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드리지 마. 다쳐!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하는 자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10살 어린 나이에 파라오의 자리에 올라 19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투탕카멘[Tutankhamen, 이집트 제 18왕조 제 12대 왕]왕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이러한 글이 쓰여진 점토판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영국의 카나본卿(Carnavon Herbert)이 발굴 이듬해 모기에 물려
갑자기 사망한 이후
발굴에 참여했던 20여 명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적이 있었다.
언론은 이를 ‘파라오의 저주’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했고
전세계 사람들은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내리는 재앙에 대해
다시 한 번 공포심을 가져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주 천마총과 공주 무녕왕릉 발굴 시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쏟아지고 발굴에 참여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갖가지 횡액이 생겼다는 얘기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돌았었다.
그래서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땅 밑을 발굴할 때는 돼지머리를 놓고 아무 사고 없이 작업이 끝나기를 기원하는 고사, 일명 개토제(開土祭)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곳 서울에서도 불암산 자락 한 야산에 조성된 16세기 한 사대부의 묘역 이전 문제가 묘 앞에 세워진 묘갈(墓碣) 표면에 심상치 않은 문구가 새겨졌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10년 동안 세간의 뜨거운 시선을 모은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중계동·하계동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단지 사이로는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미아사거리를 잇는 6차선 간선도로가 개설되려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 묘갈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한 마디로 “건드리지마. 다쳐!” 이렇게 말하고 있는 비를
지역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살살 ‘건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 평범한 묘에 세워진 범상치 않은 묘갈 하나 - 시 유형문화재 제26호「한글고비」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12번지. 서라벌고등학교 맞은 편 높은 콘크리트 옹벽 위 약 50여 평 땅에는
현재 이윤탁(李允濯)과 그의 부인 고령 신씨의 합장묘 1기,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각각 1기,
문인석(文人石)이 2기, 묘갈(墓碣)이 2기 놓여 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과 서화가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신도비도
없고 묘 바로 아래 좌우로 하나씩 설치되는 망주석도 없다.
상석과 향로석 역시 근년에 조성되어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일반 서민들의 민묘에 비하면 일정 격식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묘들에 비하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도 보인다.
묘주(墓主)인 이윤탁(李允濯)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라는 시조 작가로서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조년(李兆年, 이윤탁의 8대조)과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 이윤탁의 5대조)을 배출한 명문 성주이씨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연산군 7년(1501년) 봄 문과(文科)에 급제한 직후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서 실무 수습 단계(權知 副正字)에 있다가
같은 해 섣달 26일 병환으로 40세에 갑자기 세상을 뜬다. 요즘으로 치자면 늦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해 사무관 실무수습을 하다 그 정치적 포부를
채 펴보지도 못하고 사망한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묘가 단출한 것도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탁(李允濯)의 묘는
서울시에서 일반 사대부 묘역으로는 가장 먼저 1978년 서울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왕릉은 물론이고 정승 · 판서 · 공신들의 묘역, 그것도 세장묘(世葬墓, 4~6代의 묘들이 한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묘역)가 즐비한 서울에서 從9品 벼슬을 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한 젊은 수습관료의 묘역이 다른 유명 고위관료 및 학자들의 묘역을 제치고 가장 먼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면
그 묘역에는 뭔가 특이한 문화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묘역 내 영비각(靈碑閣)에 모셔져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한글고비(古碑).
돌아가신 분(亡者)을 추념하기 위해 분묘 앞에 세운 일종의 표지석이라는 점도, 6품 이하 관료의 묘 앞에 세워진 것이어서 비 몸돌(碑身이라고 한다) 위 부분이
약간 모가 나긴 했으나 약간 둥그스름하게 깎인 모양으로 조성되었다는 점도
다른 묘역의 그것과 대체로 같다.
그 밖에 방부(方趺, 사각의 받침돌)에 비신을 끼운 수법이라든지
그 크기도(비 몸돌 높이 143.5cm, 폭 64. 5cm, 두께 19. 3cm)
다른 일반 관료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비문의 구성도 다른 비문에 비해 크게 특색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묘갈에 관례적으로 기록되는 것들인 묘주(墓主)의 가계(家系),
생몰연대, 관력(官歷)과 성품, 직계자손, 묘의 이장 경위와
묘갈 건립연대 등이
한글고비에도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묘갈은
1926년『대동기문(大東奇聞)』 권2 둘째면에
「이문건 영비(李文楗 靈碑)」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진 이래 일반시민들은 몰라도
국문학자와 언론인들, 문화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줄곧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다면 그것은『대동기문』에 기록된 아래의 내용대로 단지 영험한 비였기 때문이었을까?
후손이 먼 곳(이문건 후손의 주 근거지는 충북 괴산임)에 에 있어 오래도록 돌보지 못하고
甲이라는 사람이 점유하면서 풀과 나무를 베니 이윤탁의 묘갈이 나타났다. 완연 새 것이라.
산 아래 사람들에게 甲이 점유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훼손이 안되었더냐고 물었더니
주민이 말하기를 “병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기도하면 효험이 있었고 나무꾼이 혹 그 돌조각에
해를 입힐 양이면 재앙이 있었다. 영험함이 이와 같은데 그 누가 훼손할 것인가?”라고 했다.
그러나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다른 측면이었다.
이 비를 만들고 비문을 새긴 이윤탁(李允濯)의 막내아들 묵재 이문건(默齋 李文楗 , 1494~1567)으로
인하여 이 묘갈이 갖게 된 몇 가지 파격에 그들은 시선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글고비는 얼마만큼 특별한 묘갈인가?
먼저, 한글고비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한글 비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유일한 한글비이기도 하다.
독자적인 우리의 글이 없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금석문으로 알려진「광개토대왕비문」도,
진흥왕의 한강유역 장악이 기록된「북한산진흥왕순수비」도
사실 모두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글은 사대부들에 의해 중글 · 암클 등으로 비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 평민도 아닌 사대부가, 그것도 편지글도 아닌
부모님의 묘 앞에 비를 세우면서 한글로 된 비를 세워 놓았으니 비 건립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한글고비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비의 앞과 뒤, 그리고 우측면에 한문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한글고비 좌측면에 순수 한글로 쓰여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계글은
16세기 한글 고어와 서체를 연구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금석문 자료였던 것이다.
또한 한글고비는
묘갈이나 묘비, 신도비 등 망자(亡者)를 추념하기 위해 세우는 각종 석비의 비문 중에서
단연 독창적이고 개성적이다.
묘갈에 관례적으로 적는 글 뒤에 부모를 잃은 애통함과
이 묘지가 영원히 조성된 자리에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로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문에 이처럼 솔직하게 찬자(撰者)의 마음이 담겨진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묘갈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좌우측면에 다른 어떤 묘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다음과 같은 동일한 내용의 경계문이 한글과 한문으로 각기 적혀 있다는 점에 있다.
지방마다,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자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며
그들을 추념하는 의식과 태도는 각기 조금씩 다 다르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보수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분야가
바로 이 상례(喪禮)라고 한다.
따라서 상례와 결부된 부분들은 자칫 형식화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묘갈 하나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한글고비에게 이 세상 빛을 보여준 장본인인 이문건은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도 그리 하지 않았다.
그는 부모의 백(魄)이 묻히고 혼(魂)이 깃든 묘역이 훼손당할 것을 염려하여 비 뒷면 끝에 한시를 지어 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좌우로 다시 식자층과 한자를 모르는 사람 양쪽을 겨냥, 절대로 이 비를 건드리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는 글을 써 놓았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도 이렇게 독특하게 표현해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파격으로 인해 한글고비는 정2품 고위관료나 공신, 석유(碩儒)들의 분묘 동남쪽
발치에 거대규모로 조성된 여러 신도비를 제치고 가장 먼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또한 묘갈 단독으로 문화재 지정이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사례라는 진귀한 기록도 갖는다.
■ 사연있는 남자, 이문건
그렇다면 근엄한 조선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묘갈을 만든 이문건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비문을 세울 만큼 어떤 기막힌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유명인사였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송시열의『이문건 행장(行狀)』등에
이문건은 매우 강직하고 효심과 우애가 깊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나와있다.
송시열은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사(賜死)되자
그 문인들마저 해를 입을까 두려워 문상하기를 꺼려했는데
이문건만은 그 형 충건(忠楗)과 함께 문상할 정도로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또『중종실록』을 보면
이문건은 중종의 두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禧陵) 조성 당시
장경왕후 소생의 세자(훗날 인종)를 해하고 다른 왕자(福城君)를 세자로 세우려는 경빈 박씨와 그 추종자들이 광(壙)을 파면서 그 속에 큰돌이 박혀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대로 능을 조성하였으므로 정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고 능을 이전할 것 등을 왕 앞에서 주장,
한동안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 때가 중종 32년(1537)이니 기묘사화(1519년)로 사림의 세력이 한풀 꺾인 시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과감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효행 또한 각별했던 모양이다.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며 직접 탕제를 달이고
어머니가 가야금 타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니 늦은 나이에 가야금까지 배웠다고 한다.
또 서법(書法)에도 능해 중종의 시책문(諡冊文, 제왕의 시호를 올릴 때 덕행을 칭송하여 짓는 글)을 쓰기도 했다. 관직도 승정원 승지(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올랐으니
그는 살아 생전에 이미 강직하고 효성스러운 성품과 글씨와 관직으로 유명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보다 오히려 오늘날 더 '떴다.'
그것도 한글고비와 그가 쓴 일기(『묵재일기(默齋日記)』라고 불림)가
오늘날의 그의 유명세를 만들었다. 그는 일기에다 별의별 것들을 다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기에서 드러나는 이문건의 모습은
앞서와 같은 책에서 드러나는 비장하고 근엄한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그의 다양하고 개성적인 면모와 생활의 일부를 약간만 맛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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