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경주박물관] 남산신성비

Gijuzzang Dream 2010. 11. 22. 13:19

 

 

 

 

 

 

 

 

 

 

남산신성(南山新城)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남산신성(南山新城)은

국립경주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 바위가 게 눈처럼 튀어나와 붙여진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 3.7km의 돌로 쌓은 성[석성, 石城]인데,

지금은 쇠락하여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진평왕(재위 579~632) 13년(591)에

신라의 정궁(正宮)인 월성(月城)을 방어하기 위해 처음 축성하였다.

그리고 문무왕(재위 661~681) 3년에는 성 안에 장창(長倉)을 짓고,

문무왕 19년(679)에는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10월 경주 남산 식혜골(食慧谷) 김호(金虎, ?~1952) 장군 생가 대문 앞에서 발견된 이래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남산신성비에는 각각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신해년(辛亥年, 591)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만드니,

법(法)에 따라 만든 후 3년 내에 붕괴되면 죄를 묻기로 하고 이를 맹세하게 하였다.’는

문구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와 더불어 축성(築城)에 참여한 인물을 열거한 부분과

각 집단(集團)이 쌓은 거리를 기록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맹세의 글, 축성에 참여한 인물,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쌓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는 물론 국가가 대규모 국책사업에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하였는지,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그 양이 방대한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남산신성비(제1비)
▲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제1비) 높이 91.0cm 경주 남산 탑동 식혜골 출토

남산신성비(제9비)
▲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제9비) 높이 90.0cm 경주 배동 남산신성 내 출토

 

 

 

 

<전시품 목록>

 

 

명칭

발견 위치

사진

크기

소장처

1

남산신성비 제1비

경주시 탑동 식혜곡

91.0cm

국립경주박물관

2

남산신성비 제2비

경주시 탑동

일성왕릉 주변

121.0cm

국립경주박물관

3

남산신성비 제3비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지 주변

81.0cm

국립경주박물관

4

남산신성비 제4비

경주시 탑동

일성왕릉 주변

40.0cm

국립경주박물관

 5

남산신성비 제5비

경주시 사정동

영묘사터 주변

22.0cm

국립경주박물관

6

남산신성비 제6비

경주시 탑동 식혜골

18.0cm

국립경주박물관

7

남산신성비 제7비

경주시 배동

해목령 부근

25.0cm

국립경주박물관

8

남산신성비 제8비

경주시 배동

남산신성 북문 부근

22.5cm

국립경주박물관

9

남산신성비 제9비

경주시 배동

남산신성

90.0cm

국립경주박물관

10

남산신성비

            제10비

경주시 배반동

27.0cm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남산신성(南山新城)과 비석(碑石)에 대한 몇 가지 의문

 

(1)남산신성(南山新城)이 있으니, 남산구성(南山舊城)도 있었을까?

 

-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같은 문헌에는 ‘남산성(南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어,

어떤 학자는 남산성이 원래 있던 성(城)이고,

그 성을 진평왕(眞平王) 때에 대대적으로 수축한 뒤에 ‘신성(新城)’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학자는 돌로 쌓은 신성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구성(舊城)으로 보기도 한다.

남산신성이 완성된 진평왕 13년(591)은 진평왕의 개혁 정책이 마무리 되던 시기였던 것으로 미루어,

남산신성으로 이름 지은 것에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2)남산신성을 쌓은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을 때 어느 지역의 사람을 동원하였을까?

왕경(王京)인 서라벌에 거주하던 사람만 동원하였을까?

 

- 1934년 발견된 남산신성비를 세운 집단은 아량촌(阿良村) 사람들이다.

아량촌은 현재의 경상남도 함안(咸安)일 것으로 여겨진다.

제2비는 충청북도 옥천 부근으로 여겨지는 아대혜촌(阿大兮村)에서,

제3비는 서라벌 훼부(喙部) 주도리(主刀里)에서,

제9비는 경상북도 영주 부근으로 추정되는 급벌군(伋伐郡)에서 사람을 동원하였다.

240여 개 이상의 집단을 동원해야했으니, 왕경사람, 지방사람 할 것 없었을 것이다.

 

 

(3)각 집단은 얼마나 성을 쌓았을까?

가장 처음 발견된 남산신성비에 따르면,

이 비에 나오는 집단이 11보步 3척尺 8촌寸 길이의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한 보(步)=1.22m, 한 척(尺)=33cm이며 한 촌(寸)=3.3cm 정도인 것을 고려해보면,

대략 13m 47cm 정도를 쌓았던 것.

이로써 둘레가 3.7km인 남산신성을 쌓는데 무려 240여개 이상의 집단이 참여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각각의 집단이 똑같은 거리를 쌓았던 것은 아니다.

제 2비를 세운 집단은 7보步 4척尺(9.86m)을,

제 9비를 세운 집단은 6보步(7.32m)를 쌓은 것을 보면

각 집단의 규모에 따라 쌓아야 할 성의 길이가 달랐을 것이다.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 내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