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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지원한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집 - 딜쿠샤

Gijuzzang Dream 2010. 11. 26. 14:15

 

 

 

 

 독립운동 지원한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집

 

  - 딜쿠샤(DILKUSHA)

 

 

 

 

 

 

 

희망의 궁전 딜쿠샤(DILKUSHA)

 

 

'딜쿠샤(DILKUSHA)',

이건 뭔가? 이름인가 단어인가 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본다.

 

서울의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마당에 웬 딜쿠샤?

당연히 딜쿠샤는 생소한 단어이다.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딜쿠샤는 힌두어이며, 그 뜻은 ‘행복한 마음’ 이다.

 

딜쿠샤는 현재 서대문구 행촌동 사직터널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는 서양식 붉은 벽돌집의 명칭이다.

그러면 딜쿠샤는 과연 누가 살았고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느 시대 소산일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와 부인 메리 테일러 부부가 살던 개인 주택이다.

이 주택은 1923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앨버트 테일러가 지어서 1942년까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여러 가옥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으로 변모하였다.

딜쿠샤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 집의 주인공인 앨버트 테일러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미국인으로서 금광개발업자이자 UPA(UPI의 전신)의 한국 특파원으로 1910년부터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3․ 1 독립선언과 제암리(현재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외부에 알려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다.

특히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서 발견한 3․ 1 독립선언서를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가

일제의 눈을 피해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석방된 후 테일러는 미국으로 추방되었으며,

1948년 숨을 거둘 때 사랑하는 한국 땅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부인인 메리 테일러는 남편의 유골을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소에 안장하였다.

 

 

독립시위 하는 현장에서 생사 초월하여 독립운동 지원

 

앨버트의 부인 메리 테일러(Mary Taylor)는 화가이자, 작가였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메리는 서울에서 사는 동안 가난한 이웃들의 모습과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녀가 쓴 회고록은 작가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호박구슬처럼 엮어진 한국에서의 삶과 모험으로 가득찬 그녀의 생애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고록 『호박목걸이의 이야기(CHAIN OF AMBER STORY)』의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 브루스(앨버트의 애칭)와 나는 건축업자와 함께 은행나무까지 가파른 언덕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우리는 잠시 멈춰서 숨을 좀 고르며 새 집을 지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집 터 언덕 뒤로는 웅장한 북한산이 버티고 있고, 서쪽으로는 페이킹 패스(현 의주로)와 독립문이 보이며

동쪽 계곡 아래로는 서울의 옛 성곽과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중략)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머릿돌에 우리 집 이름을 새겼다.

나는 인도에서 ‘딜쿠샤 궁전’을 본 순간부터 우리 집에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을 꿈꿔 왔다.

“희망의 궁전, 딜쿠샤!”

커다란 화강암 주춧돌 위에 올라서면 한국이 화강암처럼 단단한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망의 궁전, 딜쿠샤) -

 

 

- 바로 그날 첫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병원에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병실 문이 계속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는 내 방에 사람들이 숨어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때 수간호사 선생님이 아이가 아니라 종이 한 뭉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그 종이뭉치를 내 침대보 밑에 밀어 넣었다.

병원 밖 도로는 혼돈 그 자체였으며, 비명소리와 총성이 때때로 들렸는데

끝없이 반복되는 커다란 외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만세!만세!”소리였다.

병실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잠에서 깨었는데 브루스가 침대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은 내게 키스하고 어색하게 아이를 안다가 내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종이 뭉치를 발견하였다.

그는 갑자기 아이를 내려놓더니 급히 아직 빛이 남아있는 창가로 가 그 문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이건 독립선언서잖아!” 그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장담컨대, 그날 밤 신참 특파원 브루스는 자기 후계자, 첫 아들이 태어난 것보다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일에 더욱 더 흥분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 브루스는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서 사본을 구두 뒤축에 숨기고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게 했다.

선언서 발행 금지 조처가 내려지기 전에 브루스가 쓴 기사와 함께 미국으로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이건 독립선언서잖아!) -

 

 

앨버트 테일러는 딜쿠샤를 지으면서 건물 초석에 ‘DILKUSHA 1923'라고 새겼다.

꿈에 그리던 이상향 한국땅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는 일제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던 당시로서는 큰 모험을 하였던 것이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독립시위를 하는 현장에서 생사를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일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수감생활도 하였지만 그것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한국 땅에 자기의 시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 앨버트 테일러.

비록 벽안의 외국인이지만 그의 숭고한 삶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11.18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 더 보기

 

[서울역사박물관] 세 이방인의 서울회상(回想) - 딜쿠샤에서 청계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