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맥아더 장군과 한국전쟁 - ‘신화’ 객관적 조명 통해 교훈 얻어야

Gijuzzang Dream 2010. 10. 27. 22:14

 

 

 

 

 

 

 맥아더 장군과 한국전쟁
 ‘신화’ 객관적 조명
통해 교훈 얻어야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남한을 구한 전쟁 영웅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박태균 교수는 그러나 맥아더에 관해 알려져 있는 많은 사실이 잘못된 허구라고 말한다.

그는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면서까지

한국전을 세계대전으로 확산시키려 한 위험한 군인이었다는 것이다.<편집자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인천항이 보이는 자유공원에 섰다.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에 있는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조선 고종 25년(1888년) 11월 9일 인천항구 각국 조계장정 제1관에 의해 공원으로 확정됐으며,

미국 · 영국 · 러시아 · 청 · 일본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고

러시아 토목기사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이 측량해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부르던 것을

1914년 각국 지계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호칭했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해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 개칭했다.



일본에 나가사키가 있고 중국에 상하이가 있다면 한국에는 인천이 있었다.

개항장으로 외국 세력들이 몰려오던 곳. 개항장의 상징으로 조성된 공원.

공원이 조성된 지 6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공원의 앞바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졌다.

이 서구식 공원이 만국공원에서 서공원, 다시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은

우리 현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곳에 있는 거대한 동상 앞에 붙어 있는 ‘건립문’은 동상이 설립된 사연을 잘 알리고 있다.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불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탄앙을 한 몸에 두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중략)…

그의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장군의 진두지휘하에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대한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며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가 김경승 교수의 손에 의하여 빚어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하략) 1957년 9월 15일


 


 

월미도 앞바다를 바라보는 거대한 동상


 

거대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은 인천상륙작전이 거행된 월미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에 쌍안경을 들고 서 있는 장엄한 모습이다.

동상을 만든 김경승은 일제에 부역한 혐의로 인해 광복 후 미술인 조직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지만

1950년대 인천의 맥아더 동상과 4·19 혁명으로 헐린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제작한 분이다.

자유공원이 설립된 지 반세기 만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어야 했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후 반세기 후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앞에서는

동상을 헐거나 옮기자는 사람들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맥아더 장군을 둘러싸고 왜 이러한 갈등이 발생했을까.

혹시 그를 둘러싸고 어떤 신화나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달 전 해리 트루먼 대통령 기념도서관의 관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 언급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기 때문에

한국이 통일되지 못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대비시키는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분명 잘못된 신화가 아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전쟁이 치러졌다면

한국은 대한민국과 유엔군의 주도권 아래 통일됐을 것이다.

비록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당분간 대한민국 정부 대신 유엔군이 행사한다 하더라도,

한반도의 북부 지역에 수십발의 원자탄이 투하돼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됐더라도,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전선이 확대돼 동북아에서 세계대전을 방불하는 전쟁으로 확전됐다 하더라도

한반도는 통일이 됐을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통일을 했어야 했는가?

 


전략적 실수와 위계질서 위반으로 해임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한 것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도 논란이 벌어졌다.

공화당과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트루먼의 맥아더 장군 해임에 대해 비판했다.

공산군에 대해 너무 온화한 정책을 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루먼과 참모들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파병했지만 이것이 또 다른 세계전쟁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전선은 철저히 한반도 내에 있어야 했다.

전선이 중국으로 확대되는 순간 또 한 번의 세계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봤다.

이러한 생각은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을 제한전쟁(limited war)으로 일컫기도 한다.


 

 

박태균 교수가 월미도 인천상륙작전 기념 조형물 앞에 서 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된 것은 전략적 실수와 군의 위계질서를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1978년에 발간한 합동참모본부사 3권

<한국전쟁>(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1990년에 번역)을 보면

맥아더는 미국의 군 통수권자(트루먼 대통령)나 군 지휘계통에서 상부기관(합동참모본부)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행동을 한 지도자로 그려지고 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의 실시를 취소하지 못하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너무 늦게 본국에 보낸 것이

“군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첫 번째 선례”(159~160쪽)였다.

워싱턴의 결정을 무시하고 유엔군이 국경선까지 진격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 역시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 훈령의 범위를 벗어나 왜곡하여 내린 명령의 첫 번째이며 마지막이 아니었다”

(290쪽).



또한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결정한 정책들을 벗어나는 성명들을 ‘제멋대로’ 발표했다.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416쪽)으로 간주했고,

합동참모본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합동참모본부의 모든 구성원들은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종종 피력해 왔다. 그들은 이번 경우에 있어서도 모두, 만일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각 계층의 미국 국민이 민정당국은 이미 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고 비난할 것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426쪽)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사에 그려진 맥아더는 전술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실수를 범했다.

먼저 인천상륙작전이 맥아더가 장담한 것과는 달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즉 “적의 능력은 …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결코 격멸되지는 않았다. 북괴의 최정예부대는 섬멸되었으나

탈출한 잔류부대에는 적의 고급사령부와 대부분의 고급장교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적 군사력의 예비가 고갈되지 않았”(183쪽)다.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서울 탈환까지는 13일이 걸렸고,

이 기간에 북한은 재기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맥아더의 실수는 중국군의 참전에 대한 오판이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사는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의 오판에 더 주목했다.

중국군이 참전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 1950년 10월 중순이었고,

11월 초 미국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그때 맥아더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한다고 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여기에는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원자탄의 사용과

중국군의 후방 지역인 동북지역(만주)에 대한 폭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그는 유엔군에 총공세 명령을 내렸고,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유엔군의 길어진 보급선은 그의 오판을 막는데 고려 사항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중국군이 참전한 직후

국경 근처의 모든 시설과 함께 도시와 촌락에도 고폭탄이나 소이탄을 사용하도록 했다.(224쪽)



이렇듯 미국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전사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전쟁 당시나 지금까지도 일부 한국인들이 내리고 있는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결코 객관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정부와 군부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군인일 뿐이었다.

 

맥아더가 일본에서 점령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의 정책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점령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수많은 A급 전범뿐만 아니라 일본 왕도 면죄부를 받았다. 이른바 레드퍼지(red purge)라고 하는 ‘빨갱이 숙청’도 진행됐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불만 세력으로 규정됐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냈다.

‘한국군은 열심히 싸웠는데 유엔군은 열심히 싸우지 않아 서부 전선은 공산군에 밀렸고,

동부전선은 넓은 수복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은 사람이 너무나 많아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는 등 다양한 신화가 양산됐다.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상이 진행된 판문점을 중심으로 그을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주요 전술은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이었으며,

반공 포로 석방의 목적은 정전협정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오히려 미국은 전투를 끝내기 위해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웠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신화 가운데 한 명의 주인공이었다.

이제 객관적 사실을 통해 모든 신화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한국전쟁의 객관적 조명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훈들을 얻어야 한다.

그래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은 역사적 산물이고, 그것을 보면서 당시의 역사상을 후대에게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청을 일부라도 보존하지 않고 헐어버린 것에 대해 지금도 애석한 마음이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오히려 맥아더 동상 아래에 있는 학도병들을 애도하는 기념비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맥아더 동상 아래에 있는 학도병 애도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우리 학도병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 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었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또다시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18일 남녀 대원 3,000여 명은 축현초등학교에 집결, 출정식을 갖고 마산까지 남하하여

1951년 1월 5일 600여 명은 해병대로, 1,300여 명은 부산에서 육군으로 자원입대하였다.

그 후 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가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우리는 그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고자 여기에 기념탑을 세운다.



전쟁을 통해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희생된 그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국가에 의해 동원된 피해자라는 점이다. 국가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

이들뿐만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

전쟁 발발 후 60년이 지난 오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 박태균 서울대 교수,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2010. 7/20 위클리경향 8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