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인물 특별전 - 원효대사

Gijuzzang Dream 2010. 11. 22. 09:53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

 

  원효대사(元曉大師

 

 

 ■ 전시기간 : 2010년 9월 16일 ~ 11월 21일
■ 전시장소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판비량론(判比量論)』은  9월 16일~10월 24일까지 35일 동안만 전시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을 기획하고 그 첫 번째로

‘한마음(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으로 통일신라 사상 발전의 초석을 닦았고,

누구보다 '무애(無碍)'의 삶을 실천한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를 조명하는 전시를 갖는다.

 

 

 

전시는 이러한 원효대사의 삶을 다채롭고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원효대사의 독백 형식을 빌려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대기를

연표와 관련 자료를 모아 도입부에 전시하였다.

두 번째로,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승되고 그의 모습이 어떻게 후세에 인식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원효대사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진영(眞影)들을 전시하였다.

세 번째로, 원효대사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의 다양한 저술들을 모았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물론 후대에 원효대사가 어떻게 평가되고 계승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2009년 가을 200여 년 만에 재발견된 문무왕릉비편(文武王陵碑片)을 최초 공개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과 동국대학교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는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웠던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도 처음으로 함께 전시한다.

원효대사 저술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전시품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일본 오타니대학(大谷大學) 소장의 『판비량론(判比量論)』이다(8세기 필사본).

원효대사가 55세 때인 671년 행명사(行名寺)에서 저술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최초 공개이다.

이 밖에도 『이장의(二障義)』,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등

국내에 없는 원효의 저술도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되며,

아울러 모사본이지만 일본 고산사(高山寺) 소장의 원효대사 진영(眞影)과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도 눈여겨 볼 만하다.

 

 

원효대사는 617년 압량군(지금의 경산) 남쪽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 무렵에 출가하여 낭지(朗智), 혜공(惠空), 보덕(普德) 등 뛰어난 스님에게 배웠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도반(道伴)이 된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와의 만남은

커다란 전기가 되었는데,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오르고 그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유학을 포기한 원효대사는 요석공주(遙石公主)와 인연을 맺고, 설총(薛聰)을 낳고 환속하였다.

속세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저잣거리와 주막, 기생집을 돌며 대중과 함께하고 그들을 깨우치는데

온 힘을 쏟다가 686년 혈사(穴寺)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원효대사는 저술가이자 사상가로서 매우 유명하다.

일생에 걸쳐 15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원효대사의 삶과 저술을 요약한다면,

‘한마음(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의 사상이라고 하겠다.


신라 때는 물론이거니와 요즘도 원효대사는 우리 곁에 존재한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절이 국내에 100여 곳에 이르고

원효로, 원효대교처럼 길이나 다리 이름에도 ‘원효’가 있다.

이처럼 원효대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번 특별전이 원효대사와 시공을 뛰어 넘어 만나고, 대화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 기념 강연

 

일 시

강 연 자

주 제

1

9.18.(토) 14:00~16:00

김상현

(동국대학교 사학과)

원효 화쟁사상의 현대적 의미

2

9.29.(수) 14:00~16:00

西山 厚

(일본 나라국립박물관)

『화엄종조사회전』

- 의상, 원효, 그리고 明惠

3

10.23.(토) 16:30~18:00

宮崎 健司

(일본 오타니대학)

『판비량론判比量論』에 대하여

4

11.13.(토) 16:30~18:00

남동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원효의 저술과 사상


 
 
 
 
 
 
 
 
 
 
 
 
 
문무왕릉비편 앞면 문무왕릉비편 뒷면
문무왕릉비편(文武王陵碑片) / 좌 : 앞면, 우: 뒷면
높이 45.0cm, 682년, 2009년 발견


 

 

 

 

 

 

 

 

 

 

 

 

 

 

 

 

 

 

 

 

 

 

 

 

 

 

 

원효대사 진영

원효대사 진영(元曉大師 眞影)
비단에 채색, 102.1×52.6cm, 무로마치시대(133.6~1573), 일본 고산사 소장
※ 모사본(2010년 국립경주박물관 제작) 전시

 


판비량론1

판비량론2

판비량론3 

판비량론(判比量論)
원효(元曉, 617~686), 27.2×178.2cm, 8세기 필사본,

일본 오타니대학(大谷大學) 박물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사진 왼쪽 끝 부분은 원효가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를 밝힌 발문(跋文)이다.
이에 따라 판비량론을 함형(咸亨) 2년(671) 7월 16일 행명사(行名寺)에서 탈고했음을 알 수 있다.


 

이장의
이장의(二障義)
원효(元曉, 617~686), 23.2×16.2cm, 에도시대(江戶時代) 필사본,

일본 오타니대학(大谷大學) 박물관 소장

 

 

 

 

 

1.

탄생(誕生)

부처님 땅,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난 아이

석가모니의 열반을 지켰던 사라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아이

깨달음을 얻을 운명을 타고난 아이

그 이름, 새털 또는 서당(誓幢)

 

선지식(善知識)

눈 속의 먼지를 닦아줄 스승을 찾아 나선 청년

영축산(靈鷲山) 낭지(朗智)스님께 배운 법화경(法華經)

반룡산(盤龍山) 보덕(普德)스님께 배운 열반경(涅槃經)

운제산(雲梯山) 혜공(惠空)스님께 배운 무애행(無碍行)

그리고 영원한 도반(道伴), 의상(義湘)

 

오도(悟道)

젊은 날 당(唐)나라로 떠난 유학 길

큰 비 만난 어느 날 저녁

토굴에서의 꿀맛 같던 잠

어슴푸레 동틀 무렵

해골이 뒹구는 무덤임을 알아채고

결국 모든 것이 오직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승려, 원효(元曉)

 

파계(破戒)

오랜 수행 끝

남산에서 내려와 월정교를 건너다 물에 빠진 원효

요석공주와의 숙명적 사랑

그리고 설총(薛聰)의 탄생

범부(凡夫), 원효(元曉)

 

환속(還俗)

높았던 콧대를 꺾고

한없이 낮은 곳으로 임한

거사(居士), 소성(小姓)

 

교화(敎化)

거리에서 무애가(無碍歌)를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싣고 가는 수레가 되었던

중생이 걸어갈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되었던

보살(菩薩), 원효(元曉)

 

학문(學問)

경전(經典)마다 써내려간 주석(註釋)과 논소(論疏)가

책 상자 가득하였던

대학자(大學者), 원효(元曉)

 

입적(入寂)

일흔, 봄향기 가득한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던 토굴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 듯

혈사(穴寺)에서 영면(永眠)한 원효(元曉)

 

 

2.

三界唯心 萬法唯識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모든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이다.”

(원효대사가 무덤의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우칠 때 한 말.)

 

 

3. 치열했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의 삶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은 새털(서당, 誓幢)이라고도 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이 일어난 7세기를 살아간 인물.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 신비로운 탄생, 깨달음, 요석공주와의 사랑,

춤과 노래로 중생을 구제한 거리의 성자, 15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위대한 학자”

 

(1) 새털, 세상의 빛을 보다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신라를 다스리신지 39년이 되던 해(617년)

신라의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압량군(지금의 경산) 남쪽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왕족은 아니지만 경주에 살던 귀족이었다.

성은 설(薛)씨고,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인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는 나마(奈麻) 벼슬을 지내신 담내(談捺)라는 분이고,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

어머니가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산기(産氣)를 느끼자 아버지가 나무에 옷을 걸쳐 낳을 곳을 만들고 그 곳에서 낳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고 하고

거기서 난 밤을 사라율(娑羅栗)이라고 불렀다.

원효대사의 어릴 때 이름은 ‘새털’이다. 한자로 쓰면 ‘서당(誓幢)’이라고도 한다.

법흥왕(法興王, 514∼540)이 불교를 공인할 때 큰 공을 세운 이차돈의 이름도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한자 이름은 염촉(厭髑)이었다.

 

(2) 진로에 대한 고민

화랑(花郞)이 되기 위해 향도(香徒)를 꿈꾸었지만 육두품 출신인 가문 때문에 포기하였다.

육두품 출신인 설계두(薛罽頭, ?~645)라는 사람도 신분의 한계를 한탄하며 당나라로 떠나기도 하였다.

관직에 나가더라도 큰 꿈을 펴지 못 할 거라 포기한 원효는,

불가(佛家)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 높은 스님들을 찾아가 배웠다.

영축산 반고사(盤高寺)에 머물 때에는 낭지(朗智) 스님에게 배웠다.

낭지 스님은 『법화경(法華經)』의 대가였는데, 스님의 영향을 받아『초장관문(初章觀文)』과『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썼다.

포항 운제산에서 머물며 책을 쓸 때에는 가까운 항사사(恒沙寺)의 혜공(惠空) 스님을 찾아

모르는 것을 묻기도 하였다. 이 무렵 영원한 도반인 여덟 살 어린 의상(義湘)을 만났다.

그는 진골 명문가 출신으로 뒤에 당나라 유학을 다녀와 신라에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널리

펼쳤다. 의상과 중국 유학길에 함께 올랐을 때는 고구려의 이름난 보덕(普德) 스님을 찾아가『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

 

(3) 험난한 중국 유학길

여러 불경에 대해 주석하기도 하고 논문을 쓰기도 하던 어느 날 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가 17년간의 인도 유학을 마치고 새로운 경전을 가져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침 김춘추(金春秋, 603~661)가 죽음을 무릅쓰고 당나라에 가서 외교 관계를 맺은 때였다.

이를 계기로 진덕여왕(眞德女王)께서는 옷을 중국식으로 입으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의상과 중국 당나라 유학을 위해 처음에는 고구려를 지나 육로로 당나라에 가려고 했으나

국경을 넘기가 수월하지 않아 다시 바닷길로 가는 방법을 택해 당항성에서 출발하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자 의상과 원효는 비를 피할 겸 토굴을 찾아 들어 잠을 청했다.

 

(4) 깨달음

날이 밝아 주변을 살펴보니 어젯밤 잠자리는 토굴이 아니라 무덤 속이었고 

밤에 목이 말라 마셨던 달콤한 감로수 같던 그 물은 무덤 안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아뿔싸!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모든 법은 오로지 인식하기 나름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먹기에 따라 으스스한 무덤도 아늑한 방이 되고 썩은 물도 감로수가 되며,

인식하기에 따라서는 편한 방도 바늘방석이 되는 것이다.

의상에게 더 이상 중국 유학은 필요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다시 신라의 왕경 서라벌로 돌아왔다.

 

(5) 요석공주와의 인연

깨달음 이후 원효에게는조용한 산사나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는 매한가지였다.

어느 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 하늘을 떠받들 기둥을 베어 오련만”이라고

노래하며 서라벌 거리를 돌아다녔다.

태종무열왕은 노래 가운데 자루 없는 도끼가 과부를 뜻하고,

하늘을 떠받들 기둥은 임금을 보좌할 뛰어난 인재나 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맺어주려 하였다.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요석궁 앞 문천교를 건너고 있었는데 다리 중간에서 

요석궁의 관리와 맞닥뜨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온 몸이 젖은 원효는 몸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으로 들어가 결국 공주와 사랑을 나누었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다.

 

신라 지배층과의 관계는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비공식적이나마 왕의 사위가 되었고,

왕위를 이을 법민(法敏=문무왕)과는 처남 매부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요석공주와 자매 사이인 지조공주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원효는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 군대에 군량미를 수송하는 임무를 띤

김유신장군 원정대에 참여하여 무사히 군량미를 전달하고 나서 소정방의 암호문을 받았으나,

신라군에는 아무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원효가 나섰다.

암호문은 송아지[犢]와 난새[鸞]를 그린 그림이었다.

바로 ‘화독화난(畵犢畵鸞)’에서 따온 것임을 간파하였다. 

즉 ‘화’의 ‘호’와 ‘독’의 ‘옥’ 그리고 역시 ‘화’의 ‘호’와 ‘란’의 ‘안’을 합쳐

‘혹환’ 즉 ‘속환(速還)’으로 해독하고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김유신 장군께 아뢰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나라군은 이미 철수하였고 고구려군이 좇아오는 것이었다.

만약 원효가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더라면 신라군은 몰살당할 뻔 했던 것이다.

 

(6) 환속 이후 나의 삶

요석공주와의 사랑으로 계율(戒律)을 범한 원효는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길을 가고자 했다.

이는 보덕(普德) 스님에게 『유마경(維摩經)』을 배울 때 이미 생각했던 것으로 

환속을 계기로 실천에 옮긴 것 뿐이었다.

승려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사람들에게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게 하였다.

 

원효는 광대가 춤출 때 쓰던 박을 얻어 악기를 만들고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들과 함께했다. 원효의 '무애가'에서의 ‘무애’는

『화엄경』의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에서 따온 말이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사람들에게 아미타극락정토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며,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이 땅에 정토가 실현된다고 가르쳤다.

그 방법은 오직 ‘귀로 경전 이름을 듣고, 입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 뿐이라고 했다. 

원효가 가는 곳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원효가 55세 때 지은『판비량론(判比量論)』을 저술하였다.

 

(7) 죽음 그리고 홀연 돌아보다

원효는 일흔 살이 되자  삶을 정리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한동안 머물던 서라벌의 고선사(高仙寺)를 떠나

아들 설총의 집 근처에 있는 혈사(穴寺)에 들어갔다.

3월 30일 죽음을 맞이하였다.

 

 

4.

 

(1) 원효대사의 행적

원효만큼 우리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온전히 기록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나마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송고승전(宋高僧傳)』,『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원효대사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서당화상비』는

원효대사가 입적한 지 120년이 지나 그의 손자 설중업(薛仲業, ?~?)이 세웠다.

는 779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효대사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감명 받은 일본의 관리로부터 환대받은 것을 계기로 비석을 세우고자 했으나

중대 왕실에서 하대 왕실로 교체되는 격동에 휘말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애장왕 때(800~809) 비로소 고선사에 비석을 세운다.

이 『서당화상비』는 어느 때인가 파손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1914년 하단부 3편이, 1960년대에 윗부분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원효대사의 대표 저술인 『십문화쟁론』과 『화엄종요』와 관련된 내용, 초기의 수학 과정, 파격적이거나 신이한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 건립과 추모 사업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찬녕(贊寧, 919~1002)이 지은 『송고승전』, 『금강삼매경』의 성립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어 원효대사의 삶을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원효대사의 깨달음은 오히려 『송고승전』「의상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의상전」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해골에 고인 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귀신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골에 고인 물 또는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종경록(宗鏡錄)』, 『임간록(林間錄)』, 『지월록(指月錄)』등에 실려 있다.

 

일연(一然, 1206~1289)이 지은『삼국유사』는

원효대사 기록 가운데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이지만,

전의 기록에서 알 수 없었던 원효대사의 출신지와 가계,

그리고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대사와 낭지(朗智) 그리고 혜공(惠空)과의 인연,

엄장(嚴莊)을 쟁관법(錚觀法)으로 가르친 이야기, 원효대사와 사복(蛇福)이 얽힌 이야기,

원효대사가 동해 낙산사(洛山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는 이야기

등도 실려 있다.

 

(2) 원효대사의 상(像)을 만들고 그리다

원효대사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원효대사는 조각상과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대사의 상을 만들고 그리는 행위는 그가 입적한 뒤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686년 원효대사가 입적한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유골을 갈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이 소상은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을 지을 때는 물론 일연(一然, 1206~1289)이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위해 분황사에 들렀을 때에도 있었다.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 역시 거사 모습의 소상을 만들어 고선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흥륜사 금당에 신라 10대 성인의 상을 봉안할 때, 원효대사의 상 역시 봉안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소상은 남아 있지 않다.

 

원효대사는 의천의 노력으로 고려시대인 1101년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된다.

이후 원효대사에 대한 현창 사업이 활발히 벌어져 원효대사의 진영도 널리 조성되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화쟁국사영찬(和諍國師影讚)」이나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소성거사영찬(小性居士影讚)」 등 고려시대 문인들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진영은 남아있지 않다.

 

유교가 국교였던 조선에서는 불교미술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양대 전란 이후 재건 불사과정에서 많은 조사들의 진영이 그려졌다.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사찰이 80여 곳에 이르는 만큼 많은 사찰에서

원효대사의 진영을 그렸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남아 있는 조선시대 진영은 겨우 2~3점 밖에 없다.

 

원효대사를 그린 그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일본 교토의 고산사(高山寺)이다.

고산사는 1206년 묘에(明惠, 1173~1232) 스님이 창건한 사찰인데,

그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매우 흠모하여 『송고승전』에 실린 그들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을 조성하였다.

이 절에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진영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3)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 「원효회(元曉繪)」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은

화엄종의 조사(祖師)인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전기(傳記)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1206년 고산사(高山寺)의 창건주인 묘에(明惠, 1173~1232)

평소 흠모하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행적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

죠닌(成忍, ?~?)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그림의 내용은 『송고승전』의 「원효전」과 「의상전」이 바탕이 되었다.

 

『화엄종조사회전』은 시기에 따라 편제가 바뀌었는데,

후숭(後崇) 광원(光院, 1372~1456)의 『간문어기(看聞御記)』에 따르면,

1433년에 이 그림은 의상대사회(義湘大師繪) 4권과 청구대사회(靑丘大師繪) 2권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청구대사는 원효대사(元曉大師)를 일컫는다.

이후 여러 차례 체제를 바꿔 현재는 의상회 3권, 원효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위대한 사상가 원효대사

 

원효대사가 기이한 행적만을 일삼거나

거사의 행색으로 거리에서 대중을 교화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일생에 걸쳐 2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긴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였다.

저술의 폭도 매우 넓어 밀교(密敎)를 제외한 대승불교 경전 대부분에 대한 논소(論疏)를

남겼다. 그 가운데에서도 화엄학과 유식학에 관심이 많았던지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에 관한 저술이 가장 많다.

그 많은 원효대사의 저술 가운데 쓴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있는 것은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쓴『판비량론(判比量論)』뿐이다.

 

원효대사의 많은 저술과 생애에서 드러난 그의 불교사상은 무엇일까?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그의 깨달음, 즉 ‘이 세상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을 인식한 것은,

중생의 마음이 우주 만물의 근원인 ‘일심(一心)’이라 가르치고 있는『기신론』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할 만큼, 원효대사라고 하면

‘화쟁’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다.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화쟁사상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당시의 불교적 논쟁을 화해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화쟁사상은 원효대사가 살던 당시나,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은 갈등과 경쟁이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통용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원효대사의 ‘일심’이나 ‘화쟁’과 같은 사상은 책상 앞에서의 사유에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사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원효대사의 대중 교화를 흔히 무애행이라고 하는데, 그 사상적 배경은

‘일체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고 한

『화엄경』에 있다.

이렇듯 원효대사는 수많은 저술로 자기의 사상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긴 인물이다.『금강삼매경론』에서 역설했던 수레의 두 바퀴,

즉 이론과 실천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6. 영원한 스승, 원효대사

 

원효대사는 환속 후 대중 교화에 힘썼기 때문에 교단(敎團)을 만든다거나,

제자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에는 아홉 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전하나,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석이 입적 후 곧바로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실인지 의문스럽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문선(文善), 사복(蛇福), 엄장(嚴莊) 등이

원효대사와 사제지간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이들의 저술이나 행장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원효대사의 저술은 그 이후 활동했던 경흥(憬興), 도륜(道倫), 태현(太賢) 등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태현은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를 집필할 때

원효대사의『범망경종요(梵網經宗要)』를 참고하였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저술은 이미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져

중국과 일본 불교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과 일본에서 해동(海東) 또는 해동법사(海東法師)로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별칭인 해동을 붙인 것으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화엄교학을 완성한 법장(法藏)이 695년 이전 완성한『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원효대사의 저술을 인용하였다.

또한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가운데에는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잔편이 확인되고 있어,

멀리 서역까지도 원효대사의 명성이 알려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일본에 갔을 때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감명을 받은 관리의 예로 보아 일본에도 일찍이 원효대사의 저술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가마쿠라시대 일본 화엄종을 대표하는 묘에(明惠, 1173~1232)와 교넨(凝然, 1240~1321)은

원효대사를 흠모하였는데, 특히 묘에는 죠닌(成忍)에게 부탁하여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행적을 그린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그림

남겼으며, 46세 때에는 원효대사의『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를 강설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원효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때는 입적 후 400여 년이 지나서였다.

그 중심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있었다.

의천은 자신의 형인 숙종(재위 1095~1105)에게 건의하여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게 하였다. 이후 명종 때(1170~1197) 원효대사가 머물던 분황사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분황사를 근거로 하는 해동종(海東宗)이라는 종파가 등장하기도 한다.

 

원효대사에 대한 연구와 흠모는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원효대사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사상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이 10여 권에 이른니다.

이처럼 한 개인을 다룬 박사학위 논문이 10여 권에 이른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역사학, 불교학 등 학문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번역서, 대중서, 소설, 시, 서예와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해석되며 재창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