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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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현재 서울시의회 의사당

Gijuzzang Dream 2010. 11. 26. 14:06

 

 

 

 

 경성부민관(京城府民館)

 

김두한이 오물을 투척한 그곳, 현재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

 

 

 

 

조문기 등 청년 중심의 대한애국청년당이 부민관 폭탄의거 주도

 

경성부민관(이하 부민관)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지금의 중구 태평로1가 60번지 1호에 세워진 공연장 겸 시민회관으로서,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기탁한 공공사업시설비로 지었다.

대지 1,486평에 건평 584평이며 대강당 · 중강당 · 소강당 · 사교실 · 식당 등을 갖추고 있고,

특히 대강당에 해당되는 곳은 지상 3층, 탑부 9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연회 때 최대 3,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남쪽에 주 건물보다 높은 수직 탑부를 배치한 것은 시내 어느 곳에서나 시야에 들어오도록 하여

발전하는 경성을 상징하고자 하였던 일제의 의도였다.

 

부민관은 한국전쟁 후 미군이 사용하다가 철수하자,

1954년 6월 3대 국회부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고,

1975년 국회의사당이 여의도로 이전하자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이용되었다.

1980년에는 태평로 확장 과정에서 정문과 현관 등 280평이 헐렸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에 따라 서울시의회가 구성이 되어 현재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 5월 31일에 구 부민관은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부민관은 1945년 7월 24일 조문기 등이 주도한 폭탄의거의 현장이었다.

부민관은 당시로는 드물게 냉난방 시설과 조명, 음향시설을 갖추어,

각종 극단의 공연은 물론 전시총동원 체제 아래 각종 관변 집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전쟁을 확대하여 군국주의를 강화해 가자

이곳에서는 한국인들의 황민화(皇民化)를 부추기는 각종 정치집회와 공연 · 예술행사가 열렸다.

유명한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 등이 학병 지원을 권유하기 위해 연설회를 개최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부민관 폭탄의거는 그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의거를 주도한 조문기, 유만수, 우동학 등 당시 20세 안팎의 청년들은

1945년 5월 서울 관수동 13번지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당의 노선과 방향을 항일투쟁으로 삼았다.

 

 

한국전쟁 이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수많은 정치파동과 우여곡절의 현장

 

1945년 7월 24일 저녁 부민관에서 친일파 거두인 대의당(大義黨)의 박춘금 일당이 주최하는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보도가 언론기관을 통해 전파되었다.

박춘금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인을 색출한 공로로 중의원 의원까지 역임한

대표적인 친일파이고, 그가 조직한 대의당은 황도실천(皇道實踐)과 총후보국(銃後報國)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친일단체였다. 이 당에 가담한 주요 인사로는 앞서 언급한 춘원 이광수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발표한 시인 김동환,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1919년 「창조」의 동인이자 해방 후 장면(張勉)정권에서 상공부 장관을 지낸 시인 주요한 등이었다.

 

조문기 등은 비밀 회합을 갖고 대회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유만수가 수색변전소 공사장 발파 인부로 침투해 빼낸 다이너마이트로 사제폭탄 2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밤 대회장 뒤편 화장실 쪽에 설치하였다.

폭탄은 대회 당일인 7월 24일 밤 9시 경 박춘금의 강연이 끝나고 웅변대회가 시작될 무렵

폭탄 2개가 연단에서 폭발하여 대의당원 1명이 현장에서 폭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는 부민관 일대는 물론이고 경성 일원에 비상을 선포하고 범인 색출에 광분하였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고, 사건의 전말은 해방 이후에 밝혀졌다.

특히 해방되기 1달 전에 경성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의거로서

꺾이지 않는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과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사건이었다.

 

부민관은 한국전쟁 이후 국회의사당으로 이용되면서

수많은 정치파동과 우여곡절의 현장의 산 증인으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아직도 세인의 뇌리 속에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있는 예를 들어보면,

우선 1958년 8월 자유당이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려 하자

야당인 민주당이 이곳에서 보안법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당시 유명한 야당 투사였던 조병옥, 민관식, 곽상훈, 유진산 의원 등이 무술경관에게 끌려 나간 일이 있었고,

1960년 4월 18일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고려대 학생 3,000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였고, 이 데모는 급기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66년 9월 22일 재벌밀수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가 진행 중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무소속의 김두한 의원이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두한이 누구인가?

장군의 아들, 종로 우미관 극장 주먹패 보스이자 건달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인물이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 의원은 의원직 제명과 더불어 국회의장 모욕과 공무 집행 방해로 구속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민관은 민의의 현장이자 한국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서,

일제의 집회장에서 해방 후 국회의사당을 거쳐 지금은 서울시의회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세월은 흐르고 사용자는 매번 바뀌어도 꿋꿋이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국민의 뜻을 겸허히 수용하는 장소로 오늘도 의연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11.25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