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북경, 동경 세 수도의 원형과 보존 특별전

Gijuzzang Dream 2010. 11. 11. 19:05

 

 

 

 

 

 

 

 서울 · 북경 · 동경, 세 수도의 원형과 보존  


- 서울 · 북경 · 동경, 세 수도의 도시 역사 한자리에
-  2010년 11월 4일~12월 5일(18일까지 연장전시) 

- 세 수도의 역사, 역사보전 노력을 담은 특별전시회

 

 

 

 

 

- 관련행사 -

□ 11월 3일(수) 「서울 · 북경 · 동경, 세 수도의 원형과 보존」을 주제로 국제심포지엄
□ 11월 4일(목)   서울 · 북경 · 동경 박물관장, 박물관의 역할과 협력방안에 대한 좌담회
□ 세 도시의 원형과 변화과정, 그리고 도시유산 보존을 위한 현재 경험을 상호 비교하고 교환함으로써

   세 도시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미래 바람직한 도시유산보존 방향을 모색.

 

 

 

 

세 도시 모두 계획도시, 자연환경과 역사에 따라 형성, 변화과정 달라

□ 서울, 북경, 동경은 모두 아시아 시대를 이끌어가는 글로벌 도시들이자 연륜 깊은 역사 도시들로서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세 도시는 모두 계획도시로 출발하였지만,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탄생한 까닭에

각기 특징적인 도시 원형을 가지게 되었으며

근대화 과정 또한 달라서 현재의 도시 모습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 서울은 2000년 전 한성백제시대의 도읍이었으나,

우리 역사의 중심이 된 것은 1394년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이다.

수도 서울은 자연지형을 활용한 계획도시로 주변의 산과 언덕을 활용하여 성을 쌓고,

가운데 궁궐을,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으며, 궁궐 앞으로 도로와 시전(市廛)을 배치하였다.

- 북경은 중국 금(金, 1115~1234)의 '중도(中都)', 원(元, 1271~1368)의 '대도(大都)'가 되면서

수도로서 서막을 올린 이래, 1421년 명(明, 1368~1644)의 성조(成祖)가 '북경(北京)'이라 이름하고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이후 중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북경은 넓은 평원에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을 앞에, 시장을 뒤에 배치)'와

'좌묘우사(左廟右社,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배치)'의 원칙 하에 기하학적으로 세워진 계획도시이다.

- 동경은 159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영지를 에도(江戶)로 옮기면서부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1869년 천황이 교토(京都)에서 에도로 옮겨오면서부터

명실 공히 일본의 수도가 되었고, 이름도 에도(江戶)에서 동경(東京)으로 바뀌었다.

에도는 지형적으로 서북쪽은 고지대, 동남쪽은 강과 바다에 접해 있는 저지대의 수변도시이다.

에도는 서북쪽 고지대의 에도성(江戶城)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무가(武家)들의 가옥과 정인(町人)들의 가옥이 차례로 배치된 계획도시이다.

 

 

세 수도의 역사, 역사보전 노력을 담은 특별기획전

○ 크게 북경, 동경, 서울, 세 도시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각 도시의 원형을 전시하며,

주요 전시물들은 북경수도박물관, 에도도쿄박물관, 그리고 북경시성시규획설계연구원에서 출품한

모형과 지도, 그리고 각종 유물로 구성되었다.

- 북경실

가로 세로 7m에 이르는 북경시 모형과 원나라 때 궁전모형, 북경지도 등은

평원 위에 축으로 구성된 북경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 동경실

도쿄만의 옛 모습이 담긴 각종 지도와

일본교(日本橋)로 가는 분주한 거리의 모습을 담은 12m 길이의 그림인 '희대승람(凞代勝覽)',

세밀한 마찌야(町屋)와 와리나가야(割長屋) 모형은

매립을 통해 바다로 확장된 도시, 동경의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 서울실에서는

옛 서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모형(7m×7m)과, 도성대지도, 서궐도 채색복원도 등

서울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자료들과 함께 각종 그래픽으로 해석해 낸 서울의 원형이

구릉 위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임을 드러내게 된다.


- 또한 세 도시에서 각기 수행된 각종 문화유산정책을 통해

원형을 보전하려는 각 도시의 노력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코너를 마련하였다.

 


□ 이번 전시에서 

세 도시의 원형과 변화과정, 그리고 세 도시가 현재 도시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한 자리에서 비교하여봄으로써 각 도시의 역사를 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박물관이나 연구자, 정책수립담당자들은 각 도시의 입지를 확인하고

보다 바람직한 도시개발과 역사보존의 방향을 찾는데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서울(SEOUL) - 구릉 위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 서울의 원형 : 자연지형(내사산)과 도성 조영(都城 造營)

서울은 2000년 전 한성백제시대의 도읍이었으나,

우리 역사의 중심이 된 것은 1394년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이다.

서울은 자연지형을 활용한 계획도시로 주변의 산과 언덕을 활용하여 성을 쌓고,

가운데 궁궐을,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궁궐과 숭례문(남대문)을 잇는 남북 도로와,

돈의문(서대문)과 흥인문(동대문)을 잇는 동서대로를 개설하였다.

동서대로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는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동서대로를 따라 시전(市廛)을 배치하여 상업기능을 수행하였다.

이후 서울은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 등이 불타는 등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기본적인 도시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17세기 후반 서울인구가 20만으로 늘어나면서 도성사람들의 생활영역이 성저십리로 확대되었다.

 

 

● 서울의 변형

서울은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경운궁(덕수궁)중심으로 도로체계를 방사형으로 개조하였다.

현재의 태평로, 을지로, 소공로, 남대문로 등은 이때 형성된 도로들이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성곽이 허물어지고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환구단에는 철도호텔, 대한제국의 상징 경운궁 앞에 경성부청,

숭례문과 마주하는 곳에 경성역이 들어서는 등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주거와 상업 공간도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조선인들이,

남쪽의 남산과 용산 일대에는 일본인들의 공간으로 분리되었다.

해방이후 서울은 약 1백만 명의 인구가 1천만 명으로, 136㎢의 시역(시域)은  605.25㎢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내사산과 성저십리를 포함하는 공간적 범위에서

북한산-덕양산-관악산-용마산 등 외사산의 범위로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서울의 역사성과 장소성도 함께 변형 또는 훼손되었다.

 

 

 

 

 

 

서울 원형의 보존

역사적 도시경관 회복, 역사적 도시조직 재생, 역사적 건물 복원, 역사적 건물의 활용 등으로 나누어

시행되었으며, 서울성곽 복원, 북촌가꾸기 사업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서울성곽 : 북촌 서울성곽 복원사업(1975-2005)

백악, 인왕, 목멱, 타락 등 내사산을 잇는 둘레 약 18.2㎞의 서울성곽은 역사도시 서울의 상징으로

1898년 전차노선이 설치되면서 파괴된 이후 식민지,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서울성곽 복원사업은 1975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일부 도심구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복원되었다.

 

(2)북촌가꾸기 사업(2001-2006)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약 9백여 채의 한옥이 남아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도시주거지이다.

북촌가꾸기 사업은 급속한 도시화로 많은 한옥들이 멸실된 상황에서

북촌에 남아있는 한옥의 멸실을 막고, 서울의 문화명소로 가꾸기 위해 2001년부터 시행되었다.

현재 이곳은 옛 골목길과 아름다운 한옥지붕군이 어우러져 역사도시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도시문화유산이 되었다.

 

 

 

 

 

서울

서울 옛모습 모형(동대문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가운데 개천(청계천)이 흐르고, 종로대로 쭉 뻗어 있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서울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희궁(서궐도) 모습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바탕으로 채색 복원한 경희궁 모습이다.


 

 

- 삼청동의 한옥 모형

 

 

 

 

 

 

 

 

 

 

 

 

 

 

북경(BEIJING) - 평원에 축으로 구축된 도시

 

 

 

 

 

 

 

● 북경의 원형

북경은 금(金, 1115-1234)의 '중도(中都)', 원(元, 1271-1368)의 '대도(大都)'가 되면서 수도로 시작되었고,

1421년 명(明, 1368-1644)의 성조(成祖)가 '북경(北京)'이라 이름하고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이후 중국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명대에 건설된 북경은 원나라 대도성의 기초 위에

성곽의 규모를 다소 변경하고 궁성의 배치를 조절하여 도시 중심에 두고,

궁성 앞에 조정(朝庭)을, 뒤에는 침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后寢)'의 배치를 이루었다.

 

- 원 대도 궁전모형(元 大都 宮殿模型)

 

 

장인이 나라를 영건함에 성벽의 한 길이를 9리로 하고, 각 성벽에는 3개의 문을 낸다.

성안에 가로 세로 각 9개의 길을 내고, 길의 폭은 아홉 마차의 폭으로 한다.

좌측에는 조상, 우측에는 사직을 두며 앞에는 조정을, 뒤에는 시장을 둔다.

- 명대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좌조우사(左祖右社)’ ‘면조후시(面朝后市)’

 

 

더보기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

 

 

 

 

 

 

 

주례 고공기의 도시구성을 도식화한 왕성도,

이러한 도시를 ‘회(回)자형의 도시’라 한다.

 

 

북경은 중국 도시계획의 교과서격인『주례』「동관」고공기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도시이다.

『주례』는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으로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下官)」.「추관(秋官)」.「동관」의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 천 · 지 · 춘 · 하 · 추의 다섯 전(典)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나

마지막「동관」만은 발견되지 않고 그 중의 일부인 고공기만을 찾아내었는데,

이를「동관」고공기라고 부른다.

 

「동관」고공기에는 도성계획에 관한 원리가 기록되어 있어서

중국의 도시 특히 수도의 건설을 위한 매우 중요한 참고서가 됐다.

또한 고공기에 나타난 도시구성의 원리는 중국뿐이 아니고 한국 · 일본 등을 포함한 동양 삼국의

국도(國都) 및 지방도시의 조영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어 왔다.

 

고공기에 나타난 도시계획의 내용을 보면 그것이 실제적인 도시계획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중화사상, 즉 중국적 세계관에 입각한 천하국가의 이념을 도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일종의 이상도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성의 조성에 관한 고공기의 본문은

“匠人營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涂九軌, 左廟右社, 面朝後市, 市朝一夫”라는 것인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왕의 도성은 사방 길이가 구리이며 각 변에 세 개씩의 문이 있고

성 안에는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의 간선도로가 각각 아홉 개씩 있으며

각각의 가로 폭은 아홉 대의 수레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이다.

중앙에는 왕궁이 있고 왕궁의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 사직(社稷),

전방에 정부(政府), 그리고 후방에 시장(市場)을 배치한다.

시장과 조정(朝廷)은 일 묘 즉 사방 백 보(步)의 넓이로 한다.”

 

즉 도시의 구성은 궁성을 중심으로 관청 · 시장 · 종묘 · 사직을 배치하고

이 중심시설 주변으로 일반시민이 거주하는 주거지역이 배열되며,

도시전체는 성벽으로 둘러싼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이란 것인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를 ‘회자형(回字型)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고공기는 중국의 도성건축에 있어 반영해야 할 네 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확립시켜 주었다.

즉 전조후시(前朝後市) · 좌묘우사(左廟右社) · 중앙궁궐(中央宮闕) · 좌우민전(左右民廛)이 그것인데,

이것이 중국 도시계획을 위한 기본 패턴으로 작용했다.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

주공은《주례(周禮)》라는 일종의 헌법, 행정법, 민법, 기술법 등을 총괄한 법전을 발행했다.

모두 6편으로 된 이 책은 관제를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 육관으로 나누었다.

천관(天官)은 치관(治官)으로 전 관료를 통제하고,

지관(地官)은 교관(敎官)으로 교육과 재정과 지방행정을 담당하고,

춘관(春官)은 예관(禮官)으로 국가의 의례와 제사를 담당하며,

하관(夏官)은 정관(政官)으로 병마와 군대를 통솔하고,

추관(秋官)은 형관(刑官)으로 국가의 일반 업무와 법을 담당하고,

동관(冬官)은 사관(事官)으로 토목과 공예를 담당한다.

 

중국의 역대 관제는 이것을 규범으로 삼은 것이 많고 우리나라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관은 현존하지 않아 후대의《고공기(考工記)》가 보충하고 있다.

이른바《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는

도성의 건설ㆍ궁궐조영ㆍ수레ㆍ악기ㆍ병기ㆍ관개ㆍ농기구 등에 관한 기록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술관련 백과사전이다.

 

특히〈장인영국기(匠人營國記)〉는

도시 기술자들이 도성을 건설할 때 쓰는 제반기준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 널리 전파되어

근대까지 도시건설의 기준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수원성을 건설할 때 이를 참고한 것으로《경세유표》에 나와 있다.

《고공기》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낙서구궁도(洛書九宮圖)를 사상적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도시들 대부분은 동양의 우주관이 투영된 형태로 나타난다.

 

도성건설과 관련된 대표적인 한 대목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인영국방구리방삼문(匠人營國方九里旁三門),

국중구경구위경도구궤(國中九經九緯經涂九軌),

좌조우사면조후시(左祖右社面朝後市), 시조일부(市朝一夫)”

 

 

장인영국방구리방삼문(匠人營國方九里旁三門)

장인(匠人)은 도시건설기술자로 오늘날 도시계획자이고,

영국(營國)은 도시를 만든다는 의미이며,

나라 국(國)은 원래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口)영역이라는 뜻이다.

방구리(方九里)는 한 변의 길이가 9리(약3.6km)인 정사각형의 성곽이다.

이는 천자가 없을 때이고, 진시황제 이후부터는 천자(天子)의 성은 12리, 왕(王)의 성은 9리,

공(公)의 성은 7리, 후(侯) ․ 백(伯)의 성은 5리, 자(子) ․ 남(男)의 성은 3리 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4개의 방위는 춘하추동 4계절을 의미한다.

방삼문(方三門)은 면마다 3개의 성문을 배치하여 12개를 통하게 하라고 했는데

이는 12개월 및 12지신을 상징한다.

 

국중구경구위(國中九經九緯)

각 문들은 서로 직선도로로 연결하여 성안 내부는 격자형으로 도로망을 형성하라는 뜻이다.

경(經)은 세로인 남북간선도로를 위(緯)는 가로인 동서간선도로를 의미하므로

남북축으로 9개, 동서축으로 9개의 도로를 낸다.

각 문(門)에는 3도(涂, 도로)가 있어서 남자는 오른쪽 길을 경유하고, 여자는 왼쪽 길을 경유하며,

수레는 중앙으로 다니었다.

 

경도구궤(經涂九軌)

세로축인 남북도로는 9량의 수레가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수레 1량은 8척이니 9궤는 72척이다.

6척이 1보(1.2m)이므로 길의 폭은 약 12보(步)로 지금으로 치면 14.4m 정도 된다.

이때 왕궁의 위치는 중경(中經)의 도(涂, 길)에 마주하는 곳이다.

 

좌조우사(左祖右社)

왕궁 좌측에는 조상을 모시는 종묘(宗廟)를 배치하고,

우측에는 토지와 곡물 신에게 제사지내는 제단인 사직(社稷)을 배치하라고 하였다.

면조후시(面朝後市)

왕궁 앞에는 신하들이 알현할 광장을 배치하고, 뒤에는 시장을 배치하라는 뜻이다.

시조일부(市朝一夫)

시장(市)과 왕궁(朝)의 면적은 각 1부로 하라는 뜻인데,

1부(夫)는 전답 100무(畝)이고 100무는 가로세로 각각 100보(步)의 정방형 토지를 말한다.

이를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왕궁 앞의 광장과 뒤의 시장은 가로 100보(약133m) 세로 100보(약133m)로

약 4,363평의 넓이에 해당된다.

 

 

 

 

이후 명 가정(嘉靖, 1522-1566)시기에

외성의 남쪽부분을 건설하여 지금과 같은 '凸'형 성곽을 이루게 되었다.

1644년 북경으로 도읍을 옮긴 청(淸)은 명대의 궁성과 도시 구조 등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북경성 안에 북해(北海)와 중남해(中南海),

교외 지역에 남원(南苑)과 원명원(圓明園) 등 황실 원림들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북경은 정교하게 계획된 도시체계와 아름다운 원림을 갖춘 제왕의 도시로서의 면모를

확립하게 되었다.

 

 

 

- 건륭경사전도(1750년, 청 건륭제 15년)

 

 

 

 

 

더보기

 

 베이징 구성(舊城)의 주요건축물  

 

 

(1) 종루/ 고루

 

(2) 좌묘우학(左廟右學)=국자감(태학)/공묘(공자묘), 옹화궁(雍和宮)

 

 

(3) 자금성 주변

 

 

 

(4) 천안문 주변

 

 

 

(5) 제단(일단, 월단, 천단, 지단, 선농단 등)

 

- 일단(日壇)

 

 

- 월단(月壇)

 

 

 

- 천단(天壇) 

 

 

- 지단(地壇)

 

 

- 선농단(先農壇) 

  

  

 

 

 

 

 

 

 

 

 

● 북경의 변형

명대 이후 약 400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북경도 19세기 중반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큰 변화를 겪었다.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서구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북경에는 서양식 건축물과 교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또 19세기 말부터는 철도, 전기, 수도 시설과 같은 현대적 도시기반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면서 내성과 외성 등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고,

천안문 앞에는 큰 가로가 형성되었다.

 

북경의 원형이 크게 변형된 시기는 문화혁명기(1966-1979)이다.

이 시기에 문물유적을 '사구(四舊 -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하나로 취급하여 배척함에 따라

역사유적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동시에 지하철 건설 등으로 대부분의 성곽이 철거되었다.

대체로 1961년에서 1976년까지 북경은 도시건설과 수도발전의 저조기를 겪었다.

이 시기 인구는 급증하였지만 무질서한 건설로 구성의 전통적 풍모가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982년 북경이 역사문화명성(歷史文化名城)의 지위를 획득함에 따라

고도의 풍모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가운데 붉게 표현된 부분이 자금성이고 그 옆의 호수가 북해(北海)이다.

자금성 앞에 천안문이 있다. 아래쪽 초록색 부분이 천단(天壇)이다.

자금성과 북해를 둘러싸고 있는 위쪽이 내성(內城)이고,

천단이 있는 아래쪽 푸른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부분이 외성(外城)이다.

넓은 평원에 건설된 기하학적 계획 도시 북경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경성(北京城)

내성(內城), 외성(外城), 황성(皇城)=도성(都城), 자금성(紫禁城)=궁성(宮城)을 통틀어 말한다.

북경성의 위가 내성(內城)이고, 아래 부분이 외성(外城)이다.

내성 안에는 황성(皇城)이 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독자적인 궁성(宮城)인 자금성이 있다.

     

 

 

● 북경성의 내성(內城) - 9문

북경성의 내성은 남문 - 정양문(正陽門)이 정문이다.

   

북의 동문 - 안정문[安定門, 元의 안정문(安定門)]

북의 서문 - 덕승문[德勝門, 元의 건덕문(建德門)]

동의 북문 - 동직문[東直門, 元의 숭인문(崇仁門)]

동의 남문 - 조양문[朝陽門, 元의 제화문(齊華門)]

서의 북문 - 서직문[西直門, 元의 화의문(和義門)]

서의 남문 - 부성문[阜城門, 元의 평칙문(平則門)]

남문 - 정양문[正陽門, 元의 여정문(麗正門)]과 전루(箭樓)

남의 동문 - 숭문문(崇文門, 元의 문명문(文明門)]과 전루(箭樓)

남의 서문 - 선무문(宣武門, 元의 순승문(順承門)]과 전루(箭樓)

                  ***전루(箭樓): 감시하거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을 낸 성루

 

한편 북경의 내성은 3개의 문이 추가되어 12개의 문이 있는데

늘어난 세 개의 문은 화평문(和平門), 부흥문(復興門), 건국문(建國門)이다.

그런데 이 문은 별도의 성루를 만들지 않고, 단지 드나들 수 있게 간이로 성벽에 길을 낸 것이었다.

    1926년 신화문(新華門) → 화평문으로 개명(중ㆍ남해의 신화문과 이름이 중복되어)

    1940년대 계명문(啓明門) → 1945년 부흥문으로 개명

    1940년대 장안문(長安門) → 1945년 건국문으로 개명

 

● 북경성의 외성(外城) - 7문

북경성의 내성과 외성은 맞닿아 있는데, 내성의 남쪽 성벽이 곧 외성의 북쪽 성벽이다.

외성의 정문은 남문 - 영정문(永定門)이다.

 

남문 - 영정문(永定門)

남의 동문 - 좌안문(左安門) [강찰문[㩖擦門]

남의 서문 - 우안문(右安門) [초교문[草橋門]

동문 - 광거문(廣渠門) [사와문(沙窩門)]

서문 - 광녕문(廣寧門) [창의문(彰義門)]

북의 동문 - 동편문(東便門)

북의 서문 - 서편문(西便門)

 

 

● 황성(皇城)=도성(都城) - 4문

황성의 문에서 정문은 남문 - 천안문(天安門)이다.

 

동문 - 동안문(東安門)

서문 - 서안문(西安門)

남문 - 천안문(天安門)

북문 - 지안문(地安門)

 

 

● 자금성(紫禁城)=궁성(宮城) - 4문

정문은 남문 - 오문(午門)이다. ‘오(午)’라는 말 자체가 정남쪽을 뜻하는데,

이는 북쪽의 음기로부터 자금성을 보호하고 남쪽의 양기를 받들어 바르고 큰 정치를 펴고자 함이다.

 

동문 - 동화문(東華門)

서문 - 서화문(西華門)

남문 - 오문(午門)

북문 - 신무문(神武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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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성궐(城闕) 

 

 

무릇 성 쌓은 제도는, 모두 벽돌을 양쪽으로 쌓아 올리고 그 속을 회와 돌로 메우며,

타첩(垜堞) 사이는 10여 보 정도 되고 높이는 3장(丈) 이상이 된다.

또 성의 제도는 모두 네모 반듯하고 둥글지 않으며, 아래는 넓고 위가 차차 좁아진다.

북경성은 둘레가 43리, 남쪽 가의 중성(重城)은 둘레가 28리다.

통주성(通州城)은 둘레가 9리이고 서쪽에 중성이 있다.

계주성(薊州城)ㆍ영평부성(永平府城)은 둘레가 모두 8, 9리이고 나성(羅城: 성의 외곽)이 없으며,

금주성(錦州城)은 둘레가 8리이고 동쪽에 나성이 있다.

영원주(寧遠州)에는 내성ㆍ외성이 있는데, 내성은 둘레가 8리이고 외성은 허물어졌다.

산해관성(山海關城)은 둘레가 7리쯤 되고 동ㆍ서의 나성이 있다.

 

심양(瀋陽)은 내ㆍ외성이 있는데, 외성은 토성(土城)이고 내성은 둘레가 8리이다.

중우소(中右所)ㆍ중후소ㆍ전둔위(前屯衛)ㆍ중전소(中前所)ㆍ대릉하보(大凌河堡) 등의 성은

둘레가 모두 금주위성과 비슷하고, 요양성(遼陽城)은 둘레가 거의 10리나 되고,

봉성은 둘레가 거의 7리나 되는데, 모두 나성이 없다.

북경과 산해관의 성이 가장 웅장하다.

무령(撫寧)ㆍ옥전(玉田)ㆍ풍윤(豐潤)ㆍ삼하(三河) 및 여러 역보(驛堡)에도 성이 있으나 흔히 퇴폐해졌다.

성이 있으면 성 안에는 흔히 십자가루(十字街樓)가 있는데, 혹은 2첨(簷) 혹은 3첨으로

단청이 찬란하게 공중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연경(燕京)은 순천부(順天府)에 있다.

명(明) 영락(永樂) 초에 남경으로부터 도읍을 옮겨 북경이라 했고,

영락 18년에 묘사(廟社)ㆍ교사단(郊祀壇)의 담을 완성했다.

궁전(宮殿)과 문궐(門闕)은 다 남경의 것을 모방하였으되 웅장 화려하고 높고 넓기는 그보다 훌륭했으며,

지금 청인들은 일체 옛 제도를 따랐다.

성은 무릇 9문이다.

남은 정양(正陽)이니 원 나라의 여정(麗正)이고,

남의 동은 숭문(崇文)이니 원 나라의 문명(文明)이다.

남의 서는 선무(宣武)이니 원 나라의 순승(順承)이고,

동의 남은 조양(朝陽)이니 원 나라의 제화(齊華)이며,

동의 북쪽은 동직(東直)이니 원 나라의 숭인(崇仁)이다.

서의 남쪽은 부성(阜城)이니 원나라의 평칙(平則)이며,

서의 북쪽은 서직(西直)이니 원 나라의 화의(和義)이다.

북의 동쪽은 안정(安定)이니 원 나라의 안정(安定)이고,

북의 서쪽은 덕승(德勝)이니 원 나라의 건덕(建德)이다.


성 남쪽에다 또 중성(重城)을 쌓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안아 돌고, 남북은 짧고 동서는 길다.

성의 둘레는 20리, 담장을 두른 길이가 3225장(丈)이다.

 

교사단이 그 안에 있고 또한 7문 있다.

남은 영정(永定)이고,

남의 동쪽은 강찰(㩖擦)이고 안쪽 편액은 좌안(左安)이다.

남의 서쪽은 초교(草橋)이고 안쪽 편액은 우안(右安)이다.

동은 광거(廣渠)이고 안쪽 편액은 사와(沙窩)이다.

서는 광녕(廣寧)이고 안쪽 편액은 창의(彰義)이다.

동북은 동편(東便), 서북은 서편(西便)이다.

도성을 통틀어 황도(皇都)라 하고, 궁성(宮城)을 자금성(紫禁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제도는, 바깥에는 비예(睥睨: 성 위의 담)를 설치하고

안에는 여장(女墻: 성 위의 작은 담으로 적을 망보는 것)으로 막았으며,

양쪽 사이에 역시 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 성랑(城廊: 성 위에 세운 다락집)을 두었다.

비예에서 여장까지는 20보는 됨직하고 높이는 무릇 6, 7장이다.

성은 평지에서 시작하였으나 안에 의탁한 것이 없고,

성안에는 성을 의지하여 흙을 쌓아 마치 섬돌의 층계처럼 점차 높이 올라갔는데

높은 곳은 성과 가지런하고, 그 아래에 문을 만들어 오르내리고 여닫는데 그 제도가 극히 엄밀하다.

궁성(宮城)은 도성의 반을 차지하고, 둘레는 18리, 높이는 5장 남짓하다.

성은 담 쌓는 제도와 같으나

내성ㆍ외성 모두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기와로 덮었으니, 자금성으로 명명된 것이 이 때문이다.

 

4문이 있으니,

남은 대청(大淸), 동은 동안(東安), 서는 서안(西安), 북은 지안(地安)이다.

대청문은 정양문(正陽門)과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겨우 200보이고,

그 안에 천안문(天安門)이 있으니 또한 궁성 남문에 소속된다.

동안문ㆍ서안문 안에 여염집과 가게가 즐비하게 잇닿아 있다.

 


궁성 안에 또 내궁성(內宮城)이 있는데 둘레가 6리다.

성 쌓은 것은 도성의 제도와 같으나 오직 타첩(垜堞)만 설치했고,

요철(凹凸 오목함과 볼록함)이 극히 가지런하다.

성 밖에는 낭각(廊閣)이 둘러 있고, 그 밖에는 호수로 둘러 있는데 너비가 30보는 됨직하다.

성의 네 귀퉁이에는 모두 채루(彩樓)가 있는데 높이는 100척쯤 됨직하고, 규모가 극히 기이하고 아름답다.

  

천안문 안으로는 단문(端門)이 그 다음이고 오문(午門)이 또 그 다음이다.

오문은 곧 내궁성의 정남문이니, 동은 동화(東華), 서는 서화(西華), 북은 신무(神武)이다.

오문을 지나면 태화문(太和門)이 있다.

성 문루에 옹성(瓮城)이 있고, 좌우에 또 초루(譙樓)를 마주 세워 봉함이 매우 엄밀하니,

아마 그 안에 전쟁 도구를 간직한 듯하다.

또 성 위에는 10여 보마다 돌무더기가 있으니 또한 뜻밖의 일에 대비한 것이다.

성의 제도는, 바깥에는 타첩(垜堞)을 설치하고 안에는 여원(女垣)으로 막았으며

양쪽 사이는 20보가 되는데 모두 모난 벽돌을 깔았다.

그리고 수문(水門) 위로 해서 구멍을 뚫어 바닥까지 가게 했는데,

길이는 5척 남짓하고 너비는 겨우 2촌쯤 된다.

그리고 성 위의 빗물이 빠지게 하고 구멍 바닥에 수문을 만들어 안팎을 막고 있으며, 아래는 곧 도랑이다.

여원 안에는 5, 60보마다 초소[廊] 하나를 두고,

초소에는 각기 갑군(甲軍)을 두어 돌려 가며 수직하니, 총 수만 인이다.

온돌방과 솥ㆍ두레박 등이 갖추어졌으니, 번 드는 자가 거기서 침식하며 왕래의 수고가 없게 한 것이다.

정양문 문루는 4층이고, 조양문 문루는 3층인데, 모두 옹성이 있다.

그 위에 역시 층루(層樓)를 세웠으며,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고 벽돌을 처마와 가지런하게 쌓았다.

구멍 난 벽돌로 집을 설치했는데 총 30여 호이니,

내루(內樓)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서 이것을 적루(敵樓)라 한다. 이 이외의 여러 문에는 모두 적루가 없다.

정양문 서ㆍ남ㆍ북에 각기 문 하나씩이 있는데, 그 남문은 늘 굳게 잠가 두고 황제가 거둥할 때에만 연다.

지안문(地安門)의 북쪽에 또 북상문(北上門)이 있어 지안문과 마주 섰고, 그 밖은 곧 경산(景山)이다.

 

경산(景山)은 외궁성의 중앙에 있다.

대개 외성은 남북은 길고 동서는 짧으며, 남북은 정양ㆍ안정(安定)의 중앙에 걸쳐 있다.

 

부(部)ㆍ원(院)의 여러 아문(衙門) 및 인가와 시장 가게는 모두 성의 동서에 있다.

듣건대 한인(漢人)으로 벼슬하는 자는 모두 도성 밖에 산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반드시 다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9문 안에 궁궐ㆍ관부(官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시장 가게가 또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벼슬살이하는 군민의 집은 많지 않을 듯하다.

 

궁전ㆍ문궐은 모두 황유리로 이어 번질번질하다.

문과 전(殿)의 편액은 모두 만주 문자로 옆에 번역하였고, 성문의 편액도 이와 같다.

궁성 안에는 다 모난 벽돌을 깔고, 정로(正路)에는 돌을 땅에서 한 자 남짓 높이로 쌓았다.

그 배포 설치는 진실로 장려(壯麗)하였다.

 

태화전부터 무릇 다섯 중문이니, 태화문ㆍ오문ㆍ단문ㆍ천안문ㆍ태청문(太淸門)이다.

태청문 밖 수백 보 지점에 성문이 있으니 곧 정양문이다.

태화전에서 정양문까지는 먹줄 놓은 듯 똑바르고,

홍예문(虹霓門: 무지개같이 반 원형이 된 문)도 다 굉걸하고 깊숙하여

지나가노라면 마치 굴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태화전(太和殿)은 태화문 안에 있으니 곧 예전 황극전(皇極殿)이다.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도읍을 옮긴 초기에는 봉천전(奉天殿)이라 이름 했다가,

가정(嘉靖) 때에 와서 황극전으로 고쳐 불렀고, 지금에 와서 태화전이라 일컬으니,

원조(元朝: 설날)에 하례 받는 곳이다.

앞 기둥은 12칸, 옥폐(玉陛)는 9급, 돌난간은 3중인데,

모두 용의 몸뚱이를 조각하여 섬돌 구석으로부터 굼실굼실 나오는 듯하며,

그 머리는 곧 용머리[螭頭]이다.

양쪽 옆에 각각 거북 받침[龜趺]을 학이 서 있는 형상으로 세웠으되 모두 검은 구리로 주조하였으며,

전문 앞에는 옥으로 만든 사자를 마주 세워 놓았다.

중화전(中和殿)이 그 뒤에 있고 보화전(保和殿)이 또 그 뒤에 있다.

여기를 지나면 곧 건청궁(乾淸宮)이고, 건청궁 뒤에 곤녕궁(坤寧宮)이 있으니 이는 내전(內殿)이다.

태화전의 좌우 낭각(廊閣)은 즉 13성(省) 및 외국의 방물(方物)을 저장하는 곳인데

모두 난간을 빙 둘러 쳤다. 낭각의 중앙으로 다니는데, 동서에 각각 2층 낭각이 있으니

동은 체인(軆仁)이고, 서는 홍의(弘義)라 한다.

전 앞의 월대(月臺: 궁전 앞에 있는 섬돌)는 수백 칸이니,

이는 친왕[親王: 황제 종실로 봉왕(封王) 된 사람을 말한다. 청대에는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약칭 또한

친왕으로 불렀는데, 종실 중의 봉작된 자로 최고등이었다)]ㆍ각로(閣老)가 홀로 조하(朝賀)하는 곳이다.

 

뜰에 두 줄로 청동(靑銅)의 품석(品石)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만주인, 한인(漢人) 천관(千官) 및 외국 공사(貢使)가 품계에 따라 고두배궤(叩頭拜跪)하는 곳이다.

월대 앞에, 왼쪽에는 일영대(日影臺)를 세워 놓고 오른쪽에는 석향로를 두었는데,

향로와 일영대의 높이가 각각 2장 남짓하고,

또 청동로(靑銅爐) 16개를 놓아두었는데, 황제가 나오면 침향(沈香)을 그 안에 피운다고 한다.

태화전 동각과 서각에 좌익문(左翼門)ㆍ우익문(右翼門)이 있다.

좌익문 밖에 문연각(文淵閣)이 있고 우익문 밖에는 무연각(武淵閣)이 있다.

문연각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담이 둘러 있고, 담의 동쪽 모퉁이에 문 하나가 있으며,

여기를 지나면 경운문(景運門)이다.

협화문(協和門) 밖에는 무영각(武英閣)이 있고 희화문(煕和門) 밖에는 문화각(文華閣)이 있는데,

희화문과 동화문이 서로 마주치고 협화문과 서화문이 서로 마주친다.

태화전 밖에 좌우 익문(翼門)이 있으니 서는 정도문(貞度門)이고 동은 소덕문(昭德門)이라 한다.

태화전과 중화전 두 전 사이에도 좌문과 우문이 있으니, 동은 중좌(中左), 서는 중우(中右)라 한다.

보화전 양쪽에도 문이 있으니, 동은 후좌(後左), 서는 우후(右後)라 한다.

건청궁 동쪽에 봉선전(奉先殿)이 있고, 그 두 건물 사이에 육경궁(毓慶宮)이 있으니

곧 가경 황제(嘉慶皇帝)의 잠저(潛邸)다. 봉선전 동쪽에 황극전이 있다.

대개 건청궁ㆍ봉선전ㆍ황극전 세 전이 동쪽에서 비스듬히 일자(一字)로 연달았고,

봉선전ㆍ황극전의 사이에 낭각(廊閣)이 있어 그 양쪽 사이를 막고 있으며,

한가운데 서쪽으로 향한 문 하나의 편액은 ‘석경(錫慶)’인데 경운문(慶運門)과 멀리 마주 보고 있고,

여기를 지나면 황극전이다.

전 앞에는 채장(彩墻)으로 둘러 싸고, 가운데 세 문을 설치하였으니, 황극문ㆍ황극좌문ㆍ황극우문이다.

영수궁(靈壽宮)이 봉선전 뒤에 있다.

건륭 황제(乾隆皇帝)가 전위(傳位)한 뒤에 때때로 임어하던 곳이고, 수방재(漱芳齋)가 그 서쪽에 있다.

봉선전의 남쪽 100여 보쯤에 한 채의 채정(彩亭)이 있으니 전정(箭亭)이다.

또 남쪽은 곧 문화각(文華閣)과 서로 거리가 겨우 7, 80보이고,

좌익문(左翼門)은 겨우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30보 남짓 떨어진 거리에 문연각이 그 밖에 있으니, 곧 태화전의 동쪽이다.

문화각의 남쪽에 담이 둘러 있고 문이 있으니, 문화문이다.

문화문 수십 보를 못미쳐 와서 북쪽으로 돌다리[石橋] 셋이 있는데 모두 난간으로 둘렀고,

그 제도는 천안문 밖 호수 위의 돌다리와 같다.

돌다리의 북쪽에 문이 있으니 전성문(前星門)이다.

문 안에 청와전(靑瓦殿)이 있으니 이것이 청궁(靑宮)이다.

 

중정전(中政殿)은 태화전 서북에 있고, 보명원각루(普明圓覺樓)가 그 곁에 있으며,

우화각(雨花閣)이 또 그 뒤에 있다.

여기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 자광각(紫光閣)이 있으니 곧 외궁성(外宮城) 서북 모퉁이다.

 

자광각은 무릇 2층이다. 전의 섬돌에는 백옥으로 난간을 만들었다.

《일통지(一統志)》를 상고하면, ‘명 무종(明武宗) 때 평대(平臺)로 하였다가,

 뒤에 대를 폐지하고 자광각으로 고쳐 만들었고, 청(淸)은 그대로 자광각으로 하였다.

무사(武士)의 사격을 시험하고, 공신의 화상을 그려 걸고, 외번(外藩)을 잔치하는 곳이다.’ 하였다.

태청문 안 좌 월랑(月廊)과 우 월랑(月廊)은 각 100여 칸이고

천안문(天安門)의 월랑은 각 22칸씩이며, 좌우에 각각 문 하나씩이 있으니, 동조(東朝)와 서조(西朝)다.

단문(端門) 월랑은 각 40여 칸인데, 또한 두 협문(夾門)이 있으니, 협화(協和)와 희화(煕和)이다.

오문의 월랑 또한 각 40여 칸씩이고, 태화문의 월랑은 각 100여 칸씩이며, 양쪽에 좌익과 우익이 있다.

보화와 건청 두 전의 사이에 동문과 서문이 있는데 멀리서 서로 마주 보고 섰으니,

동은 경운(景運)이며 서는 융종(隆宗)이다.

단문 밖에 태사(太社), 태묘(太廟)가 두 거리에 있으니 즉 좌묘(左廟), 우사(右社)의 소재지이다.

 

태청문만 1층 3문이고, 천안문도 2층 3문, 단문도 2층이고 5문이다.

오문은 3층 9문이니 이것이 오봉루(五鳳樓)이고, 그 아래 5홍예문(虹霓門)이 있다.

홍문의 좌우 담장이 꼬부라져 남쪽으로 나갔는데 각각 60여 보이고,

그 꼬부라진 곳에 각각 3층 채루(彩樓)가 있다.

그 최하층은 원각(圓閣)이고,

제2층에는 8각(閣)을 세웠는데 사방 방은 크고 네 귀는 작으며 누르고 푸른 단청이 영롱하다.

최상의 한 각 위에는 금정(金頂)으로 덮었는데 그 빛이 찬란하다.

이것이 곧 풍마동(風磨銅)이니, 바람을 맞아 더욱 광채가 나므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문밖에 석대(石臺)를 마주 설치하였는데 그 높이는 한 길 남짓하니, 일영(日影)을 관측하는 곳이다.

천안문 안팎에 각각 돌기둥 한 쌍이 있는데, 높이는 5장(丈) 남짓하고 크기는 한 아름 반이니,

이것이 경천주(擎天柱)이다. 구름과 용을 새겼는데, 비늘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 같다.

문은 무릇 다섯이고, 거기서 또 동서쪽에 암문(暗門)이 하나 있다.

문 앞의 길에 돌다리를 많이 만들고 난간을 둘렀는데, 대개 다리는 문의 수와 같다.

다리 아래의 물에 배를 띄우며 통주강(通州江)에 닿을 수 있다 한다.

천안문의 옛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이었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이자성(李自成)이 승천문에 들어와서 편액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가 천(天) 자를 쏘아 천하 얻을 것을 점치겠다.’ 하고, 그것을 쏘았는데, 곧 천자 아래를 맞혔다.

그래서 깜짝 놀라 얼굴빛이 달라지니, 그의 정승 우금성(牛金星)이 말하기를,

‘천자 아래 맞힌 것은 곧 천하를 나누어 가질 상입니다.’ 하자, 자성은 활을 던져 버리고 기뻐하였다.

여러 전정(殿庭)의 남쪽 끝에 다 큰 구리솥을 마주 놓아두었는데, 크기는 100여 곡(斛)이 들 만하다.

백전(白氈)으로 덮고 소금물을 담아 불을 끌 때의 일에 대비하였는데, 무려 수십 개나 된다.

 

 

 

 

 

 

 

 

 

 

 

 

- 북경모형(720×840m), 북경성시규획연구원

 

 

 

● 북경 원형의 보존

북경은 고궁, 만리장성, 천단 등 세계문화유산과 각종 문화재를 비롯한 역사적 건축물,

구성(舊城) 내외 43개소의 역사문화보호구, 구성(舊城) 전체의 시역의 역사문화자원을 포함한

역사문화명성(歷史文化名城) 등을 대상으로 보호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1) 영정문(永定門) 복원

영정문은 구성(舊城) 중축선의 남단 기점으로서 북경시 남단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1950년 도시건설과정에서 영정문의 성루와 옹성이 철거되었다.

북경시에서 전문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2003년부터 복원을 시작,

성루와 양측 성벽을 복원하였으며, 천단과 선농단 사이에 영정문 광장을 조성하였다.

 

(2) 호동(胡同 : 후통)과 사합원(四合院)의 보호와 정비

호동은 북경의 옛 골목, 사합원은 호동 속에 있는 전통적인 'ㅁ'자형 건축물을 말한다.

호동과 사합원은 주로 북경의 황성과 내성 및 외성 사이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중국의 전통 주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자원이다.

최근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이들이 점차 소멸되자

북경시에서 역사보호구역으로 선정하여 보호, 정비하고 있다.

호동은 역사도시 북경의 풍모를 간직한 곳으로 관광과 문화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으며,

사합원은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동경(TOKYO) - 매립을 통해 도쿄만으로 확장된 도시

 

 

 

 

 

 

● 동경의 원형 : 초기의 에도

동경은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영지를 에도(江戶)로 옮기면서부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1869년 천황이 교토(京都)에서 에도로 옮기오면서부터

명실공히 일본의 수도가 되었고, 이름도 '에도(江戶)'에서 '동경(東京)'으로 바뀌었다.

에도의 지형은 서북쪽은 고지대, 동남쪽은 강과 바다에 접해 있는 저지대였다.

따라서 서북쪽 고지대에 에도성(江戶城)을 건설하고,

에도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고지대에는 무가(武家)들의 가옥이,

저지대 시타마치(下町)에는 마찌야=정인(町人, 일본의 상공업자들)들의 가옥이,

외곽에는 절과 신사(神社)들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한편 에도성의 방어를 위해 성 바깥에 해자(垓子)의 전신이 되는 수로를 건설하였으며,

물자운반을 위하여 바다와 에도성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 에도조감도(江戶鳥瞰圖) 38.1×51.5

 

 

 

● 동경의 변형

에도 성립 이후의 동경은 몇 차례의 큰 화재와 지진,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변화하였다.

1657년 '메이레키(明曆) 대화재'로 시가지의 60%가 소실되었으나

18세기 후반 에도는 인구 120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오오에도(大江戶)'라고 불리게 되었다.

1869년 천황이 에도로 옮겨오면서 명실공히 수도가 된 에도는 동경(東京)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가로, 항만, 공원,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 시설을 정비하여 근대적 도시로 변모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동경은 대규모 지진재해 복구사업을 통해

런던, 파리, 베를린과 같은 수준의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 공습으로 동경은 전체 면적의 28%가 소실되어

메이지시대부터 쌓아온 '근대도시'의 모습은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사라졌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동경은 인구 약 3천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동경 대도시권이 형성되었고

나아가 킨키(近畿) 대도시권까지 포함하여 이른바 토카이도(東海道) 메가로폴리스를 형성하였다.

  

 

 

 

 

 

 

● 동경 원형의 보존

동경의 역사자산 보존은 에도시기에 형성된 무사들의 저택이나 마찌야(町屋),

메이지시기에 만들어진 근대 건축물, 하천, 굴, 운하 등 수변공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에도 호족의 정원, 후지산의 경관을 볼 수 있는 닛포리 후지미고개 보전 등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편
서울은 서울성곽 복원사업, 청계천복원사업, 북촌 가꾸기 사업, 조선왕궁 복원사업 등을

북경은 역대 제왕묘 건축 보수 작업, 베이징황성보호계획 등을 보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 스미다강(隅田川) : 물길

스미다강 하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에도성 건설에 따라 에도항(溱)이 건설되면서

스미다강 자체는 관동 일원에 넓게 퍼진 토네강(利根川) 수계의 하천 등을 이용하여

각지로부터의 수운이 집결하는 물류의 중심이자 교통 및 경제의 축이 되었고,

제일의 번화가로서 동경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의 하나였다.

또한 스미다강변에는 아사쿠사(浅草)라고 하는 행락지가 옛날부터 입지하였으며,

료코쿠교(兩國橋) 옆의 광소로(廣小路, 히로코지)는 에도 제일의 번화가로서 번창하였다.

맞은편 강변에 설치된 스미다제방은 하나비(花見)의 명소가 되어 활기차며,

스미다강에는 유람을 위한 야카타부네(屋形船)가 사람들 교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이지(明治)시기 이후에도 연안에는 공장지대가 건설되어 원재료나 제품 수출입의 대동맥으로서

동경의 산업활동을 지원했다. 또한 시민의 휴식장소로서의 기능도 계승되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수도부흥사업에 의한 3개의 대공원 가운데 스미다공원과 하마초공원 두 곳이

스미다강의 연안에 설치되었고 13개의 우수한 의장의 근대 교량이 가설되는 등

동경의 도시축으로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후 고도성장기에 수질이 악화되고, 방파제와 고층의 도로가 강변에 건설되면서 낙후되었다.

1980년대 이후 수변창고를 갤러리, 라이브 하우스 등으로 활용하면서 회복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97년 스미다강의 경관만들기사업 이후 이 일대가 역사자산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2) 야나카(谷中) 지구

타이토우구 야나카는 에도(江戶)시기에 형성된

에도 고후나이(御府內: 에도 시대의 의 구역 내) 주변의 테라마찌(寺町, 사원이 있던 지역)로서

대지상의 지형을 가지며,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도로와

그것에 직교하는 비탈길(오르막길)이 마을의 골격을 이룬다.

대지의 대부분은 사원이며 일부 다이묘(大名)에게 주어지는 저택이나

쿠미야시키(組屋敷ぐみやしき, 각 행정담당의 고위직을 제외한 말단직 가옥)가 입지하고 있었다.

또한 골짜기 주변의 도로변에는 사원의 몬젠마찌야(門前町家, 절, 신사 등의 전에 형성된 마을)가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저지(低地) 부분은 논이나 습지였다.

메이지(明治) 시기에 사원, 다이묘의 저택 일부, 저지(低地) 부분이 점차 택지화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에도시대 이래로 형성된 도로망과 토지구획 방식은 계승되어 왔다.

현재에도 대지 위 사원의 특징적인 전통경관이 유지되고 있다.

 

 

(3) 리쿠기엔: 에도 호족의 정원

리쿠기엔(六義園)은 겐로쿠(元禄) 8년(1695)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츠나요시(徳川綱吉)에 의해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가 교외 별장으로서 받은 토지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 스스로가 설계하고 지휘한

‘유람식 석가산 천수정원(回遊式 築山泉水庭園)’이다.

 

리쿠기엔이라고 하는 명칭은

중국의 낡은 한시집인 <모시(毛詩)>의 '시의 육의'(詩の六義=바람風 ․ 문채賦 ․ 비례比 ․ 흥취興 ․ 우아함雅 ․ 칭송頌)라고 하는 분류법을, 키노 츠라유키(紀貫之)가 전용한 단가(和歌) ‘육체(六体)’에서

유래하고 있다. 정원은 중지도(中之島)를 가지는 큰 천수(泉水)를 수림이 둘러싸고 있어

기슈단가(紀州和歌)에서의 포(浦)의 경승이나 단가에서 읊어진 명승의 경관이 88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도(江戸)시기부터 ‘코이시카와코라쿠엔(小石川後楽園)’과 함께

에도의 2대 호족(大名)정원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이와사키 미타로(岩崎彌太郞, 미츠비시 창업자)의 소유가 된 공원은

쇼와 13년(昭和 13)에 도쿄시에 기부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쇼와 28년(昭和 28) 3월 31일에 국가의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현재에도 에도시기의 호족정원의 공간구성을 그대로 전하는 귀중한 역사자산이다.

 

 

(4) 닛포리 후지미고개의 후지미경(富士見景)

에도(江戸)시기 풍속화에는 에도의 가로경관에 후지산이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후지산은 에도의 내부에서도 조망되었지만 현재에는 그 곳들의 지명이 그 자취를 전하고 있다.

동경 도심부에는 후지라는 이름을 가지는 고개가 16개소 있었으며,

일찍이 이러한 고개에는 멀리 후지산을 바라볼 수 있는 후지미경(富士見景)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가화의 진전과 함께 건축물이 고층화하면서 점차 시선을 차단하게 되어

후지미경은 차례차례 없어져 갔다.

1990년대에는 아라카와구(荒川區) 니시닛뽀리(西日暮里)의 후지미(富士見) 고개가

후지산의 전모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후지미고개가 되었다.

 

후카가와 만넨바시(深川 万年橋, ふかがわまんねんばし)

- 일본 홋카이도 중앙부의 이시카리 평야 북단에 있는 후카가와의 만넨바시 다리

 

 

- 江戸日本橋(에도 니혼바시, 日本橋)

 

 

- 니혼바시(Nihonbashi, にほんばし, 日本橋)

일본 도쿄 도 주오 구의 니혼바시 강을 가로지는 다리 이름이다.

니혼바시 다리(日本橋)는 1603년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국 도로정비 계획에 따라

건설된 이후로 고카이도의 기점으로 삼았다.

다리는 다음해 전국 이정(里程)의 원점으로 정해져

도카이도[東海道]를 비롯한 5개 국도의 기점이 되었는데

지금도 일본 국도의 원표(元標)가 다리 밑에 놓여 있다.

현재의 르네상스 양식을 본뜬 아치형 돌다리는 1911년에 건설된 것으로, 길이 49m, 너비 27m이다.

1878년 도쿄의 15개 구(區) 가운데 하나로 니혼바시구가 설정되면서

다리 주변의 지역에만 한정하여 사용되던 ‘니혼바시’라는 지명이 확대되어 쓰이게 되었다.

1947년 교바시구[京橋區]와 합쳐 새로 주오구를 개설하였다.

옛 니혼바시구에 속하는 지역은 이 다리 주위로 발달한 도쿄의 경제중심지이자 상업 활동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고, 또한 상업지구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일본은행 본점과 도쿄 증권거래소 등이 위치한 일본의 대표적인 금융가이다.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그림에는

후지산(富士山, ふじさん, 해발 3,776m, 기저의 둘레가 125㎞, 1707년 마지막으로 폭발한 휴화산)과 함께

니혼바시가 자주 소재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니혼바시에 쓰여 있는 '日本橋' 글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쓴 것이다.

  

 

료고쿠 다리(료고쿠 바시, 兩國橋)

-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후지산 36경(富嶽三十六景, 후가쿠 삼십육경)>

- 御厩川岸より両国橋夕陽見

 : 온마야가시 스미다강둑에서 바라본 료고쿠 다리(료고쿠 바시, 兩國橋)를 가로지르는 석양

 

- 오하시(大橋) 아타케의 소나기, 1867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797-1858), [명소에도백경(名所江戶百景)]

 

 

  

- 江都駿河町三井見世略図

: 코토 스루가-쵸 미츠이 미세랴쿠즈(에도 스루가의 미츠이三井 가게 풍경)

 

- 스루가쿄(스루가 街. 1856)

히로시게(安藤広重)의 ‘명소에도백경(名所江戶百景)-에도의 유명한 100가지 풍경’ 중에서

 

후지산을 배경으로 에치고야 키모노와 환전가게가 보인다.

현재의 이 거리의 오른쪽에 있는 미츠이 본관건물(三井本館)에는 스미토모 미츠이 금융법인과

미츠이 후도산, 그리고 츄오 미츠이 신탁은행주식회사와 미츠이기념박물관이 있고,

왼쪽 편에는 미츠코시백화점이 있다.

스루가(駿河)는 현재 도쿄 인근 시즈오카(靜岡)현의 東部를 말한다.

 

 

 

 

 

 

 

 

  

 

- 隠田の水車(온덴 노 수이샤) : 온덴의 물레방아

  

 

 

 

- 고햐쿠 라칸지 산자이도

 

- 礫川雪の旦(코이시카와 유키 노 아시타) : 코이시카와의 찻집. 눈 내린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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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키요에(浮世繪, 일본어: 浮世絵 : うきよえ)  

 

 

일본의 옛날 목판화.

일본의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에도 시대에 당대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의 형태를 말한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우키요에’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힌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絵)’를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육필화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키요(浮世)’라는 말 자체를 풀이하면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즉 현세의 이모저모를 그려낸 그림이라는 뜻이며,

지금의 도쿄에 해당하는 에도, 오사카, 교토 등지의 마을의 중심의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현대풍의 새로운 문화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똑같은 발음의 다른 말인 ‘우키요(憂き世) - 근심어린 세상, 덧없는 세상’이라는 말이며,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생노병사가 전개되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라는 개념이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역사에서 풍속화로 등장했다.

17세기의 후반에 들어와,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단색그림 작품들을 필두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초창기에는 인도 묵만이 사용되었으며, 나중에 붓으로 색상을 덧입힌 형태였으나

18세기에 스즈키 하루노부가 비단에 여러 색상을 사용한 니시키에(錦絵)를 발명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목판화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를 충당했다.

근대 풍속화의 시작이라고 할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는

출판문화의 흥행에 따라 소설 삽화에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삽화에서 점차 목판화로 독립, 단일색의 수미주리는 목판화의 각선이 갖는 견고함과 더불어

대중적인 취향 때문에 서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우키요에는 붉은색의 간결한 채색과 역동적인 탄에, 검정색에 광채의 금속분을 첨가한 ‘우루시에’,

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는 목판 채색의 ‘베니주리에’ 등으로 발전해 갔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絵)의 기법을 개발한 뒤

우키요에의 판화 기법은 정점에 달했다.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조각도의 생생한 각선의 표현은

일본의 미니어처라 불릴 만한 독특한 미적 형식을 개척했다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이유로 원화를 고가에 구입할 수 없었던 도회지의 서민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다.

우키요에는 처음에는 마을의 일상생활, 특히 유곽의 어여쁜 게이샤들,

스모 역사들과 유명한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나 특별한 예술 공연 등의 모습이나 특정한 장면을

주제로 많이 담았으며, 이후에 풍경화도 또한 널리 제작되게 되었다.

정치적인 주제 혹은 권력층의 모습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우키요에 작가들은 따로 춘화(春画 슌가)를 내기도 하여,

때로는 이 때문에 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우키요에 자체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사진 · 기계인쇄 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주목을 받아, 특히 프랑스의 인상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우키요에의 기법은, 여러 분야에 전해 내려졌으며,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주었다.

 

- 우키요에와 죠닌(町人) 

우키요에는 일본의 옛날 목판화로 단색 또는 다색 판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

화가가 원본에 그린 그림을 목공예장인들이 목판에 새겨 인쇄해 판매하였다.

우키요에는 에도 막부의 안정기였던 18세기에 성행했는데,

근본적인 뿌리는 ‘죠닌(町人)’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성안에서 무사들과 물건을 공급하던 죠닌들이 갑작스럽게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지배계급인 무사들의 지위권이 하락되어감에 따라 큰 사회적 동요가 있었던 와중에,

죠닌들은 새로운 문화의 주역들로 떠오르고, 막대한 부를 오락과 여흥에 사용하게 되면서

상당히 쾌락적인 문화인 ‘죠닌문화(화류계 여성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화적 흐름 속에서 생활풍속을 그린 ‘우키요에(浮世絵)’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우키요에의 특징

우키요에는 본래 의미는 현세를 긍정하고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미보다는 유동적인 변화와 순간적인 미를 중시한다.

(대량생산과 상업적 목적이 강함).

우키요에에 화류계 여성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유는,

그 당시 최고의 패션 선두주자였던 화류계 여성들이 에도시대에 있었던 호색적인 경향에

서민들의 핫이슈가 되었었기 때문.

화류문화가 화려한 만큼, 우키요에 역시 색채와 전체적 느낌이 매우 강렬하고 화려하다.

주로 원색 계통의 색채를 써서 매우 독특할 뿐만 아니라

일본 특유의 곡선을 잘 사용하는 묘사법으로 둥글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기본적으로 판화이기 때문에 여러번 인쇄가 가능하여

가와라반 (瓦版, 현재의 신문)의 삽화 역할을 했다.

현대의 캘린더에 해당하는 그림 달력(絵暦) 제작에도 우키요에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여기서 그림 속에 숫자를 감추는 등 여러 가지 궁리가 이루어졌다.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표현이 없는 것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원근법도 받아들여졌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낚시의 명인(釣の名人)’처럼,

멀리 있는 풍경을 거꾸로 크게 그려 일부러 원근법을 깬 형태의 그림도 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대중문화의 일부이며,

현대의 미술전시처럼 액자에 넣어서 멀리서 감상하는 형태가 아닌,

손에 들고 살펴보며 즐기는 형태였다. 개중에는 그림을 오려서 가지고 노는 형태의 그림도 있다.

 

무로마치 막부시절 말기부터 에도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 초기까지 200여 년을 유행했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는 19세기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며 사진, 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자 판화라는 한계를 지닌 우키요에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 해외에서의 영향

우키요에는 해외에서의 영향 또한 받았다.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공 안료인 ‘베로아이(ベロ藍)’는 선명한 남색을 표현할 수 있어

가츠시카 호쿠사이 등에 의해 널리 쓰여졌다. 서양의 원근법과 음영 기법 또한 받아들여졌다.

 

- 해외로의 영향

1851년 런던에서 전시회가 열린 이후 우키요에는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명암이 적고 평면적이며 색이 강렬하다.

몇몇 작품들은 검은색을 풍부하게 사용하여 강한 대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우키요에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이후부터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미술 이론을 거부하고

새로운 작풍과 화가로서의 개성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첫 기반을 다진 것이 인상파였다.

인상파 화가로는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메리 카사트, 에두아르 드가,

그리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등이 있으며

그들의 작품들은 우키요에의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1865년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몽이 도자기의 포장지에 있었던 ‘호쿠사이 만화’를

친구들에게 돌려서 보여준 것이 인상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라는 작품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고, 히로시게의 그림이 유화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나,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이 작품은 배경이 없고 명암이 적으며 검은색과 붉은색을 대비한 강렬한 색으로 그려져 있어

유럽의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우키요에의 강렬함과 단순함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에밀 졸라의 초상’ 또한 배경의 벽에 우키요에 작품이 보이고 있다.

모네는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평면적인 그의 작풍 스타일 또한 우키요에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게다가 자포니즘의 영향과 일본 미술을 취급하고 있었던 빙에 의해

아르누보에는 우키요에 등의 평면적인 의장이 보인다.

 

드뷔시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神奈川沖波裏)’를 보고 자극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하는 등 클래식 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 우키요에 작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1760~1849)

19세기 중엽에서 1933년까지 살았던 아일랜드의 저명한 작가 조지 무어는

호쿠사이를 일러 ‘호쿠사이의 그림 한 폭은 전 일본인의 생명과 동일하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조지 무어는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주로 파리에서 활동을 했고,

일본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에밀 졸라와도 교류가 많았기에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호쿠사이를 격찬하였다.

 

2000년 가을 ‘라이프’지는 지난 천년간 세계사를 만든 100명의 위인중

이 호쿠사이를 86위에 올려놓았다.

거의 서양인 일색인 이 리스트에 난데없이 일본 화가가 올라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많은 화가들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드뷔시 같은 음악가에 까지 영향을 주어 ‘파도’라는 교향악을 만들게 한 화가 ‘호쿠사이’.

1760년 지금의 동경인 에도에서 태어났다. 1849년 5월에 죽었으니 90까지 장수한 셈이다.

그는 5세 즈음에 유명한 공예가 집안으로 양자를 들어갔으나, 후계자가 되진 못했고,

15-18세까지 책대본 가게에서 일하던 중 목판화가 집에서 도제수업을 했다한다.

이는 아마도 우키요에가 소설의 삽화로부터 시작했으니 삽화 우키요에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18세 때인 1778년 우키요에의 대가인 가쓰가와 순쇼의 제자로 들어가

가부키 연극배우들의 그림을 그리며 우키요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그후 도카이도의 풍경을 주제로 한 판화시리즈를 많이 만들었다.

그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1825년부터 1831년 사이에 제작된 <후카쿠 36경>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인식되는 붉은 후지산이나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 여기에 포함된다.

당시 풍경판화가 유행했던 것은, 막부시대, 에도와 각 영지를 잇는 도로가 많이 건설되었고

일반인까지 여행이 가능해지자 여행가이드나 여행기 등이 발달하고

이와 동반해 실경산수화에까지 대중적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객이 가장 선호한 곳은 에도와 교토를 잇는 도로(53개 역)와 후지산으로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차 지도(東海道五十三次地圖)]와

호쿠사이의 후지산을 소재로 한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 1825~31] 판화 시리즈를 보면

그 인기가 짐작된다. 이 판화집 중에서도 ‘붉은 후지산(凱風快晴)’은

‘파도 뒤로 보이는 후지산(新奈川沖浪裏)’과 더불어 널리 알려진 판화이다.

‘붉은후지산’은 후지산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은 기운을 신령스럽게 내뿜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순화된 표현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호쿠사이의 판화를 기억하고 있다.

작품에 쓰인 색들도 청색과 적색, 녹색과 약간의 황색 등 단순한 색조가 적당히 어우러져

그 묘미는 상당히 남다르다.  

그는 이뿐 아니라 ‘전국 폭포유람’ 등 명승지에 관련된 판화제작에도 힘을 쓴다.

 

그는 1844년 85세의 나이로 나가노市 ‘오부세마치’란 곳으로 와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이곳에는 지금 그의 미술관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당시 상공업의 중심지이던 오부세마치에 살던 코우잔이란 상인이 그의 그림에 매혹되어,

이곳에 헤키이겐이란 집을 지어 그림을 그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화광인(畵狂人)이란 그의 별명대로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 열정적인 화가이다.

‘호쿠사이 만가’에는 4,000여 점이 실린 디자인 도안첩 같은 것으로

여러 동식물이나 인물의 표정과 행동 등을 다룬 것인데,

이것은 에니메이션 왕국인 일본에서, 그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아마 여러 장르의 작품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이런 그림을 그린 것 같다.

 

- 우리나라의 민화와 비슷한 우키요에는

처음엔 요즘의 전단지나 카탈로그처럼 실용적인 용도로 그려졌던 그림이라고 한다.

그 덕분에 프랑스에서 우키요에를 발견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수출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문지처럼 구깃구깃 뭉쳐서 넣어놓은 종이들을 폈더니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요즘의 잡지 같은 구실을 했기에

우키요에에 등장했던 기녀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스타일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우키요에를 일본 전통회화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풍경화를 비롯한 우키요에는 전통 일본 그림이라기보다 서양의 원근법을 들여와 일본화시켰고,

이를 다시 서양사람들이 보면서 아름답다고(자기들의 미의식을 반영한 그림이니까) 역수입한 것이다.

 

우키요에는 풍속화, 풍경화, 인물화(기녀와 배우) 외에도 여행그림이 많다.

에도 100경 등 여행자들을 위한 그림도 시리즈로 많이 그려졌다.

또한 우키요에는 육필화와 판화가 있는데, 판화의 경우 그림을 그리는 사람, 목판을 파는 사람,

디테일을 다듬는 사람, 색을 찍어내는 사람 등 세분화한 장인들의 솜씨가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호쿠사이와 히로시게 등의 유명 풍경화가는 물론 샤라쿠 등 유명 화가들, 보카시(글라데이션) 등

우키요에의 기법 등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 우키요에의 공방

우키요에의 공방우키요에를 그리는 화가를 우키요에시(浮世絵師) 또는 에시(絵師, 화공)이라 부른다.

우키요에시가 그린 디자인을 목판에 파는 일은 ‘호리시(彫師)’가 맡으며,

색을 채색하여 종이에 찍는 일을 맡은 사람은 ‘스리시(摺り師)’라 불린다.

우키요에는 이들의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이 되나, 대표로 에시의 이름만 남는 것이 관례였다.

여기에, 제작자 즉 주문한 사람까지 포함해 최소한 4명이 필요하게 된다.

 

여러 가지 색을 찍을 때에 색칠 영역이 맞지 않는 일을 피하기 위해,

종이의 위치를 표시하는 겐토(見当)라는 표식이 매겨진다.

겐토의 유래는 1744년 출판물 중개업자인 우에무라 기치에몬(上村吉右衛門)이 고안했다는 설과,

1765년 긴로쿠(金六)라고 하는 한 스리시가 처음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이 ‘겐토’란 말은 현대 일본어에서도 짐작이나 판단, 방향이 엉뚱하게 빗나간다는 의미의

‘見当違い’ ‘見当外れ’ 등의 표현에 남아 있다.

 

 

 

 

 

 

 

에도

일본 키다이쇼란(凞代勝覽, 희대승람)

번화한 에도의 경관이라는 뜻, (베를린 동양미술관 소장) 중 일부, 복제본, 12m 길이,
1800년 에도의 일본교(日本橋,  일본 도쿄도 주오구의 니혼바시にほんばし 강을 가로지는 다리 이름)로

가는 분주한 에도의 중심가의 번화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혼바시풍경)

희대승람의 '희대'란 훌륭한 시대, '승람'이란 훌륭한 광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1805년 경의 니혼바시에서 이마가와 다리(今川橋)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그렸다.

 

수하라야 젠고로(善吾樓) - 두꺼운 흙벽의 광

지신반야(番屋) - 에도시대 네거리에 두었던 자치적인 경비초소를 말하는데, 

                           읍의 관리가 근무하는 파출소같은 곳으로 읍내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근처에는 화재감시용 망대도 설치되어 화재를 경계하는 일도 겸했다.

마치키도(町木石) - 마을대문, 에도를 경비하기 위해 설치된 문

하타지루시(깃발)

아키나이반야(商番屋) - 에도시대의 편의점

 

 

 


우라나가야

 

   

 

- 왼쪽(무네와리나가야, 棟割長屋), 오른쪽(와리나가야, 割長屋) 모형

  

 

 

 

무네와리나가야(棟割長屋)

긴집(長屋, 나가야)을 용마루로부터 반으로 나누고

다시 용마루로부터 직각으로 나누어 몇 칸의 집으로 만든 것이다.

같은 면적의 와리나가야(割長屋)보다 많은 집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벽면이 많아서 주거환경은 와리나가야에 비해 뒤떨어졌을 것이다.

 

와리나가야(割長屋)

긴집(長屋, 나가야)을 용마루로부터 직각으로 나누어 몇 칸의 집으로 만든 것.

여러 채가 연속되어 하나로 길게 이어진 일종의 '집합주택' 형식으로인

와리나가야는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서민주택을 말한다.

칸수에 따라 '긴집(四軒長屋)', '여덟칸긴집(八軒長屋)'이라 한다.

'구척이칸(九尺二間)'이라는 가로 9척(약 2.7m) 세로 2간(약 3.6m)의 와리나가야(割長屋)의 경우,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거주인들은 대부분 장인이나 행상인들이었다.

'긴집(長屋, 나가야)'은 뒷골목에 있어 '뒷긴집'이라고 불리는데

중앙에는 오수를 흘리는 하수구가 있고 널빤지로 덮여 있었다.

공동우물, 공동변소 등도 뒷골목 한쪽 구석에 있었다.  

 

 

 

 

 

키도반(木戶番)

마을의 출입구 통제를 한 곳,

또한 일본 짚신ㆍ쏘시개나무ㆍ숯ㆍ군고구마 등 소규모 장사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왼쪽 - 키도반(木戶番) / 오른쪽 - 지신반야(番屋) 모형 

 

 왼쪽 - 지신반야(番屋) / 오른쪽 - 키도반(木戶番) 뒷모습 모형

 

지신반야(番屋)

에도시대 네거리에 두었던 자치적인 경비초소를 말하는데, 한 층에 한 개소를 원칙으로 설치되었다.

읍의 관리가 근무하는 파출소같은 곳으로 읍내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근처에는 화재감시용 망대도 설치되어 화재를 경계하는 일도 겸했다.

 

 

 

 

  

 

 

 

 

 

 

 

 

 

 

 

 

   

 

오모테다나(表店)

에도의 상인들은 장사하기 편하도록 사람의 왕래가 잦은 큰길에 가게를 차렸다.

그래서 에도의 가게를 일반적으로 표점(表店, 오모테다나)라고 불렀다.

에도에서는 화재가 자주 발생했는데 막부에 의한 방화대책에 따라

표점(表店)의 대부분은 불연소재인 두꺼운 흙벽(회벽)으로 지어졌다.

대개 1층은 손님을 응대하는 곳, 2층은 주인이 사는 집으로 되어 있다.

근처에는 화재감시용 망대도 설치되어 종을 매달고 화재를 경계하는 일도 겸했다.

- 마찌야가옥의 평면구성

 

일본의 점포와 주택을 겸하고 있는 마찌야(町屋) 모형도 함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