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성균관

Gijuzzang Dream 2010. 10. 18. 08:42

 

 

 

 

 

 

 

  성균관  

 

 

 

고려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이

1298년(충렬왕 24)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1308년(충선왕 즉위) ‘성균관(成均館)’으로 바뀌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국자감’으로 바뀌었고,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고쳤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주례(周禮)>에는 국가 교육기관으로 오학(五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학(南學)을 ‘성균(成均)’이라 하여

음악을 통한 교육을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했다.

성균은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는 뜻으로

어그러짐을 바로잡아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성균관(成均館)>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명칭 변경

고려

성종 11년(992)

국자감

충렬왕 1년(1275)

국학

충렬왕 24년(1298)

성균감

충선왕 즉위년(1308)

성균관

공민왕 5년(1356)

국자감

공민왕 11년(1362)

성균관

조선

태조 7년(1398)

성균관

고종 24년(1887)

경학원(經學院)을 부설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때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 철폐

 

1905년

경학원(經學院)

1930년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 설립

1942년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 설립

→ 태평양전쟁으로 인하여 폐교

1945년

명륜전문학교가 부활

경학원 → 성균관으로 환원

1946년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 설립

1953년

성균관대학교


 

 

조선이 개국하게 되면서 조선 왕조는 국가이념인 주자학을 연구하고 보급할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관료체제의 재편성과 강화를 위하여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관리양성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교적 교육을 위한 성현(聖賢) 봉사(奉祀)의 기능과 인재 양성의 기능을 함께 가진

성균관을 설립하게 되었다.

 

 

 성균관

또한 태학(太學) · 반궁(泮宮) · 현관(賢關)· 근궁(芹宮) · 수선지지(首善之地)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왕조의 한양(漢陽) 천도에 따라

숭교방(崇敎坊 : 현재의 명륜동)에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1398년(태조 7)에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정록소(正錄所) · 식당 · 양현고(養賢庫) 등이

완공되었으며, 정종 2년(1400)에 소실되어 태종 7년(1407)에 재건되었고,

 그 뒤 1478년(성종 9)에는 도서를 보관하는 존경각(尊經閣)을 새로 건립하는 등

규모가 확대되고 형식도 정비되었다.

 

연산군 시절에는 창덕궁의 후원에서 연락(宴樂)을 일삼을 때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엿본다고 서재(西齋)의 외면에 화방벽을 쌓게 하고

공자의 위패를 철거하고 묘정비는 도성 밖에 버렸다고 한다.

성균관 자체도 도성 밖 남쪽으로 옮기려다가 중종반정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선조 34년(1601)에 복구하기 시작하여

선조 35년에 대성전(大成殿), 39년에 명륜당(明倫堂)을 중건하였다.

그 뒤로 계속 중건과 확장을 거쳐,

영조 18년에는 왕의 친필을 새긴 탕평비(蕩平碑)를 반수교(泮水橋) 옆에 세우고

19년에 성균관에 나가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한 후

왕이 사용하였던 활과 여러 도구들을 육일각(六一閣)을 세워 보관하기도 하여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후 고종 6년(1869)에 대대적인 보수를 하는 등, 현재의 건물들은 선조대와 그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성균관의 건물 배치

‘전묘후학(前廟後學)’ 또는 ‘전제향후강학(前祭享後講學)’

곧, 앞쪽에는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 뒤쪽에는 교육을 하는 강학의 공간을 배치하였다.

지방에 설치한 향교(鄕校), 서원(書院)의 구조도 바로 이 성균관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였다.

 

 

이름

내용

비고

향사(享祀)의 공간

신삼문(神三門)

성현들의 신이 드나드는 문묘(文廟)의

정문

 

동삼문(東三門)

왕이 석전(釋奠) 참석 등 문묘에 출입할 때 드나들던 문

또는

어삼문(御三門)

하련대(下輦臺)

왕이 행차할 때 가마(연, 輦)를 내려놓는 곳.

어삼문 동쪽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를 모심.

현재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5성), 공문10철(공자의 제자 10인), 송조 6현(송나라 현인 6인),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

나주향교 대성전을 원형으로 삼음.

‘大成殿’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

동무(東廡)ㆍ

       서무(西廡)

공자의 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 한(漢) · 당(唐) · 송(宋) · 원(元)의 제현(諸賢) 94위 및 우리나라의 18현(賢) 등 112위(位)

1949년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 · 서무에 봉안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옮기고, 중국 현인 94명의 위패는 땅에 묻음

묘정비(廟庭碑)ㆍ

묘정비각

(廟庭碑閣)

성균관 역사와 설립과정을 새긴 비

 

수복청

 

대성전 서쪽

제기고

 

수복청 남쪽

강학(講學)의 공간

명륜당

 

 

동재ㆍ서재

 

 

은행나무

 

 

정록청

학교 고위직원들이 업무 보는 곳

명륜당 동쪽

서리청

학교 하급직원들이 업무 보는 곳

정록청 동쪽

비복청

학교 여직원들이 업무 보는 곳

정록청 동쪽

향관청(享官廳)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

제사지낼 때 제관들이 머무르는 곳

정록청 북쪽

동월랑ㆍ서월랑

향관청 앞에 있는 부속 건물

최근 복원

존경각

도서관 기능

명륜당 뒷편

육일각

활과 화살, 대사례의 기구를 보관하던 곳

 

진사식당

학생식당

명륜당 동쪽

포주

식당 음식, 제사 음식에 사용될 소, 돼지 등 고기를 준비하던 곳

서재 남쪽

기타

은행나무(杏壇)

명륜당과 대성전 앞뜰에

각각 암수 두 그루를 심음

 

잣나무(壯元柏)

이 나무를 만지면 과거에서 장원할 수

있다고 한다. 대성전 앞뜰에 있음

 

삼강목

나뭇가지가 셋

대성전 앞

오륜목

나뭇가지가 다섯

대성전 앞

반수(泮水)

성균관 앞을 흐르던 냇물

복개

반수교(泮水橋)

반수 위에 놓여있던 다리

현재 없음

비천당(丕闡堂)

과거시험장, 과거 때 제 2과장(科場)으로 사용

명륜당 서쪽

벽입재ㆍ일양재

비천당 앞에 있는 기숙시설

지금은 없어졌음

계성사(啓聖祠)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

원래 비천당 뒤편에 있었는데, 현재 없어짐

 

하마비

성균관에서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표시비석

탕평비 앞

탕평비ㆍ

          탕평비각

영조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은 당쟁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뜻에서 세운 비석과 그 건물

 

“주이불비 내군자 지공심(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시소인 지사의(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즉 “두루 사귀고 편당되지 않음은 군자의 떳떳한 마음이요, 편당되어 두루 미치지 못함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는 글이 새겨 있음

성균관 입구


 

 

①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향사(享祀)의 공간[문묘(文廟)]

△신삼문(神三門)

: 성현들의 신이 드나드는 문묘의 정문(보물)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지어진 문으로 대성전의 남쪽입구에 출입하는 세 개의 문.

△동삼문(東三門)

: 왕이 석전(釋奠) 참석 등 문묘에 출입할 때 드나들던 문으로 대성전 동무 북쪽의 문이다.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고, 왕의 행차 때만 사용하는 ‘어삼문(御三門)’이라고도 한다.

△대성전(大成殿)

: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 · 가을로 석전(釋奠)을 행하는 사당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선조 35년(1602) 중건하면서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원형으로 삼아 지었다.

대성전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 좌우의 동무ㆍ서무 건물은 중국과 우리나라 현인들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 대성전(大成殿)의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 1543∼1605)의 친필이다.

석전대제(釋奠大祭, 중요무형문화제 제85호)는

음력 2월 첫번째 정(丁)일과 음력 8월 첫번째 정(丁)일에 행한다.

△동무(東廡)ㆍ서무(西廡)

: 본래 공자의 제자(孔門弟子) 69위(位)와 중국 한(漢) · 당(唐) · 송(宋) · 원(元)의 제현(諸賢) 94위 및

우리나라의 유학과 관련된 현인들의 18현(賢) 등 112위(位)를 모시고 있었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1949년 전국 유림대회(儒林大會)의 결정으로 당시 성균관과 각 향교의 동 · 서무에 봉안되어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종향(從享)하고,

중국 현인 94명의 위패는 땅에 묻고(埋安 : 위패를 태워서 땅에 묻음) 현재 동무 · 서무는 비어있다.

△묘정비각(廟庭碑閣)

: 태종 10년(1410)에 처음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인조 4년(1626)에 처음의 비문을 그대로 쓰고 음기(陰記)를 추가해 세운 것.

비문은 조선 초기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고

뒷면의 음기(陰記)는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지었다.

△향관청(享官廳)

: 문묘 제사 때에 제관(祭官)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으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되었다.

중앙 대청에는 제사에 쓰이는 향축(香祝)을 보관하고 좌우에는 헌관방(獻官房)이 있다.

한편, 향관청의 좌우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들이 사용하던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이 있다.

△전사청(典祀廳 : 석전 때에 희생(犧牲)을 준비하던 곳)

재학당(載學堂), 수복청(守僕廳), 제기고(祭器庫) 등

 

 

② 유생들의 교육 및 기거와 관련된 강학공간 - 명륜당, 동재, 서재, 존경각

△명륜당(明倫堂) : 유생들의 강학장소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고,

뒷벽 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 · 서재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 · 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됨.

 

△명륜당 월대 위의 비 : 대원군 서원철폐에 대한 내용의 비 (碑)

고종실록 1871년 3월12일자에 의하면,

고종이 문묘에 친림하여 공자 재를 올린 뒤 서원철폐의 당위성을 이야기했는데,

서원철폐에 대한 당시 유생들의 큰 반발로 비(碑)의 인위적인 훼손이 있어 비문을 확인하기 어렵다.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12일(임인) 1번째기사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유생들에게 서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다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어서 사재(四齋)의 장의(掌議)와 참반유생(參班儒生)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서원(書院)을 설치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百世) 후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公議)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이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더러 네다섯 군데에 달하니, 또한 매우 무의(無義)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원 외에 중첩하여 설치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허락하지 말아서

변함없는 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양재(兩齋=동재ㆍ서재)

: 명륜당 앞 유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이며

동재(東齋)는 상급생, 서재(西齋)는 하급생과 특별전형 유생이 거처하였다.

지금도 성균관 대학 동양학부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기거한다.

동ㆍ서재는 명륜당 마당 방향으로 창이 나 있고, 반대편으로 생활하는 공간인데,

방 앞에는 마루가 넓고 길게 있다.

동 · 서재는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 · 서재를 합하면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방 · 장의방 · 진사방 · 하일방 · 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끝방을 하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이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다.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 · 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유생들의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 · 재뢰(財賂) · 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庖廚) : 석전제釋奠祭(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410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의 희생犧牲을 준비하던 곳

식당(進士食堂)

동재 마당 건너편에는 성균관 식당(진사식당)이 있고, 성균관에 근무하던 관리들이 머물던 정록청도 있다.

△정록청

: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의 끝 글자(字)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이다.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성균관내의 서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명륜당 동쪽에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고,

이후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되었다.

- 서사청(書史廳) : 정록청 뒤편의 부속건물

 

△존경각(尊經閣) : 도서관 기능

명륜당 북쪽에 있는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改修)하였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 · 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였으며,

불교 · 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戰亂)과 재정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로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400여 년 동안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육일각(六一閣)

: 영조 19년(1743) 명륜당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 기구를 보관하던 곳이며

‘육일각’ 명칭도 활쏘기(射)는 육례[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중 하나라는 뜻이다.

명륜당 뒤에 육일각을 둔 것은 태학생들에게 글공부와 함께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으로,

태학생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은행나무 두 그루(천연기념물 제59호 지정).

: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였던 대사성(大司成) 윤탁(尹倬)이 1519년(중종 14)에 심었다고 전한다.

높이 21m 둘레 7.3m.

 


율곡 이이는 한때 금강산에 들어가 잠시 불교에 몸을 담았던 일로

성균관 유생들과 왈패들의 방해로 인하여 고역을 치렀던 일이 있었다.

그때 지기(知己)였던 송강 정철의 기지로 겨우 수모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말 불가에 귀의하였다면 머리를 삭발하였을 터이니

갓을 벗어 머리를 확인하여 만약 머리가 길면 귀의한 것은 아닐 것이니 훼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율곡의 갓을 살짝 벗겼다고 한다.

선비의 자존심도 살리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율곡의 머리는 금강산에서 하산할 때 이미 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입장하고 난 다음에 겨우 과거장에 들어가 맨 끝에 앉아서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율곡은 장원을 한다.

  

 

 

③유생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공간 - 성현의 제사, 유생교육에 필요한 음식마련, 서적 출판 등

△계성사(啓聖祠)

: 중국의 예에 따라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


△비천당(丕闡堂)

: 소과, 대과의 과거 때 제 2과장(科場)으로 사용되었다(제1 과장은 명륜당).

현종 5년(1664)에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남은 재목으로는 서쪽과 남쪽의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건물이다.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에 세운 600주년 기념관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천당은 ‘니원(尼院 : 즉, 비구니僧房)’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명륜전문학교 설립 후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일양재와 벽입재는 없는 상태이다.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이 있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고려시대 성균관의 직제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성균관을 구성하는 교장인 ‘대사성’, 장관인 ‘좨주’, 선생님인 ‘직강’ 등 여러 직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보이지 않게 성균관을 지탱한 ‘반인(泮人)’도 있었다.

어린아이인 재직(齋直)은 유생들의 심부름과 수발을 들었고,

어른 반인(泮人)들은 각기 담당을 나눠 의식주를 책임졌다.

 

관비(館婢)의 소생은 직동(直童)이 되고

다른 계집종 자식은 서리(胥吏)에 이름이 오른다네.

재직(齋直)은 장성하여 수복(守僕)이 되니

반인(泮人)들이 지는 역(役)은 본디 길이 다르다네.

館婢攸生是直童, 生於他婢吏名充.

齋直長還成守僕, 泮人亦自不相同.   - 윤기(尹愭, 1741-1826)

 

 

반인(泮人)의 사회적 지위는 대단히 낮았다.

반촌(泮村)의 남자가 성균관 소속의 계집종과 자식(아들)을 낳을 경우

성균관의 직동(直童) 곧 ‘재직(齋直)’이 된다.

재직은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ㆍ서재의 각 방에 소속되어 유생들의 잔심부름을 한다.

재직(직동)이 장성하면 성균관 내 제향과 관련된 육체노동을 맡는 '수복(守僕)'이 된다.

이와 달리 반인(泮人)이 성균관 밖의 계집종과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서리(胥吏)’가 된다.

이 때의 서리 역시 성균관의 서리일 것이다.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좨주(祭酒) 1명, 정4품 악정(樂正) 2명, 정5품 직강(直講) 1명,

정6품 전부(典簿) 1명, 정7품 박사(博士) 2명, 종7품 순유박사(諄諭博士) 2명,

정8품 진덕박사(進德博士) 2명, 정9품 학정(學正) 2명, 정9품 학록(學錄) 2명, 종9품 직학(直學) 2명,

종9품 학유(學諭) 4명을 두었고, 서리(書吏) 2명을 배속시켰다.

 

1401년(태종 1)에는 직제의 일부가 개정되면서

좨주가 사성(司成), 악정이 사예(司藝), 전부가 주부(注簿)로 개칭,

1466년(세조 12)의 관제 대개혁 때 성균관의 직제도 바뀌어 정비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학덕이 높은 2품 이상의 대신(大臣) 중에서

성균관제조(成均館提調) 또는 겸대사성(兼大司成)에 겸임하는 겸관(兼官)으로

정2품 지사(知事) 1명과 종2품 동지사(同知事) 2명이 있으며,

실제 교수직은 정3품 대사성(大司成) 1명,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정5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

정9품 학록(學錄) 3명, 종9품 학유(學諭) 3명으로 구성되었다. 서리 10명을 배속시켰다.

사성 이하 전적 이상의 관원 가운데 5명을 종학(宗學)의 교관으로 겸하게 하였으며,

적 이하의 관원 가운데 16명을 사학(四學)의 교관으로 겸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정3품 좨주 1명, 정4품 사업(司業) 1명을 새로 설치하는 대신에

사성과 사예 각 1명을 감축하였으며, 서리 10명을 21명으로 증원시켰는데,

실제 운영상의 직제로는 겸직강(兼直講) 1명 및 겸박사(兼博士) · 겸학정(兼學正) · 겸학록(兼學錄) · 겸학유(兼學諭) 각 3명이 증설되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

개국 초기에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에는 200명으로 증원되었다.

(생원과 진사가 100명, 기재생이 100명)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의 궁핍과 성균관 재원의 감소로 인하여 75명으로 대폭 감축되었다가

1742년(영조 18)에 126명으로 다소 늘어났으며, 20인은 기재생으로 되어있었다.

 

정원의 반은 생원(生員) · 진사(進士)로서 입학한 ‘본과생(本科生)’인데,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이라 하고,

나머지 반은 사학(四學)의 생도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 승보기재(升補寄齋)와

부조(父祖)의 공덕으로 입학한 문음기재(門蔭寄齋) 등의 ‘기재생(寄齋生)’이었다.

기재생을 ‘하재생(下齋生)’ 또는 ‘별과생(別科生)’이라 하였다.

 

성균관의 정원

본과생(本科生 )

- 상재생(上齋生),

  상사생(上舍生)

소과급제자, 즉 생원(生員) · 진사(進士)로서 입학

별과생(別科生)

- 하재생(下齋生),

   기재생(寄齋生)

승보기재(升補寄齋) - 사학(四學)의 생도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

문음기재(門蔭寄齋) - 부조(父祖)의 공덕으로 입학

사량기재(私粮寄齋) - 나라에서 주는 급식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식량을 가지고 와서 기숙하는 경우


 

문음기재는 학당을 다니지 않아도 기재 100명 모두성균관에 입학할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에 문음의 수 제한하고 문음도 학당에 들어가 소학을 배우고 시험을 치른 후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

 

기재생의 경우,

사학(四學)생도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 · 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중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한 자,

문과 및 생원 · 진사시의 초시(初試)인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에게만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입학 자격은 다소 완화되어 『경국대전』에 규정된 자격 이외에,

서울과 지방의 유생 중 시강(試講)에 뽑힌 자,

과시(科試)의 하나인 통독(通讀)에서 기준 점수는 얻었으나 합격하지 못한 자가 추가되었으며,

양반신분이 아닌 서출(庶出)의 생원 · 진사도 입학하였는데,

이들은 남헌(南軒)에 있으면서 공부하였기에 ‘남반(南班)’이라고 하였다.

 

 

교과 과정

경사(經史)의 강의와 과문(科文)인 시(詩) · 부(賦) · 송(頌) · 책(策) 등의 제술(製述)과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琅)의 필법도 익히게 하였는데,

사서오경은 주자의 주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르쳤다.

주자학(朱子學) 이외의 이단서(異端書)는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1466년(세조 12)에는 9재(九齋)를 설치하여 사서오경을 차례에 따라 가르치도록 했으나

이 구재법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수업 성적은 강경(講經)과 제술을 통해 평가했으며,

성적이 뛰어난 학생은 문과 초시를 면제하고 바로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교수 방법

원칙적으로 먼저 9재 가운데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大學)』을 배우고,

『대학』에 능통한 것으로 판단 될 경우에만 논어재(論語齋)에 올렸으며,

논어재 · 맹자재(孟子齋) · 중용재(中庸齋) · 시재(詩齋) · 서재(書齋) · 역재(易齋)로 진재(進齋)하게 했다.

 

표준적으로 적용된 교수 방법은 학생이 1개월 중 20일 동안 경서를 읽고, 4일간은 제술을 실시하여

월말에 그 달에 배운 경서의 다소(多少)와 고강 및 제술의 분수(分數)를 기록하고,

식년에 분수의 총계를 통하여 상등 5명 내지 10명에게 관시(館試)를 면제하고 회시(會試)를 보게 하였으며,

기재생의 경우에는 생원시를 보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는 각 6개월,

『주역(周易)』·『예기(禮記)』는 각 7개월로 되어 있었다.

 

성균관 유생에 대한 특전은 원래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 취득한 학생들에게 주어졌는데,

관시 · 알성시(謁聖試) · 춘추도회(春秋都會) 등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그 밖에 천거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 적용되는 원점은 도기에 따라 하루에 1점이며, 300점, 즉 300일을 채우면,

관시(성균관 안에서 시행하는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도기(到記)’란 진사식당 입구에 비치된 명부로

하루에 두 끼(아침, 저녁) 먹을 때마다 서명해야 하는 출석부. 오늘날의 출석점수와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성균관 유생에 대한 과거의 특전은 초기에 비하여 확대되었고,

원점의 기준이 1744년(영조 20)에 50점으로 크게 완화되었다.

 

 

성적평가

강경 : 대통(大通) - 통(通) - 약통(略通) - 조통(粗通) - 불(不) 5단계로 평가

제술 : 일정기간을 정하여 지식의 응용과 표현 연습

 

고시방법

일고 : 매일 실시, 순고 : 10일마다, 월고 : 매달마다, 연고 : 매년 3월 3일과 9월9일 실시

제술로 이루어지고 성적이 우수한 세 사람을 선발하여 문고의 복시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 사학의 사학합제

 

학관일강은, 교수 앞에서 매일 보는 시험.

순과는 열흘마다 치르는 서술식 시험인데, 순두전강(旬頭殿講)이라고도 함

 

 

학생들의 자치는 유교적 의례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치적으로 질서를 잡도록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의 자치기구로는 ‘재회(齋會)’가 있는데,

그 임원으로는 장의(掌議) · 색장(色掌) · 조사(曹司) · 당장(堂長) 등이 있었다.

또 유생들은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떠나버리는 ‘권당(捲堂)’을 행하기도 했다.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학전의 수조(收租)와 성균관의 외거노비 신공으로 충당했으며,

그 전곡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다.





△성균관

= 성균관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그 이전까지 국자감이라 불리던 국립교육기관의 이름이 이때 성균감으로 바뀌었다.

성균관으로 개칭한 것은 공민왕 때다.

조선 건국 후인 태조 6년, 성균관은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 명륜동 일대 숭교방으로 이전한다.

정종 2년(1400)에는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됐으나 1409년 원상복원됐다.

성균관의 교육이념은 단 하나, 유교적 소양을 갖춘 국가 엘리트 양성이었다.

드라마에서 정약용(안내상)이 유생들에게 힘주어 말하듯

“그대들은 나라의 녹을 먹는 성균관 유생”이었던 것이다.

△동재와 서재

= 조선시대 성균관은 기숙학교로, 기숙사는 '청재'라 불렀다.

청재는 명륜당을 기준으로 왼쪽의 동재와 오른쪽의 서재로 갈렸다.

동재와 서재에는 각각 28개의 방이 있었다.

청재에는 온돌이 없어 겨울에는 화로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는데,

이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 중에는 하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서재는 노론의 자제들이 사용했고, 동재에는 소론 및 기타 당파의 자제들이 머물렀다.

상재생들의 경우 한 방에 보통 2~4명이 기거했지만, 하재생들은 10여 명이 같이 사용했다.

상재생과 하재생이 같은 방을 쓰는 것은 금지됐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동재와 서재의 유생들이 서로 편을 갈라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은 사실과 일치하지만,

남인 김윤식(박민영)과 노론 이선준(박유천)이 소론 문재신(유아인)과 한 방을 쓰는 것은 100% 허구다.

△수업

=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모습보다 술을 마시거나

음모를 꾸미는 데 열중하는 모습이 더 자주 비친다.

물론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 실제 성균관 수업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성균관의 시험은 크게 강경과 제술로 나뉘었다.

강경은 경전을 읽고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

제술은 강경에서 공부한 바를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모두 9개 교과목을 배웠는데,

한 달 30일을 기준으로 20일은 경서를 공부하고 6일은 제술을 공부했다.

오전에는 교관의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이를 복습했다.

또한 수시로 시험이 치러졌는데, 개중에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무작위 추첨식 시험도 있었다.

일고라는 형태의 시험은 날마다 상재와 하재에서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그날 배운 글을 외우게 했다.

순고는 10일에 한 번 보는 시험이었는데, 이는 일종의 작문으로 유생들의 필력을 측정했다.

이외에 달마다 치르는 월고, 해마다 치르는 연고 등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곧 시험의 나날이기도 했다.

△장의

= <성균관 스캔들> 드라마에서

하인수(전태수)는 성균관 장의의 권한을 이용해 남장 여자인 주인공 김윤식을 괴롭힌다.

장의는 일종의 학생회인 자치기구 재회의 우두머리다.

장의는 재회를 소집하거나 유생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전임 장의 3명의 추천을 통해 뽑은 뒤 대사성의 인준을 받았다.

라마에서 장의가 하인수 한 명뿐인 것은 사실과 다르다.

실제 성균관에는 동재와 서재에 장의가 각기 1명씩, 모두 2명이 있었다.

△순두정강

= 드라마에서 김윤식은 하인수의 음모로 성균관 유생들의 물건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된다.

이에 정조는 순두정강 과제로 진범을 찾아내라는 과제를 주고, 이를 기회로 윤식은 모함에서 벗어난다.

성균관 유생들은 과거 급제가 최종 목적이었지만 성균관 내에서 여러 종류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은 도기과, 절제, 친시, 응제, 알성시 등등 종류도 다양했는데, 그 중 순두정강은 임금이 주관했다.

순두전강(旬頭殿講)은 성균관 유생들이 매 달 보는 제술시험이다.

매년 2, 4, 6, 8, 10, 12월의 11일마다 출석부를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이 중 몇몇을 골라 시험을 보게 했다.

△벽서

= 소론 영수인 대사헌의 아들이자 성균관 유생인 문재신은 밤마다 조선의 실정을 비판하는

붉은 색 벽서(일종의 대자보)를 화살에 묶어 조정 중신들의 집 벽에 쏘고는 달아난다.

이 때문에 그는 홍벽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물론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나 선조 때 ‘벽서지변’이라 하여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606년 6월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 조정을 비방하는 벽서가 나붙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성균관 관리 몇 사람을 잡아들여 처벌했는데,

실제로는 성균관 유생들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이보다 앞서 성종 13년에도 성균관 내에 “썩고 용렬한 무리들이 그 벼슬을 차지하였도다”라며

성균관 스승을 비방하는 내용의 벽서가 나붙어 성종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수사에 나서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다.

△반인과 반촌

= 반인은 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비들로, 반노라고도 불렀다. 반인들은 평생 성균관에 붙어 살았다.

재직 또는 직동이라 불린 반인 남자아이들은

세숫물을 나르거나 술을 타오는 등 유생들의 시중을 들었다.

반인 여자아이들은 성균관 관비가 됐다. 이들은 주로 밥과 반찬을 만들거나 빨래를 담당했다.

수복과 관비가 서로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므로 이들의 자식 또한 반인이나 관기가 됐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죽을 때까지 성균관을 떠날 수 없었다.

반촌은 반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유생들을 상대로 한 하숙집, 시장, 음식점, 푸줏간 등이 있었고, 강력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드라마에서는 홍벽서를 뒤쫓아 온 관군들이 반촌으로 진입하지 못하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조선시대에는 반촌에 함부로 들어간 포졸이 처벌받기도 했다.

△정조와 정약용

=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바른 정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조(조성하)와 정약용이 있다.

정약용은 1783년 과거를 통해 생원이 된 후 처음 정조를 만났다.

정약용은 성균관 학생 시절 정조가 내준 시험 과제에서 독특한 답변으로 정조의 관심을 모았다.

정약용이 정조의 야심적인 화성 건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라마에서는 성균관 박사 정약용이 화성 축성을 위한 각종 도구의 설계도를

정조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약용이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정조가 정약용에게 화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정약용은 부친상으로 3년간의 여막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 장원식 기자 ,  2010 10/26, 위클리경향 897호
- 조선유생 사랑과 야망 ‘성균관스캔들’ 드라마 속 정조시대 공부벌레들 모습, 어디까지 사실일까


참고자료:

<성균관의 공부벌레들> 이한, 수막새, 2010

<조선조 성균관 교육과 유생문화> 장재천, 아세아문화사, 2000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 김영사, 2004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성균관을 가리켜 인륜을 밝히고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고 했다.

실제 성균관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유지에 기여했다.

성균관의 이러한 기능은 성균관과 과거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 데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문과의 경우 소과와 대과의 2단계가 있었다.

예비시험으로서의 소과는 내용적으로 성균관의 입학자격자를 뽑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발된 이들에게는 성균관 과정의 교육을 거친 다음에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성균관이 대과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균관의 이러한 성격은 조선 후기에 유교 학풍이 과거를 위한 학문보다

심성 수양과 의리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고,

서원을 통해 그러한 학풍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성균관 교육의 부진을 초래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성균관이 여전히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존속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소학(小學) 정신에 윤리적 기초를 둔 학령(學令)의 적용을 받았는데,

학령은 성균관의 학칙인 동시에 관학(官學) 일반의 학칙으로서

주자학(朱子學) 정신이 철저히 반영되어 있었다.

유생들은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하여 학령의 준수를 감독하며, 대내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시정 요구, 선대의 유신(儒臣)에 대한 문묘배향(文廟配享) 요구,

이단에 대한 배척 요구 등의 대외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재회를 열어

소두(疏頭)를 뽑고 유소(儒疏)를 올렸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일종의 수업거부와 단식투쟁인 권당(捲堂)이나 동맹휴학인 공관(空館) 등의 실력행사를 하였다.

이러한 실력행사는 초기에 유교의 근본이념에 맞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행하여졌지만,

후기에는 우세한 당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격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의 유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학전은 성종년간(1469∼1494)에 2,400여 결(結)이었던 것이

효종년간(1649∼1659)에는 358결로 크게 감소되었으며, 그 뒤로 400결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국가의 재정이 피폐해짐에 따라

성균관 자체의 교육재정도 궁핍해졌으며,

서원이 발달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집권층이 과거시험을 불공정하게 운용하면서 성균관의 교육기능은 약화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이 된 후에는 그 기능이 더욱 약화되어

1887년(고종 24)에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관제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과거제도가 철폐되면서 인재 양성의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학무아문(學務衙門)의 성균관급상교서원국(成均館及庠敎書院局)으로 변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성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 정신의 계승과 근대화에 대처해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교육 기능의 부활을 위하여 고종 32(1895) 성균관에 3년제 학교인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장(長) 1인 · 교수(敎授) 2인 · 직원(直員) 2인을 두어 직제를 개편하는 한편,

학과목에서도 유교 과목 외에 본국역사(本國歷史) · 만국역사(萬國歷史) · 본국지지(本國地誌) ·

만국지지(萬國地誌) · 산술과목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성균관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5년에는 한일합병에 의해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일제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명칭도 ‘경학원(經學院)’ 으로 바뀌게 되었다.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으며,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 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하여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 이 설립되었다.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가 설립되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인하여 폐교되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면서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었고,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로 발전하였다.

 

 

 

 

 

 

 

 서울 문묘(文廟)  

유교 성인(聖人) 공자를 모시는 사당

 

 

제사를 위한 대성전이 앞에, 교육을 위한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가 특징

 

서울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 옆 유림회관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문묘 일원은 크게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이 중 대성전 · 명륜당 · 동무 · 서무 · 삼문과 같은 중요 건축물은 보물 제141호로 등록되어 있고,

나머지 동재 · 서재 · 존경각 · 양현고 등은 사적으로 되어 있다.

 

문묘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우고

정종 2년(1400)에 불에 탄 것을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1년부터 1606년 사이에 거의 원래 모습대로 중건되고, 영조 때는 거의 모든 시설이 완비되었다.

고종 6년(1869)에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 · 서무 등 제사를 위한 공간인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동재 · 서재 등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 구역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현재 종로구 명륜동3가 53 성균관대학교 내에 소재하고 있고,

1963년 보물 제141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종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문묘는 신라시대 때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서는 국자감(國子監) 안에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서울을 옮긴 후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 두었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유학 교육과 함께 선현의 제사를 받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문묘의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가운데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그 좌우에는 유학자의 신위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세워져 있다.

대성전 뒤편에는 학생들을 교육하고 과거 시험을 보던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그 좌우에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東齋)와 서재(書齋)가 있으며,

뒤에는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이 있다.

 

 

 

문묘의 건축물 규모와 격식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는

일반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서울 문묘의 특징이다.

 

  

서울 문묘, 건축사 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 지녀

 

대성전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 · 맹자 · 안자 · 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宋朝) 6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기법을 느끼게 한다.

단청을 간소하게 하여 기둥에는 붉은 칠, 공포에는 녹청 칠을 하였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원래 이 곳에는 공자의 70제자와 우리나라 및 중국의 제현 112위를 제사하였으나

광복 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 중국의 94인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매안).

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선조 39년(1606)에 지은 건물로 가운데 중당과 양옆에 있는 익실(翼室)로 구분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맞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 공간으로

성균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 아름드리 큼지막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 59호이다.

수령은 500년으로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윤탁(尹倬)이 심었다고 한다.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가려주는 듬직한 체구의 나무는

수령만큼이나 문묘의 역사성과 전통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 때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되자 새로 개편하여 3년제의 경학과를 설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성균관은 경학원으로 고쳐져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문묘의 제사와 유학기관의 재산 관리만을 담당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서울 문묘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며,

또한 건축사 연구의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 있는 곳이다.

- 사종민, 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년 09월02일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 성균관(成均館)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353

  

● 반촌(泮村) - '서울의 게토(ghetto)'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778


신참례(新參禮) - 조선시대 신입관리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7605808

 

● 대사례 - 영조 19년(1743) : http://blog.daum.net/gijuzzang/4338430



● 조선시대 신고식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272 

 

● <조선시대 문과백서>-조선시대 문과방목(文科榜目) 분석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311


● 고문서 - 과문(科文)=시권(試卷)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