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보다 800년 빠른 ‘백제 면직물’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 유적애서 ‘섬유로 짠 最古 면직물’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 ‘백첩포’ 실물로 확인
독특한 직조방식… 한국 면직史 다시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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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인 14세기 후반 문익점(1329∼1398)
에게서 시작됐다는 한국 면직의 역사가무려 8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갈 전망이다.
- 능산리사지 출토 면직물. ⓒ국립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국내 최고의 면직물이 발견됐다.
능산리 절터 서쪽 돌다리 백제 유적 층에서 출토된 대나무 조각 안에 들어있던
폭 2cm, 길이 약12cm 가량의 이 면직물은 6겹으로 접힌 덩어리 모양으로
1999년 능산리사지 6차 발굴조사 때 발견된 이후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중흥을 꿈꾸다 - 능산리사지’ 특별전(8월15일까지)에 처음 공개됐다.
최근 전시 유물인 능산리 절터 출토품을 정리 분석하는 과정에서
1999년 능산리 절터 제6차 조사 당시
유적 저습지에서 목기류와 함께 수습된 직물 덩어리가국내 최고의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온 면직물인 '백첩포(白疊布 또는 白布)'로 추정하고 있다.
백첩포는 중국인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만든 면직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당시 국내에서도 만든 기록이 나온다. 백첩포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면직물의 재료가 되는 목화는
역사적으로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 경 중국 원에 사신으로 다녀온 문익점을 통해 한반도에 전래됐다.
값비싼 비단에 비해 싸고 따뜻한 면직물의 보급은 당시로서는 섬유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실물을 통해 보고 확인된 국내 최고(最古) 면직물은
안동 태사자 묘에서 출토된 흑피화(검정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의 안쪽에 붙어 있는 직물로
그 제작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1330~1374) 때로 추정됐다.
하지만 능산리 절터 서쪽 돌다리의 백제시대 유적 층에서 출토된 이번 면직물이 확인됨으로써
한국 면직물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됐다.
능산리 절터는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 때 제작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 등이 함께 출토된 곳으로,
‘창왕명사리감’의 제작년도가 서기 567년 백제 창왕 때인 점을 고려할 때,
고려의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처음으로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에 비해
무려 800년이나 앞서는 국내 최고의 면직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직물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조법과는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 씨실)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로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으며,
이 직물을 통해 백제인의 독창적인 직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 면직물 조직모형도. ⓒ국립부여박물관
박물관은 "이번 면직물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조법과는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이라며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어 이 직물을 통해 백제인의 독창적인 직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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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첨단 기자재인 주사전자현미경(SEM)을 통한 종단면 관찰 결과,
식물성 셀룰로오스 섬유의 특징인 완두콩 형상의 결정 구조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섬유단면에 완두콩 모양으로 가운데 중공이 있고 측면에 천연의 꼬임이 있어
확실히 면섬유라고 확증할 수 있었다.
즉, 이 유물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 독특한 방법으로 직조한 고대 직물 ‘면’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당시의 제직기술과 복식사 연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내에서 출토된 고직물(古織物)의 경우,
초기 철기시대 유적인 광주 신창동 출토의 직물처럼 잘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극히 단편적 자료들이며 금속기 등 다른 유물에 고착되거나 경화된 상태로 남아있어
직물 고유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유물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섬유와 실의 상태, 직물의 조직 등이 잘 남아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번 백제 면직물에 대한 조사, 분석은 국립부여박물관 보존과학팀과,
MOU기관인 한국전통문화학교(심연옥 · 정용재 교수)와 공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조사 · 분석에 참여한 심연옥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는
삼국시대 목화의 소량 재배 가능성을 높게 보는 전통직물연구자인데
면직물의 기원 · 전래와 관련,
"문익점이 면 종자를 유입하기 전에 국내에서 면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며
“목화가 전래됐다면 중국의 윈난(雲南)지방이나 중앙아시아 쪽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목화 재배에 적합한 아열대 환경이었던 지역에서 전래돼 우리 풍토에 맞게 품종을 개량해 토착화했을 것”
이라고 말했다
또 " <한원(翰苑)> 에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는
구절이 나오고, <삼국사기> 의 신라본기 경문왕 9년조(869년)에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布)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당시 백첩포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직물은 아니며
외국과의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등 극히 귀하게 사용된 직물이었는데,
고려 시대로 가면서 생산량이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목화는 고대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비단길 등을 거쳐 중국, 한반도에 전해졌다.
국내 재배와 생산은 <고려사> 기록 등에 따라 문익점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해왔었다.
이는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 문익점을 통해 목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됐으며
이를 통해 값비싼 비단에 비해 싸고 따뜻한 면직물이 보급됐다는 역사인식이 너무 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대직물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품 중에서 6세기 백제 면직물이 확인되면서
목화의 재배와 면직물의 보급에 대해서도 새롭게 이해해야 할 계기가 만들어졌다.
문화재위원인 박윤미 경상대 강사(복식공예 · 직물)는
"문익점이 갖고 온 목화씨는 방적하기 편한 종류로 대량생산을 위한 것이고,
그 이전 삼국시대 때 이미 목화가 소량 재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국시대 목화는 중앙아시아 품종으로 토양과 기후 때문에 잘 재배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문익점의 중국 목화씨 반입은 이후 한반도 전역에 걸쳐 목화 재배를 본격화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확인된 백제 면직물은 옛 기록을 실물로 입증한 첫 유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이번 조사 성과는 오는 10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정식 보고될 예정이다.
- 2010.07.16
- 경향, 국민, 세계, 문화, 연합, 서울신문 등 일간지에서 발췌 정리.
면직물 생산과 목화 재배 시점은 구분해야
문익점 목화 면직물과 능산리 백제 면직물
국립부여박물관은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 직물 1점을 분석한 결과
"고려말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처음으로 갖고 들어왔다는 14세기에 비해
무려 800년이나 앞서는 국내 최고의 면직물로 볼 수 있다"고 7월15일 발표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면직물 역사는 그만큼 쑥 올라간다.
하지만 이번 발표 내용 중에는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목화를 재배해 그것을 원료로 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시점과
면직물 사용 시점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면직물이 꼭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그 목화를 원료로 해서 생산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면직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목화 외의 다른 식물을 재료로 해서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문익점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을 생산한 기록이 확인된다.
예컨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그나마 기록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신라에서는
국내에서 면직물을 생산해 중국에 조공품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 9년(869) 조를 보면,
이 해 가을 7월 신라가 왕자이면서 소판(蘇判)인 김윤(金胤) 등을 당나라에 보내 사은(謝恩)하는 한편,
그 표시로 진봉(進奉) 즉, 받들어 올린 물품 내역을 이례적으로 상세히 공개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가 공물로 보낸 물품은
말 2필을 시작으로 금 100량, 은 200량, 우황 15량, 인삼 100근,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 10필,
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 10필, 조하금(朝霞錦) 20필,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疊布) 40필,
삼십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 40필, 사척오촌두발(四尺五寸頭髮) 150량,
삼척오촌두발(三尺五寸頭髮) 300량 등이다.
이 가운데 40필을 보냈다는 '백첩포'는 여러모로 주목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면직물 일종이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라서는 '백첩포(白疊布)'로 쓰는 이 직물을 종래에는 모직물로 보았지만,
민길자 국민대 명예교수가 이를 면직물로 수정한 데 이어 최근 들어 상명대 박선희 교수는
이것이 바로 면직물 일종임을 광범위한 문헌 자료 조사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결국 한반도에서는 이미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훨씬 이전에 면직물을 생산한 셈이며
최근에는 학계에서도 이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복식사 전공인 최규순 단국대 교수는 전했다.
고대 한반도에서 직물 산업이 꽤 번창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정부 조직과 그 기능을 집약한 <삼국사기> 직관지에
관급 직물 생산을 담당한 부서가 여러 개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도 간접 확인된다.
백첩포라는 면직물은 고구려에서도 생산했다는 흔적이 있다.
한원(翰苑)이라는 중국의 옛 문헌은
<고려기(高麗記)>라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고구려에 관한 기록을 인용해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백첩포를 짜는 원료가 곧 우리에게 익숙한 목화,
즉,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몰래 그 씨앗을 들여오고
그의 장인 정천익이 퍼뜨렸다는 그것과 같은 종류는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상명대 사학과 박선희 교수는 목화에는 크게 아프리카종과 인도종 두 가지가 있으며,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는 후자이며,
그 이전에 한반도에서 면직물 원료로 삼은 목화는 초면(草綿)이라고 하는 아프리카종이라고 말했다.
이는 면직물이 반드시 문익점이 가져왔다는 목화, 즉, 인도종만을 재료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떻든 이와 같은 기록과 더불어
이번 능산리 절터 출토 백제시대 직물에서 확인한 사실을 아울러 고려할 때
고구려ㆍ백제ㆍ신라 공히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문익점 이전에도 한반도에 면직물은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그다지 이견이 없다.
문헌기록과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 그리고 이번 조사성과를 같이 고려한다면
능산리 출토 면직물은 목화가 재료가 아니라
아마도 초면과 같은 다른 원료를 사용한 백첩포일 가능성이 있다.
이번 능산리 직물이 문익점보다 800년 앞선 면직물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나아가 이것이 지금까지 실물로 확인된 면직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번 분석결과는 의미가 자못 크다.
하지만 설혹 능산리 백제직물이 면직물로 밝혀졌다 해서
한반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지금의 그 목화 재배 또한
문익점보다 800년이나 더 거슬러 올라간 백제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 2010.07.16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백제금동대향로가 놓인 풍경-능산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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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간 : 2010-06-08 ~ 20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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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소 : 국립부여박물관 제2전시실
능산리사지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16년간 총 11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됐는데,
국립부여박물관을 비롯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전통문화학교 등이 참가하였다.
16년간 능산리사지의 발굴을 통해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및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등 400여 점의 유물이 소개된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주칠편이 최초로 공개된다.
이 자료는 발견 사례가 극히 드문 것으로 고대 칠기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
고대 칠기 제작기법과 백제 회화사 연구에 매우 주목되는 자료다.
능산리사지는
옛 백제의 왕도인 사비를 둘러싸고 있던 동라성과 백제왕들이 묻힌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능산리 절은 이 고분들에 묻힌 백제왕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 왕릉을 관리하기 위한 사묘(祠廟)에서 위덕왕대의 국가 사찰로 개편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능산리사지를 통해 알 수 있는 백제 사비시기의 삶과 문화를 전하고자 하였다.
능산리사지 특별전은 발굴 유물을 총 7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1부 <능산리 절의 창건배경 및 입지>는 능산리사지의 발굴 경과를 소개하면서
능산리 절이 왜 능산리에 세워지게 됐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의문을 풀어가도록 했다.
2부 <백제 중흥의 꿈과 좌절, 능산리사지>는 능산리 절의 창건부터 폐사까지에 관한 이야기다.
3부 <능산리사지 가람이야기>는
능산리 절이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의 백제 전통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강당지 주변의 공방지와 불명건물지 등을 통해 능산리 절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4부 <능산리사지 목간에 남겨진 이야기>는 목간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능산리사지의 성격을
조명하고자 했다. 남근형목간은 남근의 왕성한 생명력을 빌어
당시 백제인들이 무엇을 기원하고자 했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해준다.
5부 <한국 사리장엄의 역사, 이곳에서 시작되다>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함께 봉양된 다양한 사리 공양구를 통해
한국 사리장엄의 첫 장이 능산리 절에서 시작된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6부 <유물로 본 능산리 절의 역사>에서는
사비시기 백제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목제품, 금속공예품, 토기 등
능산리사지의 대표적인 유물이 소개된다.
7부 <중흥을 꿈꾼 백제, 백제금동대향로를 땅에 묻다>는
백제 전성기의 예술과 문화를 투영한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능산리 절의 마지막 운명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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