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구 러시아공사관

Gijuzzang Dream 2010. 11. 26. 14:31

 

 

 

 

 

 

 

 

 

 구(舊) 러시아공사관

본 건물은 없어지고 탑신만 남아

 


 

구한말 정치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역사적 장소...을미시해 사건 이후 고종이 이곳에 피신

 

중구 정동길에 있는 이화여고 북문 건너편 예원학교를 끼고 골목길로 오르다보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하얀 집이 서 있다.

언덕위에 하얀 집, 마치 노래 가사 같지만 자세히 둘러보면 3층 탑형태의 건물이다.

안내판에는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본 건물은 없고 탑만 있어

구 러시아공사관이라고 해야 할지, 러시아공사관 터라고 해야 할지 애매모호하지만

건물이 완전히 없어지고 터만 존재하는 경우는 공사관 터가 맞지만

그나마 건물 일부가 남아 있으니 구 러시아공사관이 이치에 맞다고 본다.

 

이 유적이 구한말 정치사의 핵심이자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교과서에 보면 1896년의 사건으로(이를테면 현재 매년 말 일간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한 해 동안 일어난 10대 뉴스나 사건 중의 하나로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뜻 그대로 왕이 도성을 떠나 아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뜻인데

여기서 아관은 구한말 당시 러시아를 한자(漢字)로 '아라사(俄羅斯)'라고 표기했던 데서 연유하여

러시아공사관을 줄여서 아관으로 지칭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을 말한다.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1895년에 일어난 경복궁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시해가 직접적인 원인이다.

을미시해 후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은 친일내각의 출범과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불안과 신변 위험을 느낀 고종을 당시 이완용, 이범진 등 친러파 대신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모의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던 것이다.

 

공사관이 설치된 것은 조선과 러시아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1884년 이듬해인 1885년(고종 22) 10월이다.

이 건물은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였으며, 1885년에 착공하여 1890년(고종 27)에 준공되었다.

러시아의 건축양식에 따라 신축하였으며, 매우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였다.

이 건물이 지어질 때에는 시내 중심가의 높은 곳에 세워졌으므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탑신 지하광장은 댄스홀로 쓰이기도…‘로스께 할아버지’ 책에 소개된 일화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자 그 여파는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으로도 파급이 되었다.

러시아 공사 부부와 공사관 직원 등은 인천항을 통해 러시아로 강제 송환되었고,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광복 후 공사관은 한 때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된 바 있고,

한국전쟁 때 벽돌조 2층의 본관 건물은 소실되고 탑 부분과 지하층 일부가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 공사관의 모습에 대한 웃지못할 일화가 있다.

1950년대부터 50년간 공사관을 무보수로 내 집처럼 돌보고 관리해온 장기원 옹을

서울신문 라윤도 기자가 취재하고 발간한 ‘로스께 할아버지’ 책자와

2002년도에 필자가 직접 장기원 옹을 만나서 들어본 내용 중에서 발췌해 보았다.

 

“러시아공사관 터 아래쪽은 마치 벽돌공장 창고처럼 땅만 파면 은회색 벽돌이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판잣집을 짓거나 또 내부 수리에 쓰기 위해 닥치는 대로 그 벽돌을 캐 갔다.

심지어 물역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리어카를 대놓고 대량의 벽돌을 캐다가 팔기까지 했다.

그대로 놔두면 가까스로 남아있는 공사관의 탑신마저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탑신 밑에는 약 4~5평 정도의 지하광장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어느 약삭빠른 사람이

댄스교습소를 차려 놓아 낮 동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렇다 할 성인 오락실이 없는 상황에서 이 댄스홀은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땅위의 둥근 맨홀 뚜껑같이 생긴 문을 열고 쇠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 그 댄스홀은

완벽한 방음시설을 해 놓은 것처럼 소리가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아 최고의 장소였다.

댄스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변 식당이나 구멍가게의 물건들을 제법 팔아주었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반겼다.

 2층 높이의 탑 위에는 그 좁은 공간에도 4세대가 살고 있었다.

각각 담요 같은 것으로 휘장을 두르고 칸막이를 한 채 살았는데 그 옹색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살고 있었기에 전쟁 후 그 탑이 헐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 시내에서 적성국가의 공사관 탑이나마 헐리지 않고 현상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조그마한 에피소드도 작용한 것 같아 영 마뜩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1973년에 서울시에서 남은 건물만 보수하면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하였고,

1977년 국가 사적 제 253호로 승격시켰다.

서울시에서는 1981년 10월 건물을 재보수하고 주변을 조경하여 시민공원으로 조성하였으며,

현재 서울시 중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09.30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