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명동성당 - 신비와 경외의 대상 뾰족집

Gijuzzang Dream 2010. 11. 26. 14:54

 

 

 

 

 

 

 

 

 

 

 명동성당

 

신비와 경외의 대상 '뾰족집'

 

 

 

 

조선교구장이던 주교 블랑(Blanc)의 주도로 성당 건립 시작

 

명동성당(옛 종현성당)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본당이자 상징으로서

정식명칭은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다.

현재 중구 명동2가 1-8에 위치하고 있고, 1977년에 사적 제 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재단법인 천주교 유지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1층, 면적 1,453㎡의 우리나라 유일의 순수 고딕양식의 벽돌조 건물로서,

고종 29년(1892)년에 착공하여 1898년에 준공되었다.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한성부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종현(鐘峴)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고종 19년(1882)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주교 블랑(Blanc)의 주도아래

1883년 김까밀로 회장의 명의로 종현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면서 성당 건립은 시작되었다.

 

우선적으로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학당을 설립, 운영하였다. 그러나 성당건립 공사는 지지부진하였다.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당시 조선 정부와 마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격적인 정지작업은 1890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주교는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성당 건립과정에 무보수로 건축공사에 참여하거나 헌금한 신도 1,000여 명과

조선에서 사역한 선교사 명단을 이 성당의 머릿돌과 함께 묻었다.

설계와 공사감독은 파리외방선교회 코스트(Eugene Coste, 한국명 고의선)신부가 맡아 진행하였고,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건축의 기술자가 없었으므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은 중국인들이 담당하였다.

공사 도중인 1896년 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별세하여

프와넬(Poisnel, 한국명 박도행)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착공한지 6년만인 1898년 5월에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고 같은 달 29일에 준공식을 가졌는데 이때의 이름은 '종현성당'이었다.

 

공사비는 총 6만 달러가 든 대공사였으며(당시 성인의 한 달 급료를 달러로 환산하면 약 4달러였음),

총길이 68.2m, 폭 29.2m, 건물 높이 23.4m, 십자가를 제외한 종탑 높이 46.7m였다.

건축 당시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벽체와 기둥은 벽돌 조적조이며, 종탑과 뾰족탑은 목구조이다.

벽돌조는 적벽돌과 회색벽돌을 혼용하였는데, 다양한 이형벽돌을 사용하였다.

 

건물은 경사진 구릉의 산봉우리를 깎은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형과 진입로에 따른 주변 여건에 의하여 출입구 정면을 북북서에 두고 있으며,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진입로보다 약 13m 높아서,

성당은 주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중심적이고 우월한 모습을 하고 있다.

 

 

 

구한말 사진에서, 서울에서 제일 찾기 쉽고 우뚝 선 건물이 종현성당

 

종현성당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뾰족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성당을 보기 위해 연일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구한말 사진을 보면 서울에서 제일 찾기 쉽고 우뚝 선 건물이 바로 이 종현성당인 것이다.

 

1900년 9월 조선 정부에 의해서 자행된 천주교도 대학살 사건인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 때

죽음을 당한 일부 신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1942년에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신부의 수품식(천주교 사제가 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명칭이 종현성당에서 명동성당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동성당 일대는 성당을 중심으로 천주교 관련 건물들이 집합되어 있다.

계성여고, 카톨릭회관(전 성모병원), 주교관, 사제관, 수녀원, 문화관, 교육관 등이 있다.

문화관은 지은 지 62년 된 옛 문화관과 성물 판매소가 있던 옆 건물을 합쳐 2002년 3월에 개축되었다.

문화관 내에는 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의 공적을 기려 ‘코스트 홀’, ‘소성당’, ‘명례방’ 등이 있으며

폐백실과 지하에 영안실이 같이 있어 결혼, 장례, 공연행사, 교육 등 다목적 복합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성당 뒤편으로 1979년경에 건립된 사제관이 있는데

성당과 사제관 사이 길에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의 동상이 서 있다.

 

명동성당은 1970년, 80년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국 사회의 인권 신장 및 민주화에 대입시킨 성지로서 자리매김한 곳이었다.

이제는 기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로 세상을 향하고 있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09.20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