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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백제, 문화의 꽃을 피우다

Gijuzzang Dream 2010. 11. 4. 03:40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 백제실 재개관
 “백제, 문화의 꽃을 피우다”

 

 

 

 

 ㅇ전 시  명 : 선사 · 고대관 백제실 재개관 “백제, 문화의 꽃을 피우다”
 ㅇ전시기간 : 2010년 10월 28일부터
 ㅇ전시장소 : 선사 · 고대관 백제실
 ㅇ전시유물 : 무령왕릉 관 꾸미개 등 53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 새박물관 개관 5주년을 기념하여

선사 · 고대관의 백제실을 새롭게 단장하여 공개한다.

이번 전시는 한성기에서 웅진기를 거쳐 사비기로 이어지는 백제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보는 통사적 전시로 구성하였다.

또한 최근 발굴되어 보존처리를 마친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여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완으로 남아있는 백제사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는 크게 한성기 · 웅진기 · 사비기 그리고 지방세력 및 대외교류로 구성된다.

 

한성기는 백제의 건국과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당시 백제의 중앙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유물 및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백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제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에 세운 백제국이 점차 마한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고대국가이다.

한강 유역은 백제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도읍했던 지역으로 도성인 한성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한성기 백제의 건국과 성장과정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당시 백제의 중앙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유물 및 지방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여

문헌에 나와 있는 백제의 실체를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제는 새로운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점차 영역을 확장하여 마침내 마한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방의 세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특히 금동관모는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대표적 유물인 서산 부장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가 전시된다.

  

 

웅진기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아내고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말미암아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백제는

국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중국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무령왕릉에서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웅진기 백제의 국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백제의 예술성과 국제성을 살펴볼 수 있는 무령왕릉 관 꾸미개를 비롯하여 다양한 꾸미개가 소개된다.

 

  

사비기는 한성기부터 축적되어 온 백제의 문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

예술과 종교,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하였다.

특히 예술과 종교에서는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웠다.

이러한 사실은 문자와 도량형 자료, 그리고 금속공예품 등에 반영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비기 백제인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그릇 · 무기 · 문자 자료 등이 소개되며,

백제 불교문화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도록 기와 · 불상 · 사리기 등이 전시된다.

 

백제의 환곡 제도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지닌 부여 쌍북리 출토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묵서명 목간이

보존처리를 끝내고 처음으로 전시된다.

(백제금동대향로와 묵서명 목간은 각각 11월 14일, 11월 28일까지만 전시된다.)

 

한 사비기에는 불교문화가 특히 발달하여 많은 사찰이 세워졌으며

백제예술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비롯하여

미륵사지 사리기, 왕흥사지 사리기 등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품이 제작되었다.

또한 건탑 기술도 뛰어나서 이웃나라인 신라에까지 기술을 전수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문화는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와박사, 노반박사 등 기술자를 보내 사찰 건립을 지원하였다.

  

 

마지막으로 백제의 대외교류 및 지방세력에서는

특히 강력한 지방세력을 구축하였던 영산강 유역의 고대 문화 를 소개한다.

 

강력한 지방 세력을 구축하였던 영산강유역의 고대문화에서

백제의 대외 교류 관련 유물을 통해 동아시아 속에서 백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제의 특징은 세련미와 개방성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한성기부터 대외적인 교류를 통하여 동아시아 속에서 백제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백제의 외교적인 역량은 문화에도 반영되는데

백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백제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으며 이를 신라와 가야에 전해주었다.

또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져 일본 고대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고대사에서 백제의 위치는 어디쯤인가. 백제는 어떤 나라인가,

백제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해답은 새로이 단장한 백제실 전시가 말해줄 것이다.

 

 

 

 

 

 

서산 부장리 출토, 금동관모, 높이 15.5㎝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고분군은 2004년~2005년 충남역사문화원에서

임대아파트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13기의 분구묘를 비롯한 260여기의 유구들이 조사된 유적으로서

서해안에 위치한 서산지역에서 크고 높게 남아있는 분구와 더불어

금동관, 환두대도, 철제초두 등 화려한 출토유물들은

백제시대 서산지역의 위상과 문화적 성격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15cm, 폭 17cm 크기로

관모 전면에 나뭇잎을 형상화한 듯한 장식이 달려있으며

마한의 고위 관료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부장리 유적 5호 분구묘에서 출토된 5세기 무렵 백제 금동관.

이는 공주 수촌리 4호 석실분 출토품과 거의 같다.

  

 

부장리 유적5호 분구묘(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의 보존처리 과정 중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백제관모에 대한 제작기술이 밝혀졌다.
자료에 따르면 이 금동관은 고깔모양의 관모장식 전면과 후면에 각종 문양을 투조한 금속판을 잇대고

못으로 고정한 것으로 공주 수촌리 1, 4호분과 고흥 안동고분 출토품 등

한성시기 후반의 금동관모와 형태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청동에 금도금을 한 이 금동관모의 크기는 밑부분이 17.5cm에 높이 15cm 크기로

제작기법은 먼저 좌우의 금속판을 반타원형으로 오린 다음 육각형(귀갑문)으로 구획했다.

그 다음 구획된 테두리에는 파상문을 연속적으로 베풀었고 내부에는 봉황무늬의 투조로 표현했다.
투조 양식인 이 금동관은 높이 15㎝에 폭 17.5㎝크기로

관모 앞면에 나뭇이파리 3개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엽(三葉)의 세움 장식을 달았고

뒷면에는 넓은 방패모양의 세움 장식을 따로 두고 있다.

금동관 주변에는 금동관의 장식품으로 보이는 흰색 곱은옥 1점과 검은 구슬 수십 개, 금제 장식품 등이

발견됐다. 금동관이 발견된 바로 옆에서 손잡이가 달리고 다리가 세 개인 주전자 모양을 한

높이 18㎝, 길이 40㎝ 크기의 철제 초두가 발견됐다.

투조된 모양은 다양하며 각기 장식판의 웃부분에는 단면 '∧'자의 복륜(테두리)를 씌워 붙였으며,

그 전후에 각기 장식판 1매씩을 덧붙여 못으로 고정했다.

앞 장식은 아래쪽이 뾰족하고 위쪽에는 줄기모양의 장식이 세워져 있다.

아래쪽 넓은 부위에는 역시 육각형의 구획을 하고 그 속에는 봉황 여러 마리를 투조로 표현했다.

마지막에는 백제시대 금동관모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예와는 달리 금동판을 반으로 접어

단면 '∨' 자형의 판을 만든 다음 윗부분의 여러 금동판을 끼워 넣어 고정했다.

이 부분(일반적인 백제양식과 다른)이 백화수피와 함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정 연구원은 "방사선으로 촬영하기 어려운 부분을 CT를 이용해 관모를 분석한 결과,

이 금동관모는 백화수피층 둘레로 직물구조층과 금속층이 존재하는데

이는 금속층과 백화수피층이 직접 맞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백화수피는 자작나무껍질을 15겹으로 접합했고

금동관모 내외부에도 마섬유의 직물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설명했다.

 

 

 

 

 

 

 

 

 

 

 

 

 

원형(原形)에 맞게 복제한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백제 금동관.

충남 서산 부암리 출토 금동관도 이 같은 형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주 수촌리와 익산의 출토품에서 보이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이 이 금동관에서는 보이지 않고

 금동관모 내부에서 발견된 '백화수피제' 장식도 백제시대 출토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화수피는 자작나무의 껍질로

우리나라에서는 신라고분에서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관모와 천마도가 발견되었다.
자작나무는 한반도 중북부 이북지역의 추운 지방에서 자생하며,

시베리아 일대의 유목민족이나 중국의 흉노, 선비족 등의 무덤에서 발견된 적이 있다.

자작나무 껍질에는 방수효과가 있는 밀랍성분과 살리실산이 함유되어 있어

잘 부식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장리의 금동관모 내부에서 발견된 백화수피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수피표면에 여러 줄의 칼집이 조밀하게 나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둥글게 감기려는 성질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 연구원은 "백제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이 백화수피는
향후 신라와 백제의 교류와 북방관의

교류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또 백화수피의 표면에 세밀한 직물 흔적이 남아있어 백화수피제 관모 틀이 있고

그 표면에 비단과 같은 세밀한 올을 가진 직물을 씌우고

마지막으로 도금한 금동투조판을 씌워 마무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관모와 관테에는 끈을 묶었던 흔적이 없어 이 금동관모를 어떻게 머리에 썼을까 하는 의문도

백화수피와 직물에서 해답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금동관모의 특징은 백제시대의 일반적인 관모처럼 외형이 고깔모양이라는 점과

장식판이 보다 화려하다는 것이다.

부장리 금동관모는 육각형의 무늬가 기본을 이루고 그 속에 봉황이 중심무늬를 이루고 있다.

또 관테에는 파상열점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어 육각형무늬속에 구획감을 더해 준다.

게다가 봉황장식을 자세히 보면 두 날개를 편 채 비상하는 모습에서

한성시기 후반에 이미 백제의 공예기술이 높은 수준에 올라있다는 알 수 있다.

이 금동관모의 시료를 채취 분석한 결과

금동판의 금(Au)의 순도는 99.9%이고, 투조장식(1)의 경우 금의 순도가 98.37%,

투조장식(2)의 금 순도는 97.97%, 영락고리는 99.33%의 금순도,

영락은 99.41%이며, 철(Fe), 구리(Cu), 주석(Sn), 수은(Hg), 은(Ag) 등의 성분이 검출됐다.

 

 

 

공주 수촌리 Ⅱ-1호분 출토, 금동관모

  

 

 

 

 

 

 

 

 공주 수촌리 출토 금동관모. 높이 18.0㎝

 

금동관모(金銅冠帽)는 신분을 상징하는 구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형태는 둥근 고깔 모양으로 모자의 뒷부분에 대롱 모양의 장식을 달거나

앞 또는 뒷부분에 화려한 장식을 세우기도 했다.

백제의 관모 중에서도 고식(古式)에 속하는 것으로 이러한 관모는 공주 수촌리 뿐만 아니라

서산 부장리, 천안 용원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고흥 길두리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공주 수촌리 1호 금동관모는 둥근 고깔 모양의 모자로

금동판 2장을 붙이고 연결 부분은 테를 둘러 마무리하였다.

 

앞쪽에는 ‘山’자 모양의 세움 장식이 뒤쪽에는 광배모양의 세움 장식이 있다.

뒤쪽과 정수리 부분에는 장식을 부착하였던 대롱이 남아있다.

금동판에는 용무늬ㆍ구름무늬 등이 맞새김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고 달개가 달려 있다.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꾸미개로

금동신발(金銅飾履)ㆍ중국 도자기 등의 고급 물품과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가 마한의 세력을 통합해가는 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백제인의 사상과 예술성이 담겨져 있다. 

백제시대 절터(능산리 절터, 陵山里 寺址)에서 발굴된 이 향로에는 용이나 봉황 등 상상의 동물

그리고 신선 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고 생각한 상상의 세계가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뚜껑에 산을 나타낸 점으로 볼 때 상상의 세계 가운데 하나인 ‘박산(博山)’을 나타낸

소위 박산향로(博山香爐)라 할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왕실의 기원사찰인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왕실의 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향로는 크게 뚜껑, 몸체, 받침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향로의 뚜껑 부위에는 봉황을 비롯한 37마리의 동물, 악사(樂士) 5인을 비롯한 신선 17명,

나무 6그루, 향연구멍(香煙穴) 12개, 시냇물, 폭포 등이 표현되어 있고,

겉을 연꽃으로 장식한 향을 담아 피우는 부위에는 신선 2인, 25마리의 동물이 각각 표현되어 있다.

 

겹쳐진 산봉우리 모습의 향로 뚜껑의 정상부에는 봉황이 있으며 그 아래로 다섯 악사가 배치되어 있다.

다섯 악사는 각기 거문고ㆍ북ㆍ배소ㆍ종적ㆍ완함을 연주하고 있다.

74개의 산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는 12명의 인물,

상상 속의 동물, 멧돼지ㆍ코끼리ㆍ원숭이ㆍ호랑이 등 현실세계의 동물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식물과 바위, 시냇물, 폭포 등도 표현되어 있다.

 

봉황은 비상하려는 듯 활짝 펼친 날개와 긴 꼬리, 벼슬, 부리, 깃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향을 피우는 그릇인 몸체는 연꽃 모양으로 표현되었으며 8장의 연꽃잎이 세 겹으로 배치되어 있다.

연꽃잎에는 2명의 인물과 27마리의 동물이 돋을새김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릇에 표현되어 있는 인물은 무예를 하듯 역동적인 자세로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달리는 동물 위에 앉아 있다. 동물은 악어, 황새, 새, 물고기 등이 확인된다.

 

받침은 한쪽 발을 치켜든 용의 모습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다리와 몸통 사이사이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 등을 배치하였다.

 이 향로는 전체 모습이 연꽃 봉오리라 할 수 있다.

이 연꽃은 용의 입에서 분출, 화생(化生)되는 신기(神氣), 기(氣)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氣는 뚜껑 부위에서 박산(博山)으로 변화, 즉 화생(化生)하고 있다.

산과 연꽃의 테두리마다 있는 무수한 빗금들도 상승하는 신기(神氣), 氣를 나타낸 것이다. 

- 조원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 박물관 News, 2010년 10월 470호, 국립중앙박물관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면직물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면직물이라 할 수 있다.

창왕명석조사리감의 출토연대가 567년임을 감안할 때,

고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에 비해 800년 앞서는 면직물이다.

목화에서 실을 뽑아 독특한 방법으로 직조하였는데

강한 꼬임을 주어 무늬를 만들고 더불어 보온효과까지 내고 있다.

씨줄 날줄로 이뤄진 면직물인데

자세히 보면 가로로 넣는 실에 꼬임을 많이 줘서 직조를 한 것이 특징이다.

보온성도 좋고 무늬 자체도 아름다운데 이는 당시 중국에 없는 백제만의 독특한 직조법이다.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먹글씨 목간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 먹글씨 목간, 부여 쌍북리, 길이 29.1㎝

 

  

이번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처음으로 전시된다.

목간은 가늘고 긴 나무판에 글씨를 쓴 것으로

먹으로 쓴 묵서(墨書) 목간이 일반적이나 칼로 새긴 목간도 있다.

이러한 목간은 간단한 문서 기록이나

꼬리표, 낙서나 연습용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좌관대식기’ 목간의 좌관(佐官)은 관직명으로

좌관이 주관이 되어 식을 대여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 목간은 7세기 초반 백제의 환곡제도를 기록한 장부로

6월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와 함께 상환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충남 부여 쌍북리 저습지에서 2008년에 발견된 목간은

7세기 백제 정부가 백성들에게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환곡(還穀) 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이런 공문서로는 국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앞면 61자, 뒷면 58자 등 총 119자가 기록됐으나 아직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가 많은 실정이다.

길이 81㎝, 너비 2.3㎝, 두께 0.6㎝인 이 목간에는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 5년(558)이나 무왕 19년(618)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큰

무인년(戊寅年) 6월에 좌관(佐官)이라는 정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각종 곡물(식량)을

대여했다는 것으로, 이는 조선시대 환곡제도의 원류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일부에서는 이 목간에 기록된 환곡제도가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에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官穀)을 내서 백성의 호구(戶口)에 따라 빌려주되 차등을 매겼다가

10월이 되면 관아에 반납하도록 했다"는 진대법(賑貸法)과 상통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좌관대식기에 기록된 곡물 대출 시점(6월)이

고구려 진대법 곡물 대출 기간에 포함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이 목간에는 '米三斗'(미삼두=쌀 서말) 등 빌려준 곡물의 단위가 기록되고,

이자를 뜻하는 '利'(리)라는 글자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가 춘궁기에 곡물을 꾸어 주면서 그것을 거두어들일 때는

5할 정도의 이자를 쳐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환곡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백제시대에 정부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한편, <백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의 세계>란 주제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스즈키 야쓰타미 일본 국학원대학 교수는

"'좌관대식기'가 7세기 백제와 왜국의 교류를 불교와 환곡제도를 중심으로

백제의 제도가 일본에 이식되었음을 고증하고 있다"며

특히 "중국 북조에서 백제로, 다시 백제에서 왜국으로 문화와 제도의 전래를 알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카미 요시타카 야마카타대학 교수는

"백제 좌관대식기 목간과 일본의 환곡제도와 관련된 목간을 비교 검토한 결과

종래 일본의 독특한 제도라고 생각되어 왔던 일본의 환곡제도(=출거, 出擧제도)가

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용현 연구사(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좌관대식기'의 내용을 분석하여

이것이 환곡 관련 백제 관청의 문서이며, 6월에 꾸어주고 가을에 이자와 함께 상환 받은 내용을 기록한

장부이며, 그 이자는 5할이었음을 논증하였다.


 

 

 

 

 

 

 백제의 목간 출토로 다시 보는 동아시아 관계란?

 

 

일본 고대사학계 ‘백제 쇼크’  

목간 등 유물 잇단 출토, 동아시아 교류 허브 입증

 

2009년 7월7일 일본 <아사히신문>에는 이런 제목의 특파원발 기사가 실렸다.

한국의 7세기 목간에 일본인 이름이!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고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10여 년전 출토된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을

정리하다 현재 오사카인 ‘나니와’ 지명과 ‘무라지 공’이라는 일본 고대 성씨가 적힌 물품표를

확인했다는 특종. 일본 역사학계는 경악했다.

한반도 유물에서 처음 확인된 일본인 이름이자, 옛 오사카 부근에 살던 숱한 왜인들이

교역을 위해 백제를 드나들었다는 생생한 물증이 나타난 것이다.

 

2009년 5월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목간 국제학술세미나에서는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백제 목간이 소개돼 일본 학자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 목간은 흉년 때 농민에게 쌀을 빌려줘 구제하는 백제의 환곡 제도 문서로,

고대 일본에서 발견된 문서 목간과 비교 검토한 결과, 일본 고대의 환곡 제도와 명칭은 물론

나중에 쌀을 되갚는 이율까지도 상당부분 판박이임이 밝혀졌다.

 

지금 일본 역사학계는 ‘백제 쇼크’에 휩싸여 있다.

지난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577년)의 사리기와 절터, 백제 목간들,

2009년 2월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 안에서 나온 7세기초 무왕 때의 금동사리기와 명문기 등은

하나 같이 일본 고대 아스카시대의 불교 공예 문화, 정치·사회체제의 원형과 잇닿는 사료들이다.

일본 학계의 시각틀이 통째로 뒤흔들린 건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등의 백제 영향 기록을

명백히 뒷받침하는, 연대가 확실한 새로운 물증들이 잇따라 백제 유적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일본 최초의 사찰로 꼽는 아스카데라 등 6~7세기 주요 일본 사찰들의 절집 배치 구도,

사리기의 얼개와 묻는 방식 등이 조금 이른 시기 백제 사찰들과 거의 같으며,

목간에 담긴 계량 단위나 행정 문서 내용도 상당부분 백제 것을 본따 만들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 남조 문화를 일본이 직접 수입해왔다는 설 등으로 백제를 슬쩍 폄하해온

일본 주류학계의 시선은 이제 180도 바뀌었다고 국내 연구자들은 전한다.

실제로 2009년 초부터 부여, 공주 등의 백제 유적지에는 잇따라 확인된 새 발굴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하려는 일본 역사 · 고고 · 미술사학자들의 발걸음이 끊일 새 없다.

정림사, 왕흥사 등의 백제 절터, 목간 자료 등을 분석 · 토론하는 일본 내 학술행사도 전례없이 늘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더이상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한 연구자의 단언처럼

백제는 놀라운 실물 발굴 성과로 부활하면서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의 허브로서 입지를 굳혔다.  


나니와(옛 오사카) 부근에 살던 고대 일본인 이름이 쓰여진 7세기 백제 목간. <아사히신문>에 실린 적외선 촬영 사진
2007년부터 물꼬를 튼 백제 유산 신드롬이 올해 대세로 굳어진 것은 일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6~7세기 불교 · 문화 교류사의 자취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 · 유물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요인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주목되는 것이 백제가 문물을 주로 들여온 중국쪽 남조 유적이다.

백제와 동시기 밀접하게 교류했던 난징 등지의 양 · 진 시대 유적만 해도 그동안 비교할만한 유적, 유물들이 빈약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재개발에 따른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백제의 불교, 공예품과 빼어닮은 각종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옛 도읍인 난징 시내의 홍토교란 곳에서는 부여 정림사터의 소조불과 거의 같은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돼 화제를 낳았다.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가 잇따르면서 ‘곳곳에 중국으로 달려가는 구두굽 소리가 요란하다’고 할 정도로 국내 고고 · 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최근 남조 유적 답사가 필수적 관행이 됐다.

중국, 일본과 백제의 교류사를 풀기위한 한 · 중 · 일 학자들의 학제 공동 연구도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했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적 전범으로까지 격상된

백제의 귀환은 올 한해 문화재학계에서 가장 주목되는 물밑 흐름이다. 하지만, 넘어야할 산이 있다.

백제고고학 전공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동아시아 관점에서 백제의 교류사가 부각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만,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 등을 내세우는 정치적 근거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며

“한 · 중 · 일 국민과 학자들사이에 객관적인 역사 탐구라는 공감대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 한겨례신문 2009.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