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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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고비 -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李允濯 靈碑)」

Gijuzzang Dream 2010. 11. 26. 16:04

 

 

 

 

「한글고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李允濯 靈碑)」

묘를 옮긴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우리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변에 어떤 문화재가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이에 문화재는 사라져 가고 있다.

 문화재는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제대로 알아야 보존도 제대로 할 수 있다. 

 제대로 알아야 보는 맛도 다르고 애정도 깊어지면서 과학적인 보존에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문화재과에 전문계약직 및 학예연구사 공무원을 통해

 문화재 보존에 관한 전문성을 증진하고 있다.

 <재발견! 서울 문화재>는 바로 이들이 서울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재미있고 유익한 설명이

 펼쳐지는 공간이 될 것이다. 서울의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도

 바로 이 공간에서 움트기를 기대하면서 <재발견! 서울 문화재> 시리즈를 신설한다.

 필자로는 서울시 문화재과 연갑수(문화재관리팀장), 김수정(학예연구사), 유승훈(학예연구사)

 등이 참여한다.

 

 

 

 

 

 

 

 

 


 

 

■ 건드리지 마. 다쳐!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하는 자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10살 어린 나이에 파라오의 자리에 올라 19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투탕카멘[Tutankhamen, 이집트 제 18왕조 제 12대 왕]왕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러한 글이 쓰여진 점토판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영국의 카나본卿(Carnavon Herbert)이 발굴 이듬해 모기에 물려

갑자기 사망한 이후

발굴에 참여했던 20여 명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언론은 이를 ‘파라오의 저주’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했고

전세계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내리는 재앙에 대해

다시 한 번 공포심을 가져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주 천마총과 공주 무녕왕릉 발굴 시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쏟아지고 발굴에 참여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갖가지 횡액이 생겼다는 얘기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돌았었다.

그래서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땅 밑을 발굴할 때는 돼지머리를 놓고 아무 사고 없이 작업이 끝나기를 기원하는 고사, 일명 개토제(開土祭)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곳 서울에서도 불암산 자락 한 야산에 조성된 16세기 한 사대부의 묘역 이전 문제가 묘 앞에 세워진 묘갈(墓碣) 표면에 심상치 않은 문구가 새겨졌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10년 동안 세간의 뜨거운 시선을 모은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중계동·하계동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단지 사이로는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미아사거리를 잇는 6차선 간선도로가 개설되려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 묘갈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한 마디로 “건드리지마. 다쳐!” 이렇게 말하고 있는 비를

지역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살살 ‘건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 평범한 묘에 세워진 범상치 않은 묘갈 하나 - 시 유형문화재 제26호「한글고비」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12번지.
서라벌고등학교 맞은 편 높은 콘크리트 옹벽 위 약 50여 평 땅에는

현재 이윤탁(李允濯)과 그의 부인 고령 신씨의 합장묘 1기,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각각 1기,

문인석(文人石)이 2기, 묘갈(墓碣)이 2기 놓여 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과 서화가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신도비도

없고 묘 바로 아래 좌우로 하나씩 설치되는 망주석도 없다.

상석과 향로석 역시 근년에 조성되어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일반 서민들의 민묘에 비하면 일정 격식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묘들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도 보인다.

묘주(墓主)인 이윤탁(李允濯)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라는 시조 작가로서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조년(李兆年, 이윤탁의 8대조)과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 이윤탁의 5대조)을 배출한 명문 성주이씨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연산군 7년(1501년) 봄 문과(文科)에 급제한 직후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서 실무 수습 단계(權知 副正字)에 있다가

같은 해 섣달 26일 병환으로 40세에 갑자기 세상을 뜬다.
요즘으로 치자면 늦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해 사무관 실무수습을 하다 그 정치적 포부를

채 펴보지도 못하고 사망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묘가 단출한 것도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탁(李允濯)의 묘는

울시에서 일반 사대부 묘역으로는 가장 먼저 1978년 서울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왕릉은 물론이고 정승 · 판서 · 공신들의 묘역, 그것도 세장묘(世葬墓, 4~6代의 묘들이 한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묘역)가 즐비한 서울에서 從9品 벼슬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한 젊은 수습관료의 묘역이 다른 유명 고위관료 및 학자들의 묘역을 제치고 가장 먼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면

그 묘역에는 뭔가 특이한 문화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묘역 내 영비각(靈碑閣)에 모셔져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한글고비(古碑).

돌아가신 분(亡者)을 추념하기 위해 분묘 앞에 세운 일종의 표지석이라는 점도, 6품 이하 관료의 묘 앞에 세워진 것이어서 비 몸돌(碑身이라고 한다) 위 부분이

약간 모가 나긴 했으나 약간 둥그스름하게 깎인 모양으로 조성되었다는 점도

다른 묘역의 그것과 대체로 같다.

그 밖에 방부(方趺, 사각의 받침돌)에 비신을 끼운 수법이라든지

그 크기도(비 몸돌 높이 143.5cm, 폭 64. 5cm, 두께 19. 3cm)

다른 일반 관료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비문의 구성도 다른 비문에 비해 크게 특색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묘갈에 관례적으로 기록되는 것들인 묘주(墓主)의 가계(家系),

생몰연대, 관력(官歷)과 성품, 직계자손, 묘의 이장 경위와

묘갈 건립연대 등이

한글고비에도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묘갈은

1926년『대동기문(大東奇聞)』 권2 둘째면에

「이문건 영비(李文楗 靈碑)」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래 일반시민들은 몰라도

국문학자와 언론인들, 문화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줄곧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다면 그것은『대동기문』에 기록된 아래의 내용대로 단지 영험한 비였기 때문이었을까?

후손이 먼 곳(이문건 후손의 주 근거지는 충북 괴산임)에 에 있어 오래도록 돌보지 못하고

甲이라는 사람이 점유하면서 풀과 나무를 베니 이윤탁의 묘갈이 나타났다. 완연 새 것이라.

산 아래 사람들에게 甲이 점유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훼손이 안되었더냐고 물었더니

주민이 말하기를 “병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기도하면 효험이 있었고 나무꾼이 혹 그 돌조각에

해를 입힐 양이면 재앙이 있었다. 영험함이 이와 같은데 그 누가 훼손할 것인가?”라고 했다.

그러나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다른 측면이었다.

이 비를 만들고 비문을 새긴 이윤탁(李允濯)의 막내아들 묵재 이문건(默齋 李文楗 , 1494~1567)으로

인하여 이 묘갈이 갖게 된 몇 가지 파격에 그들은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글고비는 얼마만큼 특별한 묘갈인가?

먼저, 한글고비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한글 비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유일한 한글비이기도 하다.

독자적인 우리의 글이 없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금석문으로 알려진「광개토대왕비문」도,

진흥왕의 한강유역 장악이 기록된「북한산진흥왕순수비」도

사실 모두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글은 사대부들에 의해 중글 · 암클 등으로 비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 평민도 아닌 사대부가, 그것도 편지글도 아닌

부모님의 묘 앞에 비를 세우면서 한글로 된 비를 세워 놓았으니 비 건립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한글고비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비의 앞과 뒤, 그리고 우측면에 한문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한글고비 좌측면에 순수 한글로 쓰여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계글은

16세기 한글 고어와 서체를 연구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금석문 자료였던 것이다.

또한 한글고비는

묘갈이나 묘비, 신도비 등 망자(亡者)를 추념하기 위해 세우는 각종 석비의 비문 중에서

단연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다.

묘갈에 관례적으로 적는 글 뒤에 부모를 잃은 애통함과

이 묘지가 영원히 조성된 자리에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로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문에 이처럼 솔직하게 찬자(撰者)의 마음이 담겨진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묘갈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좌우측면에 다른 어떤 묘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동일한 내용의 경계문이 한글과 한문으로 각기 적혀 있다는 점에 있다.

 

 


지방마다,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자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며

그들을 추념하는 의식과 태도는 각기 조금씩 다 다르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보수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분야가

바로 이 상례(喪禮)라고 한다.

따라서 상례와 결부된 부분들은 자칫 형식화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묘갈 하나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한글고비에게 이 세상 빛을 보여준 장본인인 이문건은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도 그리 하지 않았다.

그는 부모의 백(魄)이 묻히고 혼(魂)이 깃든 묘역이 훼손당할 것을 염려하여 비 뒷면 끝에 한시를 지어 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좌우로 다시 식자층과 한자를 모르는 사람 양쪽을 겨냥, 절대로 이 비를 건드리지 말라고

원하다시피 하는 글을 써 놓았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도 이렇게 독특하게 표현해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파격으로 인해 한글고비는 정2품 고위관료나 공신, 석유(碩儒)들의 분묘 동남쪽

발치에 거대규모로 조성된 여러 신도비를 제치고 가장 먼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또한 묘갈 단독으로 문화재 지정이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례라는 진귀한 기록도 갖는다.

 

 

■ 사연있는 남자, 이문건

그렇다면 근엄한 조선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묘갈을 만든 이문건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비문을 세울 만큼 어떤 기막힌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유명인사였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송시열의『이문건 행장(行狀)』등에

이문건은 매우 강직하고 효심과 우애가 깊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나와있다.

송시열은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사(賜死)되자

그 문인들마저 해를 입을까 두려워 문상하기를 꺼려했는데

이문건만은 그 형 충건(忠楗)과 함께 문상할 정도로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또『중종실록』을 보면

이문건은 중종의 두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禧陵) 조성 당시

장경왕후 소생의 세자(훗날 인종)를 해하고 다른 왕자(福城君)를 세자로 세우려는 경빈 박씨와 그 추종자들이 광(壙)을 파면서 그 속에 큰돌이 박혀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대로 능을 조성하였으므로 정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고 능을 이전할 것 등을 왕 앞에서 주장,

한동안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 때가 중종 32년(1537)이니 기묘사화(1519년)로 사림의 세력이 한풀 꺾인 시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과감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효행 또한 각별했던 모양이다.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며 직접 탕제를 달이고

어머니가 가야금 타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니 늦은 나이에 가야금까지 배웠다고 한다.

또 서법(書法)에도 능해 중종의 시책문(諡冊文, 제왕의 시호를 올릴 때 덕행을 칭송하여 짓는 글)을 쓰기도 했다. 관직도 승정원 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올랐으니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강직하고 효성스러운 성품과 글씨와 관직으로 유명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보다 오히려 오늘날 더 '떴다.'

그것도 한글고비와 그가 쓴 일기(『묵재일기(默齋日記)』라고 불림)가

오늘날의 그의 유명세를 만들었다. 그는 일기에다 별의별 것들을 다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기에서 드러나는 이문건의 모습은

앞서와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비장하고 근엄한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그의 다양하고 개성적인 면모와 생활의 일부를 약간만 맛보기로 하자.

○ 바람을 피우고 그 사실까지 기록으로 남겼다.〈1552년 11월 21일. 맑음〉
당에 들어와 아내를 보니 아내가 성을 내며 질투하여 말하기를,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들어오지 않고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왜 아내가 상심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오?

하였다. 드러내어 많이 질책하니 귀에 거슬렸다. --- 중략 ---

밤이 되어 물에 만 밥을 먹고 잤다.

○ 손자의 육아일기(『양아록(養兒錄)』)를 16년간이나 썼다.〈1555년 12월〉
손자아이는 타고난 체질이 허약한데 놀기를 좋아하고 옷을 잘 벗어제친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헤어지면 혼자 서 있다가 놀라기도 한다.

애가 일 푼 놀라면 이 할애비는 십 푼 이상 놀래라. --- 중략 ---

손자가 다칠까봐 두려워 이 할애비는 날마다 깊이 마음 쏟네.

○ 반편인 아들을 동정하면서도 심하게 다뤘다.

1535년 12월 8일〉
이른 아침, 기성이의 뺨을 짓밟고 머리카락을 한 웅큼 잡아당겨 뽑았다.
더 화가 났다. 그 아이가 즉시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대부로서 점을 치거나 무녀를 데려다 굿도 했다.〈1551년 9월 24일〉
숙길이(이문건의 손자)가 똥을 눌 때마다 우니 불쌍하고 불쌍하다.

무당을 불러다 고사를 지냈으니 숙길이를 위한 것이다.

숙길이의 어미가 금년에 액운이 들어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쪽에 있는 집으로 나가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그는 기록광이다 싶을 정도로 매우 세세하게 일기를 썼다.

일기에서 보이는 그는 감정이 풍부하다 못해 매우 격정적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행동에 대한 자제력이 큰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질병이나 알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사대부로서 주술적인 것에 매달리는 양면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이다 보니 부모님의 묘 앞에 세우는 묘갈도 꼭 필요한 부분은

관례와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되 파격을 꾀해 보았음직도 하다.

그래도 어떤 절실한 필요도 없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다소 꺼림칙하고 섬뜩하게도 느껴지는

문구를 삽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글고비를 세울 때 혹시 이문건은

경계문을 비 각 측면에 써야만 했던 어떤 특수한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1990년대 중계동과 하계동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건설과 간선도로 개통이라는 상황을 맞아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종이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윤탁 묘 이전문제와도 맥이 닿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약 5세기 전 이문건에게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문건은 그의 나이 7살 때인 1501년 그의 아버지 이윤탁(李允濯)을 여의었다. 그는 2남3녀 중 막내로 이윤탁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장례는 그의 형들과 누나 중심으로 치러졌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묘소는 선산인 양주 영동(塋洞)에 조성되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태·강릉(泰,康陵, 중종의 세 번째 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그의 아들 명종의 능) 자리이다.

그런데 그의 나이 41세 되던 1535년 이문건은 두 가지의 큰 일을

이제 형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그의 형들(重楗과 忠楗) 부부가 기묘사화에 휘말려 1521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님 한 분도 세상을 떠나 이문건은 어머니 봉양을 비롯한 집안 대소사를

실제로 책임지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 역시 하나같이 일찍 세상을 뜨거나 병으로 바보가 되어

그에게 의지처가 될만한 사람이 사실상 조카 휘(輝, 둘째형 충건의 아들로 을사사화 때 참시당함)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또 11월 이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의 묘가 있는 선산이 태릉 조성 대상(國用)으로

선택되어 오늘날 말로 ‘수용’당하게 됨으로써

원치 않은 부친 묘 이장까지 갑자기 치러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송시열의 행장에 그가 어머니 사후 슬퍼함이 예(禮)에 지나친 면이 있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묘까지 이장하기에 이르렀으니 효자로 소문 나고 감정도 격한 편이었던 그가

어떤 심적 상태에 이르렀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장하기 위해 아버지의 묘광(墓壙)을 파던 날의 일기 속으로 들어가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536년 2월 11일〉
아버지의 시신(體魄)이 드러나게 되니 몹시 가슴아프고 속이 상했다.

다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勢不得하여) 이리 된 것이나

눈에서는 눈물이 난다. 참아가며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 때 이문건의 슬픔과 비통함은 이후 을사사화(1545) 발생 시

자신을 비롯한 대다수 사림들과 정치적 대척점에 서게 되는 문정왕후의 능 조성 예정부지로

자신의 아버지 묘가 강제수용 당하게 된 데서 더욱 커졌을 수 있다.

이문건은 인종(장경왕후 소생으로 명종의 이복형)과는 4촌 동서지간인데

다른 사림들과 마찬가지로 세자 시절부터 인종을 지속적으로 옹호해왔고

이는 결국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그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놓이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세부득(勢不得)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아버지 묘의 이장 결정은

이문건으로 하여금 어떤 파격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결국 그는 1935년 11월 1일 아버지를 어머니가 묻힌 양주 노원 율이재(栗伊岾)로 합장하기로

결정하고 다른 사대부가의 이장절차를 직접 가서 보는 동시에

『가례의절(家禮儀節)』의 이장 관련 부분을 참고하는 등 3개월 간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이듬해 2월 이장 절차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리고 5월에는 지금 현재 묘역 안에 있는 석물들까지 다 세우게 된다.

 

그런데 합장묘에 세울 묘갈은 합장 결정 직후부터 새기기 시작해

1536년 3월 17일 절반 정도 새기고, 같은 해 4월 16일 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5월 4일 이문건은 드디어 모든 석물들을 묘역에 세운다.

묘갈을 새기고 세우는 데만 5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묘갈을 새기고 또 세웠는지는 그의 일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1535년 11月 27일〉
분묘에 올라가 묘갈 면에 몇 글자를 새겼다.

왼쪽 무릎이 더욱 시리다.

<1536년 正月 25일〉
묘갈에 4字를 새겼다.

<1536년 正月 26일〉
묘갈에 2字를 새겼다.

<1536년 2월 27일〉
흐리고 바람불다. 외막(廬幕)을 지키며 상식례(上食禮)를 행했다.
묘갈 새기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1536년 2월 28일〉
맑고 바람불다. 조카 휘(輝)와 함께 여막(廬幕)을 지키며 묘갈에 글씨를 새겼다.

몸이 피곤하다.

<1536년 2월 30일〉 맑았다가 흐려졌다.
맑았다가 흐려졌다. 조카 휘(輝)와 함께 여막(廬幕)을 지키며 묘갈에 글씨를 새겼다.

몸이 피곤하여 일찍 그만두었다.

<1536년 3월 17일〉
조카 휘(輝)와 함께 여막(廬幕)을 지키며 묘갈에 글씨를 새겼는데 비로소 절반을 마쳤다.

<1536년 4월 16일〉
맑음. 조카 휘(輝)와 함께 여막(廬幕)을 지키며 묘갈에 글씨 새기는 일을 마쳤다.

<1536년 5월 4일〉
비가 왔다. 휘(輝)와 함께 여막(廬幕)을 지키며 묘갈을 세웠다.

계체석(階?石)을 늘어놓고 석상(石床)을 배치하였으며 혼유석(魂遊石)을 놓았다.

그리고 묘역에 잔디를 더 보완했다.

이웃 마을 인정(人丁) 30여 명과 권농(勸農, 조선시대 지방의 坊이나 面에 소속되어 농사를 장려하던 직책에 있던 사람)이 이끌고 온 軍 10여 명 등이 힘을 합해 묘갈을 세웠는데

저녁이 다 되어 일이 끝났다. 석수 등 4인에게 면포 25필을 주고 돌려보냈다.

 

이상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한글고비는

노원의 야산 중턱에 있는 어머니 묘 옆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아버지 묘 이장 작업까지

도맡아야 했던 이문건이 한 겨울 추위, 육신의 수고로움과 고통, 마음의 비통함을 삭여가며

한 자 한 자 직접 파 내려간 노력과 정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고비 좌우 측면에서 보는 경계문은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옮겨야 했던 아버지의 묘를 두 번 다시 옮기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문건이 정해놓은 일종의 방어장치,

그것도 아주 개성 있고 재치 있는 방어장치였던 셈이다.

비문을 읽어본 사람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 묘갈 자체와 분묘 모두 함부로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혼이

노원 율이재에서는 영원히 평안하기를 기도했던 아들의 마음과 고심의 흔적이

그 작은 크기의 한글고비에 크게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5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람들은 그의 바람을 외면했다.

이윤탁의 묘역에 도로를 뻥 뚫었던 것이다

그의 묘를 옮긴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산 하나도 우리 시야에서 순식간에, 간단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강줄기도 이리저리 마구 바꿔버릴 수 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은 시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요즘 세상을 구경한다면

“인걸은 의구한데, 산천은 간 데 없네”라고 고쳐 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글고비가 있는 노원구 하계동과 중계동 일대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만 해도 벌판이던 그곳이 이제는 고층 아파트와 쇼핑몰 숲이 되어있다. 한글고비도 이러한 변화과정의 일부

사실 한글고비가 있던 곳은 문화재 및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인 1971년에

이미 건설부 고시 제198호로써 중계2지구 택지개발사업의 도시계획도로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화재 지정이 있은 지 15년 뒤인 1989년 택지개발 실시계획에 대한 건설부 승인이

떨어짐에 따라 드디어 이 지역(정확히는 1,346,696㎡)에는

1994년까지 호수(戶數) 16,978호에 달하는 주택과 폭 30m의 6차선 도로가 뚫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직선 도로는 상계동과 미아사거리까지를 연결하는 이 지역 주요 간선의 역할을 할 예정이었고

한글고비가 있는 곳을 관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업을 추진하는 대한주택공사측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한글고비였다.

문화재는 비록 그것이 어느 한 개인의 법적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국민 전체가, 그리고 현재 및 미래의 인류 전체가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일종의 공물(公物)의 성격을 가진다. 따라서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보존 · 관리의 기본원칙으로「원형보존의 원칙」을

규정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수단으로 현상변경허가 조항을 두고 있다.

이 조항은 문화재 자체를 이전 또는 수리하거나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서 어떠한 공사를 시행하고자 하는 경우 모두 사전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아 시행토록 함으로써

문화재가 일정한 적(籍)이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무단의, 잦은 수리를 통해 원형을 잃어버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주요수단이 된다.

그런데 사업대상이 되는 한글고비는 시 유형문화재이고 주변 400㎡의 땅도 보호구역으로 함께

지정되어 있었던데다 계산대로라면 6차선 도로의 3개 차선을 점할 것이었기 때문에

한글고비를 허가 받아 어디론가 이전하여 도로를 직선으로 뚫거나

아니면 직선도로를 개설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거나 하는 방법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대한주택공사에서는 1990년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의 동의하에

한글고비를 경기도 고양시로 이전하는 데 대한 허가를 신청을 하는 동시에

문화재 보호구역 외 지역에서는 같은 해 4월 1일자로 도로개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역사학과 미술사학 등 관련분야 대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던 시 문화재위원회는

1차 심의(1990. 5. 13)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한글고비를 다른 곳,

그것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로 이전하는 것에 전원이 반대했다.

동일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건은 그 이후로 반 년, 혹은 일 년 간격으로

문화재위원회 심의에 지속적으로 상정되었다. 문화재위원회의 입장은 완강했다.

그 사이 이 지역에는 아파트가 다 들어서고 주민 입주가 이루어졌으며

한글고비가 있는 지역을 제외한 사업대상 전 구간에서 1992. 10. 5까지 도로가 개설되기 이르렀다.

원래 불암산 서쪽 자락에 완만하게 솟은 한 야산 중턱에 조용히 있던 한글고비는

예상대로 6차선 도로의 3개 차선을 떡 하니 깔고 앉은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

6차선 도로가 한글고비에 와서 3차선으로 줄어들고 그것도 급격한 커브를 이루게 되니

자연히 이곳에는 교통 병목현상과 사고발발 가능성이 커졌다.

도시 미관상으로 보아도 그것은 썩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이에 지역주민들이 집단으로 들고일어났고

잇단 묘 이전 부결과 도로 개설로 조상묘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있는 것에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은 문화재위원회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문화재위원회가 상대해야 할 대상은 대한주택공사라는 쉬운 대상이 아니라

행동력을 갖춘 대단위아파트 단지 주민들과 문화재위원회와는 다른 방향에서 조상묘를 지키는데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 등 사사건건 대립하는 이해집단들이었다.

이 지역주민들은 직선도로 개설을 위해 묘를 15m 후방으로 이전하거나

묘는 그대로 두고 지하도로를 뚫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측은 묘의 정기 차단을 우려하여 후자에는 적극 반대하는 한편

묘를 온전히 경기도 선산으로 이전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한 문화재위원회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전불가, 우회도로 개설”이었다.

 

한글고비 이전심의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던 한 문화재위원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같은 사안에 대해 오래 끄니까 문제가 더 복잡해진 면이 있었다.

 

여러 단체에서 서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려는

방향으로만 이전 문제를 끌고 가려 했고 언론은 한글고비의 문구에 주목하여 이를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우리 문화재위원회가 지나치게 완고하고 융통성 없는 집단으로,【1994. 5. 13(금)字 조선일보 기사】

 

화재위원회에서 비석과 분묘를 원래 위치에 존치시키고 우회도로 개설을 의결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으나 5년 뒤 분묘는 결국 15m 후방으로 밀려났다.
또 비문내용 때문에 어떤 꺼림칙한 일을 피하려고 하는 미신적인 사람들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전 허가해 줘버리면 잠시 욕먹고 끝나는 일을 왜 문화재위원회가 10년이나

붙들고 있었겠는가?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글고비가 당시 처해 있는 상황을 인정하여 쉽게 이전의결을 해버리면

그 어떤 개발시도로부터도 우리 고유의 문화를, 어느 지역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그 땅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낼 수 없게 된다는 위기감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한글고비 이전불가와 우회도로 개설을 주장했다.

문화재는 한 시대의 단기적 필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문화재 보존·관리의 대원칙인 원형보존원칙에 충실한 것이었으나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이었음에도

잠시 우회도로 개설이 추진되기도 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의결대로 건설부 고시 제145호(1994. 4. 27)로써 우회도로 개설이 승인되었고

같은 해 8월 우회도로 공사가 착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민들은 대통령비서실, 감사원, 건설부, 서울시, 대한주택공사 등에

집단으로 항의서한을 제출하는 등 이에 반발했다.

결국 문화재위원회 9차 회의(1995. 12. 15)에서는

교통여건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과제를 절충하여

문화재 이전장소를 시행자인 대한주택개발공사가 현재의 위치에 가까운 곳에 확보하고 이전에 따른 문화재 훼손대책 수립 등을 조건으로 하여 문화재 이전 쪽으로 방향이 급선회하기에 이른다.

좀 전에 인용했던 문화재위원이 당시 분위기를 단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 쪽 사람들에게 밀린 겁니다.”


그리고 이전심의 후 약 1년만에 대한주택공사가 이전 부지를 제공하고 비용 전액을 부담하되

이전 자체는 문화재 관리단체인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이 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양측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합의에 바탕을 둔 이전설계안이 제출되는데

그 안의 골자는 묘역을 전체적으로 15m 후방 이전하고

한글고비는 비각을 세워 비각 안에 모시되 복제된 묘갈을 묘 앞에 세운다는 것이었다.

이 이전설계안 심의를 위한 문화재위원회 10차 회의(1997. 4. 8)에서는

이전 계획이 대체로 무난하다고 보았다.

다만 이전 이후 문화재 보호구역을 별도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추가 의결했다.

이에 따라 1998. 2. 25~8. 28 약 6개월에 걸쳐 이전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전을 책임 맡은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 일각에서는 15m 뒤로 이전하는 데 대해

여전히 꺼림칙해 했으나 대체로 도로 한 중간에 있게 두는 것보다는 이전하는 쪽을 선호했다.

문중회의가 열리고 어떻게 이장작업을 진행할 것인가가 그곳에서 토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이장은 매우 신중히 진행되었다.

원래 묘 자리의 묘광을 파낼 때, 그리고 새로운 땅으로 이전이 마무리되는 날

집안어른들은 묘역에 모여 고유제(告由祭)를 지냄으로써

조상에게 이전하게 된 경위를 상세히 아뢰고 조상의 혼이 새로운 땅에서 영면하기를 기원했다.

 

 

그리하여 묘 이전 완료를 최종 보고하고

그에 따른 보호구역 지정 검토를 위한 문화재위원회 11차 회의(1999. 6. 25)가 열렸다.

마지막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전된 한글고비를 중심으로

문화재보호구역이 새로이 설정되었고,

이전된 묘의 둘레에 설치한 호석(護石)이

일반 사대부의 묘역에는 설치될 수 없는 것이므로

호석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훗날 사람들에게 일반사대부 묘에도 호석을 둘렀다는 오해를

줄 소지가 있다하여 이미 설치된 호석 철거를 명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인도가 되어버린 원래 묘 자리에 이 묘가 언제, 어떠한 경위로,

얼마만큼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록한 지석(誌石)을 묻어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부득이하게 이전허가를 내주었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이 문화재가 아무렇게나 옮겨지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1999. 11. 20 문화재위원회의 이행요구 조건이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에 의해 완전히 이행되었다.

이로써 10년을 끌었던 이윤탁의 묘 이전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성주이씨 정자공파 종중회장으로서 이 진땀나는 이장절차를 진두지휘한 이홍섭씨에게 이장 이후 한글고비에서 예고한 것과 같은 어떠한 불행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개명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많이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면 묘 이전에 최종 동의한 문화재위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참여했던 한 분은 재작년 암으로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았으나 초기에 발견되어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머지 분들은 60~70대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모두 건강한 편이다.



■ 뿌리를 다치는 것이 더 큰 재앙이다.

이문건의 경계글에도 불구하고 그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무사했다면

이제 우리는 한글고비와 이윤탁의 묘를, 아니 개발 예정지에 있는 다른 모든 문화재를

이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이리 저리 옮겨도 된다는 것일까?

이쯤해서 이문건이 한글고비 뒷면에 쓴 한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며

그가 경고한 재앙의 실체가 단순히 묘 하나 훼손하는 데 따른 목숨의 상실에 그친 것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부모님의 육신과 영혼이 묻힌 이곳, 견고하고 평안하며 언제까지고 영원하여라.
애달프게 비는 이 마음 뒷사람들은 부디 저버리지 말기를.

 


부모의 육신과 영혼은 곧 현재 우리의 뿌리이다.

그리고 그 뿌리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공동의 뿌리를 가지고 거기에 기초하여 새 줄기를 내뻗고 무성한 잎사귀를 자랑하며

예쁜 꽃을 피우기도 한다. 뿌리가 빈약하거나 썩어 갈 경우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 나무는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한글고비는, 아니 모든 문화재는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뿌리이다.

이 뿌리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하나임을 깨닫고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 뿌리를 건드려 훼손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전통문화를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의 문화기반을 취약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문건이 한글고비 양 옆, 뒷면에 각각 한글, 한문으로, 산문과 시로 거듭 써서

후세인에게 부디 저버리지 말라고 한 뜻을 다시 한 번 새기며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문화재에 시선을 돌려볼 일이다.

 

-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학예연구사)

- 2003.09.19 하이서울뉴스, [재발견! 서울문화재]

 

 

 

 

 

 

‘한글 고비(古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7호)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 12-2에 소재한 ‘한글 고비(古碑)’는

조선 중종 때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이

부모의 무덤과 비석의 훼손을 경계하는 한글을 새겨 세운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비(碑)라는 가치를 지닌다.

 

훈민정음 반포 후 90여 년이 지난 뒤인 중종 31년(1536)에 세워진 이 한글 비(碑)는,

당시의 한글 어법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으며,

글자체는 훈민정음 반포 직후의 판본체의 기본을 따랐으면서도

이후 필사체로 변화하는 초기 단계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비의 오른쪽 측면에는 "不忍碣(불인갈)"이라 새긴 글과 함께

그 아래에 '차마 훼손하지 못하는 갈(碣)'이니 길이 무덤과 비석이 훼손되지 않도록 힘쓰라는

경계의 말이 새겨져 있다.
왼쪽 측면에는 먼저 "靈碑(영비)"라 새기고

그 아래 한글로 "신령스러운 비이다. 건드리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을 것이다.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라는 뜻의 글을 새겨 잡인의 훼손을 경계하였다.

이 비(碑)는 근래까지는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99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15m 뒤로 이전되었다.

 

- 문의 : 서울시 문화국 문화재과 ☎ 02)3707-9434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4번 출구) ⇒ 1221번 버스 또는 4호선 노원역(1번 출구)

⇒ 1142번 버스를 이용하거나

지하철 7호선 하계역(3번 출구) ⇒ 1141번 버스를 이용하여

대림벽산아파트 정류장에 하차하면 찾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