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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병합(1910년) 100년과 한일관계의 미래

Gijuzzang Dream 2010. 10. 26. 02:22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한·일관계의 미래

 

 

 

2010년 5월 10일, 한국과 일본 지식인 200여 명이

100년 전 한일병합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지난 10일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삶은 주장과 선언에 포획되지 않는 것이다.

김호기 교수는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를 떠올린다.

김 교수는 식민지배가 한 시인의 영혼에 새겨놓은 상흔을 들여다보면서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반성이 없는 한 소망스러운 한·일관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편집자주>


 



필자는 1960년에 태어났다.

일제시대 경험이 없는 필자에게 식민지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 50년 가까이 간접적으로 체험한 식민지 시대가

필자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모더니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이해는 우리 모더니티 연구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다루고자 한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것은 1910년이었지만, 실질적 병합은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1876년 개항 이후 경제적 주권을 상실해가는 과정 속에서

결국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국 병합’이 선언됐다.


 

김호기 교수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앞에 서있다.


 

 

한일 강제병합 무효 선언


당시 병합 조약의 전문(前文)에는

일본과 한국이 상호의 행복과 동양 평화의 영구 확보를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병합이 최선이라고 확신하고

본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고 서술돼 있으며,

제1조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고 기술돼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통탄스러운 내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없이 수치스러운 이 한일병합 조약에 대해서는

지난 5월 10일 한국과 일본 지식인 200여명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필자 역시 참여한 이 선언은

“한국 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다”라고 공표했다.

또한 선언은 “조약의 전문(前文)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고 있다.

한국 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한국 병합 조약도 불의부당”하기 때문에

한일병합 조약이 처음부터 불법 무효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은 지난 7월 28일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한·일 지식인 대표들이 ‘1000명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뒤늦었으나 당연한 선언이었지만,

한일병합 100년을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은 적잖이 착잡하다. 식민지 시대만이 문제가 아니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그토록 갈망해 온 해방을 성취했지만,

20세기 후반 한·일관계는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2010년에도 우리 사회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영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다.

과연 우리에게 식민지 시대란 무엇이었으며, 일본은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일까.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며

 

필자는 한 지식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한·일 병합 100년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인 윤동주(1917~45)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널리 알려진 ‘서시’(序詩)다. 이 시를 처음 읽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백양로에서 문과대학으로 올라가는 길 한편의 윤동주 시비에 적혀 있는 시이기도 하다.

‘서시’가 쓰인 시비는 연세대 교정 말고도 교토 도시샤대학과 만주 용정중학교(전 대성중학교)에도 있다.

모두 시인이 다녔던 곳이다.

연보를 보면 시인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다.

윤동주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yoondongju.yonsei.ac.kr/)를 보면

본관 앞에서 시인이 친구들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이 나온다.

지난 30년 동안 수시로 이곳을 지나다녔던 필자로서는 가슴 뭉클한 사진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가 윤동주 시세계에 대해 뭐라 얘기하기가 쉽지는 않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도 있고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흐름도 있다.

비전공자인 필자에게 가장 설득력 높은 견해는

시인이 다녔던 연세대 문과대학 교수이자 시인이었던 박두진의 해석이다.

“티 없고 맑은 고독과 깊은 종교적인 사랑으로까지 경도했던 그의 인간성,

민족과 시대적 현실에서 불멸의 가치로써 탈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자유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을 그는 아울러서 소유하고 있었다.

시와 사상, 사상과 지조, 그리고 서정정신과 저항정신이 한 줄기 순절에의 희생으로 일철화함으로써

하나의 영원한 비극적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았다.”
(http://yoondongju.yonsei.ac.kr/)


자유와 정의, 서정정신과 저항정신이야말로

더없이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 맞섰던 윤동주 시인의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식민지 시대란 나라를 잃은 시대다. 나라란 무엇이며, 민족이란 무엇인가.

'나라'란 동일한 언어를 쓰는 민족 또는 민족들이 구성한

독립된 주권을 가진 정치 · 경제 · 문화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공동체가 갖는 자결권을 상실한 시대가 다름 아닌 식민지 시대다.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가 역사적 시각이라면, 다른 하나는 현재적 시각이다. 이 두 시각이 물론 분리될 수는 없다.

역사란 본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지난 8월 9일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된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일본 수도 도쿄 전경.


 

담화를 통해 간 총리는

한일병합이 한국인들의 뜻에 반(反)하여 식민지배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또한 불법적으로 탈취한 조선왕실의궤 등 귀중 도서의 인도를 약속하고,

사할린 교포 귀환과 한인 유골 반환 지원 등의 의사를 표명했다.

전체적으로 간 총리의 담화는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보다 진전된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식민지배를 받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일병합의 위법성을 담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대했던 군 위안부에 대한 국가 책임 인정 및 배상, 강제징용자들의 개인청구권,

재일동포들의 지방참정권 등에 대한 언급도 빠져 있다.

더욱이 담화가 의의를 가지려면 8월 15일 또는 8월 29일에 이뤄졌어야 했는데,

미리 발표한 것도 그렇게 반가운 것은 아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약소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략일 따름이며,

따라서 과거사를 올바로 해결하지 않고서 미래의 바람직한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가 끝난 60여 년이 흘렀건만

과거사 문제가 크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고이즈미 준이치 전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전범들의 위패가 안장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일본 정부는 화해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하고 그 의의를 훼손시켜 왔다.

한 걸음 물러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켜 볼 때 한·일관계는 매우 복합적이며,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 역시 복잡다단하다.

한편에서는 반일감정이 여전히 강고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적 · 문화적 상호의존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일본 애니메이션이 자연스럽게 향수되는 문화의 하나라면,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한류에 대한 일본 대중의 관심 역시 뜨겁다.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숭실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 뒷줄 가운데 있는 이는 문익환 목사다(경향신문).

 

 

일본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과거사에 대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노와

동아시아라는 문화적 동질성에 대한 공감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과연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두운 과거를 가진 국가들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진정한 화해는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 필자의 마음이 더없이 착잡한 것은

식민지 시대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개인적·사회적 경험을 결코 쉽게 잊거나 역사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기억 하나를 돌아보고 싶다.

몇해 전 교토에 갔을 때 필자는 도시샤대학을 방문해 윤동주 시비를 찾았다.

1995년 연세대에 이어 도시샤대학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건립됐다.

우리말과 일어가 병기돼 있는 시비 앞에 갖고 간 꽃다발을 내려놓고

시인의 비극적인 삶을 다시 한 번 추모했다.

시비에 적힌 ‘서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여러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북간도에서 평양으로, 다시 북간도로, 그리고 서울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해방되기 6개월 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인은 일제의 생체실험을 받다 죽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같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더없는 슬픔과 분노를 갖게 한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년 도쿄에서 쓴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다.

어둠의 시대에서 등불을 밝혀 새로운 아침,

다름 아닌 조국의 해방을 간절히 기다리는 시인의 소망을 담고 있다.

사회와 역사로부터 유리된 삶과 정신은 사실 부재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 사회적 거처를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과연 무엇인가.

세계화 시대라 하더라도 우리의 사고와 정신의 한 거처가 여전히 민족에 있음은 분명하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을 일방적으로 배격하자는 게 아니다.

100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의 문제가 저절로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가 진정성이 담긴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바람직한 공존, 소망스런 한·일관계는 사실 불가능하다.

도시샤대학을 빠져 나와 걷고 있는데 가모가와 강이 나타났다.

윤동주 시인도 이 강변을 더러 거닐었을 것을 생각하니 새삼 뭉클하면서도 처연했다.

빨갛게 물든 벚나무 잎새들이 저녁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간사이 공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가모가와 강을 나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 김호기 연세대 교수

- 2010 08/24, 위클리경향 889호 

 

 

 

 

 

 

 

 

문화재 환수과정 정부 역할 아쉬워

  

 

ㆍ조선왕실의궤 반환 공신 혜문스님, 지속적 환수활동 다짐
ㆍ경술국치 100주년·한국전쟁 60주년·전태일 분신 40주년·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혜문스님은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일본 정치인을 설득하며
 조선왕실의궤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했어요.

일개 스님이 일본 왕실을 상대로 문화재를 환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이죠.”

 

일본 궁내청에 묻혀 있던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인 <조선왕실의궤>가

현해탄을 넘어 8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의궤가 환수된다는 사실은 강제병합 100년을 앞두고

지난 8월 10일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뜻에 반한 것이었음을 사과하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문에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도서를 가까운 시일에 넘기고자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이러한 내용이 담화문에까지 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스님이 꼽히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치밀하게 준비


지난 2006년부터 의궤를 돌려받기 위해 일본을 수십 차례 드나들었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혜문스님의 목소리에는 기쁨만큼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다른 문화재에 대한 환수 노력이 병행됐다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더 많은 문화재가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일협정 이후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어요.

이번 의궤 환수과정에도 정부의 외교적 역할은 거의 없었죠.

민간 차원에서 오랫동안 노력한 것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인 겁니다.”

혜문스님이 문화재 환수활동을 벌인 것은 의궤가 처음이 아니다.

혜문스님은 2004년 도쿄대에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실록 환수운동을 벌였다.

도쿄대가 2006년 7월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실록을 반환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혜문스님은 같은 해 10월 실록 환수활동을 통해 의궤도 침탈된 사실을 파악해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를 구성했다. 실록에 이어 의궤 환수활동에도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혜문스님이 문화재 환수에 나선 계기는 무엇일까. 혜문스님은 ‘상식’을 이유로 꼽았다.

지난 2004년 한일협정문서가 완전히 공개되자 혜문스님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환수한 1432점의 문화재에 대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 결과 문화재적 가치가 비교적 낮은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청구권을 포기하고 졸속으로 체결된 협상임을 느꼈다.

“석굴암, 다보탑에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는 다 털리고 짚신을 받아온 격이었습니다.

국가적 자존심은 물론 사회 상식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혜문스님은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까지 의궤를 돌려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 환수될 조선왕실의궤 가운데 하나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 나오는 국장행렬도 '발인반차도’.


 

우선 의궤를 강제적으로 일본에 뺏겼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형식으로 의궤를 약탈당했는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환수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혜문스님은 2006년 10월 일본 궁내청에 찾아가 의궤를 열람했다.

의궤마다 ‘대정 11년(1922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뻘건 도장이 찍힌 것을 직접 확인했다.

일본이 스스로 의궤를 강탈해 반출했다고 인정한 사실을 확인한 혜문스님은

의궤 환수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혜문스님은 북한 조선불교도연맹과 조선왕실의궤 반환촉구 남북 공동 합의를 추진했다.

또 수시로 일본 정치인들을 찾아가 의궤 반환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특히 간 나오토 총리 등 유력 정치인에게는 꾸준히 서한을 보내

의궤 반환을 일본 내에서 이슈화해줄 것을 촉구했다.

2009년 10월에는 일 외무성을 방문해 ‘조선왕실의궤 반환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꾸준히 환수작업을 벌였다.

 


관련부처 소극적 태도 변화 필요


어려움도 많았다. 수십 차례 일본과 북한을 오가는 비용만 해도 수천만원이 들었다.

문화재청의 지원이 있었지만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무관심이었다.

시민사회와 언론은 이들의 행보에 무관심했고,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문화재청의 지원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기는 지난 7월에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의궤를 반환할 것이라고 밝혔죠.

그러나 한국 외교부가 정식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6만1000여 점의 문화재 가운데 의궤만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이 소식을 접한 혜문스님은 7월 20일 일본으로 건너가 8월 6일까지 일본 민주당 의원들을 만나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환수하도록 설득했다.

또 한국 외교부를 압박해 정식 요청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나라당 이해봉 의원 등과 함께

조선왕실의궤 환수 국회 포럼까지 준비했다.

결국 일본이 자발적으로 담화문을 통해서 의궤 반환의사를 밝혀

환수위원회와 외교부는 갈등을 피했지만 혜문스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아쉬운 마음이었다.

의궤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질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는

관련 부처의 무관심이나 소극적인 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환수는 꾸준히 준비해야 하는데 지난 5년 동안 제대로 준비한 것이 의궤밖에 없다”면서

“만약 정부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미리 문화재 환수를 준비하거나

민간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면 더 좋은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담화문을 통해 ‘조선왕실의궤 등’이라고 밝혔듯 의궤 외에 다른 문화재의 환수는

앞으로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문화재청이 일본 정부와 협의해 이뤄질 것이다.

혜문스님은 이와는 별개로 문화재 환수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어떤 문화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의궤 환수 협상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의궤를 완전히 환수하면 다른 문화재 환수작업에 나선다는 것이다.

“과거에 왜란 등 나라에 큰일이 발생하면 중요한 문화재는 사찰에서 보관하거나 스님들이 지켰습니다.

이번에 되찾은 의궤도 마찬가지였죠.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따라서 옛날 스님들이 그랬듯이 저 역시도 불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조선왕실의궤란?

의궤란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로,

조선왕실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행한 주요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기록문서다.

주로 왕실의 혼사, 장례, 잔치 등을 기록했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는 명성황후의 장례 절차가 기록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등

총 81종 167책의 조선왕실의궤가 보관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는

2007년 6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 임석빈 인턴기자

- 2010 08/24위클리경향 8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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