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행(使行), 문화교류와 실리외교의 길을 가다!
사행(使行)은 조선 사신이 중국으로 파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행(使行)이란 '사신행차'의 줄임말로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행은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한 사행이 규모에서나 횟수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조 말까지 800여 차례에 걸친 사행이 이루어졌고, 사행 때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왕명으로 짧게는 넉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 동안 멀고 먼 험로를 왕복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와 그들을 수행하는 역관(譯官), 하급관원, 군관, 시종, 상인 등 온갖 직분의 구성원들이 사행단을 꾸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인원으로 구성된 사행단은 그 관심사항과 경험치가 제각각이었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견문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넓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사행은 여러 사람들에게 중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안목을 느끼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보고 들은 것, 새롭게 느낀 것들을 적는 ‘사행록(使行錄)’을 적어 보고서로 올렸다. 또한 사사롭게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길은 실로 의식을 전환시키는 길이었다. 중국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목격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변화해야 할 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여정에 녹아 있다.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국에서 그들의 행위와 산물을 지켜보면서 동북아시아를 포괄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나갔다. | |||||||||||||||||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세계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어 꼭 가고자 했다. 또한, 상인들은 사행길을 따라 가며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소문이 난 인삼과 목면을 거래해 이익을 올렸고, 조선의 사신들이 회동관에서 시장을 열면 중국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모두 인삼을 구하기를 청했다. 이렇게 조선의 사신들은 새로운 세계로의 소통의 기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길을 가는 동안 곳곳에서 열리는 역관무역과 상인들의 사무역을 통해 국익을 우선시 하는 실리외교를 했던 것이다. |
대중사행(對中使行)
근대 이전,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을 굳게 닫고 있던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이웃의 명ㆍ청과 집중적으로 교류하던 방식이다.
조선의 대중 사행은 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되는 사대주의로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행은 국제 정세를 통찰한 결과,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책봉 정책으로, 청나라 때는 조공 정책으로 중국을 드나들면서
조선의 국가안보를 보장받음과 동시에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고,
우리가 가진 인삼ㆍ종이ㆍ청심환 등을 공무역, 사무역등을 통해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일본으로는 중국의 물자를 팔고, 일본의 은을 들여오는 중개 무역을 통해서
한층 많은 경제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 서책과 선진 문물을 도입하였고, 중국 선비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조선 선비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닌 넓은 세계관을 가진 실증적 사고를 갖출 수 있도록
변해갔고,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자아 성찰의 계기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사행’이었다.
따라서 사행이라는 행위를 단순한 사대 외교로서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문화 교류와 실리 외교의 주체성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껏 사행 및 사행록에 대한 연구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나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 18세기의 작품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행 기록을 통사적으로 정밀하게 읽다 보면,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변치 않는 일관된 흐름을 잡을 수 있고,
그 흐름 속에 쉬지 않고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들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를 읽기위해 학제적 연구를 통한 입체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이제까지는 사행록을 중심으로 한 문학 연구가 주축을 이루었다.
하지만 사행은 근본적으로 정치ㆍ외교적 행위이며 동시에 경제 교역과 문화 교류 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정치ㆍ경제ㆍ문화예술ㆍ군사ㆍ지리ㆍ인류학 등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아울러 사행 노정의 현장은 지금도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답사를 비롯한 현장론적 연구도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방면의 연구를 통해 사행을 재평가하고,
연행 노정 현장에 서서 과거 조선의 지식인들이 했던 고민을 떠올려 봄으로써,
앞으로의 대중관계를 헤아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대명관계 외교
책봉조공의 관계
14세기 말 몽고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때 만들어진 책봉조공(冊封朝貢)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세계 체제, 곧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은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책봉조공(冊封朝貢) 관계를 수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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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을 가져왔던 사행
명나라는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 문제를 들어 조선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강력한 항의를 접한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鄭道傳)이 물러나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안착되었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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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를 매개로 한 외교활동
칙사가 황제의 명을 조선에 직접 전달하는 '명사출래(明使出來)' 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경사행과 명사출래는 모두 문서를 매개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하들끼리는 대화[通交]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문서를 전달하는 것 외에 별도의 교섭을 벌이는 것은 참람한 행위로 여겨 문책을 받았다. 그래서 사행원은 문서 전달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제외하고는 매우 제한적인 활동 범위를 허락받았다. 문서를 전달하고, 전달된 문서에 대한 확인과 답서에 대한 청구, 명나라 관원을 만나 외교적인 교섭을 벌이는 일, 사행원의 제반 일정에 관한 사항을 확인하는 일, 본국에서 매매하도록 명을 받은 물품을 매매하는 일 등은 모두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이 담당했다. |
- 대청관계 외교
주변국과 조공관계를 맺은 청나라
청나라는 명나라를 승계하기는 했지만 통치구조가 달라 외교관계까지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다.
중국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던 18세기 후반의 기본틀은 다음과 같다.
만주와 중국 본토와 대만은 직할령으로 직접 다스렸고,
내몽골ㆍ외몽골ㆍ청해(淸海)ㆍ티벳과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는 ‘번부(藩部)’라 하여
간접통치 구역으로 삼았는데,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는 직접 통제하였다.
그밖에 조선ㆍ오키나와(琉球)ㆍ베트남(安南)ㆍ미얀마(면전, 緬甸)ㆍ타이(섬라, 暹羅)ㆍ잉글랜드(英吉利)ㆍ러시아(俄羅斯)ㆍ서양(西洋) 등은 ‘번속(藩屬)’이라 하여 일정한 조공 관계를 맺는 나라로 삼았다.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게 된 조선과 청나라
여타의 번속 가운데 조선은 청나라와 가장 강력한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서 외교관계의 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게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교린의 한 대상에 불과했고,
청나라에게 조선은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일이 잘못되면 돌아갈 만주(滿洲)에 인접한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다.
청나라는 1627년과 1636년의 두 차례 침공으로 조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끊고,
1637년 조선과 확실한 조공관계를 수립했다.
여진족의 중국 지배가 성립되는 1644년까지
인질ㆍ원군 파병ㆍ포로 송환ㆍ통혼(通婚)ㆍ세폐 등 청나라의 위압적 태도는 계속되었다.
1645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인질이 돌아오고,
중국의 남부를 소란하게 했던 삼번(三藩)의 난이 진압되는 등 체제의 불안요소가 사라지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도 점차 안정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하기 시작한 조선
청나라를 쳐서 병자년의 치욕을 씻자는 북벌(北伐) 논의,
조선인이 국경을 넘어가 청국의 공한지(空閑地)에서 경작ㆍ채벌을 하는 범월(犯越) 문제,
북방의 영토선을 확정 짓는 백두산(白頭山) 정계 등 우호 관계를 위협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오면 양국 관계는 안정되고
조선의 지식인들도 청나라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사행 참여 인원의 견문(見聞) 기록과 서장관과 역과의 보고서[別單]를 통해
중국의 국내사정, 황제에 대한 관심, 황실 내부 사정, 민심의 동향, 지식인들과의 교류 등등이
자세하게 전해진다. 일군의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개항으로 사라진 사행
19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면 조선과 청나라의 전통적 종속관계는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심대하게 위협받았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면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야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조선이 개항(1876)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행은 종말을 고했다.
사행(使行)이란 '사신행차'의 줄임말로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행은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한 사행이 규모에서나 횟수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조선조 말까지 800여 차례에 걸친 사행이 이루어졌고, 사행 때마다 수백 명의 인원이 왕명으로 짧게는 넉 달에서 길게는 여섯 달 동안 멀고 먼 험로를 왕복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와 그들을 수행하는 역관(譯官), 하급관원, 군관, 시종, 상인 등 온갖 직분의 구성원들이 사행단을 꾸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의 인원으로 구성된 사행단은 그 관심사항과 경험치가 제각각이었고, 이로 인해 얻어지는 견문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넓은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사행은 여러 사람들에게 중국의 실상을 관찰하고 느끼는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안목을 느끼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던 것이다. |
이러한 사행단이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체험한 것 등을 써놓은 기록이 사행록(使行錄)이다.
따라서 사행록은 고려부터 조선왕조 까지 칠백여 년 동안 일본과 함께 양대 교류국이었던 중국에 나가 보고 들은 견문과 선진문물에 대한 체험들을 자유롭게 기록한 것이다. 이에 그 기록 속에는 한국과 동아시아, 동아시아와 세계와의 외교 역학 관계, 공식 및 비공식의 국제 무역과 경제적 상황, 중국인의 의식주 및 사상, 문학, 예술 등의 문화 교류와 학술 교류 등 다양하고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
사행록은 비슷한 임무를 가지고 오랫동안 변화가 거의 없는 동일한 길을 숱한 사람이 지나간 이야기다. 따라서 그 기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차에 단조로운 내용이 반복되기 쉽다. 하지만, 사행록의 내용이 비단 사행단의 여정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록자의 견문과 경험 이후에 일어나는 문화교류나 의식변화처럼 기록자의 내면적 변화 내용도 많이 담고 있어서 그 내용이 풍부하다. |
중국 원(元)나라로부터 명(明)나라를 거쳐 청(淸)나라까지
조선 외교사절단의 공식 및 비공식 기록인 <사행록(使行錄)>은 시대별로 부르는 이름에 차이가 있었다.
먼저 원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 기록에는 <빈왕록(賓王錄)>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명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 기록에는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의미의 조천(朝天)이라는 말을 넣어 <조천록(朝天錄)>이라 이름 붙인 경우가 많았다.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는 조천이라는 말이 오랑캐를 떠받드는 의미가 되어
소중화(小中華)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냥 청의 수도였던 베이징의 옛 이름인
연경(燕京)을 넣어 그 사행 기록을 <연행록(燕行錄)>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 따른 사행록 종류의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는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후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사행 기록을 남긴 황여일의 사행록에 『조천록』이라 제목을 붙인 것처럼
명나라 때 중국을 다녀온 사행록에 <연행록>이라고 이름 붙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른 구별보다는
빈왕록, 조천록, 연행록을 통칭하여 <사행록(使行錄)>으로 명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사행록>의 종류
사행록은 주로 한문으로 적었고, 한글로 적은 것도 있었는데,
같은 저자가 하나의 사행록을 한문과 한글로 적은 경우도 있었다.
홍대용의 『담헌연기(湛軒燕記)』는 한문본으로 주제별로 편집되었고,
한글본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우아한 궁서체로 날짜를 따라 써내려간 문학적 일기이다.
숭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행록은 사행을 다녀오는 동안의 여정과 감상, 새로운 발견, 체험, 공무, 문화교류, 역사, 지리, 풍속,
과학, 무역 등 다양한 주제로 사행을 다녀온 생생한 기록을 적었다.
책문에서 호랑이를 경계하기 위한 불을 피워놓고 장막을 친 뒤에 그 안에 들어가서 찬 땅에 몸을 뉘이고
하룻밤을 지새우는 과정, 수레를 빌리지 못해 며칠씩 한 곳에 머무르는 일,
권마성을 외치는 사행단을 보며 웃고 따라하는 중국의 어린아이들 모습 등
사행록 속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대중국 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사행록은 북경까지의 사행 노정ㆍ제반 사행 의식과 절차ㆍ중국의 역사와 전통과 제도ㆍ인적 교류와 문화 교류ㆍ 북경의 서적 정보와 학술 활동ㆍ중국의 전통 연희와 서양의 최신 연희ㆍ서양 문물과 서양 서적ㆍ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ㆍ그리고 민정ㆍ풍속ㆍ언어ㆍ지리 등을 기본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다.
한편 사행록에는 중국 쪽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기록들과 중국 쪽에서 소홀하게 기록한 것을 그들보다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적은 기록들도 적잖이 존재한다. 때문에 사행록은 사행 당시 동아시아의 정황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다양하고 방대한 기록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
이러한 사행록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현황에 대해 임기중(林基中)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그는 1271년(원종 12)부터 1893년(고종 30)까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통문관지(通文館志)』,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에 있는 관련 기록으로 보아 총 사행 회수가 579회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원대(1271~1368)에 1회, 명대(1368~1636)에 82회, 청대(1637~1912)에 497회인데 이 통계를 토대로 보면 사행록은 최소 579종 이상이 전승되어야 한다. 게다가 1회 연행할 때마다 2종 정도의 사행 기록을 남겼다면 최소 1천여 종의 사행록이 전승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행록의 전승현황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임기중의 연구를 살펴보면 독립성을 가진 사행록은 모두 418건에 이른다. 이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원대가 1건, 명대가 141건, 청대가 294건이다. |
국수집 광고 문안을 오해하다 기상새설(欺霜賽雪)
신민(新民)에서 글씨를 자랑하기 위해 전당포에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더니, 주인은 이게 아니라고 했다. <기상새설>은 마음이 깨끗하고 고매함이 찬 서리와 흰눈과 견줄 만하다 라는 뜻. 나는 촌놈이 뭘 아냐며 투덜거렸다.
다음날 연산관(連山關)의 한 상점에서 글씨 자랑을 하는 남자를 보니 필법이 옹졸하고 간신히 글자 모양을 갖출 뿐이어서 “내가 글씨를 뽐낼 순간이다”라고 생각하고 먹을 들어 거침없이 커다랗게 <신추경상(新秋慶賞)>이라 써 갈겼다. “조선 사람이 글씨를 잘 쓰네.”라며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수식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붉은 종이를 가져와 내게 글씨를 써달라고 했다. 그러기에 전날 전당포 주인에게 써준 <기상새설(欺霜賽雪)>을 또 써주고 “이게 적당하지 않을까요?”물었더니 “저희 가게는 여인들의 장신구를 파는 집이지 국숫집이 아닙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전에 한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얼버무렸다. “저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단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입니다.”
이전에 요양의 어느 점포에서 <계명부가(鷄鳴副珈)>라는 글씨를 금가루로 써서 걸어놓았던 간판을 퍼뜩 떠올렸다. 그 점포와 이 가게가 한 업종일거라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부가당(副珈堂)>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귀하의 가게에서는 부인들의 장신구를 전문으로 취급한다고 하셔서, 『시경(詩經)』에 나오는 ‘부계육가(副笄六珈)’라는 말에서 따와서 쓴 것입니다.” 일러주었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4글자가 써있으면 반드시 국숫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자기의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국숫집의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하는 뜻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눈보다 흰 밀가루를 ‘진말(眞末)’이라고 부른다. -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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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행 노정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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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이 정해지고 한양을 출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압(李押)의 『연행록(燕行錄)』에 자세하다. |
■ 삼사(三使)를 결정하다 1777년(정조 1) 7월 11일 벼슬아치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시키거나 면직을 결정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가 열렸다. 이날 겨울에 출발하는 동지겸사은사의 삼사를 결정하였는데, 이압은 부사에 1순위로 올라 낙점을 받았다. |
■ 삼사가 혜민서에서 회동좌를 열어 인사를 나누다 혜민서(惠民署)에서 회동좌(會同坐)를 열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
■ 사신의 명칭이 정해지다 사형에 처한 일을 중국에 알리자는 건의한다. 정조는 이를 재가하여, 동지사 편에 역적을 처벌한 일을 기록한 토역주문(討逆奏文)을 함께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리하여 사신의 명칭은 사은진주겸동지사(謝恩陳奏兼冬至使)로 정해졌다. |
■ 호조에 나아가 방물을 포장하다 10월 16일에 호조(戶曹)에 나아가 청나라에 보내는 방물인 세폐를 포장하였다. |
■ 의정부에 나가 방물을 봉하여 싸고,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하다 이어 삼사가 모여 국서를 점검하는 사대(査對)를 행했다. 사대란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表文)과 6부에 바치는 자문(咨文)을 살펴 틀린 글자가 있는지 나중에 외교적인 문제가 될 표현은 없는지 확인하는 일로,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3번, 도중에 3번을 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날 사대에는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애초에 문서를 만들었던 승문원(承文院)의 제조가 참여하여 꼼꼼하게 살폈다. |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보낸 외교문서인 표문(表文) |
■ 삼사가 왕에게 하직을 고하는 숙배(肅拜)를 행하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삼사를 맞은 정조는 무사히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담피가죽으로 된 귀싸개[耳掩] 2개와 쥐가죽으로 된 귀싸개를 가져오게 하여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겨울철 사행에 반드시 필요한 방한구였다. 3사는 공경히 받아 사모 위에 쓰고 나왔다. 승정원으로 물러나오니 별감이 나라에서 주는 납약(臘藥) 5종과 단목(丹木)ㆍ백반(白礬)ㆍ호초(胡椒)를 전해주었다.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다시 사대를 행했다. 좌의정, 예조 판서, 공조 참판, 병조 참의, 형조 참의 등이 함께 하였다. 가마를 타고 홍제원(弘濟院)에 이르자 호조에서 작별의 연회를 베풀었다. 배웅 나온 친척들과 예전에 근무하던 관청의 하급자들과 일일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오후 4시에 길을 떠났다.
**** 이압(李押)의 『연행록(燕行錄)』 1777년(정조 1)에 파견된 진하사은진주겸동지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연행(燕行)하였던 이압(李押, 1737 1795)의 일기 연행기사(燕行記事) 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세손시절 자신을 위협하였던 洪麟漢 鄭厚謙 등의 벽파세력을 제거하였는데 본 사행은 이 사실을 청에 보고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본래는 토역주문(討逆奏文)을 전달하기 위한 사신이 별도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곧 절사가 가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 편에 함께 보내게 되었다. 당시 사행의 正使는 河恩君 李垙, 書狀官은 兼執義 李在學이었다. 본서의 저자인 이압은 본관이 延安, 자는 信卿이다. 1769년(영조 45)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그해 정언에 임명된후 교리 · 수찬 · 대사간 · 이조판서 · 공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던 인물이다. 사행 당시에는 이조판서에 재직하고 있었다.
본서는 내용상 1∼2책은 일기, 3∼4책은 견문잡기(聞見雜記)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777년 7월 11일 저자가 동지겸사은부사에 차출된 후 1778년 3월 29일 귀국하기까지 약 9개월간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10월 26에 입궐하여 肅拜한 후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말미에는 [표부자문주본급방물세폐수(表副咨文奏本及方物歲幣數)] [삼절방물이준수(三節方物移准數)] [삼절방물이준외잉여수목(三節方物移准外剩餘數目)] [토역주문(討逆奏文)]이 실려 있다.
11월 27일의 기사 뒤에는 [관서연로각읍병참관(關西沿路各邑幷站官)]과 함께 [일행인마원액(一行人馬員額)] [팔포도수(八包都數)]가 실려있어 당시 사행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사행의 인원은 세 사신을 포함하여 총 338명이었으며 말은 223필이 동원되고 있다. 팔포수는 당상관 1인당 天銀 3,000냥, 從事官 1인당 2,000냥 등으로 계산되어 83,000냥이며, 여기에 內局과 尙房 등의 무역에 필요한 別包가 별도로 10,000냥 책정됨으로써 총 93,000냥이 된다.
이 밖에 일기의 중간 중간에 [노정기(路呈記)] [회송례단(回送禮單)] [상은분정기(償銀分定記)] 등이 실려 있다. [견문잡기(聞見雜記)]는 청에서 견문한 사항을 소주제별로 분류하여 다시 정리한 것인데 연경의 연혁, 의관제도, 과거제도, 청의 풍속, 외국의 사정 등 102항목에 걸친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들 내용으로 볼 때 저자는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화이관을 지니고 있던 인물로 보이지만 반면 수레, 工匠의 기술 등 조선이 배워야 할 사항도 함께 기록하고 있어 18세기 후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던 북학적인 분위기도 드러나고 있다. 이 밖에 외국조에서는 러시아 · 몽고 · 西洋國 등에 관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서양국의 풍속을 "길에 흘린 것을 줍지 않고 밤에 문을 닫지 않으며, 혹은 교역할 때 물건이 서로 틀리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조사하여 도로 보내는 등 모두 忠信을 중하게 여긴다"고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
먼지가 날리고 찬바람이 부는 고단한 여정의 시작 | |||||||||||||||||||
「평양감사향연도」, <연광정연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행단에게 연희를 베풀었던 연광정 | |||||||||||||||||||
한양에서 의주까지 잘 닦여진 길과 깨끗한 숙소, 지방관들의 융숭한 대접을 누리던 사행사들에게 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의 길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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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향연도」, <부벽루연회>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떠나는 사행단에게 연희를 베풀던 부벽루 | |||||||||||||||||||
짧으면 석 달, 길면 반년이 걸리는 긴 여정은 여러 가지 불편하고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안개가 자욱했고, 안개가 걷히는 낮이 되면 요동벌의 먼지가 살 속으로 파고들고, 저녁부터는 북방의 찬바람이 뼛속으로 사무쳤다. | |||||||||||||||||||
언덕과 물의 연속, 동팔참
특히 마천령과 청석령의 두 고개는 하루에 넘어야만 했다. 또한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강을 건너야 했다. 눈이 가득 쌓인 고개를 넘다보면 수레바퀴는 미끄러져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얼어붙은 강도 얼음이 깨지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움직여야 했다. | |||||||||||||||||||
늪과 개펄로 하루 10리 길밖에 가지 못하는 일판문~이도정 구간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강물이 사방으로 흘러 넘쳐 늪으로 변했고, 얼어붙은 땅이 녹는 봄에는 개펄처럼 푹푹 빠져 하루에 겨우 10리 밖에 못가는 악명 높은 구간이었다. | |||||||||||||||||||
연산역과 고교보 구간에서 물이 나빠 고생한 조선 사신들
중국과 요동과 하북 지역은 물이 좋지 않은데, 특히 지금의 진황도(秦皇島) 부근에 있는 연산역(連山驛)과 고교보(高橋堡) 구간은 가장 심했다. 많은 조선 사신들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물에 대한 고통을 남기고 있다. | |||||||||||||||||||
먼지와 모래바람으로 고생한 계주~북경 구간
서북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黃砂]의 위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 북경 입경기(入 京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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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행(節行) : 공식 인원 - 총 35명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정사ㆍ부사는 사신에게 주어진 외교상의 임무인 사사(使事)만 담당한다.
서울에서 북경을 오가는 행차에 수반되는 일[行中事]에 대해서 원칙적으로는 관여하지 않았다.
정사와 부사는 반드시 귀한 집안의 저명한 사람에서 뽑았다.
황궁에서의 의식을 책임지는 상징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서장관은 관료 가운데 평소 명망을 쌓아 도덕과 규율[風憲]을 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뽑았다.
대간(臺諫)의 임무를 띠고 일행을 규찰ㆍ점검해야 했으며,
날마다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였다가 귀국한 뒤에 보고서로 꾸며 승문원(承文院)에 제출해야 했다.
정사는 정2품을 종1품으로, 부사는 정3품을 종2품으로, 서장관은 정5품을 종4품으로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 파견했다. 이를 '결함(結銜)'이라 하였고, 올려진 품계를 '가함(假銜)'이라고 하였다.
사신으로 보내기에 마땅한 고위직 인물이 없을 때,
그보다 낮은 등급의 인물을 보내면서 가함을 쓰게 한 것이다.
■ 당상역관(當上譯官)
당상역관은 사행의 일을 총괄하여 살피고 공무를 주관하였다.
사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실질적인 총책임자로서 여러 원역(員役)을 지휘했으며,
나아가 사행 중에 일어나는 공적인 일도 주관하였다. 이처럼 지위가 막중했기 때문에
북경으로 사행을 갈 때나 조선에서 청나라 사신[賓客]을 맞이할 때[接伴] 비록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당상역관에게 곤장이나 태형(笞刑)을 가하지 않고
일을 다 끝내고 돌아온 뒤에 죄를 논하는 것으로 법으로 규정했다.
■ 상통사(上通事)
상통사 2명으로 중국어 역관 1명과 만주어 역관 1명으로 구성된다.
상통사는 당상역관을 보좌하면서 사행 업무와 사행이 지나는 여러 관문(關門)에 주는 예단을 관장하였다.
또한 상의원(尙衣院)에서 왕실의 의복을 짓는데 필요한 원사(原絲)와 옷감,
그리고 각종 사치품 및 약재를 수입하는 일을 대행했다.
■ 질문종사관(質問從事官)
질문종사관은 1명인데, 통문관(通文館: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는 교회(敎誨) 가운데 역과(譯科) 급제를 먼저 한 사람을 뽑았다.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에서 중국에서 온 문서에 쓰인 이어(吏語)나 방언(方言) 중
난해한 것만을 초록하여 주면,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내어 주석을 달아 오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조천관(朝天官)이라 하여 문관을 뽑아 보내다가,
1537년(중종 32)에 통문관의 역관으로 교체했다. 질정관(質正官)으로도 불렸다.
■ 압물(押物)ㆍ압폐(押幣)ㆍ압미종사관(押米從事官)
압물ㆍ압폐ㆍ압미종사관은 방물(方物)ㆍ세폐(歲幣)ㆍ세미(歲米)의 운송 관리ㆍ감독[押]하는 역관들이다.
한 사행이 중국에 가지고 가는 물화는 수백 태(?)에 달했고,
그것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수백 마리의 말과 마부(馬夫)를 이들이 관장했다.
■ 청학신체아(淸學新遞兒)
청학신체아 1명은 만주어 역관으로 청나라의 각 관문을 출입하고 및 찬물(饌物)의 지급을 담당했다.
당상 역관에서 청학신체아까지 총 19명의 역관 가운데
3명을 관주관(管廚官)으로 뽑아, 각각 3사행의 양식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한 1명을 장무관(掌務官)으로 뽑아 사행 중에 휴대하는 모든 공식 문서를 맡도록 하였다.
숫자가 적은 압폐종사관이나 압미종사관에서 관주관이나 장무관이 나오면,
압물종사관 8명 중에서 압폐나 압미의 일로 옮겨보게 하였다.
■ 의원(醫院)
의원 1명은 궁에서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內醫院)과
오늘날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는 혜민서(惠民署)에서 번갈아 임명했다.
■ 사자관(寫字官)
사자관 1명은 승문원(承文院) 서원(書員)에서 뽑았고,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表文)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사행 도중 현지에서 작성하여 올리는 문서의 글씨를 쓰게 했다.
■ 화원(畵員)
화원1명은 그림을 맡아보는 도화서(圖畵署)에서 데려왔고, 그림을 그리게 하여 사행을 기록했다.
■ 군관(軍官)
군관은 총 7명이었다. 정사는 4명을 데려가는데, 그 중에는 서장관이 추천한 한 사람이 들어가야 했다.
부사는 3명을 데려갔고, 서장관은 1명이었다. 사신들은 모두 스스로 후보자를 추천했다.
지방의 고위 관료를 할 때 수하에 두었거나 잘 알고 지내던 전직 무관(武官)을 데려갔으나,
개중에는 자제군관(子弟軍官) 또는 자벽군관(自辟軍官)이라 하여
손아래 친인척으로 세워 외로움도 달래고 그들로 하여금 견문을 넓히게 하였다.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나 몽고어ㆍ만주어 학습을 위하여 우어별차(偶語別差) 1명을 뽑아 보냈다.
만상군관(灣上軍官) 2명은 연행 노정에서 3사행이 머무르는 곳을 정돈하고,
사행 중에 들어가는 식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 의주(義州) 사람으로 정했다.
이상 35명을 ‘절행(節行)’ 이라고 한다.
절행에게는 중국 조정에서 숙식은 물론 상급(賞給)까지 내려야 했으므로 인원이 적을수록 좋으니
늘 숫자를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조선에서는 한 사행에 여러 임무가 겹쳐지면
그만큼 담당자가 있어야 했으므로 인원을 추가하는 일이 잦았다.
정기 사행인 동지사(冬至使)의 정원은 반드시 매년 6월 15일에 차출하는 것이 법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차례를 빼앗는 자와 차례가 왔는데도 책임을 피하려는 자는 곤장 100대를 때렸다.
연행을 하면서 얻게 되는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부류와
그런 이득에도 불구하고 반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하려는 부류가 늘상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철도, 비행기 등 교통이 발달한 지금이야 약간 불편하고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풍찬노숙을 해야 하는 그 시대에 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별행(別行) : 임시 사행
동지사보다 사신의 품계를 높여 보내는 것이 관례여서,
정사는 정승급의 대신(大臣)이나 정1품의 왕족(종실)을 임명했다.
부사는 종2품을 정2품으로, 서장관은 정4품을 종3품으로 결함했다.
사은과 진하처럼 고마움과 축하를 전할 때는 왕실의 인물들이,
주청과 변무처럼 의전(儀典)보다 실제 성과를 얻어내야 할 때는 명망이 높고 글을 잘 짓는 실무형 인물들이
차출되었다.
반면 진위사와 진향사는 동지사행보다 한 단계 낮추었다. 진향사와 진위사는 관례상 겸하기 때문에
정사는 진위사가 되고, 부사는 진향사가 되며 서장관은 이를 겸하여 검찰했다.
고부사와 문안사는 부사를 빼고, 정사와 서장관만 보냈다.
사은사에서 문안사까지를 별행(別行)이라고 부르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차출했다.
사행의 일이 특별하지 않고 정행과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지면 이를 겸임하는데,
사신의 관품은 사은사의 행차에 준하고 인원의 정원수는 절행에 따랐다.
삼사 가운데 정사와 부사는 의전을 책임지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서장관이 실제 사행의 책임자라 할 수 있다.
정사는 주로 현직 정승이나 판서, 아니면 전임 대신(大臣)을 임명했다.
이들은 대개 연로하기 마련인데, 2,000리가 넘는 여정에 겨울 한철을 포함하여 6개월간의 객지 생활을
감당할 만한 체력을 지닌 인물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연행 길에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다.
거기에 청나라를 오랑캐로 폄하하는 사고를 지닌 인사들은 병자호란에 죽거나 고초를 겪었던 조상들을
들어 임명을 사양했다. 실제로 그렇게 신념에 따라 거부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그 중 일부는 고역을 면해보려는 핑계이기도 했다.
인평대군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사로 가장 많이 중국에 다녀온 인물이다.
19살에 심양에 들어가 1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한 이래, 37살에 죽을 때까지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었다.
1642년 청나라 군대가 금주(錦州)를 함락시키자, 이를 축하하는 진하사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다.
이듬해(1643) 청 태종이 죽자 진향사가 되어 심양에 들어가 조문했다.
이때 인질로 있던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과 함께 우모령(牛毛嶺)으로 사냥을 다녀왔다.
심양에 돌아와 함께 왔던 사신 일행은 먼저 귀국시키고, 인질로 잡혀 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청은 북경에 입성한 뒤, 1645년 소현세자를 돌려보냈다.
이에 인평대군은 청나라가 하북(河北)을 평정했음을 진하하는 사절이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1647년에는 사면해 준 것[頒赦]을 사례하기 위해 북경을 다녀오면서
외교력을 발휘해 해마다 청나라에 바치는 폐백의 양을 줄였다.
1650년에는 두 번이나 북경에 다녀왔다.
아버지 인조의 장례를 치르던 6월에는 청나라의 실력자 다이곤(多爾滾)에게 의순공주를 시집보내는 일로 상복(喪服)을 벗고 다녀왔고, 11월에는 세 신하의 일을 진주(陳奏)하는 일을 자청했다.
청나라에서 정승 이경여와 이경석, 판서 조경이 청나라와 화친을 반대했다며 극형에 처할 것을 주문했으나,
조선에서는 금고와 유배(안치)형으로 타협을 봐야 했기에
청나라 고위층과 친분이 각별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651년 늦은 봄에 돌아와 잠시 쉬다가 11월에 칙사를 보내준 것에 대한 사례와 동지사를 겸했고
1652년에는 역시 칙사에 대한 사례로 북경에 다녀왔다.
1654년 8월 강희제가 심양으로 와서 성묘한다는 소식에 문안사가 되어 나가다가
평양에 이르러 거둥이 중지되었다는 말에 그대로 돌아왔다. 11월에는 책봉진하의 일로 북경길에 올랐다.
1656년에는 사대부들이 화를 입은 것을 진주하는 일로,
1657년에는 화약 만든 것을 사죄하는 일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은 잦은 사행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은 날마다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행에 대한 보고는 조선 건국 초기에 조말생(趙末生)이 귀국하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기록하여 조목별로 보고서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된다.
서장관은 압록강 도강을 앞두고 의주부윤(義州府尹)과 함께 사절단의 휴대품을 검속하였다.
일행 인마와 금지 품목―금과 은ㆍ진주ㆍ인삼ㆍ담비 가죽[貂皮]― 및 허가받은 액수 이상의 은자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서장관은 압록강을 건너가게 되면 곧 힘을 잃는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을 역관에게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제군관: 사신의 친척으로 따라간 단기 유학생
사신들이 자제군관을 세우는 일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배경에는
북경에서 사신들의 활동 폭이 넓어진 사정과 관련이 깊다.
명나라 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신을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1521년 역관 김이석(金利錫)이 국외 반출이 금지된『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구입하려다 적발된
사건을 계기로 숙소의 문을 잠궈 놓고 일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공무가 있을 때에 한하여 표첩을 휴대하면 출입을 허용하게 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출입금지 조치가 심할 때는 숙소의 담장 위에 가시울타리를 올릴 정도로 엄격했다.
의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길도 정해진 곳으로만 이동했고, 현지인과 말을 주고받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다.
당대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던 북경에 가서도 아무런 문화 활동을 할 수 없다보니
사행은 소득 없이 힘든 임무로 여겨졌고,
큰 세계에 대한 동경이 크지 않던 지식인들은 구태여 힘든 길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청나라는 대륙 통치에 자신감이 생기자 사신들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았다.
사신들은 숙소에서 나와 북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견문을 넓혔다.
유리창(琉璃廠)의 방대한 서적은 물론 천주교와 선교사로 표상되는 서구 문명과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던 일군의 젊은이에게 연행은 큰 배움의 길로 인식되면서,
어떻게 하면 연행을 갈 수 있을까 고심하게 만들었다.
광대한 요동벌의 자연과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의 인문지리를 보려 연행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건국 초기에 오랑캐니 할아버지의 원수니 하며 사신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하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조선후기 연행록의 3대 명편이라 할 수 있는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담헌연기(湛軒燕記)』(『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작가인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 모두가 자제군관(子弟軍官)인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역관(譯官)은 사신을 수행하여 외국에 다녀오는 것이 곧 출세요, 치부의 방법이었다.
사역원 소속의 역관은 매년 600명 선을 유지했으나, 역관이 나갈 수 있는 관직은 76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정3품직을 받더라도 참하관의 녹봉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아예 녹봉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행에 참여하는 정관(正官)에게는 인삼(人蔘) 80근을 휴대하는 팔포(八包),
상의원(尙衣院)과 내의원(內醫院) 등 관아를 대행하는 별포(別包),
사행에 필요한 기밀비(機密費)를 조달하되
중앙 및 지방 관아의 은자(銀子)를 대출받는 공용은 차대(公用銀借貸)의 방법으로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여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은 수개월 간의 노고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다.
18세기 초까지 대중ㆍ대일 무역은 사행에 따른 공무역뿐이었고,
청-조선-일본의 중계무역이 성황을 이루어 역관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1707년 책문후시가 열리면서 사상(私商)의 자유 무역이 허용되고,
1680년 후반을 기점으로 청과 일본의 직교역로가 열리면서 역관들의 수익이 줄긴 했지만,
사치품 수입 사업으로 여전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역관들은 청의 정세를 파악할 주요 관서의 문서(文書)를 구해오는 것[求得]으로도 상을 받았다.
주로 반란이나 고위 관직의 비리, 주변 제국과의 마찰 등 청나라의 중원 지배가 약화되었다거나
그렇게 되려는 징후를 알리는 자료를 높이 쳐줬다. 그들이 그런 문서를 구하기 위해서
청의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빼오거나, 아예 문서를 위조하기까지 하였다.
『통문관지』에는 외교적 역량을 과시한 역대 유명 역관들이 소개되었는데,
인조ㆍ효종ㆍ헌종ㆍ숙종 때의 장현(張炫)과
숙종ㆍ경종ㆍ영조 때 활약한 이추(李樞)가 가장 많은 도강 횟수를 다툰다.
장현(張炫)은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해서 일찍이 뱃길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축년 소현세자를 배종하여 심양에 가서 6년 동안 머무르면서 청나라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다.
수임(首任)으로 있던 40년 동안 30여 번이나 연경을 다녀왔으며, 역관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여
인동 장씨(仁同張氏)를 역관 가문의 명가로 만들었다.
이추(李樞)는 변무(辨誣)로 이름을 얻었다.
『명사(明史)』에 인조반정의 일이 잘못 적혀있는 것을 고치는 일로 13번이나 계속해서 사신이 갔는데,
그는 임금의 추천으로 그때마다 동행했고 마침내 영조 14년 인쇄본을 받아보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가 33회나 연경을 드나들면서, 6번 주청을 성사시켰고, 9번 진주를 허락받았으며,
10번 황제와 사신간의 대화를 통역했으며, 황실의 말을 3차례나 하사받았다.
역관에게는 임시 품직만 주고 녹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추에게는 특별히 숭록대부 지중추부사를 임명하여 종신토록 그 녹을 타게 했다.
사자관과 화원 : 지금의 워드프로세서와 사진사
사자관(寫字官)은 사행에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쓰는 사람이다.
국가의 공식적인 입장을 전하는 외교문서에서는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글씨를 잘 써야 했다.
애초에는 사자관 2명과 화원 1명이 차출되었다.
하지만 불법 무역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자관 1명을 줄여버렸고
그 후에 화원도 이익이 없고 빚만 지게 된다 하여 스스로 원하여 나아가지 않으니,
단지 사자관 1명만 들어가게 되었다.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쓴 것으로 유명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연경에 갔을 때
사자관이 눈병이 매우 심해져서 전혀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마침 군관(軍官)으로 들어온 다른 사자관이 있어 겨우 글 쓰는 일을 대행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원을 들여보내는 대신 사자관을 1명 더 보내는 것으로 바꿨다고 했다.
화원(畵員)은 평소 국가 의식이 진행되는 과정과 절차, 행렬, 소용되는 기물을 그려 의궤(儀軌)를 만들어
기록으로 남기 듯, 사절을 수행하면서 중요했던 일을 그렸다.
정묘호란으로 요동의 길이 끊어지자 뱃길로 명나라에 가던 장면을 그린「수로조천도(水路朝天圖)」나
연행 노정을 차례로 그린 「연행도(燕行圖)」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법으로 국외로 반출할 수 없거나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할 수 없는 중국의 서적의 그림이나 지도를
모사하는 일도 화원의 몫이었다.
이이명은 1704년 삼절연공행의 정사였는데,
연행 중에 「주승필람(籌勝必覽)」이라는 책과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라는 지도를 보게 된다.
의주에서 요동을 지나 산해관ㆍ계주ㆍ북경으로 이어지는 육로와 산동반도에 이르는 해로의 지형과
군사시설을 낱낱이 알 수 있는 요긴한 자료였다.
「주승필람」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었으나, 지도는 국외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구입할 수 없었다.
화원으로 하여금 똑같이 베껴 그리게 하여 국내로 가져왔다.
비변사에서 보다 정밀하게 그려 10폭짜리 병풍으로 만들어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라 이름을 붙이고, 왕에게 바쳤다.
서기 : 유능한 사람들
영조ㆍ정조 때에 이르면 절행의 일원이 아닌 모호한 직책의 인사들이 출현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ㆍ이덕무(李德懋)와
평생을 수행비서로 지낸 조수삼(趙秀三)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 글재주와 식견을 갖추고 있지만, 양반 신분이 아니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홍대용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절강(浙江)의 세 선비와 친구의 인연을 맺은 것을 본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은 중국에 가는 것을 소원했다.
그러던 중 1778년 동지사에 채제공(蔡濟恭)이 정사로, 심념조(沈念祖)가 서장관이 되자,
이덕무는 평소 친분이 있던 심념조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고, 박제가는 채제공을 따라갔다.
두 사람의 주된 목적은 중국 구경이었으므로
북경의 선비들을 만나고 천주당이며 유리창의 서점을 구경하는 일로 소일했다.
조공(朝貢)이 허락되자 역관들과 함께 방물을 궁전으로 나르는 일에 하면서, 황제의 궁전을 구경하였다.
또한 서장관이 구입한 서적을 검열하여 포장하고 봉함하는 일도 했다.
박제가는 이때의 견문을 토대로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었다.
그는 이후 세 차례의 연행을 더 하게 된다.
1790년 5월 건륭제의 팔순절을 맞아 유득공과 함께 연경에 들어가고,
그 해 10월 정조의 특명으로 다시 연경에 들어갔다.
그리고 1801년 『주자서(朱子書)』 구매를 목적으로 마지막으로 연행하였다.
세 번째 연행은 독특한 경우인데, 건륭제가 정조의 세자 탄생을 축하했음을 들은 정조가 박제가에게
군기시정(軍器寺正)의 직함을 주어 별주(別奏)를 이끌고 앞서 출발한 동지사를 따라 가라고 했던 것이다.
이들 검서관들처럼 문관을 군관이나 역관과 같이 취급할 수 없어 따로 만든 직책이 질정관(質正官)이다.
『패관잡기(稗官雜記)』를 보면 조선 전기에 문관 1명을 조천관(朝天官)으로 임명하여
사신을 따라 들여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질정관으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이어(吏語)와 방언(方言) 중 해독하지 못하는 것을 뽑아 주어 주석(註釋)하게
하였는데, 그 관호(官號)를 쓰는 것을 꺼려하여 압물관(押物官)에 채워 넣었다.
나중에는 사역원의 관원으로 바꿔 임명하여 ‘질문관(質問官)’으로 바꿔 불렀고,
관직에 따라 종사관의 서열을 정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질정관은 조헌(趙憲, 1544~1592)이다.
조헌은 1574년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보좌하여 조천을 다녀온 후,
명나라의 문물제도의 번성함을 관람하고 조선에 반영하기에 알맞은 계책 여덟 가지를 먼저 아뢰고
나중에 또 16개 조항을 간추려 선조(宣祖)에게 바쳤다.
후에 이 두 가지 상소문을 합하여 『동환봉사(東還封事)』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박제가는 이를 두고 “중국의 문물을 보고서 우리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서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이고도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며
극찬했고, 자신의 『북학의』도 그런 취지로 만들었음을 이야기했다.
이름 모를 마부들은 역관들보다 더 자주 연행길에 올랐다.
네팔의 셀파들이 히말라야에 오르는 등반객의 짐을 나르는 것을 업으로 삼듯
국경도시 의주에는 사행 정관의 견마잡이로 평생을 보내는 마부들이 있었다.
홍대용을 수행했던 세팔(世八)은 28번째 연행이라 했고, 평생 40번을 오갔다는 견마잡이도 있었다.
사람을 태운 말의 고삐를 잡는 견마잡이는 적어도 말에 탄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아는 것도 많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다. 같은 마부라도 짐말[刷馬]을 모는 마부는 수준이 더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관가에서 노자[行資]로 쓸 은자(銀子)가 지급되었지만,
길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모두 주어 버리고 빈손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은 일행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물론 길 가의 상점ㆍ민가ㆍ과수원ㆍ채소밭에 들어가
걸리는 대로 훔쳐다 먹었다. 그래서 연행로의 중국 사람들은 이들 마부들을 도둑처럼 여겼고
때로는 사행에게 잡아와서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점잖은 사신들의 체면을 깎기도 했다.
계절ㆍ개인의 성향ㆍ사행단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이동수단
대개 정사와 부사는 쌍교(雙轎)를 탔다. 가교(駕轎) 또는 쌍마교(雙馬轎)라고도 불린 쌍교는 대감(大監)이라 부르는 2품 이상과 승지(承旨)를 지낸 사람에게만 타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왕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도성 밖에서만 타게 하는 최고의 가마였다. 쌍교는 가마를 사람이 메지 않고 말 두 마리가 앞뒤로 끌었다. 앞뒤로 길게 뻗은 끌채를 앞뒤 말의 안장 좌우에 걸고, 좌우로 짧게 뻗은 끌채를 양쪽에서 가마꾼들이 잡아 균형을 잡았다. 그러므로 정사와 부사에게는 따로 4명의 가마꾼[駕轎扶囑]이 공식 수행원으로 인정되었다. |
<연행도>,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 가마, 말, 도보로 북경성 앞에 이르렀던 사행단의 모습
|
품계가 낮으면 탈 수 없는 쌍교
정사나 부사보다 품계가 떨어지는 서장관은 쌍교를 탈 수 없었다. 서유문(徐有聞)은 좌거(坐車)를 탔다. 좌거는 말이 끄는 수레인데, 수레 위에 가마처럼 벽과 지붕을 얹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수레 몸체의 길이는 다소 길었고, 뒤에 두 바퀴를 달았으며, 앞으로 긴 채를 만들어 말의 안장에 연결하였다. 따로 균형을 잡아주는 가마꾼들이 필요 없어 인건비가 덜 들었지만, 안정성이 떨어졌다. 길이 평탄하면 별 문제가 없었지만, 비탈길이나 돌무더기 위를 지나게 되면 바퀴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나면서 상하좌우로 흔들려 지붕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좌우 벽에 뺨을 스쳐 생채기를 입기도 하였다. |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타기도 했다
명ㆍ청교체기에 해로로 중국에 갔던 홍익한(洪翼漢)은 경비 절감을 위해 가마를 버리고 노새를 탔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호란을 겪던 조선은 돈이 부족했고, 북방에서 청나라와 밀고 밀리는 전쟁을 벌이던 명나라는 조선 사행을 지원해 줄 경제적ㆍ행정적 여유가 없었다. 역관들이 중국에서는 낮은 벼슬아치[小官]들도 반드시 뚜껑이 있는 가마[屋轎]를 탄다며 말렸다.
사행의 위신을 고려한 측면도 있지만, 서장관이 노새를 타는 마당에 자신들이 그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을 탈 수 없어 말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홍익한은 아직 근력이 세고 말 타는 것에 익숙하다며, 좋은 노새를 구해 타고 갔다. 하지만 음력 9월은 찬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20일을 버티던 홍익한도 오한이 심해지자 은자 6냥을 주고 가마로 갈아탔다. |
심양과 북경성에서는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옛날 청나라 황궁이 있던 심양과 현재 황제가 있는 북경성에서는 쌍교나 좌거를 탈 수 없었다. 성 밖에서 편복에서 공복(公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움직였다. 누런 기[黃旗]를 꽂은 자문(咨文)을 실은 수레가 앞장서고, 말에 탄 3사가 그 뒤를 이었다. |
「항해조천도」,<등주부를 지나며> 이덕형 사행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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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탔던 역관과 군관
역관과 군관은 대개 말을 탔다. 당상통관과 상통사, 의관ㆍ화원ㆍ군관에게는 역마(驛馬) 1마리와 마부 1명이 원칙적으로 배정되었던 것. 하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은 짐을 싣는 것으로 쓰고 태평거(太平車)라는 수레를 빌어 탔다. 수레 위에 나무를 얽어 둥근 집을 만드는데, 앞부분의 3분의 1은 비워두고 발과 휘장을 쳐놓고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다. 집 안쪽은 남색 베를 발랐고, 양쪽 옆으로 한 변이 30cm 정도의 유리창을 달아 밖을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서로 등을 맞대면 두 사람까지 탈 수 있지만, 대개 혼자 탔다. |
물을 건널 때도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던 사행단
육로로 가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다리가 있는 강은 약간 돌아가더라도 다리로 건넜다. 수심이 얕고 폭이 넓지 않으면 걸어서 건넜다.
삼사를 비롯한 정관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았다. 하인들이 알몸으로 메고 건너는 가마를 타기도 했고, 하인의 목을 타고 건너고, 나무로 뗏목을 엮어 하인들에게 메고 건너게 하고, 그냥 말을 타고 건너기도 하였다. 하인들은 말안장이며, 중요한 짐이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 위에 짐을 얹어 여러 번 물을 건너야만 했다. |
사행단에게 지급되던 비용
사행에 참여하는 인원에게는 노비(路費)가 지급되었다.
기본이 되는 경외 노비(京外路費)는 호조에서 하사하는 의자(衣資)와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의 형태로 지급된다.
-의자(衣資)
의자(衣資)란 의복 등의 물자를 말한다.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각기 백저포(白苧布: 흰 모시) 5필,
백면주(白綿紬) 6필, 목면(木棉)ㆍ정포(正布) 각각 15필을, 따로 쌀[賜米]15가마를 받았다.
-반전(盤纏)
반전(盤纏)이란 노자(路資)를 말한다.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으로 나뉜다.
원반전에 포함되는 품목은 백저포, 백지(종이), 청서피, 호초(후추) 등이 있다.
별반전은 녹피(사슴가죽), 수달피, 소연죽, 지삼초(담뱃잎), 장연죽 등이 포함된다.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
사행에 참여하는 인원에게는 노비(路費)가 지급되었다.
기본이 되는 경외 노비(京外路費)는 호조에서 하사하는
의자(衣資)와 원반전(元盤纏)과 별반전(別盤纏), 별간구청(別間求請)의 형태로 지급된다.
별간구청은 별구청(別求請)으로 사신이 외국에 나가거나 돌아올 때
경유하는 지방 관아에서 관례로 받는 경비 외에 따로 더 청하는 여비를 말한다.
은장도와 청서피, 백지, 소갑초, 의롱, 초석(돗자리) 등이 있었다.
지역[外方]에서 관례상 보내는 노자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ㆍ함경도는 사행 노정에 비껴있기 때문에 각 고을별로 수송하여 바쳤다.
경상도와 전라도[兩南]에서 보내는 쌀이 각각 321석, 290석으로 총 611석이다.
이를 정사 305석 7두 5승, 부사 229석 7두 5승, 서장관 76석으로 차등을 두어 나누었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사행이 지나는 길에 바쳤다.
사행원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사미(賜米)와 노자
사미(賜米)와 의자(衣資)는 사행원이 각각 스스로 받아서 사용하였다.
원반전ㆍ별반전과 8도에서 보내오는 노자를 모아
북경으로 가는 노정의 해당 지역에서 사용할 예단을 확보해 놓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삼사 이하 역졸에 이르기까지 사행 구성원 모두의 노비로 삼았다.
다만 호조와 선혜청에서는 별도의 청구 절차 없이 관례에 따라 지급하였다.
경상도 이하 6도에서는 사행이 각각 여러 고을에 서신을 보내어 노자를 요구했다.
그러나 각 고을마다 경제적 여건이 다르고, 고을 수령의 뜻도 달라
어느 지역에서는 물건이 풍족하게 오고, 어느 지역에서는 적게 보냈고,
빨리 보내주는 곳도 있었지만 사행이 출발하도록 보내오지 않는 곳도 있었다.
결국 도강하는 날까지 사행단의 노비를 확정지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행 노정의 해당 지역에 보내는 예단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행은 원칙적으로 조선의 왕과 중국의 황제 사이의 일이었으므로
사행단과 각 지방 관원과의 교류는 엄금했다.
그러므로 뇌물수수를 규례처럼 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서로 남겨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예물을 주지 않으면 발목 잡힌다!
본래 사행 노정에 있는 각 지방 관청과 명나라의 예부(禮部)에 주는 예물은
부채와 모자 등의 물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광해군 때에 주청(奏請)하는 일로 은자 수만 냥을 뇌물로 보낸 뒤로
중국의 관리들은 조선 사신의 행차를 이익을 구할 수 있는 기회[奇貨]로 여기게 되었다.
각 지방 관청의 책임자는 물론 사행을 보호하기 위해 차출된 군사들, 북경 숙소의 관리자들은
공공연하게 갖고 싶은 물품의 목록을 보냈고, 목록에 있는 물품 가운데 빠진 것이 있거나
요구하는 수량만큼 주지 않으면 갖은 핑계를 써서 사행단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사행단의 노비는 중앙 정부에서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신이 개인적으로 각 지방 관아에 청구해서 받아 써야 했다.
늘 부족했기에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번번이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궁여지책으로 사행에 참여한 역관과 상인들에게 융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관과 상인은 이를 벌충한다는 핑계로 교역에 필요한 시간과 명분을 얻게 되어,
사행을 고의로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명ㆍ청에 바쳤던 조공품, 방물(方物)
방물(方物)이란 본래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바치는 예물을 말하는데,
마찬가지로 책봉을 받는 곳에서 책봉을 하는 국가에게 바치는 예물도 이에 포괄된다.
여기서는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朝貢品)을 말한다.
사행의 방물은 사행의 목적과 종류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며,
또한 황제ㆍ황태후ㆍ황제비ㆍ황태자 등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들 품목은 조선의 토산품이면서 또한 중국에서 요청한 물품 가운데
최상의 품질을 가진 물품을 선별하여 보냈다.
호조(戶曹)ㆍ선혜청(宣惠廳: 조선시대 대동미와 대동목, 대동포 따위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ㆍ
장흥고(長興庫:조선시대에 둔 돗자리ㆍ종이ㆍ기름종이[油紙]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ㆍ
공조(工曹) 등 해당관청으로 하여금 시기에 맞추어 이 방물을 마련하게 하였다.
사행이 출발에 앞서 호조에서 방물을 간품하는 날짜를 잡았고,
그 날짜에 맞추어 각 소관 관청의 담당관이 방물을 가지고 호조에 모였다.
호조의 당상관과 실무자[郎官], 삼사신이 함께 입회하여[眼同],
방물의 품질을 살펴보고[看品], 방물을 봉해서 짐바리에 맞게 쌌다[封裹].
방물을 포장한 다음에는 해당 물건을 수령하여 가는 관원과
차사원(差使員: 방물 수송을 위해 임시로 파견된 관리)이 이를 함께 감독하여 길을 떠났다.
공물에 상응하게 지급하는 회사물(回賜物)
사신이 중국에 가서 공물을 바치면, 중국에서는 그 품질과 수량을 점검하고
공물의 품질에 따라 그 값에 상응하는 중국의 물화를 지급하였다. 이를 회사물(回賜物)이라 한다.
회사물(回賜物)은 조선 국왕에게 회사한 물품과 사행 구성원 개인별로 회사한 물품으로 나뉜다.
회사물은 중국의 규정에 정해 놓은 대로 지급되었다.
왕실에 보낸 물품은 절차에 따라 상통사가 수령하여, 귀국한 후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 바쳤다.
왕실에는 주로 견직물과 은자, 준마가 지급되었다.
동지사의 은자 250냥은 1729년(영조 5) 청나라 예부에서 황제의 뜻에 따라
은자 150냥은 담비 가죽 100장으로, 은자 100냥은 내조장단(內造粧緞) 4필과 운단(雲緞) 4필로 바꾸었다.
이후 성절ㆍ정조ㆍ연공의 사행도 이와 같이 하였다.
회사물품은 견직물과 은자, 짐승의 가죽, 말 등이 주를 이룬다.
단(緞)은 비단(緋緞)의 준말로 두텁고 광택이 나는 견직물로 보료(솜이나 짐승의 털로 속을 넣고,
천으로 겉을 싸서 선을 두르고 곱게 꾸며, 앉는 자리에 늘 깔아 두는 두툼하게 만든 요)나 이불요,
겨울용 의복에 많이 사용되며, 화려한 색상과 문양을 넣는 이중직 견직물이다.
궁중을 비롯한 사대부 계층 이상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금(錦)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치는 견직물이다.
일반적으로 무늬가 있고 없고 또는 색을 썼는가 안 썼는가에 따라 채단(綵緞)과 소단(素緞)으로,
무늬의 크기에 따라 대ㆍ중ㆍ소단(大ㆍ中ㆍ小緞)으로 구분한다.
또한 무늬가 없는 소단은 나중에 공단으로 불리면서
매끄럽고 광택이 있는 특성으로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장단은 직물 표면 전체나 일부분을 긁어 보풀을 만든 비단이다.
주(紬)는 실을 굵게 꼬아서 만들어 질겼기 때문에 외출복과 겉옷에 많아 사용된 비단이다.
견(絹)은 비교적 성글고 얇으며, 무늬가 없고 명주 그 자체로 짰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쓸 때나 봄가을옷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다.
청포(靑布)는 명나라 때에 주로 사용되었던 일반적인 복식 재료인데,
중국 남방의 남경(南京)ㆍ송강(松江) 등에서 많이 생산되었다.
주로 압물관 이하에게 하사되는 것을 보면 그다지 고급 직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단의 수량을 표리(表裏)와 표(表)ㆍ필(匹)로 구분해서 적어 놓고 있다.
표리란 옷감의 겉감[表]과 안감[裏]을 말하며, 표는 겉감을, 필은 길이의 단위이다.
‘표리’로 받았다면 예복(禮服)을 지어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역 형식
사행길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사행 무역(使行貿易)은 중국으로 가는 사행의 여정 중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말한다.
사행 무역의 형식은 공무역(公貿易)ㆍ사무역(私貿易)ㆍ밀무역(密貿易)이 병행되고 있었다.
공무역은 일반적으로 조공(朝貢)과 회사(回賜) 형식을 취한 물화의 수수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른바 증여무역(贈與貿易)이라고 한다. 개시(開市)라 칭하기도 한다.
사무역은 좁게는 사행 역원(譯員)의 팔포 무역(八包貿易)과
상의원ㆍ내의원 및 각급 관아의 무역을 이르고,
넓게는 일반상인들이 상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행에 따라가 개인적으로 교역하는 경우를 이른다.
밀무역은 사상들의 불법적인 상거래를 지칭하는 것으로, 후시(後市)라고 한다.
이는 뒷장[後市]에서 나온 말로, 공무역인 개시(開市)에 대칭되는 용어이다.
증여무역형식으로 변화한 대중 무역
병자호란 이후 중국과의 무역 형식은 조공ㆍ회사라는 증여무역 형식을 취하게 된다.
물화 보완의 형식으로서의 조공은 그 수량이 많아지면서 무역의 성격을 가미하게 된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끝난 다음부터 조선의 고종 11년까지 사절(使節)은
238년간에 999회로서 연평균 4.2회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에 청사(淸使)는 165회로서 연평균 약 1.4회 정도로 적은 것이다.
이것을 양국 간의 사신파견 빈도수를 보면 조선이 약 6배나 많이 파견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정기적인 사절의 파견부터 기타 사신의 파견에 이르기까지 많았던 결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당시의 우리 국력이 약한데 그 원인이 있다.
이렇게 사절의 파견 횟수가 많음은 그만큼 예물을 많이 가지고 가야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조선 측의 경제적인 손실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대명관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는 증여 무역의 내용적 특성인 것이다.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간 역관
조선 사회가 16세기 말 17세기 전반기에 왜란과 호란을 겪었음에도
신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장기간의 무기류 생산을 통한 광공업 발달과 대동법의 전국적인 확대 실시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청일간의 중개무역이 활기를 띤 데 힘입고 있었다.
이 중개무역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청나라에 오갔던 부연사행(赴燕使行)이며,
이를 주도한 것이 부연역관(赴燕譯官)이었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부터 조선의 개항(1876)까지
청나라로 간 사행(使行)은 총 673회에 이르는데,
이는 조선에게는 대청무역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대청무역에 참여하여 청ㆍ일간의 중개무역을 주도한 역관의 본래 임무는
사행 중 통역과 행중사(行中事)를 처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역관은 언어가 소통되는 점과 사행 중 그들이 차지하는 지위,
조선 정부의 역관제도 및 정책이 지닌 한계와 허점을 이용하여 무역 상인으로 변모해 갔다.
사행 역원(驛員)에게 주어지던 인삼과 팔포무역
조선전기부터 사행 역원(驛員)에게 은화를 가지고 가도록 하여
행중(行中)의 여비 및 무역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세종 때에 명에 대한 금(金)ㆍ은(銀) 세공(歲貢)이 면제되면서부터,
사행 역원이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 대신 정부가 사행역원 한 사람마다 인삼(人蔘) 10근씩을 지급하여 가지고 가도록 규정하였다.
비록 액수는 적었으나 사행 역원에게 일정액의 한도 내에서의 사무역(私貿易)을 허용한 것이다.
인조 6년(1628)에서 22년(1644)사이에 해당하는 명말(明末) 숭정(崇禎) 연간에 이르러
사행로가 험난해지면서 종래 한 사람 당 인삼 10근씩의 정액을 80근으로 증가 책정하였으며
그 인삼을 10근씩 팔포(八包; 여덟 꾸러미)에 나누어 싸게 하여 이를 팔포(八包)라 부르게 되었다.
곧 '팔포무역(八包貿易)'은
사행역원이 사사로이 마련한 인삼 80근을 사무역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말한다.
부연역관(赴燕譯官)들의 무역활동을 확장시킨 것은 관아 무역(官衙貿易)의 대행이었다.
서울의 각 군문이나 아문이 북경에서 수입해야 할 각종 물품은 재고량과 수요량을 고려하여
매년 동지행(冬至行)과 역행(曆行)의 부연역관에게 자금을 지급하여 수입하였다.
이를 '별포무역(別包貿易)'이라고도 한다.
역관들은 사행을 통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 역관들은 신분타파를 주장하고
신문화의 수입과 의식의 개혁에 앞장서 근대화의 선구적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개시(開市)와 후시(後市)를 중심으로 한 민간무역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은 조선의 철저한 쇄국주의 정책으로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주로 역관들에 의해 행해졌던 중국과의 무역은 임진왜란 중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강(中江) 지역의 개시(開市)가 이루어지면서 민간무역의 길이 열렸다.
개시(開市)는 두 나라의 사정에 따라 폐지된 적도 있지만
중강 이외에 회령ㆍ경원 등지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상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개시는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등 그 제약이 심해,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는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후시무역(後市)가 이루어졌다.
즉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의주상인인 만상은 사행원, 특히 역관과 감독관 등과 결탁하여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
책문(柵門)에서 청국 상인인 요동의 차호(車戶)와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책문 후시(柵門後市)'라고 하였는데,
책문에서의 무역은 사상(私商) 중에서도 만상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만상 후시(灣商後市)'라고 불렸다.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 만상(灣商)
만상(灣商)은17세기 말 이후 대청 무역활동을 한 의주(義州)상인으로,
유만(柳灣)ㆍ만고(灣賈)라고도 한다.
책문후시를 통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무역의 중심도시가 되고,
만상은 이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금ㆍ은ㆍ인삼ㆍ우피 등을 청국 상인의 비단ㆍ당목ㆍ약재ㆍ기타 보석류와 거래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은, 사행원이 개인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만큼 경제력이 없었고,
사행의 실무 담당자인 역관의 경제적 대우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만상은 청나라와의 무역에 있어서 개성상인(開城商人)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만상이 중국시장에서 상품을 구입해 오면
국내 최대 규모의 상인인 개성상인은 이것을 국내에 팔고,
반대로 개성상인이 생산지에서 매점(買占)한 국내 물품의 중국 수출은 만상이 담당하는
무역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후시는 청국 상인들과의 부채 문제 등 부작용을 들어 금지되기도 하였다.
만상 후시는 1787년(정조 11) 혁파되기도 했으나, 1795년(정조 19) 재개되었다.
그러나 만상들은 개항 후 침투한 외래 자본에 밀려 해체의 길로 갔다.
무역장소
대청 무역과 관련된 사행 노정의 주요 구간은
중강(中江), 책문(柵門), 성경(盛京: 심양), 중후소(中後所) 모창(帽廠), 북경 회동관(會同館)이다.
중강
중강은 압록강 서쪽 1리쯤에 있는 소서강(小西江)에서 서쪽으로 4리쯤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영의정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遼東)의 미곡을 구입해서 기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명(明)에 개시(開市)를 요청했다.
이에 1593년(선조 26) 중강 개시(中江開市)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은을 주요한 지불수단으로 하여, 구리ㆍ수철ㆍ면포 등을 미곡과 군마 등과 교환했다.
하지만 약탈 등의 폐단으로 1601년에 혁파되었다.
이듬해 명과 조선은 수세(收稅)를 통해 국가경비를 충당하려는 목적으로 중강개시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무역상의 불리함과 잠상(潛商)의 인삼교역 등 폐단이 발생하여 1609년(광해군 1) 다시 폐지했다.
그러다가 1627년 정묘호란 이후 후금에 대하여 많은 물품을 바쳐야 했던 조선과,
직물 등의 수요를 충족시켜야 했던 후금의 필요에 따라 1628년 2월 다시 중강 개시가 시작되었다.
김경선은『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중강 개시는 사실상 팔고 사는 무역이 아니라
국경 지대의 청인들에게 거저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후 중강 개시는 점차 무역 체제와 무역품이 정례화 되어감으로써 불평등한 요소가 해소되어 나갔다.
공무역인 중강 개시는 의주부윤의 감시 하에 사상(私商)의 출입을 금지했고,
교역횟수ㆍ개시시기ㆍ교역기간ㆍ교역품목 등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가 점차 약화되고 사상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대청교역은 자유무역처럼 되었는데,
이를 중강 후시라고 한다. 일종의 밀무역으로 개시 이후 50년간 성행하였던 중강 후시는
현종 초 장소를 책문(柵門)으로 옮겨 행하여졌다.
책문
압록강에서 책문까지는 110리에 달한다.
책문은 사행이 청으로 들어갈 때와 북경에서 돌아올 때 무역이 활발히 일어났던 지역이다.
이 책문에서 일어난 대청 무역의 형식을 책문무역(柵門貿易)이라고 부른다.
책문은 가자문(架子門) 또는 변문(邊門)이라고 하는데,
압록강 건너 만주의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있다.
봉성 장군(鳳城將軍)이 그 여닫기를 맡아 한다. 이곳에서는 1660년(현종 1)부터 사무역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의 사신들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해 상인들이 마부로 변장하여
은과 인삼을 가지고 강을 건너가 책문에서 밀무역을 했기 때문에
책문 후시(柵門後市)란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1700년(숙종 26) 중강개시가 폐지된 뒤에 책문후시는 더욱 번창하여 대청 무역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금하였으나, 단속기관인 단련사(團練使)까지 이에 가담하여
단련사 후시(團練使後市)라는 이름으로 더욱 성행해지자 1755년 공인하게 된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에 따르면,
책문후시는 1년에 4?5차례에 걸쳐 열리고 한 번에 은 10만 냥이 거래되었다고 하며,
청나라의 보석류ㆍ비단ㆍ약재류 등을 들여오는 데 따른 비용으로
조선의 은이 연간 50~60만 냥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정조 때에는 후시를 일체 금지하려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으며,
책문 후시는 청국 세폐사의 파견 중지 조치가 있은 개항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경
봉황성→진동보→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십리보→성경까지는 540여 리인데,
조선 사행은 성경에서 예물 및 표문을 내는 등 외교적 의례를 가졌고,
이를 위해 들어간 조선 측 관리와 상인에 의한 공무역과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성경에서 소흑산, 관령을 거쳐 산해관까지 이르는 노정 중에 동관역에서 18리 떨어진 곳에
중후소(中後所)가 있다. 중후소는 모자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조선 사행은 연경으로 들어갈 때 이곳에서 모자를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자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이 모자 무역은 주로 역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를 관모무역(冠帽貿易)이라 부른다.
김경선은『연원직지』에서 중후소의 「모창기(帽廠記)」를 따로 두었는데,
“모창이란 모자를 만드는 공장이다.
중국 사람이 쓰는 모자와 우리나라의 관모(冠帽)는 모두 여기서 생산된다고 한다.”고 하고는,
밤에 직접 가서 본 모자 만드는 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북경 회동관
성경에서 북경까지는 1,509리였다.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주로 옥하관(玉河館)이라고 부르는 회동관(會同館)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연행사들은 표문과 자문을 청나라에 제출하는 의식인 표자문정납(表咨文呈納),
정사 이하 모든 정관이 홍려시(鴻臚寺) 패각(牌閣) 앞에서 3궤 9고두를 연습하는 홍려시연의(鴻臚寺演儀),
사행 정관이 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조참(朝參), 방물과 세폐를 바치는 방물세폐정납(方物歲幣呈納),
숙소인 회동관에서 열리는 하마연(下馬宴),
청나라가 조선의 왕과 삼사신 및 원역에게 주는 회송예물(回送禮物)을 받는 영상(領賞),
떠나는 사신 일행을 위해 마련하는 상마연(上馬宴) 등 각종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동안 회동관 뜰에서는 이른바 회동관 개시(會同館開市)가 실현되었다.
회동관 개시는 상마연이 끝난 뒤, 청나라 예부에서 관원이 상품의 불공정 거래자와
잠매자 및 거래 금지품목의 매매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회동관의 벽에 고시(告示)한 뒤 시작되었다.
고시 후 북경의 각 점포 상인들이 화물을 싣고 회동관에 들어오면
예부가 파견한 감시관의 감독 아래 조선 역관 및 상인과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귀국 길에 오를 때는 반드시 사신 일행이 무역한 물품의 포수(包數)를 기록하여
청나라 아문(衙門)에 제출하고 아문에서는 그 수를 점검한 뒤 북경을 떠나게 하며,
그것을 예부에 보고하여 산해관과 봉황성에 통보함으로써
사행의 귀환 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 무역품
중국과의 사행 무역에 있어서, 조선의 수출품은 금ㆍ인삼ㆍ종이ㆍ우피(牛皮)ㆍ명주ㆍ저포(苧布)ㆍ모물(毛物)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ㆍ당목(唐木)ㆍ약재ㆍ보석류ㆍ문방구ㆍ신발류 등이다.
조선 후기 정부는 만상의 사무역을 정부 감독 하에 인정하여 세입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만상 후시(灣商後市)를 허용하는 대신 그 수량 등을 제한하였다. 즉 만상이 수입해오는 연복 잡물의 수요를 절사 1만냥, 별행 5,000냥, 자행(咨行) 1,000냥으로 규정하는 한편, 은ㆍ인삼의 교역을 금지하고, 피물(皮物)ㆍ종이ㆍ주(紬)ㆍ저포(苧布)ㆍ면(綿) 등을 교역대상 물품으로 규정하고 급여하도록 했던 것.
이에 따라 정조 말에는 사행정사(使行正使)가 의주에 도착한 뒤 의주부윤과 상의해서 연행상금절목(燕行商禁節目)을 합의하여 작성하고 이를 기준해 만상의 무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정한 정액 무역권을 만포(灣包)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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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 반입이 금지된 품목인 인삼
박사호(朴思浩)는 『심전고(心田稿)』에서, 연경에 가지고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물건으로 금, 인삼, 담비가죽[貂]과 수달피[㺚]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인삼(홍삼) 꾸러미는 처음에는 40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해마다 늘어서 5000근에 이르렀음에도 연경 사람들은 그 값의 10배를 주고 사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래 거래한다고 하였다. 대개 5000근 꾸러미의 삼 이외에는 단 한 근도 금물이어서, 사행이 의주로 들어가던 날 밤에 의주 부윤이 샅샅이 뒤져서 일행 중의 정관(正官) 고경빈(高景斌)ㆍ이정식(李廷植)ㆍ김성순(金性淳)ㆍ이호기(李好基)가 잡혔고, 찰방 현운서(玄雲瑞)도 붙잡혀 돌아가게 된 사정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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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수레 6, 70대가 책 안에 죽 늘어서니 마치 돛대들이 무수히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매년 사행(使行) 때에 은과 인삼이 연경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중국의 잡화로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것으로, 비단 등과 약재나 바늘ㆍ모자ㆍ책 같은 쓸 만한 것 이외에 구슬ㆍ 부채ㆍ향(香)ㆍ당나귀ㆍ노새ㆍ앵무ㆍ융전(毧氈: 모직물)ㆍ거울ㆍ허리띠ㆍ종이ㆍ벼루ㆍ붓ㆍ먹 따위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건들은 나라의 보배가 아니라 부질없이 작은 나라의 사치하는 풍습만 조장하게 되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금물(禁物)은 금ㆍ삼ㆍ초피와 수달피이고 저 사람들의 금물은 병서(兵書)ㆍ무기[兵器]ㆍ낙타[駝]ㆍ말쇠[金鐵]ㆍ상모(象毛)ㆍ 흑각(黑角: 무소뿔) 등의 물건인데, 모두 수색 검사한 후에 책문을 내보낸다. 그래서 잠상배(潛商輩)들의 눈을 치뜨고 모면하려는 꼴이란 가증스럽고 가소롭다.
그 연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선의 종이는 고려 이후 오랜 무역품이었다.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서 조선의 백추지(白錘紙: 결백 (潔白)하고 질긴 백면지(白面紙))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유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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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선(金景善)은『연원직지(燕轅直指)』에서 중국의 종이 만드는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
큰 맷돌을 설치하여 그 네 변두리를 높이고 황수(黃水)를 그 가운데 댄 다음, 두 필 혹은 세 필의 말에다 멍에를 메워서 닥나무 껍질을 간다. 그리고 그 곁에 벽돌담을 쌓되 가운데를 비운다. 그래서 그 가운데에 석탄을 태우면, 양면이 온돌과 같은데 거기에다 젖은 종이를 붙이면 경각에 마르니, 이것은 겨울용이다. 대개 중국도 역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나 다만 갈아서 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질기지 않다. 우리나라는 문드러지도록 찧기 때문에 털이 생긴다.
모자는 요동 중후소(中後所)에 있는 모자창(帽子廠)에서 생산되었는데, 주로 양털을 재료로 써서 제조한 방한용 모자였다. 18세기 후반 모자는 1년에 600척(隻)에서 1,000척 가량 수입될 수 있었다. 수량으로는 60만~100만 립(立)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다.
수입된 털모자를 사용한 계층은 주로 사대부가의 남녀를 비롯한 부유층으로 추정된다.
정조 4년(1780) 중국에 다녀왔던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모자를 만드는 법은 매우 쉬워서 양털만 있으면 우리도 만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양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은 해가 다 가도 고기 맛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온 지역의 남녀가 수백만 명 이하는 아니며, 이들이 모자 하나는 써야 겨울을 넘긴다. 그러므로 동지사(冬至使)나 황력 재자관이 가지고 가는 은화(銀貨)를 계산하면 10만 냥이 못 되지 않으니, 이를 10년 동안 통산한다면 100만 냥이 된다. 모자는 한 사람이 삼동(三冬)을 지내기 위한 것으로 봄이 되어 낡으면 이를 버린다. 천 년이 가도 부패하지 않는 은으로 삼동이면 낡아서 버리는 모자를 바꾸고 산에서 캐낸 한정된 물건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보내다니, 어찌 생각하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가.”라고 하였다.
김경선은『연원직지』에서 박지원의 말을 인용하여 모자 무역의 폐단을 언급한 후에, “양을 길러서 그 털은 모자를 만들고 그 고기를 먹으면 모자로 은을 소비해 가며 타국에 의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흉년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홍량호(洪良浩) 역시 1회성 소비재인 모자 수입을 경사 어디에서도 예법을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라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
과학(科學)
망원경, 총포, 자명종을 들여오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서양 과학 수용은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정두원(鄭斗源) 등이
천리경(千里鏡)ㆍ화포(火砲)ㆍ자명종(自鳴鐘) 등을 들여오고,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 J. 로드리게스(Johannes Rodriquez, 육약한: 陸若漢)로부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이마두: 利瑪竇)의 천문서(天文書)와 『직방외기(職方外記)』,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 『천문도(天門圖)』 등의 서적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 것을 든다.
이 당시에 들여온 것중 가장 중요한 서양 문물을 꼽으라면 망원경, 서양식 총포, 자명종 등을 들 수 있다.
아담 샬에게 서양 문물을 얻어 온 소현세자
소현세자가 북경에 있던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탕약망: 湯若望)로부터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인조의 맏아들인 그는 1625년(인조 3) 세자에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과 함께 인질로 심양(瀋陽)에 갔다.
그러다가 명이 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한 1644년 북경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아담 샬과의 친교로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지식을 배워
천문ㆍ수학ㆍ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ㆍ천주산(天主像)을 들여왔다.
국내에 유입되었던 서양 천문학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이미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
이수광은 명나라를 수차례 방문하여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천주실의(天主實義)』등을 가지고 들어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을 간행하여
한국에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등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수많은 조선 사신들이 중국을 방문했고,
그들에 의해 상당한 분량의 서양 과학 내용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실용적인 분야에 특히 큰 관심을 끌어 비교적 일찍 수용된 서양 과학 분야로는
서양 천문학을 들 수 있다. 소현세자 등의 귀국과 더불어 조선에도 역법개정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1644년(인조 22) 관상감 제조 김육(金堉)은 시헌력을 채용하자면서,
청나라에서 시헌력에 관한 서적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중국 흠천감의 실제적인 협조를 얻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조선에서는 천문학자 김상범(金尙范) 등을 사신 가는 편에 북경에 파견하여
정보를 얻고 연구하게 하여 1653년(효종 4)부터 국내에서도 이를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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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의 『칠정산(七政算)』은 이미 수백 년이 지나 정확한 계산이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에서 새로 나온 서양식 역법을 채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헌력 말고는 서양 과학문물 가운데 조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웃 중국에서는 자명종이 깊은 관심 속에 수없이 많이 수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자를 양성하여 서양식 자명종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른다. 또 일본에서도 서양의 자명종은 제작 기술을 자극하여 이것이 일본에 소위 화(和) 시계를 크게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서양의 자명종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종 시대에 밀양의 유흥발이 일본인에게서 얻은 자명종을 연구하여 그 이치를 스스로 터득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밖에도 여러 실학자들이 자명종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조선의 경우 중국, 일본과는 달리 자명종(서양식 시계)을 받아들여 비슷한 것 또는 같은 것을 제작하려는 노력을 조직적으로 하지는 않은 듯하다. |
서양 과학에 대한 일부 실학자의 관심과 이해
이런 문화와 지적 환경 속에서 일부 실학자 등이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사상에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이 그러하다.
그 가운데 홍대용은 그의 연행록인 『연기(燕記)』를 통해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을 보이는 한편,
서양 과학을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전개하였다.
남천주당에 방문해 망원경을 구경한 홍대용
홍대용의 『연기』 가운데 주목할 것으로 북경 남천주당에서 서양 신부들과 필담한 유포문답(劉鮑問答)이다. 유(劉)는 유송령(劉松齡)이요 포(鮑)는 포우관(鮑友官)이니, 모두 독일인이다.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와 탕약망(湯若望: 아담 샬)의 뒤를 이어 중국에 천주교(天主敎)를 전하러 온 선교사들로, 천문(天文)ㆍ역상(曆象)에 정통하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흠천감(欽天監)으로 등용하였다. 유송령의 본명은 Augustinus von Halberstein이고, 포우관의 본명은 Antonius Gogeisl이다. 중국에 온 지 이미 26년이 되어 유(劉)는 62세가 되고 포(鮑)는 64세가 되었다. 모두 중국어문에 능통하였다.
유송령과 포우관은 남당(南堂)에 거처했는데, 이곳은 산학(算學)이 더욱 뛰어났고, 궁실과 기용은 4당중에서 으뜸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이 항상 왕래하는 곳이었다. 연행에 참여한 첨지(僉知) 이덕성(李德星)은 일관(日官)이어서 역법(曆法)을 대략 알았다. 이번 연행에서는 조정의 명령으로, 두 사람(유송령ㆍ포우관)에게 오성(五星)의 행도(行度)를 묻고, 겸하여 역법의 미묘한 뜻을 질문하며, 또 천문을 관찰하는 모든 기구를 구매하려 하였다. 홍대용은 그와 함께 일을 하기로 약속하고, 유송령과 포우관을 직접 만나 천문에 관한 문답을 하고 관측기구를 구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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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을 토론한 박지원
홍대용에 이어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서양의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인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에는
그런 박지원의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박지원은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ㆍ기풍액(奇豐額)ㆍ왕민호(王民皥)ㆍ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ㆍ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ㆍ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박지원은 그의 지우(摯友) 홍대용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지식층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일깨우지 못하다
지도와 천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에 와있던 서양 선교사들은 17세기 초부터 갈릴레이의 천문도 등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소개하였다.
물론 지동설을 지지하지는 않고 여전히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천문학 발달이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또 남반구에도 북반구 못지않게 수많은 별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 별들의 그림이 서양 천문도에 의해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서양의 천문도가 조선 지식층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망원경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세계관과도 연관된 일이다.
1631년 명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들여온 망원경 혹은 천리경은 그리 언급되지 않다가
1세기 뒤인 이익(李瀷)이 망원경을 얻어 하늘을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다는 기록으로 다시 전해진다.
물론 1766년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이 그 제도를 자세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실록(實錄)』등은 물론이고, 19세기 초 천문학자 성주덕(成周悳)이 쓴 『서운관지(書雲觀志)』에도
천문 관측에 망원경을 사용한 관례는 보이지 않는다.
연행 노정 속 다양한 종류의 극장
청(淸) 나라에는 곳곳에 여러 형태의 건축물이 들어섰다. 극장의 다양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북경과 연행 노정의 도처에 다양한 종류의 극장 건축물이 산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 극장은 그 세워진 장소에 따라 분류한다. 궁정극장(宮廷劇場)은 화려하고 장대하다. 희대는 3층으로 된 것도 있고, 황제와 비빈, 근신들을 위한 객석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의 상업극장(都市 商業劇場)은 도시의 번화가에 위치하여 실내 객석을 갖추었다. 향촌극장(鄕村劇場)은 희대 건물만 촌락의 광장이나 노변(路邊)에 세운 것이 일반적이다. 사원극장(寺院劇場)은 사묘(寺廟)의 부속 건물로 대개 정전(正殿)의 맞은 편에 건설한 희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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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상연하는 무대가 3층으로 구성된 대형 궁정극장은 청나라 때 4군데 있었다. 열하 피서산장 동궁(東宮)의 청음각(淸音閣), 북경 원명원(圓明園) 동락원(同樂園)의 청음각(淸音閣)과 수강궁(壽康宮)의 희대, 자금성(故宮) 영수궁(寧壽宮)의 창음각(暢音閣), 이화원(頤和園) 덕화원(德和園)의 대희대 이다. 앞의 둘은 이미 사라졌고, 뒤의 둘은 지금도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다. 이밖에 단층 희대를 갖춘 소규모 극장이 자금성과 원명원에 여러 곳 있었다. 대형 궁정극장은 연극을 상연하는 희대, 관람하는 전각, 이 둘을 연결하는 양쪽 곁채로 구성된다.
1790년 건륭 황제의 80회 생일잔치에 참가한 서호수(徐浩修)는 7월 16일 열하 피서산장에서 연희를 관람하였다. 우리는 이어 두 시랑을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두 문을 지나서, 연희전(演戱殿) 서서 협문(西序夾門) 밖에 있는 조방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조금 있다가 전상(殿上)에서 음악 소리가 났다. 시랑(侍郞) 철보는 우리에게 뒤따르라고 하더니 스스로 진하표(進賀表)를 받들고 서서 협문을 거쳐서 전정(殿庭)에 섰다. 전(殿)은 2층으로 가로로 7칸인데 아래층 정중앙에 있는 1칸이 어좌(御座)이다. 남쪽 창을 활짝 열었는데 좌우의 6칸은 조각한 창을 달고 유리(琉璃)로 막았다. 보니 비빈(妃嬪)이 창 안에서 내왕하고, 밖에는 공급(供給)하는 중관(中官)이 가득히 모여 있다. 전 남쪽에는 3층 각(閣)이 있는데, 맨 위층에는 ‘청음각(淸音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다음 층에는 ‘운산소호(雲山韶護)’, 아래층에는 ‘향협균천(響叶勻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곧 음악을 연주하고 유희(遊戱)를 설행(設行)하는 곳이다. 전계(殿階) 좌우에는 분화(盆花)와 분송(盆松)을 벌여 놓았다. 계단 남쪽에는 고동(古銅) 화로를 안치하였는데, 침향(沈香) 연기가 오르고 있다. 제2권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少頃, 殿上樂作. 鐵侍郞使余等隨後, 自擎進賀表, 由西序夾門, 立殿庭. 殿爲二層而橫七間, 下層正中一間爲御座, 而洞開南?. 左右六間, 關以雕窓, 障以琉璃. 觀之人妃嬪來往於?內, 供給之中官 簇立於窓外. 殿東西各有序數十間, 卽宴筵排班處. 殿南有三層閣, 最上層扁曰淸音閣, 此層扁曰雲山韶護, 下層扁曰響協勻天, 卽作樂設戱處. 殿階左右列盆花盆松, 階南安古銅大?, 升沈香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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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戱園)과 희관(戱館)이라 불리는 상업 극장
청대의 대도시에는 건륭 연간부터 희원(戱園) 또는 희관(戱館)이라고 불리는 상업 극장이 활발하게 생긴다.
1828년(순조 28)에 북경을 여행한 무명씨의 『부연일기(赴燕日記)』에는 “성 안팎에 광대놀이 하는 누가 수백 곳이나 되며, 집 제도가 웅장하고 기구도 화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행사절의 일원은 이들 상업 극장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에 대해서도 기록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와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은 연행사절 가운데 최초로 북경 시내의 극장을 방문한 조선 선비의 기록일 것이다.
홍대용은 1766년(영조 42) 1월 4일 북경의 정양문(正陽門) 밖에서 희곡을 관람하고, 극장의 제도와 관람 절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홍대용의 기록은 중국의 그 어느 문헌보다도 극장의 규모와 상연제도를 잘 설명한다. 1,000명 가까운 관중이 극에 몰입하다 순간 환호하면 건물이 무너질 듯한 현장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
향촌과 사원의 희대(戱臺)
연행 노정 중에 향촌과 사원의 희대(戱臺)도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었다.
1712년(숙종 3)에 출발하여 이듬해 돌아온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향촌과 사원의 소규모 희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김창업은 영원(寧遠)에서부터 마을과 사원에 희대가 많다고 하였다.
영원은 요녕성(遼寧省)의 최남단 지역이다.
명청대에는 부유한 개인의 저택과 향촌 각지에 희대 건축이 활발하였다.
강서성(江西省) 낙평시(樂平市)에는 명ㆍ청대에 건축된 희대가 217곳이나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김창업은 귀국길에 고려보를 지나면서 마을의 희대(戱臺)를 보았다.
편액이 걸린 누각(樓閣) 형태의 희대이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단청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는데,
서유문(徐有聞)은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는 이를 채각(彩閣)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희대는 대개 마을마다 있기 마련이며,
연극을 상연하는 무대 건축물만 있고 객석 건물은 따로 짓지 않는다.
이와 달리 판자와 갈대를 엮어 임시로 지은 희대도 있다. 김창업이 필옥(篳屋)이라고 부른
이 건축물은 땅바닥에서 2m 정도 올려서 폭과 깊이가 3~4m에 불과한 다락마루를 만들고
지붕과 벽은 갈대를 엮어 막는다. 이런 임시적인 무대를 초대(草臺)라고도 한다.
길가 광장에 지어 노천에 걸상과 탁자를 늘어놓고 앉아 또는 주위에 둘러서서 연극을 구경한다.
붕(棚)과 희막(戱幕)
이밖에도 연행사절들이 목격한 중국의 극장에는 붕(棚)과 희막(戱幕)으로 불리는 형태가 있다.
‘붕(棚)’ 은 지상에 높다랗게 올린 다락마루 형태의 무대이고,
‘희막(戱幕)’은 영희(影戱: 그림자놀이)를 상연할 때 그림차가 비치는 천을 가리킨다.
그림자놀이의 희(戱)자는 이 막 안에서 인형을 놀리면서 노래와 대사를 하기 때문에
희막(戱幕)은 영희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호수의 『연행기(燕行記)』에는
채붕(彩棚)과 노대(露臺)라고 하는 연희(演戱) 건축물이 기록되어 있다.
‘채붕(彩棚)’은 길거리에 설치한 임시무대이며,
‘노대(露臺)’ 역시 노천에 설치한 간단한 무대이다.
명ㆍ청대 남방에서 활발히 건축된 개인 저택의 희대를 제외하면,
연행록에는 당시 중국에 존재한 거의 모든 형태의 희대와 극장 건축에 대한 견문이 들어 있다.
■희옥(戱屋), 희자옥(戱子屋), 희자각(戱子閣), 붕(棚)
: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관희전각(觀戱殿閣), 설희전(設戱殿), 연희전(演戱殿), 희각(戱閣), 채붕(彩棚), 노대(露臺)
: 서호수(徐浩修), <연행기(燕行記)>
■희대(戱臺), 연희청(演戱廳) : 박사호(朴思浩), <심전고(心田稿)>
■희대(戱坮) : 이해응(李海應), <계산기정(薊山紀程)>
■희루(戱樓) : 서경순(徐慶淳),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채각(彩閣) : 서유문(徐有聞),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창희지루(倡戱之樓), 희루(戱樓), 희막(戱幕) : 무명씨(無名氏), <부연일기(赴燕日記)>
(참고: 이창숙,「연행록에 실린 중국희곡 관련 기사의 내용과 가치」, 『연행록연구총서』3, 학고방,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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