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잊혀져 가는 비극, 역사교육의 과제

Gijuzzang Dream 2010. 10. 26. 02:30

 

 

 

 

 

 

 

 잊혀져 가는 비극, 역사교육의 과제 

 

 

  

한국전쟁 60주년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도 60년 세월 앞에 노출되면 조금씩 빛이 바랜다.

지난 6월 행정안전부 여론조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정확한 연대를 알고 있는 청소년은 41.3%에 불과했다.

30대 이상 세대와는 확연한 격차가 났다.
지난 역사를 아는 것은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도라산역을 찾은 김호기 교수는 한국전쟁에 대한 세대 간 인식의 격차가 커지고 있음을 우려하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편집자 주>

 

 


도라산역 전경.

2000년에 시작된 경의선 복원사업에 따라 2002년 2월에 완공됐다.

 


“날마다 켜지던 창에 / 오늘도 램프와 네 얼굴은 켜지지 않고 / 어둑한 황혼이 제 집인 양 들어와 앉았다 / 피라도 보고 온 듯 선득선득한 느낌 / 램프를, 그 따뜻한 것을 켜자 /

얼어서 찬 등피여, 호오 입김이 수심되어 갈앉으면 / 석윳내 서린 골짜구니 뽀얀 안개 속 /

홀로 울고 가는 / 가냘픈 네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시인 유정의 ‘램프의 시’(1958)다.

이 시를 처음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유정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그러나 <김수영 전집>을 보면 뛰어난 문학적 안목을 지닌 시인으로 나오고 있다.

지적이고 사회비판적인 김수영의 시들과는 달리 서정적이며 다소 감상적인 작품들을 발표한 시인이다.

필자가 이 시를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 있다.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 / 내가 갈 수 없는 그 가물가물한 길은 어디냐 /

안개와 같이 /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 /

싸늘하게 타는 램프 / 싸늘하게 흔들리는 내 그림자만 또 남는다 / 어느새 다시 오는 밤 검은 창 안에.”

 


양구 펀치볼에서 만난 한국전쟁


이 시에는 한국전쟁이 배경으로 놓여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말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결코 적지 않은 이들에게 전쟁이 데려간 것은 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었으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점에서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해 민통선 기행에서였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민통선과 비무장지대를 둘러볼 때 가장 인상적인 곳 가운데 하나는

양구군 ‘펀치볼’이었다. 지난해 뜨거운 여름 어느날 양구에 와서 먼저 찾은 곳은 가칠봉 전망대였다.

군부대 지프를 타고 1시간 가량 산길을 올라 능선을 타고 갔다.

철책선을 옆에 두고 한참 가는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단숨에 안겼다.

바로 왼편으로는 비무장지대가 길게 펼쳐 있었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줄기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듯 비무장지대는 깊은 계곡과 높은 산들이 연이어 있었다.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들릴 뿐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해발 1242m의 가칠봉 정상에 있는 관측소에 서자 북쪽으로 저 멀리 금강산 끝자락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칠봉 바로 앞에는 김일성고지·모택동고지·스탈린고지 등이 있었으며,

바로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가칠봉 정상에서 시선을 남으로 돌리면 펀치볼이 내려다보였다.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저 아래 쪽으로

화채그릇과도 같은 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펀치볼의 공식 행정 명칭은 양구군 해안면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 외국인 종군기자가 바로 여기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해안면의 모습이

마치 화채그릇과도 비슷하다고 해서 펀치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김호기 교수가 임직강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라산역으로 가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이곳 펀치볼은 철저히 파괴됐다.

피의능선 전투, 도솔산 전투, 가칠봉지구 전투 등이 이 지역에서 치러졌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전적비들이 세워져 있다.

더없이 한적한 이곳이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게 필자에겐 낯설지만(정확히 말하면 Punch Ball이 아니라 Punch Bowl이며, 펀치라는 말을 들으면 화채보다 주먹으로 한 대 친다는 의미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펀치볼이라는 영어지명 자체가 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듯하기도 했다.

가칠봉에서 내려와 펀치볼을 가로질러 오면서 바라본 풍경 또한 인상적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험준한 산들이 분지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으며,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분지 안에는 고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동행한 장교에 따르면 펀치볼은 양구군 안에서도 이름난 채소와 과일 생산 지역이라고 한다.

펀치볼을 새롭게 바꾼 이들은 전쟁 직후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폭탄과 지뢰를 제거하고 논과 밭을 일궜다고 한다.

모든 게 철저히 파괴된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 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처 제거되지 못한 지뢰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으며,

휴전선에 인접한 탓에 이런저런 고생과 불편함 또한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흔적이 생생한 펀치볼에서 예기찮게 만나게 된 한갓진 한여름 풍경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앞에서 인용한 ‘램프의 시’와도 같은 쓸쓸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포함한 어떤 복합 감정을 안겼다.

 


한국전쟁에 대한 현재적 인식


‘펀치볼’ 이야기를 꺼낸 것은 6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지니는 의미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지난 6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해 여러 행사가 치러졌다.

언론을 보더라도 보수 매체와 진보 매체 모두 한국전쟁 60주년을 특집으로 다뤘으며,

학계에서도 브루스 커밍스와 와다 하루키 등 외국 학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필자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한국전쟁이 잊혀져 가는 전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를 이기는 과거가 없듯이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는 적잖이 가려진 것으로 보인다.

6월 25일에는 정작 한국전쟁보다 이튿날에 치러질 한국 대 우루과이의 16강전이

더 관심을 불러 모은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지난 6월에 발표된 행정안전부의 여론조사는 한국전쟁에 대한 국민의식의 일단을 보여 준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청소년은 41.3%, 20대는 46.3%에 머물렀다.

성인의 경우는 63.7%를 기록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북한이 일으켰다고 응답한 비율은 청소년이 63.7%, 성인은 79.6%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경우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전쟁 발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모를 수도 있다.

1960년에 태어난 필자의 경우도 1920년대의 일을 정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 변동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뤄져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조사 결과가 아주 놀랄 만한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다시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면 비교적 넉넉한 살림살이였음에도 1960년대 시골에 살 때

삶은 감자와 옥수수, 개떡으로 여름 점심을 대신하곤 했다. 필자 연배의 이들에겐 이런 먹을거리들이

일종의 추억의 음식이자 먹고사는 것의 이른바 ‘빵’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지만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겐 부모 세대의 심층에 자리 잡은 애증병존적 기억이지

그렇게 현실감 있는 이야기라고 하기 어렵다.


 

1951년 격전지인 펀치볼 지구를 방문한 신현준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전쟁의 현재적 의미를 돌아보는 데 존재하는 세대 간 인식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체험이 주는 직·간접적 경험의 유무는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포함해

세대 간 정치·사회 의식의 차이를 보여 준다.

그래도 1980~1990년대에는 대학 내에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 탓인지 최근에는 그 관심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펀치볼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필자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동일한 시간에 속해 있음에도 펀치볼의 시간과 서울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거리감이었다.

이 거리감은 한국전쟁을 포함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세대 간 인식의 거리감일 수 있으며,

전쟁의 체험이 격렬했던 만큼 그 거리감의 차이 또한 결코 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라산역에서 생각하는 분단의 현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역사 교육의 중요성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된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 시각에서

현재의 한국사회가 지니는 역사적 기원과 전개에 대한 학습 및 토론은

‘우리’라는 집단은 물론 ‘나’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을 이룬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대외적·대내적 문제의 대다수는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로부터 구조화되고 경로화된 이슈들이며,

이런 역사적 · 사회적 사실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선행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넓고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며,

이 점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역사 교육의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7월 8일 박태균 교수와 파주 임진각을 찾았다.

임진각 주위를 둘러본 다음 임진강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라산역으로 갔다.

도라산역은 2000년에 시작된 경의선 복원 사업에 의해 2002년 2월에 만들어진 역이다.

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이 역을 방문해 침목에 서명하고 연설했다.

박 교수와 도라산역 플랫폼 안내판에 쓰여 있는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철도공사의 홍보문구를 읽었다.

‘서울에서 56㎞, 평양에서 205㎞’가 병기돼 있었다.

한때 운동가요로 널리 불린 ‘서울에서 평양까지’에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거리는 광주보다 더 가깝다.

지난해 민통선 기행 중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떠올린 생각이지만

개성과 사리원을 통과해 평양을 거쳐 살수대첩의 청천강과 ‘약산 진달래꽃’의 영변을 지나

압록강의 신의주까지 달려갈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 오게 될까.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노랫말처럼

“돌아올 때 빈차걸랑 울다 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 올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철길은 북쪽으로 곧게 뻗어 있되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까지다.

잠시 쉬는 사이 인터넷을 접속해 보니 ‘천안함 사건’을 두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성명을 둘러싼 남북한 외교전이 한창이다.

도라산역까지 동행한 군인이 다가와 이제 다시 임진강역으로 돌아가야 하니 기차에 올라타라고 한다.

- 김호기 연세대 교수

- 2010 07/27 ⓒ 위클리경향 885호

 

 

 

 

 

 

 

 

 

 

 

 

 

일본 초고속 경제성장 엔진 ‘점화’

 

‘한국전쟁 특수’는 신이 내린 부흥의 바람

 

 

전쟁을 치른 국가의 경제가 온전할 수는 없다.

미국을 상대로 총력전을 펼친 태평양전쟁 종전 후 일본은 더더욱 그랬다.

전쟁 기간에 일본은 전체국가 재산의 4분의 1을 날렸다. 도심의 주택은 3분의 1이 파괴됐다. 

그러나 일본은 종전 후 19년 만에 수도 도쿄에서 올림픽을 치를 정도로 비약적 성장을 기록했다.

한국전쟁은 이처럼 초고속으로 주행한 일본 경제의 엔진에 불꽃을 피우는 역할을 했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 19년 만에 올림픽을 치렀다. 사진은 1964년 도쿄 올림픽 개막식 사진. (경향신문)

 


전후 일본 국민의 생활은 최저 수준을 맴돌았다. 몇 가지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1945년 쌀 생산은 1903년 이래 최저 수준이었다. 필요한 식량의 20%만이 배급됐다.

1946년 도쿄 시민들의 1인당 하루 영양 섭취량은 1352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인의 경우 3300였다.

물가는 폭등했다. 1945년 도매물가지수는 10년 전에 비해 3.5배 높았다.

이 수치는 1년 뒤에는 16.3배, 2년 뒤인 1947년에는 48.2배가 되고

불과 4년 뒤인 1949년에는 208.8배까지 뛰었다.

일본 경제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맞은 한국전쟁을 ‘가미카제(神風)’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신이 내린 부흥의 바람이었다.

일본의 한국전쟁 특수는 크게 전쟁 기간의 특수와 휴전 이후 특수로 구분된다.

격전이 벌어지던 기간에는 군사작전에 필요한 경제 활동이 중심이었고,

전쟁이 어느 정도 휴지기에 들어간 이후에는 한국 재건에 필요한 경제 활동이 중심이다.

내용은 다양하다.

우선 한국으로 보낸 전략 및 구호물자가 있다.

여기에는 폭파 및 바리케이드 설치에 필요한 전략물자, 기관차 · 자동차 · 전선 등 운수 및 교통물자,

DDT나 빵 같은 구호물자, 목재와 시멘트 등 건설물자가 포함된다.

두 번째는 일본 내 군사기지 건설에 사용한 자재다.

세 번째는 전쟁 발발 이후 급증한 육상 및 항만 하역에 동원된 노무 인력이다.

네 번째는 선박 및 철도 이용 급증으로 인한 수요 창출이다.

마지막으로 전쟁 특수에 필요한 물자 생산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이다.



전쟁 이후에는 재건특수 ‘로또’


한국전쟁이 일본경제에 투여한 응급 효과는 전쟁 발발 직후 곧장 드러났다.

해상 수송의 경우 물자 수송을 위해 한국으로 출발한 용선 규모는 1950년 말 30만톤에 달했는데

용선료가 그 이전에 비해 2~3배 뛰었다. 자동차 수출도 급증했다.

1949년 일본 자동차 업계의 최대 수출국은 한국이었지만 그 규모는 불과 200여 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0년 7월부터 1951년 2월까지

미군과 미국경제협력국(ECA)이 발주한 자동차 수는 무려 7000여 대에 달했다.

 

기지 건설을 위한 공사 계약도 1950년 8월까지 20억엔에 달했다.

생산량 증가는 고용량 증가로 이어졌다. 초창기 인력 수요는 하역 중심이었으나

점차 기지 건설 공사나 병참 수리 공장의 고용도 증가했다.

당시 후쿠오카 지구 공공직업안정소 통계에 따르면 1950년 7월 기준으로 일용노동자 수는

전쟁 발발 두 달 전인 5월에 비해 49% 증가했다.

직종은 수리공, 운전수, 잡역부, 하역부, 경비수위 등 다양했다.

당시 일본 경제안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1년 동안의 전쟁 특수 규모는 총 3억1500만달러였다.

이 가운데 물자가 2억2200만달러, 용역이 9300만달러 규모다.

한국전쟁이 창출한 전쟁 수요는

패전 이후 시장을 잃고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일본 중화학공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일본의 중화학공업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큰 손상없이 보존돼 있었다.

문제는 2차대전 종전 후 수요 부족으로 설비 가동률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1948년과 1949년 일본 수출액은 1930~1934년에 비해 각기 15%와 34%에 불과했다. 

1949년 일본 수출 품목에서 절반이 넘는 물량이 섬유(55.2%)에 쏠려 있었고,

기계는 11.6%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 중공업 생산력은 1930년대 전성기 수준으로 회복됐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의 군사기지에서 미군과 전투장비를 싣고 이륙 준비를 하고 있는 미군 수송기.(경향신문)

 

한국전쟁은 또한 미국의 대일본 원조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구실을 했다.

1949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일본경제 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은

조지프 도지 미군정사령부(GHQ) 경제자문은

일본이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인플레이션 억제가 경제 부흥의 선결 조건이라는 이 같은 입장은

생산 확대를 통해 경제 부흥을 꾀한다는 일본 내각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물가상승률은 떨어졌지만 실업률은 급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터진 한국전쟁은

고용과 생산을 크게 늘리며 도지의 권고안을 자연스럽게 폐기 처분했다.

일본이 한국전쟁 당시 병참기지 노릇을 하며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리적 근접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요인이 있다.

바로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갖고 있던 군사경제적 이해관계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의 대일본 정책을 완결짓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1930년대부터 아시아 시장 발전을 통해 세계 경제의 균형 상태를 성취할 목적으로

일본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국이 수행한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일본은 미국의 냉전 전략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군사적 이해관계와도 맞아
 


미국의 역할은 한국전쟁과 일본 경제 성장의 관계를 따지는 데서 중요한 물음 하나를 던진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일본 경제의 회복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장은 전화통화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일본 경제에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면서 경제 부흥의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한국전쟁이 없었다 하더라도

일본 경제는 일정한 성장을 지속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전쟁 덕에 살아났다’는 주장은

대부분 사실과 부합하지만 ‘전적으로 그렇다’고 보는 건 매우 단순한 인식”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1952년 한 해에만 8억달러 상당의 전쟁 특수를 일본에 주문했다.

1952년과 1953년 전쟁 특수는 일본 전체 수출의 64%와 70%를 각각 차지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무역 적자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비슷한 기간에 유럽의 수출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150% 수준을 달성했지만

일본은 전전의 40% 수준에 머물렀다. 일본이 기대하던 한국전쟁 특수에는 전쟁 중 물자조달만이 아니라

한국전쟁 휴전 이후 한국 부흥 특수도 포함돼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의 반일정책으로 차단됐다.

일본은 1953년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 한국 특수 시장을 잃은 데 대한 보상을 미국에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했다.

일본 경제에 대한 지원이 동아시아 내 반공 자본주의 블록 형성을 강화한다는 전략적 고려에 입각한

결정이었다. 미·일 동맹에 기초한 미국의 이러한 전폭적 지원에 힙입어

일본의 무역 수지는 1955~1960년에 비로소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참고자료
: 이숙종, ‘한국전쟁과 일본의 경제적 성장’,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 한국사회학회편, 풀빛


- 정원식기자

- 2010 07/27 ⓒ 위클리경향 88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