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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Gijuzzang Dream 2010. 12. 24. 11:46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ㅇ전시유물

 

   -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 감숙성, 영하성 등 실크로드 관련 유물 200여 점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왕오천축국전’ 대여 전시

 

 

ㅇ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Ⅰ.Ⅱ

 

 

ㅇ전시기간 : 2010. 12. 18 - 2011. 4. 3

 

 

 

 

 

 

 

 

 

 

신쟝(新疆), 간쑤(甘肅), 닝샤(寧夏) 실크로드 지대의 유물 대발견

실크로드를 가다

 

 

 

 

- 혜초의『왕오천축국전』

국립중앙박물관 오영선 학예연구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3개월간 빌려주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

이라며 “3개월 이상 안 된다는 것이 전시조건이었다. 전시가 열리는 도중인 3월17일 프랑스로 돌아간다

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는『왕오천축국전』의 모사본과 견본이 함께 전시돼 있다.

 

 

 

 실크로드

 

실크로드는 고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문명 교류의 젖줄이었다.

문명의 발생 이후 동서문명의 교류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 유라시아대륙 남쪽의 바다를 이용한 ‘바닷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흔히 ‘실크로드’의 3대 간선도로라고 한다.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19세기말 독일 지리학자 리흐트호펜(F. von Richtohfen)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리흐트호펜은 비단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파미르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를 ‘실크로드(비단길)’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실크로드의 개념은 시리아, 로마로까지 점차 확장되어

주로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에 해당하였고

초원의 길, 오아시스길, 바닷길 등 실크로드의 3대 간선도로 가운데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혜초가 함께 하는 서역기행’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는

8세기 혜초가 택한 파미르 고원 동쪽의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문명교류의 생생한 현장을 소개한다.

이 길은 현재의 신쟝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서역’에서 둔황을 거쳐

동방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장안에 이른 후 다시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까지 이어진다.

 

 

 

 1부 실크로드의 도시들

 

실크로드크의 주요무대를 이루는 중앙아시아는 흔히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고 불리며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서쪽을 서투르키스탄, 동쪽을 동투르키스탄이라 칭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투르크계 민족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국신쟝위구르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투르키스탄

천산산맥을 경계로 크게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구분되고,

천산산맥 남쪽의 천산남로는 또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을 경계로 서역북도와 서역남도로 구분된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천산산맥 남쪽의 산록지대를 따라 형성된 서역북도

카슈가르, 쿠차, 카라샤르, 투루판 등의 오아시스가 연결되어 있는 길로 혜초가 직접 지났던 길이기도 하다.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서역남도

호탄, 케리야, 니야, 체르첸, 누란 등의 오아시스가 연결되어 있다.

 

천산산맥 북쪽 지방인 천산북로에는

이닝, 우루무치, 하미 등을 오아시스가 동서로 연결하는 교통로가 연결되었다.

 

8세기 초 신라의 혜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실제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따라갔던 그의 여정은 현재의 우리와 실크로드를 가깝게 이어준다.

 

 

 

◇ 서역남도, 누하 소하묘지

(중국 신장성 누란, 기원전 2000-1000년)

 

◇ 천산북로, 호랑이문양의 둥근 금장식

(B.C.5-3세기/ 금/ 5.2㎝/ 우루무치(1977)/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 서로 마주보는 호랑이 문양이 있는 금장식

(B.C.5-3세기/ 금/ 25.6×3.3㎝/ 우루무치(1977)/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 용무늬 황금대구(帶鉤)

(1-2세기/ 금/ 9.8×6㎝/ 카라샤르(焉耆) 출토/ 신강위구르자치구박물관)

카라샤르에서 출토된 황금대구(허리띠 잠금장치)는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7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용의 몸 여러 곳에 터키석을 상감하였다.

용의 형체는 모발처럼 매우 가는 황금실(金絲)를 용접해서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금구슬을 가득 채워

장식하였다. 한반도 평양의 낙랑고분 출토품(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일찍이 주목해온 유물이다.

 

 

◇ 용무늬 황금대구(帶鉤)

(1세기/ 금/ 한국 평양 낙랑고분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2부 -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은 사람이나 짐승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북쪽의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오는 눈과 빙하가 녹은 물을 의지하여

사람들은 오아시스 도시를 만들고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천산산맥 북쪽 초원지대의 사람들은 양과 말을 키우는 유목생활을 영위하였다.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서역 남로에 있는 호탄, 니야, 누란 등의 오아시스 도시 및 서역북로, 천산북로 등

실크로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2002년 누란 소하묘지(小河墓地, 샤오허묘지)의 발견으로 이 지역에서 약 4,000년 전 유럽계의 인종이

밀 등을 재배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소개한다.

 

 

서역북도(西域北道)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천산산맥 남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하는 길로 혜초가 직접 지났던 길이기도 하다. 카규가르, 쿠차, 카라샤르, 투루판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반야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구절로 유명한 쿠마라지바는

4세기말 서역북도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소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의 모델이 되었던 현장 역시

7세기 중엽 불경을 구하기 위하여 이 길을 통하여 인도로 향하였다.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장군은 쿠차, 카라샤르, 카슈가르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8세기 여러 차례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 정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서역남도(西域南道)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맥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하는 길로

호탄, 케리야, 니야, 체르첸, 누란 등의 오아시스가 있다.

누란의 샤오허묘지(小河墓地)에는

기원전 2,000년 전 이곳에 전형적인 코카서스 백인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역남도의 호탄, 케리야, 미란 등에서는 서역 지방에 전파된 초기 불교의 사원건축이 많이 남아 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이이 선호했던 호탄의 옥은 이 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향하였고,

중국의 비단 역시 초기에는 이 길을 통하여 서쪽으로 향하였다.

 

천산북로(天山北路)

천산산맥 북쪽지방을 가리키며 동시에 천산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이닝, 우루무치, 하미 등의 오아시스를

동서로 연결하는 교통로를 가리키기도 한다.

천산산맥 북쪽과 알타이 산맥 사이에는 준가르 분지라고 하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이는 동쪽으로 몽골,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드넓은 스텝 지대의 일부로,

오래전부터 양과 말을 키우는 유목민의 활동무대였으며 실크로드에서 가장 먼저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실크로드 지역은 대부분 1년 중 강수량이 증발량보다 훨씬 적은 건조지대이다.

이 지역에서는 예부터 사막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사를 짓거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양과 말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 왔다. 건조지대의 가장 전형적인 삶의 형태인 오아시스 농경과 유목생활은 우리나라와 같이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생활과는 삶의 모습이 기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아시스의 농경과 유목만으로는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얻을 수 없었으므로

오아시스 사이에는 서로 부족한 물품을 교환하는 무역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왔다.

무역은 낙타 행렬을 이끌고 목숨을 걸면서 사막을 오갔던 대상(隊商)들에 의해 더욱 발달하였고

오아시스는 점차 대상무역을 위한 거점도시로서 발전하게 된다.

대상들은 부피가 작으면서도 가치가 높은 비단이나 보석류, 향신료 등을 운송하였고

이 길이 바로 ‘실크로드(비단길)’가 되었다.

   

 

◇ 유목민의 전통 - 금제 낙타

(B.C.3-A.D.3세기/ 금/ 2.2×2.8㎝/ 투루판 쟈오허고성/ 신쟝문물고고연구소)

 

 

◇ 유목민의 전통 - 괴수가 호랑이를 물고 있는 모양의 금장식

(B.C.2-1세기/ 금/ 5.7×8.4㎝/ 투루판 쟈오허고성/ 신쟝문물고고연구소)

 

 

 

비단은 서쪽으로

기원전 1세기경 비단을 처음 접한 로마인은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화려함에 매료되었다.

중국의 비단은 로마인들의 큰 인기를 끌었고 금과 똑같은 무게로 교환되었다.

비단의 직접 생산은 로마뿐만 아니라

비단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을 얻고자 했던 실크로드 지역 모든 도시들의 공통된 욕구였다.

중국 비단의 직조기술은 서역을 통해 서쪽으로 페르시아에 전파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중국 전통 비단 직조기술은 ‘한금(漢錦)’이라고 하는 날실(세로실)을 이용해 무늬를 넣는 경금(經錦)이었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에서는 씨실(가로실)을 이용해서 무늬를 넣는 위금(緯錦)을 발전시켰다.

페르시아의 직조 방식은 중국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무늬의 직조가 가능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위금 기법은 중국으로 전해졌고 ‘당금(唐錦)’이라 불리는 중국식 위금으로 발전하였다.

 

 

 

◇ 비단은 서쪽으로 - 우전국왕 공양도

(10세기/ 종이/ 301.2×145.5㎝/ 둔황 제98굴 동벽 남측/ 둔황연구원)

 

 

◇ 비단은 서쪽으로 - 명의(冥衣)

(2-5세기/ 상의 14×바지 11㎝/ 웨이리(1999)/ 신쟝문물고고연구소)

 

 

사막의 이동수단, 낙타

낙타는 사막의 환경에 잘 적응되어 실크로드 무역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동물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200㎏ 이상의 짐을 지고 하루에 30㎞를 걸을 수 있다.

72시간 물을 마시지 않고도 견딜 수 있으며, 한꺼번에 100ℓ를 마시기도 한다.

두껍고 넓적한 발바닥은 뜨거운 모래를 밟아도 견딜 수 있게 하고 모래 속으로 깊이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사막을 오가는 카라반은 규모가 작은 경우 낙타 20마리, 규모가 큰 경우 낙타 300마리가 무리를 이룬다.

보통 낙타의 ⅔에 상품을 싣고 ⅓에는 식량, 물, 일용품, 천막 등 여행의 필수품을 싣는다.

낙타가 걷는 속도는 시속 6㎞ 정도이다.

카라반은 보통 정오쯤에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에 숙영지를 출발하여

날이 저물 때까지 5-6시간을 행진하며 하루에 30㎞를 이동한다.

 

 

 

◇ 실크로드의 주역, 소그드상인들 - 낙타몰이 나무인형

(7세기/ 목조상에 채색/ 56.2㎝/ 투루판 아스타나/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 실크로드의 주역, 소그드상인들 - 삼채낙타

(7-10세기/ 도제/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당나라 때 만들어진 당삼채 낙타이다.

등에 봉이 하나 있는 낙타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주로 서식하고,

봉이 두 개 있는 낙타는 고비사막, 몽골과 알타이 지역 등 아시아 내륙에 분포하였다.

낙타는 사막을 건너는 실크로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 실크로드의 주역, 소그드상인들 - 파란 바탕에 새와 양이 서로 마주보는 문양의 비단

(7-10세기/ 비단/ 5×12㎝/ 투루판 아스타나(1972)/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오아시스의 삶

천산산맥이나 곤륜산맥의 눈이나 빙하가 녹은 물이 흘러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에는 오아시스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사막 한 가운데에서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카레즈’ 또는 ‘카나트’라고 불리는 터널식 지하수로가 발달하였다.

투루판에서 크게 발달한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물이

사막에서 증발하지 않도록 지하에 물길을 낸 것이었다.

아무리 크게 번영하였던 오아시스라고 하더라도 자연재해 또는 인위적인 요인에 의해

관개시설이 유지되지 못하였을 경우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오아시스에서의 삶 - 말을 탄 무사 흙인형

(8세기/ 소조상에 채색/ 37㎝/ 투루판 아스타나/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 오아시스에서의 삶 - 봉수형호

(7-8세기/ 도제/ 27×16.5㎝/ 투루판 카라호자/ 국립중앙박물관)

 

 

◇ 오아시스에서의 삶 - 곡예사 흙인형

(7-10세기/ 진흙/ 11.2㎝/ 투루판 아스타나/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현세의 삶이 이어지다 - 아스타나 고분 

현재의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있는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3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지하에 조성된 수백 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을 뜻한다. 죽어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 듯,

무덤의 사방 벽면에는 자신들이 생전에 누리고자 했던 삶을 그려 놓았다.

아스타나 고분 가운데에는 중국 중원에서의 삶을 동경하였던 사람들의 무덤이 많이 있다.

이들의 무덤에서는 중원에서의 삶을 표현한 그림들이 출토된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각종 인종의 인형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생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표현하기 위하여 대량의 인형을 부장했던 중국 장례문화의 전통과 일치한다.

 

  

 

◇ 소하묘지 - 4000년 전의 기억, 모자를 쓴 해골

(청동시대/ 뼈/ 누란 공작하 고묘(샤오허묘小河墓地 근처, 1979)/ 신쟝문물고고연구소)

 

 

◇ 아트타나고분 - 현세의 삶이 이어지다, 격구를 하는 흙인형

(7-10세기/ 점토/ 26.5㎝/ 투루판 아스타나(1972)/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 아스타나고분 - 현세의 삶이 이어지다, 십이지 인형 돼지

(8세기/ 점토/ 77㎝/ 투루판 아스타나/ 신쟝위구르자치구박물관)

 

 

문명의 흔적, 기록이 남다 

19세기말 서역북도의 쿠차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바우어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의 발견 이후 서양의 탐험가들은 실크로드의 옛기록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둔황문서, 투루판문서 등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실크로드 지역은 건조한 기후의 덕택으로 종이 또는 나무에 새겨진 기록들이 많이 남을 수 있었다.

동서문명이 끊임없이 교류하는 지역 특성상 이 지역의 기록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자는 물론이고

카로슈티문자, 소그드문자, 브라흐미 문자, 위구르문자 등 다양한 문자가 사용되었다.

 

■브라흐미문자 - 카로슈티문자를 제외한 모든 인도문자의 원형을 이루는 문자이다.

                        기원전 7세기 아람문자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카로슈티문자 - 엄격한 문법 규범에 따르는 산스크리트어에 대해 속어에 해당하는 프라크리트어를 기록한

                        문자이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비문에 사용되었다.

■소그드문자 - 6세기경 아람문자로부터 생겨난 소그드문자는 7-8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 있어

                     유력한 국제공통어로서 동서교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종이 우측에서 왼쪽을 향해 쓴다.

■티베트문자 - 7세기 인도의 굽타문자를 모방하여 만든 표음문자이다.

                     4자의 모음, 30자의 자음문자로 되어 있다.

■위구르문자 - 8세기경 위구르족이 소그드문자를 모방하여 만든 표음문자이다.

                     4자의 모음문자, 14자의 자음문자로 되어 있다.

 

◇ 문명의 흔적, 기록 - 소그디아나 문자로 된 마니교 편지

(9세기경/ 종이/ 268×26㎝/ 투루판 베제클리크/ 투루판박물관)

 

 

불교는 동쪽으로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는 간다라 지역을 거쳐 동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로 전파되었다.

서역지방에 전파된 불교문화는 우선 서역남도 지역에서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건축의 형태로 발달했다.

이후 불교문화의 중심이 점차 서역북도로 옮겨가며

평지 사원건축과 더불어 석굴사원이 조영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에서는 실크로드의 각지에서 석굴사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불교미술이 조영되기 시작하여 6-7세기경에는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쿠차의 키질석굴,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둔황의 천불동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석굴사원의 형태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장엄된 벽화 및 조각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 불교는 동쪽으로, 불상벽화

(3-5세기/ 흙벽에 채색/ 39×43㎝/ 니야/ 신쟝문물고고연구소)

 

 

 

 

 3부 - 둔황 막고굴(莫高窟)과 『왕오천축국전』

 

둔황은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서역북도와 사막 남쪽의 서역남도가 동쪽에서 서로 만나는 곳이다.

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고, 서역이 시작하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오래 전부터 크게 번영을 누렸고, 그러한 번영의 결과물이 바로 둔황 막고굴(莫高窟)이다.

그러한 번영의 상징이 바로 명사산 기슭의 둔황 천불동이다.

둔황에는 막고굴 이외에도 서천불동, 유림굴(楡林屈), 동천불동 등 여러 석굴사원이 왕성하게 개착되었다.

둔황을 오가던 대상들은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이들 석굴을 조성하고 각종 불화를 그려 놓았다.

 

1900년 둔황 천불동 17호굴에서 발견된 둔황문서는

둔황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등 중앙아시아의 탐험가들이 둔황문서를 다투어 자신의 나라로 가져갔다.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왕오천축국전』역시

펠리오가 가져간 둔황 문서 가운데에서 발견되었다.

 

이번 특별전시는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던 둔황의 석굴과 벽화 및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혜초의 여행을 설명한다.

중국 서쪽 영토의 끝이자 서역이 시작되는 관문으로서 번영을 누린

둔황 막고굴의 유물 16점, 복제품 20점(벽화 17점 포함)이 소개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둔황 석굴 모형 2점(17호굴, 275호굴)을 통째로 가져다 전시하여

둔황 막고굴의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세계를 현장에서와 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가운데 17호굴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뿐 아니라 둔황문서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던

이른바 장경동(藏經洞)으로서 둔황학 성립과 관련하여 의의가 큰 곳이다.

 

세계 최초로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왕오천축국전』은

한국인이 작성한 최초의 해외여행기로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중 하나로 손꼽히며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 풍습 등을 알려주는 세계의 유일한 기록으로 그 가치가 높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중천축국(중인도) 마하보디 대탑 앞을 지나는 혜초의 모습.

주식회사 드림한스와 디지털 복원전문가 박진호씨가 복식 고증을 거쳐 그린 상상도이다. 학고재 제공

 

 1900년 수백 년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의 문이 열렸다.

당시 막고굴에 머물던 도사(道士) 왕원록(王圓簏)은

우연히 제16굴 안에서 현재 ‘17번’이라는 번호를 붙인 석실을 발견하였다.

작은 석실 안에는 3m가 넘는 높이까지 수많은 두루마리가 쌓여 있었다.

왕원록은 이 같은 발견을 관청에 보고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운반비 부족의 이유로 막고굴에 그대로 두라는 지시만을 받았다.

 

 

왕원록의 발견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다녔던 유럽탐험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07년 둔황 석굴을 보기 위해 둔황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왕원록이 석굴에서 많은 고문서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국의 오럴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은

중국의 유명한 구법승(求法僧) 현장(玄奘)에 대한 이야기로 왕도사의 환심을 산 후

수천 점의 자료를 헐값에 바꾸어 영국으로 가져갔다.

 

다음해인 1908년 프랑스의 젊은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둔황을 찾았고,

3주 동안 석실 안에서 문서를 검토한 후 수천 점을 왕도사로부터 사들였다.

중국 청 정부는 1910년에서야 1/4도 남지 않은 나머지 자료를 북경으로 옮겨오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왕원록은 모든 유물을 북경으로 보내지 않았고,

1911-1912년에 이곳을 방문한 일본 오타니(大谷) 탐험대의 타치바나 추이초(?瑞超, 1890-1968),

1914-1915년에 이곳에 온 러시아의 세르게이 올덴부르크(Sergei F. Oldenburg, 1863-1934) 등에게

둔황 유물을 팔아 넘겼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7호굴(장경동)의 발견 문서와 불화는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되었다.

현재 둔황의 자료는 중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의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일본의 동경박물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장경동 문서의 수량은 확인된 것만 4만점이 넘으며,

연대가 있는 문서 중 가장 이른 것은 4세기, 가장 늦은 것은 12세기에 해당한다.

문서의 80% 이상은 한문문서이며, 90%는 불교관련 문헌이다.

이외에도 호탄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로 된 자료가 포함되어 있으며,

유교 경서(經書)와 도교, 마니교, 경교(景敎) 전적, 사원 관련문서, 관문서(官文書) 등이 전한다.

이러한 자료는 둔황의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727년 11월 상순 혜초는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카라샤르에 도착하였다.

인도를 향해 중국을 출발한 지 4년이 지난 후였다. 바다를 통하여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는다.

세로 28.5㎝ 가로 42㎝인 종이 9장을 이어 붙여 한 권의 두루마리형태로 기록한 지역은 모두 40여 곳.

8세기 초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그는 한 권의 책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앞뒤가 훼손된 한 권 분량의 두루마리 필사본인 『왕오천축국전』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

각각 가로 29.35㎝이며 두루마리 총 길이는 358㎝이다. 남아있는 글자는 총 227행, 5893자이다.

 

하지만 원문이 3분의 1 이상 없어진 상태여서 책 성격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끊이지 않아서

이 현존본이 원본을 간추린 절략본(節略本)인지, 원본을 베껴 쓴 사록본(寫錄本)인지, 초고본(草稿本)인지

하는 성격 문제는 아직 논란이 되고 있다.

 

 

1908년 8월2일 둔황에 도착한 펠리오는 왕원록의 허가를 얻어

어두운 암굴에서 촛불에 의지하여 3주에 걸친 문서 선별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양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펠리오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였고,

그렇게 선택한 6,000여 개의 둔황 문서를 백은 오백 냥이라는 헐값에 차지할 수 있었다.

사경류 1천500여 권, 24상자 등을 사들여 프랑스로 보냈으며

이듬해 5월21일 그중 일부 고서를 중국학자들에게 공개하였고,

1909년 12월10일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왕오천축국전』 발견을 공개했다.

 

이 기행문의 저자 혜초가 신라출신 승려라는 주장은

1915년 일본의 불교학자 다카구스 준지로(高南順次郞)가 '대일본불교전서'에서 고증하면서

통설로 굳어졌다.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우리말 해제를 붙여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펠리오가 처음 두루마리 상태의 이 문서를 발견하였을 당시 앞뒤가 떨어져 나가

책의 명칭이나 지은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예전에 읽었던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인용되었던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기억하고, 이 문서가 바로『왕오천축국전』이라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펠리오가 단 한차례의 탐험으로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은

그가 중앙아시아 탐험 이전 터득한 동양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둔황 문서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던 데 있었다.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인도 출신 승려에게서 불교를 배운 혜초는

723년 광저우(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고

727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왕오천축국전』은 그가 방문한 40여 개 나라와 지역의 사정,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왕성의 위치와 규모, 언어, 습속, 종교 특히 불교의 성행 정도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오언시도 5편 실려 있어 서정적 여행기로 평가되고 있다.

 

727년 11월 상순 혜초는 당나라 안서도호부가 있는 카라샤르에 도착하였다.

인도를 향해 중국을 출발한 지 4년이 지난 후였다.

바다를 통하여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그가 직접 지났거나 들은 것을 기록한 지역은 모두 40여 곳이었다.

8세기초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그는 한 권의 책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혜초가 남천축으로 가던 도중 쓴 오언시는 그가 서역을 순례하면서

고향 계림(鷄林, 신라의 다른 이름)을 그리워한 객수(客愁)가 잘 드러나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月夜瞻鄕路)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浮雲颯颯歸)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緘書忝去便)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風急不聽廻)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我國天岸北)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他邦地角西)

 

일남(日男, 베트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日南無有雁)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誰爲向林飛)

 

 

장경동 폐쇄의 수수께끼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굴(장경동)의 입구는 16호굴 오른쪽에 벽화로 감추어져 있었다.

또한 발견된 문서의 하한연대로 보아 폐쇄된 시기는 11세기 이후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17호굴의 입구를 폐쇄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려 넣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피난설 - 서하 또는 이슬람 등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불경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는 주장이다.

■폐기설 - 둔황문서는 당시 이미 사용가치를 잃었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장경동에는 완전한 불경이나 진귀한 물품이 거의 없고,

               앞뒤가 결락된 단편들이나 기한이 지난 문서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서고개조설 - 11세기 이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불경이 보급되면서

                    사용이 불편해진 두루마리식 불경들과 잡다한 물건을 석굴 안으로 넣어 봉했다는 주장이다.

 

 

 

 

<왕오천축국전>

 

'세상은 바다/ 돛 올리면 집 밖은 전부 길/ 닻 내리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인 것을…

고원의 모래 알맹이들이여/ 시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느냐…

물 한 모금의 자비와/ 짚신 한 켤레의 보시/ 자,또 한 끼 얻어먹었으니 길 떠나자.'

(이승하 '고원에 바람 불다 - 혜초의 길 1')

 

신라 스님 혜초(704~787)는 1200여 년 전 광막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요즘으로 치면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다. 그곳을 둘러보며 종교와 풍속, 문화 등을 차근차근 기록했다.

승려 3000여명이 매일 공양미를 15석이나 소비하는 큰 사원,

절을 짓는데 코끼리와 아내까지 시주하는 독실한 신자, 나체로 생활하는 사람들,

여러 형제가 한 사람의 아내와 같이 사는 모습 등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 있다.

5개의 천축국을 다닌 기록, 즉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야기다.

 

한국인이 쓴 첫 해외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나온 시기는 727년.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7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13세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14세기)와 함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중 하나로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여행기로 꼽힌다.

책은 한 권의 두루마리 필사본이다. 총 227행에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은 5897자.

가로 42㎝,세로 28.5㎝ 크기의 종이 9장을 붙여 만들었다. 총 길이는 358㎝다.

 

이 귀한 여행기는 오랜 세월 둔황 막고굴의 장경동에 다른 문서들과 함께 묻혀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폴 펠리오가 동굴을 지키던 수도자로부터 사들인 후

이듬해 공개해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혜초가 신라인이란 것은 1915년 일본 학자 다카구스 준지로가 '대일본불교전서'에서 고증하면서

통설로 굳어졌다.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우리말 해제를 붙여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하지만 원문이 3분의 1 이상 없어진 상태여서 책 성격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왕오천축국전』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실크로드와 둔황전'에 전시된다.

무려 1283년 만의 귀향이다. 젊은 시절 미지의 땅을 거침없이 떠돌았던 혜초의 구도정신과 개척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빌려오는 것이지만

이렇게나마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만나게 된다니 반갑다.

- 이정환 논설위원

- 한국경제, 천자칼럼 2010-06-30

 

 

 

사막의 대화랑, 둔황(敦煌) 

둔황은 중국의 중원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잇는 하서회랑(河西回廊)

즉 중국 간쑤성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둔황은 동서교역상의 생명선이었으며 서역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가 만나는 관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낙양과 장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둔황을 거쳐 서쪽의 누란(樓蘭)에 도달한 후

서역북도와 서역남도로 나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났다.

 

한나라 이후에는 둔황에서 북진한 후 하미, 투루판을 거쳐 다시 서역북도로 나아가는 루트가

주 교통로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둔황은 실크로드를 내왕하는 대상무역으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서역의 금은화폐가 시장을 지배하였다.

동서교통선상의 요충에 위치한 둔황에는 4-5세기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실크로드 무역의 거대한 이익을 바탕으로, 남측 교외에 인도의 석굴사원 양식을 모방한

무수한 석굴사원 즉 천불동이 건립되었다.

둔황 천불동의 내부에 장식된 수많은 벽화와 조각에는 동서문화의 영향이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다.

 

 

둔황 천불동 벽화

 

둔황 천불동에서 가장 특징적인 예술작품은 벽화이다.

석굴에는 현재 45,000㎡의 벽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벽 위의 도서관’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 내용이 아주 풍부하다.

 

■불상화 - 부처와 보살 및 불교의 각종 신 등을 그린 그림.

               부처와 보살은 원래 남성상이었지만 중국에 전해진 후 여성적으로 표현되었으며

               특히 보살은 점차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불전고사화 -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적을 그린 그림.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몸으로 들어가는 태몽 그림 등이 있다.

■본생고사화 - 석가모니의 전생을 그린 그림. 살타(薩埵)가 호랑이에게 스스로 먹히는 그림 등이 있다.

■변상화 - 불경이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

              유마거사가 문병을 온 문수보살과 논쟁하는 장면을 그린 유마힐경변(維摩詰經變) 등

■불교사적화 - 불교의 역사인물, 사건 등을 그린 그림으로 장건출사서역도 등

■장식도안 - 천정 등 동굴의 건축물 장식으로서 그린 그림. 

 

 

◇ 사막의 대화랑, 둔황 - 불상(북제)

(5-6세기/ 납유리/ 92㎝/ 둔황 제259굴 북벽 동단/ 둔황연구원)

 

◇ 막고굴 제17동굴 복제(모형)

(7세기/ 종이/ 275×473×523㎝ / 둔황연구원)

 

 

 

 

 

 4부 -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서역에서 전래된 각종 문물은

둔황에서 서쪽으로 난주를 거쳐 간쑤 및 닝샤 지역 그리고 서안(장안)에 집결되었다.

하지만 장안이 실크로드의 종착점은 아니었다.

장안에 모였던 각종 문물은 보다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에까지 이르렀다.

 

둔황에서 난주까지는 남쪽으로 치렌산맥(祁連山脈), 북쪽으로는 고비사막이 1,000㎞ 정도 펼쳐져 있는데,

이를 하서주랑(河西走廊=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본 학자들이 일컬음)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중국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흉노 등 유목민 전통도 강하게 남아있는 독특한 성격의 문물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청동의장행렬은 중국적인 전통이지만, 매머리장식은 흉노 등 유목민 사이에 유행하였던 것이다.

감숙성 북쪽에 있는 닝샤(寧夏)에서 발견된 동로마 금화는

이 지역에서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하서회랑, 장안으로 가는 길 - 뿔이 하나 달린 동물

(3-5세기/ 구리/ 40.2×70.2×11.1㎝/ 간쑤 쥬촨(감숙 주천, 1958)/ 간쑤성박물관)

 

 

◇ 하서회랑, 장안으로 가는 길(161-168) - 한나라 시대의 행차 의장 대열 중 청동마차 행렬

(B.C 3-A.D. 3세기/ 구리/ 간쑤 우웨이시(감숙성 무위시, 武威市) 레이타이 한묘(1969)/ 간쑤박물관)

 

 

◇ 동로마 금화

(6세기/ 지름 1.5㎝/ 감숙성 북쪽에 있는 닝샤(寧夏) 고원(固原)에서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