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덕수궁 돌담길

Gijuzzang Dream 2010. 12. 1. 19:42

 

 

 

 

 

 

 덕수궁의 돌담길

 

 

 

한옥과 돌담

 

전통 한옥의 외곽을 감싸는 담은 여러 종류가 있다.

시골 초가에서 흔히 보이던 대나 갈대, 싸리나무 등으로 엮은 바자울에서부터

궁궐의 돌담에 이르기까지, 건물의 격식이나 용도, 주변 풍광과의 조화, 해당 지역 건축자재의 여건

등이 고려된 많은 담이 있었다.

돌담이라고 해서 똑같은 돌담이 아니다. 돌담도 격식과 모양이 제 각각이다.

‘고향의 물레방아’를 찾아가기 위해 돌담길 돌아설 때의 돌담길은 잡석을 차곡차곡 쌓은 담이었고,

첫사랑과 거닐던 ‘덕수궁의 돌담길’은 잘 다듬어진 사고석[四塊石, 입방체의 네모진 돌] 담장이었다.

 

고궁의 돌담길을 생각해보면 한옥의 담치고는 꽤 높고 위압적인 담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궁궐이라는 것이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는 왕조국가의 궁궐도 아니고 주변 고층 건물과 시각적으로 비교가 되므로

의식적으로 감상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위압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고궁 주변이라 비교적 한적하면서도, 높다란 돌담이 어느 정도 시야를 가려준 덕택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은밀한 맛이 있는 돌담길은 연인들에게 좋은 데이트 코스가 될 뿐이다.

고궁의 돌담길 중에서도 단연 덕수궁 돌담길이 돋보인다.

서울시의 걷고싶은 길 만들기 사업 중에서도 대한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경향신문사 앞으로 이어지는 정동길이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다운 길이다.

 

 

 

덕수궁도 없었고, 돌담길도 없었다?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1970년대의 덕수궁 돌담길은 대한문 앞에서 미대사관저 앞을 거쳐

구세군본관과 덕수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꽤 긴 길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미국 대사관에 대한 테러 공격이 증가하면서

주한 미국대사관저에 대한 경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덕택에 미국 대사관저 앞에서 구세군본관까지는 항상 전투경찰이 경계를 서고 있으니

더 이상 데이트할 돌담길이 되기는 글렀다.

하루빨리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사람들이 평화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덕수궁 돌담길을 마음 편하게 걷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검문하는 경찰들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된다 해도 덕수궁 돌담길의 슬픈 사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본래 돌담길이 없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돌담길이 없었다 함은 이곳이 바로 덕수궁터였다는 말이다.

본래 덕수궁은 현재의 조선일보미술관, 구세군본관, 덕수초등학교, 예원학교, 옛 경기여고 부지 등을

포괄하는 총 40,626평에 이르는 궁궐이었다.

지금 덕수궁이 모두 18,635평이니 원래는 퍽이나 넓은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 없었던 것은 돌담길만이 아니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원래의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사용하다가 인조 이후 폐지되었던 궁궐이었다.

 

명성황후 마저 시해하는 일본의 위협을 피해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에서 아라사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였다가

환궁하기 위해서 새로 선택한 궁궐이 바로 경운궁이었다.

바로 이 경운궁에 계시면서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였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대한제국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범상히 지나갈 궁궐이 아니다.

 

 

덕수궁도 생기고, 돌담길도 생겼다!

 

 

본래 덕수궁이란 우리가 경복궁이니 창덕궁을 부르듯이 부르는 대궐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상왕(上王)이 사시는 집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다.

가령 조선초기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물러나서 사시던 곳을

덕수궁이라고 불렀다.

정종 때는 한양에서 개성으로 환도했었는데 개성에서 상왕인 태조가 사는 곳도 덕수궁이라고 불렀고,

태종 때 다시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자 한양에서 상왕인 태조가 사는 곳도 덕수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개성에 있는 정궁인 수창궁은 개성에만 있고, 한양에 있는 정궁인 경복궁은 한양에만 있다.

 

다시 말해서 덕수궁은 정식 궁궐에 대한 호칭이 아니다.

그럼 어쩌다가 대한제국의 산실인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되었을까?

그것은 1907년 이른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하여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어 태황제가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경운궁에서 새로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태황제의 거처 즉 덕수궁을 안국동쪽에 새로 조성할 계획도 세워보았지만 헛일이었다.

일제의 의도에 따라 순종은 창덕궁으로 가고 태황제인 고종은 그냥 경운궁에 머물게 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 되었다.
경운궁이 비록 덕수궁으로 격하되었지만 고종 황제가 살아 계시는 동안 그 울타리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1919년 고종 황제는 독살되었다.

민족적 울분은 3.1운동으로, 독립투쟁으로 분출되었지만 독립은 오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열기가 차츰 식어가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덕수궁을

일제는 본격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하였다.

가령 통의동에서 소격동에 이르는 경복궁 관통도로를 개설하여

교통의 흐름을 원활히 하겠다는 발상이 가능할까?

런데 일제는 그런 식의 발상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실행에 옮겼다.

즉 일제는 덕수궁 관통도로를 1922년에 개설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미대사관저에서 덕수초등학교에 이르는 도로였다.

그리고 덕수궁터에 경성제일여고, 경성방송국 등을 세워 덕수궁을 지금처럼 옹색한 궁으로 만들었다.


없어진 돌담, 되살아난 돌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덕수궁을 일제가 그토록 유린하였지만 해방 후 우리들은 이렇게 잘 보존하여 소중하게 가꾸고 있다라는 해피엔딩의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덕수궁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대한문이 있는 동쪽 돌담 차례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 덕수궁의 돌담을 철거하고 그 대신 밖에서도 볼 수 있는 투시형 담장을 만들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1959년 1,970만환의 예산까지 책정되었다.

그러나 반대여론 때문인 듯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1960년 4.19 이후 민주당 정권 하에서 덕수궁 돌담 철거는 다시 추진되어 새로 예산이 책정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역시 이런 일에 대한 추진력은 군사정권이 최고였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시민들의 눈에 확 뜨이는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그 중 하나가 덕수궁 돌담을 허물고 투시형 담장을 세우는 것이었다.

쏟아지는 철거 반대 여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1961년 10월 15일 착공하여

두 달간의 전격적인 공사 끝에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민들에게 덕수궁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투시형 담장을 선사(?)하였다.

 

그들에게 덕수궁은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후손들과 함께 향유해야 될 문화재가 아니라,

다양한 공원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되는 대한제국의 유적이 아니라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도시경관 이론이었던 담장허물기운동의 좋은 대상지였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대한문에서 태평로파출소 사이 140m 구간이 투시형 담장으로 변했고,

그나마 돌담이 있던 자리에서 6m 정도 덕수궁 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덕수궁의 돌담이 원래대로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라'는 글을 언젠가는 꼭 쓰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덕수궁 동쪽 담장에 대한 수난이 계속 이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969년 5월 시청앞에서 세종로간 도로확장 계획에 따라 덕수궁 담장은 또다시 16m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투명담장은 돌담으로 복원되었다.

그런데 이때 문화재 위원회의 반발로 대한문은 이전시키지 못하였다.

담장은 뒤로 물러나고 대한문은 원위치를 고수하다보니

결국 대한문은 거리에 나앉은 형상이 되고 말았다. 담장과 마당을 잃어린 정문.

대한문의 어쩡쩡한 모습이 1년 정도 이어지다가 결국 1970년 8월 원래 위치에서 27m 후퇴한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왔다. 대한문이 원래 있던 자리는 도로 위에 표시한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아스팔트 도로 포장을 몇 번 더 하다보니 이제는 대한문의 본래 위치가 어디였는지

덕수궁 담의 원래 위치가 어디였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얼떨결에 급히 옮긴 대한문이 원래의 격식도 갖추지 못한 증거품인 양,

원래는 대한문 입구 계단에 있었어야 할 서수(瑞獸)가 자기 자리도 찾지 못한 채

애매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대한문 앞 광장, 시청 앞 광장

대한문이 처음부터 경운궁(덕수궁)의 정문은 아니었다.

1897년 경운궁을 영건할 때 정문은

현재 서울시청 별관 후생동 맞은편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러나 인화문으로 출입하자니 길이 너무 좁아서 대궐의 정문으로는 불편하였다.

그러다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대대적인 중건을 하게 되었고

1906년에는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여 정문으로 사용하면서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게 되었다.
대한문의 ‘한(漢)’은 ‘운한(雲漢)’ 혹은 ‘소한’ 즉 하늘이라는 뜻이다.

결국 대한문은 ‘큰 하늘 문’이라는 뜻이다.

 

경운궁 동쪽으로는 대한제국기에 방사형으로 도로를 개설하고 비교적 넓은 공간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곳이었다. 그런만큼 그곳은 민의를 수렴하기 좋은 장소였다.

바로 그곳으로 경운궁의 정문을 낸 것은

백성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대한제국의 진전된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문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쉽게 모일 수 있게 한 것의 효과가

고종 황제가 승하하셨을 때 크게 드러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1919년 일제의 의하여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 소식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조선의 민중들이 모여든 곳이 바로 대한문 앞이었다.

3.1운동 중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던 곳 중의 하나도 당연히 대한문 앞이었다.
1987년의 6월 항쟁 때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때 시청 앞 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었다.

그러나 결국 따지고 보면 민족적 염원을 담는 거대한 사람의 물결의 시작은

대한제국기, 3.1운동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우리 시에서는 교통광장에 머물러 있는 시청앞 광장을

시민들이 항상 모일 수 있는 광장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새로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본래 사람들이 모이던 대한제국 이래의 광장을 회복하는 것이다.
광장의 회복이 단순한 공간 확보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방치하고 있던 역사유적과 역사의식의 회복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바램은 아닐 것이다.

- 연갑수(서울시 문화재과 문화재관리팀장)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 [재발견! 서울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