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탑골공원과 원각사(圓覺寺)

Gijuzzang Dream 2010. 11. 26. 15:01

 

 

 

 

 

 

 

 

 

 탑골공원과 원각사(圓覺寺)

3·1만세운동의 시원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혼(魂) 살아 있어

 

 

 

원각사, 조선 세조가 조계종 본산이었던 흥복사 터를 확장해 건립한 사찰

서울의 중심부 종로 2가 38번지 1호에 소재하고 있는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초기 평지 사찰이자 왕실사찰인 원각사가 있었던 곳이다.

 

서울에는 원각사라는 이름의 문화유적이 두 군데 있었다.

첫 번째는 사찰인 원각사(圓覺寺)이고,

두 번째는 개화기 사설 극장인 원각사(圓覺社)로

1908년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세워져서 1914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근대연극 전문극장이었다.

원각사는 조선시대 세조가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조 11년(1465)에 건립한 사찰이다. 전체 면적은 현 공원 면적의 수배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웅장하고 화려한 전각과 조각으로 당시 한양에서 최고의 사찰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 공원 내 북편에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자연재해로 탑이 부식될 우려가 있기에 현재 유리 막 안에 보호되어 있다), 동편에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34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원각사는 연산군 이후 폐사되기 시작하면서 황폐화되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 잠시 민가가 들어섰으나, 2차례 화재가 발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

폐허로 방치되다가 이후 광무 원년(1897년)세관 업무를 맡은 영국인 고문 브라운(J. M. Brown)의 건의로

당시 대한제국 내부 토목국장이던 남궁억(南宮檍)이 지휘, 감독하여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을 건립하고

원각사탑의 이름을 따 '파고다공원'이라 칭하게 되었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 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하였다.

당시 공원 중앙에 건축되었던 팔각정은 현재까지 남아 있어 서울시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1902년 개원한 파고다공원은 1967년부터 유료공원으로 운영되다 1987년 무료공원으로 개방되었고,

1992년 5월 탑골공원으로 개칭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족대표인 의암 손병희 동상, 만해 한용운 대선사 기념비 등이 민족정신 고양

특히 탑골공원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시원지(始原地)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혼이 살아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1919년 3월 1일 공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4천~5천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모여 들었는데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바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고 당일 모인 학생의 대표였다.

민족대표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멀리 떨어진 현재 종로 2가 공평동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입구에 있던

태화관에 모여 있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도 공원 내부에는 민족대표인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의 동상과 불교의 만해 한용운 대선사의 기념비,

3 ․ 1운동 기념탑과 기념 조각 등 당시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석물들이 있어서

숭고한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최근 무료 공원으로 개방되면서 이용객이 급증하여 점차 슬럼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민족의 성지이자 중요한 문화유산인 탑골공원은 점차 제 모습을 잃어가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공원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여 탑골공원을 성역화하고자

2001년 대원각사비에 서술된 원각사의 건물 배치를 확인하고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 시행에 따른 유적 보존방법과 사업계획 수립을 위한 사전 문화재 조사의 일환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 지역은 전반적으로 문화재 훼손이 심한 상태로

원각사와 직접 관련된 자취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원각사가 폐사된 이후 계속 공터로 남아 있으면서

특히 근대에 이르러 원각사 터에 공원 조성공사 시행으로 인해

옛 지형의 무분별한 굴착과 복토, 매립 등의 행위가 반복되면서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원각사의 주요 건물이 현재의 탑골공원 경계 밖에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에 보면 “원각사의 둘레가 2,000보”라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원각사지 10층 석탑 주변은 대광장의 기능을 하는 공터이고,

덧붙여 『세조실록』에 원각사 준공 때 공식적으로 참여한 승려가 120명이었고,

일반 승려도 2만 명을 헤아렸으며, 세조와 성종이 자주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시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보면

그 공간의 중심지는 현재 원각사지 10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사찰은 기본적으로 예배와 교육의 공간인 당(堂)과 사리를 보관하는 탑(塔)이 기본 시설이므로

원각사탑이 있다면 탑 주위에는 본당이 있게 마련인데

조사결과 본당 건물은 현재의 인사동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낙원상가를 짓기 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를 하였다면

아마 상당수의 원각사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09.09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