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

Gijuzzang Dream 2010. 12. 1. 16:37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내시들은 왜 그곳에 묻혔을까?

 



1. 세상을 놀라게 한 초안산(楚安山) 집단묘역


1999년 6월 7일 9시 뉴스에서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楚安山)에 있는

천여 기가 넘는 내시와 궁녀의 무덤이 훼손되고 있다는 취재보도가 나왔다.

이 보도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대단위의 집단묘역이 발표된 일은 전에 없던 사실이었다.

서울시는 즉시 전문가의 예비조사를 거쳐 2000년 4월부터 본격적인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때를 맞추어 KBS는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하여

초안산 내시부부묘에 대한 집중적인 취재결과를 방송하였다.

초안산의 집단묘역은 전국민적인 관심속에서 2002년 3월에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초안산(楚安山)은 분묘의 규모와 유물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인조 12년(1643)에 조성된 내시(內侍) 승극철(承克哲) 부부묘의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내시(內侍)는 성불구자로서 결혼을 안할뿐더러 자식도 없다는 생각이 통념이었다.

그런데 승극철의 묘비에는 ‘通訓大夫內侍府尙洗承克哲兩位之墓’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승극철의 부부가 함께 묻혀있다는 의미이다.

조선조 출입번 내시가 궁궐로 출퇴근을 했으며,

처첩을 두고 자식도 입양하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미술사연구소의 정밀지표조사결과 보도내용이 거의 사실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천기가 넘는 묘가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300기 가량은 이장 혹은 도굴된 상태였다.
또한 묘표, 석인상, 망주석, 상석 등 수많은 석물들이 남아있었으며,

이중 석인상은 예술성이 있는 것으로 주목되었다.

 

초안산은 도봉산의 서쪽에서 뻗어내려온 산줄기가 창동과 월계동 일대에 형성된 낮은 산이다.

이곳은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등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서로 중랑천 · 우이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풍수지리설의 명당조건을 갖고 있다.

초안산은 내시 분묘군외에도 북쪽에는 예안이씨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사실은 초안산이 갖고 있는 명당으로서의 조건을 잘 보여준다.

 

고려조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중기 남경설치론이 대두되면서 이 일대가 도읍지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며,

고려의 무신들은 초안산이 명당이라 하여 이곳을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2. 고려전기의 내시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내시는 궁정에서 사역하는 내관(內官)으로

일명 환자(宦者), 환시(宦侍), 엄인(?人), 화자(火者)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시는 거세된 사람으로서 남성의 성기능을 갖지 못한다는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었으나,

이들은 왕을 곁에서 보필하는 임무를 수행하므로 항상 정치권력과 재물축재의 기회가 주어졌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횡포 덕에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빠진 사건들이 많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려후기 환관의 정치적 탐학은 조정의 위기로 연결되었다.


그럼 이들이 역사에 등장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환관의 등장은 아시아 지역 전제군주제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환관이 페르시아 풍습의 산물이라 이야기 하고 있다.

페르시아인들은 환관을 만들어 비싼값으로 매매하였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 환관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왕궁은 커져갔다.

이때 왕궁에 머물면서 왕을 보좌하는 특수한 집단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은(殷) 왕조 유적에서 고대국가의 환관풍습을 알려주는 갑골문자가 발견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갑골문은 은왕조의 무정왕(武丁王)이

체포한 강(羌)나라 사람을 환관으로 만들고자 신의 뜻을 물어보기 위한 것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①은 남성의 성기를, ②는 절단을, ③은 티벳종족인 강(羌)족을 의미한다.

즉 포로로 잡혀온 종족을 환관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환관의 존재가 확인되나,

환관제도의 체제는 고려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전기의 내시는 조선조 내시와 같은 거세자가 아니었다.

귀족문벌의 자식으로서 왕의 정책결정과 집행을 보필하였고,

궁중내의 각종 행사시에는 집행관으로 활동하였다.

정치권력의 핵심에 있을뿐만 아니라 재예와 용모도 출중한 그야말로 당대의 최고엘리트였던 것이다.

내시를 거쳐 재상에 이른 인물도 수십명에 이르렀다.

고려중기 이후부터는 환관들이 내시직을 수행하였고,

몽고간섭기 이후 고려환관을 원나라에 바치면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원나라는 고려에 환관의 진공을 계속적으로 요구하였고,

원나라에서 득세한 고려환관은 고국의 정치에 큰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본받은 고려는 내시부(內侍府)라는 관청을 세우고,

내시들의 품계를 법제화하였다. 몽고간섭기 고려의 내시들은 최고의 영욕을 누린 셈이다. 

 

3. 내시 승극철 부부묘에 숨겨진 비밀은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사대부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분묘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초안산은 내시들의 공동묘지로서 더 잘 알려졌다.

초안산 외에도 도봉구 쌍문동, 양주의 효촌리 등에는 내시들의 집단묘역이 존재하고 있다.

양주땅은 내시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이 많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내시들이 정착하여 살게 되자 고자마을, 내시마을이란 명칭도 붙게 되었다.


집단묘역에 잠든 내시는 대부분 명문가의 내시들이다.

명문가의 내시들은 양자를 얻어서 가문을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처첩을 두기도 하였다.

초안산 부부묘의 주인공인 승극철은 조선조 내시들의 최고가문인 연양군파(延陽君派)의 후손이다.

연양군파의 시조는 김계한(金繼韓)으로

임진왜란시 선조의 몽진을 도운 공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록된 자이다.

이후 연양군파에서는 내시들의 최고벼슬인 종2품 상선(尙膳)에 오른 자가 5명이나 배출되었다.

김계한의 묘(1637)와 양자인 김광택(金光澤)의 묘(1685)는 현재 양주 효촌리에 있다.
이들의 묘는 원래 초안산에 있었으나 이후 효촌리로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김광택의 묘비에 적힌 명문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1684년에 부인이 죽자 양주(楊洲) 각심사리(覺心寺里) 선산 남쪽에 합장하였다”

각심사는 초안산에 있었던 사찰로서 각심사리는 다름아닌 초안산 일대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명문은 초안산에 연양군파 내시들의 선산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내시들은 왜 초안산을 집단묘역으로 삼았을까?
조선조 법전에서는 백성들의 묘는 도성으로부터 10리밖에 조성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동쪽 경계선은 현재 수유동에서 우이천(牛耳川), 그리고 장위동으로 이어진다.

바로 초안산의 서쪽 일대가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는 자리이다.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연양군파의 내시들은 초안산 인근에서 선산을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선조들의 집단묘역을 조성함으로써 가계의 전승과 집안의 단결을 꾀하고,

내시명문가를 이어가려 했던 것이다.

 

풍수지리적 조건에서도 초안산은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도봉산을 주산으로 하여 우이천과 중랑천이 감싸듯 흐르고 있었으니,

초안산은 후손들의 발복(發福)을 바랄 수 있는 명당이었던 것이다.


4. 초안산에서 내시박물관을 꿈꾸며

우리의 뇌리는 내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쌓여 있다.

권력과 재물을 탐욕하는 내시를 배웠고,

왜소하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사극(史劇)속의 내시를 보았다.

그러나 내시들은 역사에서도 개인사에서도 철저한 희생자였다.

고대국가에서는 포로들을 강제로 거세시켰으며, 약소국에 환관의 공출을 강제하였다.

또한 궁형(宮刑)이란 극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기도 하였다.

황제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황제의 여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이들은 가혹한 멍에를 지고 살아야했다.

 

조선조 내시가문의 양자로 입양된 아이들은

개에게 남성을 물리거나, 탐학한 부모에 의하여 억지로 거세당한 이들이다.

우리는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내시의 밑바탕에는 이러한 불우한 개인사들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또한 국권을 빼앗긴 슬픔에 자살한 반학영, 강석호와 같은 충환(忠宦)을 알게 된다면,

내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정도 상쇄될 것으로 생각한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은 내시들의 생활사를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크다.

사실 조선시대 내시에 관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매우 소략하였다.

초안산이 학계와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배경은

노원구의 향토사학자인 이강남씨(노원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의 소리없는 노력때문이었다.

그는 초안산의 보존대책을 강조하였고, 초안산 내시부부묘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그는 요사이 ‘내시박물관’을 세운다는 큰 꿈을 계획하고 있다.

내시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와 유물을 전시 · 수장한 박물관이 세워진다면

매우 흥미롭고 이채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초안산은 그 자체로 야외박물관에 다름없다.

천기 이상의 분묘와 수백기의 석물들은 훌륭한 야외박물관의 유물들이다.

현존하는 묘비들은 16세기부터 1900년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다양하다.

조선시대 석비형식의 변천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문인석과 동자상들도 시기별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으므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더구나 초안산에는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다는 내시부부묘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초안산의 역사적·자원적 가치를 다시한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 유승훈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