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장충단비와 봉황각 -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와 2호

Gijuzzang Dream 2010. 12. 1. 15:54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 ··· 장충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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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1호는 가장 가치있는 것일까?
각 지방의 유형문화재 1호는?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우리 나라 국보급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는 문화재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답은? “아닙니다.”라고 해야 맞다.

지정번호는 문화재를 지정한 순서일 뿐 가치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의 경우도 제1호라고 해서

서울시에 있는 유형문화재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정번호 1호는 그 상징성 때문에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 지정할 때도 상당히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부산의 경우 동래부사청의 동헌(東軒), 대구는 경상감영의 선화당(宣化堂),

인천은 인천도호부사청, 강원도는 춘천 행궁(行宮)의 위봉문(威鳳門),

전라북도는 전주 객사(客舍) 등을 각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했다.


 

1969년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일제에 대한 항거와 관련된 유적을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하였다.

본래는 ‘지방문화재’라고 불렸지만

1973년부터는 지방유형문화재, 지방무형문화재, 지방기념물, 지방민속자료 등으로 세분화되어

독자적인 지정번호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화재가 유형별로 세분화되었어도

서울시 지방문화재 1호는 이후에도 여전히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로 이어졌다.


이런 사례는 경상남도의 경우 임진왜란 때의 명장이신 김시민장군 전공비를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제에 대한 항거와 관련된 유적으로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는 무엇일까?

바로 장충단비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 - 장충단비

 

장충단비가 항일유적이라는 사실이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사실 장충단은 1960년대 가수 배호가 부른 유행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라는 ‘공원’의 이미지만 클 뿐

특별히 역사문화유적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장충단 공원에 가더라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된 옛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 정도가

역사유적이라는 감회를 줄 뿐 어지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그 곳에 장충단비라는 비석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낼 수도 있다.

그리고 막상 비석을 보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의미가 깊은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장충단(奬忠壇)'이란 말 그대로 충절(忠節)을 장려하기 위해 세운 제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충절을 장려한단 말일까?

바로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1895년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 때 일본 낭인으로부터 국모를 보호하려다가

순국한 훈련대(訓鍊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위시한 장병들이었다.

 

즉 1900년 10월 고종의 명을 받들어 현재의 장충단 공원 자리에 있던 옛날 남소영 자리에

을미사변 때 충절은 세운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는 제단을 세운 것이 바로 장충단이었다.

그 이듬해부터는 을미사변 뿐 아니라 1882년의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 등 때 순절한

이최응(李最應), 민태호(閔台鎬), 이경직(李耕稙) 등도 추가로 제사지내게 되었다.

갑신정변은 친일 정치세력인 김옥균 일파의 정변이었고, 을미사변은 일본 낭인들의 만행이었으므로

이러한 정치 변동의 희생양들에 대한 제사는 당연히 항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장충단은 광무 4년(1900) 9월 고종 황제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운 사당.
고종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시위대(侍衛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건립 후 매년 장충단에서는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사라졌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명명한 후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다.
이후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과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 비만 남게 되었다.

 

장충단 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은 간략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

 

비문에는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 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광무개혁과 장충단

 

그렇다면 고종은 왜 장충단의 건립을 지시하였을까?

그것은 1900년이라는 시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왕비 시해라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일제로부터

일단 국왕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단행한 것이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즉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의 피신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면서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0월에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난 1897년 11월 21일에야

비로소 그로부터 2년여 전에 승하하신 명성황후에 대한 국장을 발인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광무연간에 추진되었던 개혁은 일제의 침략 의도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의미하고,

친일 정치세력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명성황후의 능[홍능]은 청량리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땅에 최초로 설치된 전차는 종로를 가로질러 청량리까지 이어졌으니

그 전차의 애용객 중 한 명이 경운궁에서 홍능까지 참배를 다녀오는 고종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그 전차를 타고 홍능을 다녀오시는 황제를 보면서

서울의 주민들은 근대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실감함과 동시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을 것이다.

황제가 중심이 된 반일 성향의 근대적 개혁. 이것이 바로 광무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일 의식의 중심점으로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장충단의 수난

 

항일 유적의 주체가 누구였든지 간에 장충단의 유래가 이러하니

훗날 이 땅을 강제 점령한 일제의 입장에서 달가울 리가 없었다.

1919년부터 장충단공원을 직접 관리하게 된 경성부에서는

이곳에 벚꽃 수천 그루를 식재하는 등 일본식 공원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일제의 중국침략 과정인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肉彈) 3용사의 동상도 세웠다.
공원 동편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신사인 박문사(博文寺)가 건립되어

장충단을 위압하는 형세를 갖게 되었다. 제사가 끊긴 장충단의 사당 문은 굳게 잠겼고,

컴컴한 사당 안에는 팔괘가 그려진 오랜 태극기만 덩그러니 정면 벽에 걸려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육탄3용사의 동상이나 박문사가 일찌감치 철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으로 장충단의 수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장충단의 사전(祠殿)과 부속 건물들은 6.25 전쟁으로 인하여 황폐화되고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터에는 영빈관, 장충체육관 등이 들어서고

신라호텔, 타워호텔, 자유센터 등이 주변 영역을 잠식하여 더 이상 옛 기억을 실감할 수 없게 되었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건립하면서 세운 비다.

비석 전면의 장충단(奬忠壇)이라는 글씨는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쓴 글씨이다.

그 후면에는 장충단을 건립한 간단한 경위를 설명한 민영환(閔泳煥)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일제가 뽑아서 방치했던 것을

해방 이후 일제의 건물들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다시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충단비는 원래의 짝궁 즉 장충단과 영원히 이별하고야 말았다.

장충단 자리에는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이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복개공사로 인하여 1959년 청계천에서 쫓겨난 수표교 옆에 가서 어쩡쩡하게 짝을 맞추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비석의 이마에는 6.25때의 총탄 자국인지 아픈 상채기도 남아있다.

 

지난 20세기 전반기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짓밟았다면

후반기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방치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그러한 수난을 남김없이 받은 유적이 바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 장충단비가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 봉황각

 

 

민중적 항일운동의 유적 - 봉황각

  

우리 역사에 관심이 깊은 독자들 중에는 장충단에 배향된 홍계훈(洪啓薰) 등의 이름을

을미사변 말고 다른 사건 속에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동학혁명 때이다.
즉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양호초토사로서 군사를 인솔하여 내려갔던 인물,

그리고 관군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진압하기 어려우니 청나라 군대의 도움을 요청했던 인물이

바로 홍계훈이었다.

 

민중의 위협으로부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의 자주권은 생각하지도 않고

청나라에 의존려던 인물이 어떻게 ‘충절’의 유적지에 배향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광무개혁의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반일적인 성향의 근대화 개혁이면서

동시에 황제의 독재권력을 중심으로 한 반민중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장충단비와 같은 날 서울시 유형문화재 2호로 지정된 문화재가

바로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鳳凰閣)이었다.

 

봉황각은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912년에 세운 건물이었다.

황제의 독재권력을 바탕으로 한 항일 유적과 민중들을 기반으로 한 항일 유적이

묘하게도 동시에 최초의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었다.

 

- 연갑수 / 서울문화재과 문화재관리팀장

- 2003.07.25  하이서울뉴스 [재발견! 서울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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