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임진왜란 당시의 한일(韓日) 군함

Gijuzzang Dream 2010. 12. 2. 10:48

 

 

 

 

 

 임진왜란 당시의 韓日 군함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맹활약한 이들이 바로 조선 수군이었다.

그 조선 수군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탁월했던 군인이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할지라도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같은 이순신의 탁월한 능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했던 존재 중에 하나가 바로 판옥선(板屋船)이었다.

 

 

 

조선의 대표 군함 판옥선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해진도] 속의 판옥선 그림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가장 많이 보유했을 때도 그 척수는 7척 내외에 불과했지만,

판옥선의 경우 임진왜란 2년차인 1593년 보유량이 약 200여 척에 육박했을 정도로 대량 운용한 군함이었다.

거북선의 독특한 겉모습 때문에 판옥선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면이 있지만,

전체 조선 수군 전력에서 판옥선이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주력 군함이었던 맹선에 갑판 한 층을 더 만들어 3층으로 만든 배다.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韓船)의 1층 주갑판(Main Deck)을 포판이라고 하는데,

포판 위에 ‘상장’이라 부르는 2층 갑판(O1 Deck)을 둔 배가 바로 판옥선이다.

포판 아래에도 병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선실이 있으므로, 선실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3층이 된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유리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화력전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판옥선


선체 길이가 20~30m 정도였던 판옥선은

임란 해전에 참전한 한ㆍ중ㆍ일 군함 중 크기가 가장 큰 편에 속한데다가 선체도 높은 덕택에

일본군이 그들의 장기인 승선전투전술(Boarding Tactics)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거뒀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은 "판옥선은 마치 성곽과 같다"고 그 성능을 격찬했다.

 

전근대 해전에서는 상대방 군함으로 건너가 마치 지상에서처럼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활과 화약무기 같은 원거리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했지만,

칼과 창 같은 단병무기를 운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서툴렀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고 조선군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승선전투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조선의 장기인 활과 대구경 화약무기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함이 필요했다.

판옥선은 그 같은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군함이었고,

그 같은 성능이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결합했을 때의 결과가 바로 임란 해전의 승리였다.

 

      (좌)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중인 판옥선 모형 (우)상장갑판 부분 확대

 

 

판옥선의 저력은 소나무에서


 

판옥선은 한국 전통 선박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도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

판옥선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 배는 기본적으로 주재료로 소나무를 사용한다.

배 앞부분의 이물비우 등 높은 강도가 필요한 부분은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참나무 계통의 나무를 사용했지만

배 밑바닥의 저판, 좌우 측면의 삼판, 주갑판인 포판 등 선체의 대부분은 소나무를 사용했다.

 

한국의 소나무는 평균적으로 옹이가 많고 굽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불규칙적인 목질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배를 만들 때 판재를 두껍게 가공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 전통 배들은 두께 12~18cm의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고

최종 가공도 다소 투박한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소나무 중 선박 제조에 많이 사용한 적송의 굴곡강도는 526~977kg/㎠에 달하고,

브리넬 경도도 2.20~5.80에 달해 일본 전통선박에 주로 사용하는 삼나무나 전나무에 비해

기본적으로 강도와 내구성이 우수했다. 이러한 선박용 목재의 특성 차이는

 함포전과 우발적 충돌에서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군함에 비해 우위를 누릴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한국 환경에 특화된 군함, 판옥선


판옥선을 비롯한 한선은 함수 모양이 평면이었다. 이 때문에 선체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또한 판옥선은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인 탓에

흘수가 작아 배가 직진할 수 있는 능력(Directional Stability)이 떨어진다.

 

이런 단점 때문에 평저선은 연안이나 내륙 하천에서 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에서 이 같은 평저선 구조는 큰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배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은 썰물 때 갯벌 위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평저선은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 앉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배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에 비해 평저선은 원시적인 배로 간주된다.

하지만, 평저선은 우리나라의 해양환경에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구조였기 때문에

그 같은 특성은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됐다.


 

 

일본의 대표 군함 세키부네

 

       일본 도쿄의 배 과학관(船の科學館)에 전시된 세키부네 모형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군함에는 아다케, 세키부네, 고바야 등 세 종류가 있었다.

이 중에서 제일 큰 군함은 아다케였지만 임란 초반만 해도 비중이 크지 않았고,

고바야는 30여 명 정도의 인원만 탑승하는 소형 선박이었다.

때문에  임진왜란 초반에 집중적으로 벌어진 해전에 주로 활약한 일본 군함은 세키부네(關船)였다. 

세키부네는 일본에서 흔히 야마토형 군선(大和型 軍船)의 대표적 존재로 간주할 만큼

일본인의 자부심이 서려 있는 배다.

 

세키부네를 비롯한 일본 전통 선박은 소나무에 비해 가공하기 쉬운 삼나무나 전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그 덕에 세키부네는 매우 얇은 판재를 사용해 정밀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강도 면에서 삼나무나 전나무는 소나무에 비해 약했다.

가공하기 쉬운 덕에 얇은 판재를 쓴 일본 배는 약해지고,

가공하기 힘든 탓에 두꺼운 판재를 쓴 판옥선은 강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또한 세키부네의 배 밑바닥은 평저선과 첨저선의 중간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형태의 배 밑바닥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한반도 서해와 남해에서 작전할 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세키부네에도 부분적인 2층 갑판이 있긴 했지만 선체 전체 높이가 판옥선에 비해 낮고 선체 크기도 작아

기본적으로 인원ㆍ무기 탑재 능력이 판옥선에 두드러지게 열세였다.

 

 

임란 40여 년 전 판옥선을 개발한 뜻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이 최소 120명 이상의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탑승시킬 수 있었고,

임란 이후 조선 후가의 판옥선은 200여명에 가까운 사람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노가 40개 정도인 세키부네에는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 40명과, 조총병 20명을 포함해 70~80명이 탑승했다.

 

또한 판옥선이 대포에 해당하는 지자ㆍ현자ㆍ별황자총통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데 비해,

기껏해야 1~2문의 대포만 탑재하고 주로 조총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세키부네는

화력 면에서도 판옥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조선왕조가 임진왜란 전 200여 년 동안 전쟁을 잊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외침을 걱정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고,

그렇게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부족하나마 국방의 주춧돌을 놓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불과 40여 년 전 무렵인 1555년을 전후해 판옥선이 개발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임란 해전 승리는 이미 전쟁 시작 40여 년 전 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 김병륜 / 국방일보 취재기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 201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