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구세군 본관(救世軍本館, 중앙회관)

Gijuzzang Dream 2010. 12. 1. 19:14

 

 

 

 

 

 

 ‘구세군 본관(중앙회관)’ - 이웃사랑의 상징 담겨

 

 

 


 

구세군(Salvation Army)의 역사성과 상징성 담은 대표적인 건물

 

 

해마다 12월이면,

서울의 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은은한 종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것은

바로 구세군의 자선남비이다. 

 

덕수궁에 인접한 구세군 본관 중앙회관은 중구 정동 1-23호에 위치하며

구세군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대표적인 건물.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8년인데,

영국에서 허가두(본명 Robert Hoggard)  해외선교사관 일행이 서울에서 야외집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건물은 1926년 착공하여 1928년 구세군 초대대장 브램웰 부스의 70세 생일을 기념해 완공된

건물로서 구세군의 역사성을 지닌 대표적인 건물이며,

영국 런던의 클라톤 콩그레스 홀(Clapton Congress Hall)을 모델로

신고전주의 양식을 충분히 반영하여 지었다고 한다.

 

건축 초기부터 1985년까지 구세군의 본부이자 새로운 교역자를 양성하는 구세군 사관학교로 사용하였고,

1955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구세군교회의 본부(구세군 대한본영) 건물로 함께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수난과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 구세군의 중흥기인 근대화 과정까지

한국구세군의 혼과 정신이 뿌리깊게 담겨 있는 건물일 뿐만 아니라

구세군의 사관 양성과 자선사업의 본거지가 된 건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본관 건물은 연면적 510평의 고전적인 형태의 건물로

현관의 4개의 기둥과 지붕이 당당한 인상을 주며,

현관 쪽의 바닥은 물갈기 슬레브이나 복도 및 계단 난간은 목조로 되어 있다.

벽돌조의 외관과 중앙 현관의 4개의 기둥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복잡한 장식이 배재된 외관은 단순하지만 당당한 인상을 주며,

좌 · 우 대칭의 균형감이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이 다소 커 보이는 것은 2층 예배공간의 층고가 높고

건물의 한쪽으로부터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도로의 영향.

1층은 사무실, 2층은 집회 및 예배당이고 목조 트러스가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건물은 구세군 활동 일부라는 종교적 역사성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으로서 좌우대칭의 안정된 외관이 잘 보존되어 근대건축의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와

그의 아내인 캐서린 부스가 창시한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또는 군우라 부르는 등 군대식의 조직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들에게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윌리엄 부스의 사상에 따라

구세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와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사회봉사 모두를 실천하고 있다.

 

 

구세군 본관 건물은 2002년 3월 5일자로 서울특별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서울시 문화관광국은

"구세군 역사의 보존가치가 있고 근대 건축물로서 건축물 자체의 보존이 필요하다"고 지정이유를 밝히고

"구세군 본관은 현관의 열주와 케노피가 당당하고 목조 트러스트가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구세군 활동의 종교적 역사와 근대 유서깊은 정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구세군 본관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주변 50m 이내 건축물을 규제할 수 있게 되고,

내부구조를 변경시 문화재위원회의 허가를 거쳐야 하며, 상속세 및 각종 지방세 등을 면제받게 된다.

 

 

한편, 덕수초등학교 옆에 2004년 개관한  '구세군박물관'은 구세군이 한국에 선교한 지 100주년을 준비하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산재해 있던 선교적인 문화유산들과 기독교적인 관련자료와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아주 작은 규모의 박물관은 다양한 유물, 책,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낙소(成樂紹) 사관이 기록한 구세군교회의 규칙과 교훈을 기록한 서적,

구세군 신문, 선교 초기의 복음서와 성경, 교리문답집 등의 책과 자료,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또 구세군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변모를 거듭해 온 구세군 복장을 작은 인형들의 모습으로 전시하였다.

영국사관으로 1908년 처음 한국에 와서 구세군교회의 선교의 기초를 만들었던

로버트 허가두(본명 Robert Hoggard)  사관의 선교 초기의 사무실을 재현하였고,

또 1930년대 구세군 사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주택 내부도 재현하였다.

1930년대 사용하던 자선냄비는 쇠로 만든 것으로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통을 사용하는 자선냄비와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구세군사관학교

빨간 자선냄비 하면 떠오르는~

 

 

구세군은 세상을 구하는 군대라는 뜻

 

매년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빨간 자선냄비는

구세군(救世軍)이 하는 자선사업의 일환이다. 세상을 구하는 군대라는 뜻을 가진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창립된 기독교단으로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전도와 사회봉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구세군은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한국명 : 허가두)선교사가

1908년 10월 1일 한국에 도착하여 10월 16일 경성시 서대문 평동 76번지(현재 강북삼성병원 뒤편)에

구세군 영문(구세군에서는 교회를 영문이라 함. 이후 구세군 본영으로 됨)을 만들면서 시작하였다.

 

목회자를 지칭하는 구세군의 사관 양성을 위한 구세군사관학교의 전신(前身)인 최초의 사관훈련반이

1909년 4월 20일 설립되어 경성의 16명과 지방의 4명 등 20명으로 시작되었다.

1910년에는 사관양성을 위해 평동 본영에 성경대학을 설립하였다.

구세군의 사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1913년 1월 11일 평동에 새로 건축하였다.

그동안은 일반 양옥집을 사용하여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고 교육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구세군 한국전파 7년만인 1915년 현재 종로구 덕수궁길 130(정동 1-23번지)에

구세군 본영을 건설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구세군사관학교는 1926년 본영 옆에 850평의 새로운 대지를 마련하여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8년 9월에 준공을 보았다. 고전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벽돌로 쌓은 2층 건물로

1920년대 서울 장안의 10대 서양식 건물의 하나로 지칭되기도 하였는데

1985년까지 구세군 사관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로 사용되었다.

새로운 사관학교는 1985년 11월 경기도 과천시에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2002년 3월 5일 서울시 문화재 제 20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구세군 중앙회관과 정동갤러리, 2003년 10월에 개관한 구세군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관학교 건물 옆에는 구세군 서울제일영문이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은 구세군의 역사 문화유산들을 수집, 보존, 정리하여 일반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개관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월요일-금요일)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 90년 전에 구세군이 시작

 

구세군하면 자선냄비로 기억할 정도로 사회봉사를 으뜸으로 하고 있다.

자선냄비는 1891년 12월 미국의 경제공황시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해안에 배가 난파되어 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면서

춥고 배고픈 성탄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세군 사관 조셉 멕피(Joseph Mcfee)가

오클랜드 부둣가에 선원들이 주방에서 사용하는 심슨 포트(Simpson's Pot)라는 큰 냄비를 걸어놓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이 냄비를 채워 주십시오”

이 때 모아진 한푼 두푼의 성금으로 국을 끓여 식사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렇게 맺어진 사랑의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의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구세군 자선냄비(Chrismas Kettle)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28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은 가뭄과 홍수로 많은 곳에서 이재민이 발생하고

경성시내에서도 불우한 걸인과 출감한 사람들이 오갈 데가 없게 되어 노숙자가 늘어났다.

이에 구세군에서는 구호기금을 마련하는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승인을 받아 그해 12월15일부터 31일까지

시내 20개소에서 한국 최초의 자선냄비를 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모여진 850원으로 본영 인접건물에 무료 급식소를 차려

매일 120명에서 130명 정도의 걸인들에게 따뜻한 국과 밥을 제공해주었고,

매일 아침에도 여러 가족들이 쌀을 배급받아 집으로 가져가서 밥을 짓도록 하였다.

요새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를 벌써 90년 전에 구세군이 시작한 것이다.

 

현재 구세군사관학교 건물에 가보면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인 다일사가 있어 노숙인들의 자활의지를 심어주고 있다.

또한 의복과 음식, 연료 등을 여러 사람에게 보급해주었다.

1928년의 자선냄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12월에 펼쳐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은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쓰는 구세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선교 못지않게 교육, 의료, 구호활동을 펼친 것도 많은 호응을 받아냈다.

이후 구세군은 일제의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3년 강제 폐쇄되어

지하교회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해방 이후 1947년에 다시 구세군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자선냄비에 대한 인식이 강해 구세군을 자선단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세군은 엄연히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여느 기독교 교파보다 사회사업시설은 구세군이 월등히 많다.

어린이집, 양로원, 장애인지원센터, 사회복지관 등 전국 각지에 수많은 사회복지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12.16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