탄식한다.

15일에는 각 절에서 우란회(盂蘭會: 인도의 목련존자(目蓮尊者)의 어머니가 죄를 짓고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져 있을 때 대중에게 공양을 올려 그 괴로움을 풀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기원된 의식, 우란분(盂蘭盆),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열고,

제사하고 소분하기를 청명 때와 같이 한다.

8월 15일은 곧 제일(祭日)인데, 제사에는 과실ㆍ떡을 쓰며

월광지(月光紙)를 만들어 달을 향해 절한 뒤에 이내 불살라 버린다.

9월 9일에는 술을 싣고 다로(茶壚: 차를 달이는 데 쓰는 화로)ㆍ식합(食榼: 음식을 담는 그릇)을 갖추며, 대추와 밤으로 화고(花糕: 꽃무늬 떡)를 만들어 교외의 정원이나 정자를 찾아서 논다.

그날 부모는 반드시 딸을 맞아 돌아오는데 일명 ‘여아절(女兒節)’이라고도 한다.

10월 1일에는 오색 종이를 오려서 남녀의 옷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사하고 지전을 불태우는데

이것을 ‘송한의(送寒衣: 오색 종이를 말아 남녀의 옷을 만들어서 선조께 제사한 뒤 지전과 함께 불태우는 민속)’라고 한다.

11월 동지(冬至) 날에는 백관이 조하(朝賀)가 끝나면 물러가 그 조상에게 제사하고

명함을 갖추어 서로 절하기를 원조의 의식과 같이 한다.

12월 8일에는 팥과 과실을 쌀에 섞어 아침밥을 한다. 이것을 ‘납팔죽(臘八粥)’이라 한다.

24일에는 부엌에 제사하며, 30일에는 조상의 화상을 달아 놓고 절하여 제사하고,

어른과 어린이가 존장의 집에 가서 절을 한다. 이것을 ‘배세(拜歲)’라고 한다.

또 복숭아 부적을 문에 붙이고 돈을 걸며 지마(芝: 깨)를 꽂고 솔가지를 뜰에 불태우며

제사 지낸 음식을 걷어 온 집안이 먹는데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한다.

 

- 조선의 눈으로 보는 '사행록 역사여행'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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