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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특별전] 베트남 마지막황실(응우옌 왕조)의 보물

Gijuzzang Dream 2010. 11. 8. 13:33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특별전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 특별전

 

 

  전시기간 : 2010.11.09(화)~ 2011. 02.06(일)
 전시장소 :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
 특별강연 : 2010.11.18(목)/ 12.16(목)국립고궁박물관 강당

 주최 : 국립고궁박물관
 후원 : 주한 베트남 대사관 / 후에 유적보존연구소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2010년 11월 9일부터 2011년 2월 6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과 1층 정보검색실에서「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2006년 문화재청이 베트남 문화관광체육부의 문화유산국과 교류 협력 약정을 맺은 이후,

지속되어 온 양국간 문화교류 협력의결실로써

국립고궁박물관이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 후에유적보존연구소의 후원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실 문화를 소개한다.

 

 

베트남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阮朝, 1802∼1945]는

1802년 베트남의 전국토를 통합한 최초의 왕조이자 마지막 봉건왕조였다.

중부지역인 후에(Hue)에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고

참파왕국이 있던 남부까지 점령하여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이루었다.

왕조의 최전성기에는 국호를 ‘비엣남(越南)’에서 ‘다이남(大南)’으로 바꾸고

중국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되면서 왕조의 운명도 점차 몰락의 길을 걸어

1945년 권력의 상징인 황금보검을 베트남독립동맹회 ‘베트민(越盟)’에게 넘겨주면서 몰락하였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 오히려 더 유교적 전통을 잘 간수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 말고도 있다.

바로 베트남이다.

일제강점기에 가차없이 훼손됐던 우리나라의 궁궐과 비교하자면 후에궁의 보존상태는 매우 뛰어난 편이다.

고궁박물관 정종수 관장은 “후에도 서울처럼 동서로 강이 흐르는데,

황궁이 북쪽에는 황궁보다 높게 지은 건물이 없고 강의 남쪽만 개발했다”며

“마구잡이로 개발하지 않고 황궁 주변의 경관을 보존해 엄청난 미래의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경관이 보존되고 있는 황성과 황릉 등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전시에는 응우옌 황실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베트남 후에궁정박물관(Hue Royal Antiquities Museum)의

붉은 주칠에 황금색으로 장식된 ‘황태자 보좌’ 등 대표 유물 81건 165점을 전시하며

황제 및 황후의 예복 등은 화려했던 황실의 생활문화를 보여준다.
응우옌 왕조의 역사유적지를 각종 사진과 영상자료로 선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췄던 응우옌 왕조의 역사와 한,중,일 동아시아 국가들과 공통되는 유교 문화

그리고 황제 및 황후의 예복을 비롯한 화려했던 황실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각종 유물들이 전시된다.

또한 1층 정보검색실에서는 1993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황성과 황릉 등

후에 역사유적지를 3D 입체 영상물 등으로 소개한다.

 

베트남은 유교와 한자문화를 공유하였으며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남북 분단의 아픈 근현대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역사적, 문화적으로대감이 깊다.

또한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수교를 맺은 이후

18년의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속도로 경제교류 협력을 전개해왔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양국가간 이해를 증진시키기고

다문화 시대에 우리의 세계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트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관련 주제의 특별강연회가

2010년 11월 18일, 12월 16일 오후 2시에 두 차례에 걸쳐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며,

베트남 황실의 놀이를 소개하는 특별 교육도 함께 실시된다.

내년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종료 이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2011년 2월 28일부터 5월 15일까지 순회전시 할 예정이다.

 

 

 

 

1. 대표 전시유물

 

 

황태자 보좌(Ngai thai tu, 太子寶座) / 19세기

베트남 전통 문양인 레몬꽃과 팔보문양 등이 금칠로 장식된 황태자의 상징물이다.

 

병풍(Tran phong, 風) / 1915년

앞뒤에 만(卍)자문 · 소나무 · 사슴 · 기린 등이 새겨진 액을 막는 병풍이다.

 

황태자 용포(Ao Long bao Hoang thai tu, 皇太子龍袍) / 복제

 

황태자 신발(Hia, 皇太子靴) / 20세기

 

계정년간 산수문 항아리(Binh hoa, 花甁) / 20세기

 

분재형 장식(Chau canh vang, 金枝玉葉 · 임금의 귀한 자손) / 19세기

응우옌 황실 내부는 금으로 가지를 만들고, 옥으로 잎을 만든 분재로 장식됐다.

금지옥엽(金枝玉葉 · 임금의 귀한 자손)이란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유물이다.

우리나라의 상화(床花 · 종이나 천 등으로 만든 조화)와는 전혀 다른 양식이다.

 

향로(Lu tram, 銅盧) / 1924년

 

법랑 투호(Dau ho, 琺瑯壺) / 19-20세기

 

 

 

 

2. 후에(Hue) 유적 사진

 

 

후에 황성의 오문(Ngo Mon, 午門)

 

후에 황성의 태화전(Thi Hoa Dien, 太和殿) 내부

 

   

 

3. 베트남 궁정음악 공연사진

 

 

 

 

 

응우옌왕조 [阮王朝(완왕조), Nguyen dynasty]

 

베트남 최후의 왕조(1802∼1945) 응우옌왕조의 창건자는

응우옌푹아인(阮福映, 완복영, Nguyen Phuoc Anh, 1762~1820)

 

응우옌원웨(阮文岳)가 여왕조(黎王朝)를 멸망시킨 떠이손당(西山黨)의 난을 일으켜(1773)

응우옌을 남방으로 추방하자 푹아인은 일족을 거느리고 교지지나(交趾支那: Corchin China)로 갔다가

다시 시암만(灣)의 작은 섬들과 타이의 본토를 전전하던 중

프랑스인 다들랭 주교와 손을 잡고 프랑스인의 원군을 얻어 군대를 정비,

떠이손당의 응우옌을 격멸하고 베트남을 통일하여 응우옌왕조의 제1대 황제가 되었다(1802).

 

 

재위 중의 연호를 따서 ‘가륭제(嘉隆帝)’라고도 부르며, ‘세조(世祖)’라는 묘호를 사용하였다.

세조 가륭제는 도읍을 유에(富春)에 두고 하노이를 북성(北城), 사이공을 가정성(嘉定城)이라 칭하고

각기 총진(總鎭)을 설치하였다. 청조에 공물을 바쳐 국호를 ‘베트남[越南]’이라 정하고,

여(黎)왕조의 구제(舊制)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갖는 전제군주국가를 이룩하고,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이(吏) · 호(戶) · 예(禮) · 병(兵) · 형(刑) · 공(工) 6부와 대학사 · 내각 등을 두어 관리등용에 주력하였다.

 

법률로서는 대청율례(大淸律例)를 거의 그대로 본뜬 황월율례(皇越律例)를 공포하고,

호적 · 토지대장을 작성하여 징세조직을 정비하였으며, 가륭통보(嘉隆通寶)를 주조하였다.

외교면에서는 대체로 프랑스와의 유대를 유지하였다.

 

세조 가륭제는 새 질서의 건설에 힘썼으나,

2대 임금 성조 명명제(聖祖 明命帝, 1820∼41)는 이를 일소하고

청(淸)나라 제도를 채택하고 국호도 ‘다이남[大南]’으로 고쳤다.

 

그 뒤를 이은 헌조 소치제(憲祖 紹治帝) · 익종 사덕제(翼宗 嗣德帝)도

성조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켜

그리스도교의 탄압과 양이정책(攘夷政策) 때문에 프랑스의 침략이 노골화되었다.

영국과 경쟁하며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구실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프랑스-스페인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1862년 체결한 제1차 사이공조약으로

프랑스령 식민지가 되는 단서가 되었다.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에 따라 남부 6개 성(省)을 프랑스에 식민지로 할양하였고,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 ‘후에[順化]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어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宗主權)문제로 청ㆍ프랑스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베트남은 청의 보호를 벗어나 1887년 성립된 ‘프랑스령(領) 인도차이나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령 시대의 베트남은 3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 · 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응우옌왕조는 그중 안남(安南)의 왕조정부(王朝政府)로서 존속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1945년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의 8월혁명 때 베트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8년(남부에서는 9년)이나 지속되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고,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된 결과,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제네바협정은 체결 2년 후에 전국 총선거를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 조항은 이행되지 못하였다.

제13대 바오다이 제(帝)의 퇴위 선언으로 응우옌 왕조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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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의 왕궁(Royal palace of Nguyen dynasty)

 

후에의 중심부를 흐르는 퍼퓸강(Perfume River) 북쪽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1800년대 초에 지어져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1945년까지

주로 응우옌 왕조 황제들의 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 비할 규모는 아니지만 유사하면서 좀 더 아기자기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후에의 다른 많은 유적지들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오문(午門, Cua Ngo Mon)이 정문이고,

이 중에서도 중앙의 통로는 황제 전용이었다고 하여 지금도 방문객들은 양 옆의 통로로 드나든다.

오문을 통해 성 내부로 들어서면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만든 태화전(Thai Hoa Dien)이 나오는데,

이곳은 황제가 여러 행사를 치르던 멋진 건물이다.

이 밖에도 성 내부에는 황제들에게 바쳐진 큰 항아리들과 황제들이 생활하던 궁 터,

작은 박물관 등 여러 볼거리들이 있다.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성 내부의 많은 시설물들이 폐허가 된 상태이고,

속도는 더디지만 약간씩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