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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 조선인의 민의(民意)를 대변했던 공간

Gijuzzang Dream 2010. 11. 26. 14:37

 

 

 

 

 

 

 

 

 

천도교 중앙대교당

조선인의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공간

 


 

천도교 중앙대교당 옛 자리에서 3.1 독립운동 거사 추진이 이루어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며, 일제 때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현재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수운회관 뒤쪽에 위치하고 있고,

1978년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재단법인 천도교 유지재단이 관리하고 있다.

 

천도교 본부인 천도교 중앙총부의 옛터는 현재 종로구 송현동에 있는 덕성여중 교정 자리에 있었다.

옛 자리에서 1919년 3․1 독립운동 거사 추진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2월 24일 천도교 측의 손병희와 최린이 기독교 측의 이승훈, 함태영과 만나

독립운동 거사의 일원화를 최종 확정하였던 것이다.

 

대교당 건립의 필요성으로 1921년 현재의 장소로 신축해서 이전하였고, 남아 있던 대교당 건물은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전문학교에서 1934년 9월까지 교사(校舍)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옛 건물은 사라진 채 덕성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천도교는 조선시대 말기 혼란한 사회상 가운데 서학 천주교의 유입은 서민층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 동학이다.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시하였다.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의 3대 교주로서,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현재 덕성여중 교정에 있던 옛 중앙대교당에 대한 신축은 손병희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당시 일제는 교당이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구실을 붙여

건축을 불허하였다. 그래서 절반으로 줄여 겨우 허가를 받아 1919년 봄에 착공하였고,

같은 해 7월 일본인 나까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에게 건축설계를 의뢰하여 1921년 2월 28일 준공되었다.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에 양식 건축 경험이 없다보니

시공은 중국인이, 총감독은 일본인이 맡았다.

 

지상 2층 그리고 탑부 4층의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 구조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서울의 명동성당, 조선총독부 청사와 서울을 대표하는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공사비는 당시 화폐로 22만원이 소요되었다.

 

 

민족 종교 전파하고, 어린이 운동 펼친 민족문화의 산실

 

건물 정면은 좌우 대칭이다. 기단부는 화강석을 볼륨 있게 사용하였다.

4면 모두 기초부에 는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적색 벽돌로 벽체를 구성하였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의 반원 아치를 들여쌓은 출입문을 두었고, 정면 중앙에 탑이 서 있다.

이 탑의 중앙부에는 반원 아치의 큰 창이 있다.

평면은 T자형으로, 일반적인 기독교 예배당과는 구조 자체가 다르다.

특히 이 건물이 계획되던 1910년대 말에는 이미 천주교의 대성당인 명동성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명동성당이 정통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것에 비하여 이 교당은 절충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명동성당을 능가하려는 의지가 중앙탑을 중심으로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박달나무 꽃과 무궁화 등을 조각하였다.

수용인원은 대략 800명에서 1,000명 정도이다.

 

교당은 천도교의 중심 건물의 역할 뿐만 아니라 민족 종교를 전파하고,

어린이 운동도 펼친 민족문화의 산실이었다.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종교집회뿐만 아니라

조선물산장려회 강연회를 비롯한 각종 집회가 열려

종로 YMCA강당과 더불어 조선인의 민의(民意)를 대변하는 공간으로 각광을 받았다.

 

교당은 천도교의 종교의식과 일반 행사를 하는 곳으로서, 성당이나 교회당같이 절대 신성시되지 않는다.

즉 각종 종교의식을 행할 때만 성스러운 공간이 되고, 그 외에는 일반적인 행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집회, 예술 공연, 강연회가 가능하고 심지어는 연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서울시내에 변변한 결혼식장이 없을 때 결혼장소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 대교당이었다.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고 하객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선남선녀들의 결혼식 장소로 간택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대교당 건물은 창호 공사를 위해 보수작업 중으로 건물 전면에 비계를 설치하고 있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09.20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