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국립중앙박물관] 태양의 아들, 잉카 展

Gijuzzang Dream 2010. 6. 11. 21:18

 

 

 

 

 

  

 - 안데스 문명(Andes 文明) -

  

 

 

역사적으로 지구상의 인류문명의 발전을 살펴보면, 소위 세계 4대 문명이라 하는

중국의 <황하문명>, 인도의 <인더스문명>, 이집트의 <나일문명>,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이다.

 

최근에는 발달된 고고학의 연구 성과와 새로운  유적의 발굴 등으로 지역별로 독특한 문화권이

더 많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도 하다.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도 위의 4대 문명 영향권에서 벗어나 별도 문명을 형성하였다.

 

기원전 2만 년 전 지구 빙하기 시절, 해면이 낮아져 구대륙과 신대륙이 연결되면서

베링해협을 통해 아메리카로 이동해 들어간 아시아의 구석기인들이 형성한

멕시코의 중앙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마야, 아스테카 문명>과 페루, 칠레의 <안데스 문명>을

4대 문명에 추가하여 세계 6대 문명의 발상지로 부르기도 한다.

 

 

 

안데스 고대문명

차빈문화(Chavin, B.C. 1000-400) → 와리제국(Wari, A.D. 600-900) →

잉카문화(Inca, A.D. 1430-1532) → 스페인(Spain)에 의해 멸망하면서 안데스 고대문명은 끝난다.

 

 

<안데스 고대문명>

북부

남부

비쿠스/비루문화(B.C. 200-A.D. 600)

모체문화(A.D. 100- 700)

레쿠아이문화(A.D. 100-800)

나스카문화(A.D. 100-600)

쿠피스니케문화(B.C. 1200-B.C. 200)

차빈문화(B.C. 1000-B.C. 400)

파라카스문화(B.C. 1000-A.D. 200)

와리제국(Wari, A.D. 600-900)

잉카제국(Inca, A.D. 1430-1532)

스페인(Spain)

    

 

안데스(Andes) 고대문명 중 현 페루지역에 속한 문명은

차빈문화(B.C. 1000-B.C. 400)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게 된다.

 

안데스 고대문명을 평정한 문화는

차빈문화B.C. 400), . 600-900), 잉카제국(Inca, A.D. 1430-1532) 이다.

   

 

 

 

 

 

 

 

 

- 전시실 안내판 정리 -

 

 

■ 안데스 고대문명 이전

 

베링 해협을 건넜던 사람들이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페루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1만 2천년쯤.

좀돌날과 뗀석기를 사용해 사냥하였고,

기원전 6000년에서 3000년 사이의 안데스 고원지대 사람들은

동물을 사육하거나 농업 종자를 개량할 줄 알았다.

그들의 우주는 비가 내리는 하늘과 일할 땅, 그리고 조상이 묻혀있는 지하의 세계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현실의 동물들로 상징되었는데

하늘은 독수리, 콘도르로 땅은 퓨마와 같은 펠리노로, 지하는 뱀과 거미로 상징화되었다. 

이러한 상징물은 초월적인 신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기원전 1800년 경에는 농경사회에서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사원과 같은 공공 건축물이 지어져 정치 종교적으로 특권층이 형성되었다.

 

 

  

(1)카랄유적(Caral, B.C. 3000-B.C. 2000)

페루의 수도 리마(Lima) 북쪽에 있는 카랄유적은

B.C. 3000년 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제사유적이다.

특수 공간, 지배집단 공간, 반지하 원형 공간, 대중집회 공간, 가정집 등 32개의 구조물로 이루어졌다.

특히 건물의 가운데에는 여러 단의 피라미드와 함께 반지하의 원형광장이 있다.

카랄유적에 모여든 해안지역과 안데스고원과 정글지역 사람들은

각기 다른 분업화된 생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과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지배계급은 이후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2)세로세친 사원(Cerro Sechin, B.C. 1800-B.C. 1200)

세로세친 유적은 전사와 사람의 신체 일부가 그려진 담장으로 유명하다. 사원이자 왕궁으로 추정된다.

북쪽 해안계곡에 위치하며 초기문명 형성기를 대표한다.

담장의 외벽과 내벽에는 전사와 사람의 신체 일부가 묘사된 300여개의 부조 석판들이 가득하다.

입구를 중심으로 행렬하는 듯한 전사와 부조 석판들이 배열되어 있다.

전사들은 낮은 모자를 쓰고 곤봉을 들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전사들 사이에는 목이 베인 사람의 머리, 절단된 팔과 다리, 내장, 눈 등의 시체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도안들은 전투에 참여한 전사나 전리품, 희생의례를 위한 인신공양 등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3)파코팜파유적(Pacopampa, B.C. 1250-A.D. 1)

안데스 고대문명이 형성되던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펠리노 신 모양의 절구, 목걸이 등이 출토됐다.

 

   

 

■ 안데스 고대문명 - 北部

 

(1)비쿠스/비루문화(Vicus/Viru, B.C. 200-A.D.600)

차빈문화의 북부 끄트머리 해안지역과 남부 끄트머리 해안지역에는

차빈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문화를 독자적인 문화 그대로 이어가던 집단이 있었다.

바로 쿠피스니케문화(Cupisnique)와 파라카스문화(Paracas)이다.

 

비쿠스문화(B.C. 200~A.D. 600)

소리가 나는 이중 몸체의 토기와 커피콩 모양의 사람 눈이 붙은 인물 토기가 특징적이다.

강력한 모체 세력에 인접해 있어 서로 교류와 통합의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비루문화(BC 200~A.D. 300)는 페루북부 비루계곡과 치카마(Chicama)계곡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후에 모체문화에 흡수되었다.

차빈문화의 영향을 받아 펠리노와 콘도르와 뱀의 모티브를 각종 예술작품에 적용하였다.

근접한 비쿠스문화와 모체문화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보다 사실적이다.

틀을 사용한 토기의 대량생산이 이루어기도 했다.

 

(2) 모체문화(Moche, A.D. 100-700)

잉카시대 이전의 천년 동안 페루 북부 해안은 모체의 땅이었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피라미드의 건축과 관개 시스템 등 뛰어난 건축, 기술 및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다.

지역적 규모로 볼 때 모체문화의 범위가 비쿠스/비루문화에 비해 훨씬 방대하다.

그 속에서 비쿠스/비루문화는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이어가지만 결국 모체문화에 흡수되고 만다.

 

모체는 고위성직자와 지역지배자들이 다스리는 강력한 정치체였다.

모체의 주요 신들은 펠리노와 새와 뱀의 뛰어난 능력이 합쳐진 인간 형성이었다.

아이아파엑(Ai-Apaec)은 참수의 신, 풍요의 신, 창조의 신으로 모체 최고의 신이었다.

농업사회였던 모체문화는 자연의 힘을 숭배했다.

그래서 모체인들은 신들을 달래고 기쁘게 하기 위해 신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의례를 열었다.

모체의 상형토기나 예술작품에는 이러한 희생의례 장면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전쟁의 목적은 인신공양을 위한 희생제물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제물 중에 인간의 피가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전사를 신들에게 바침으로써 그들은 신들로부터 사회질서와 안정을 약속받았다.

 

피라미드 건축과 최고의 관개시스템은 이들이 뛰어난 건축, 기술, 행정능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페루 북부해안 계곡은 큰 강과 비옥한 평야들로 이루어져 있다.

페루 해안 전체에서 생산력이 가장 높고 관개수로 또한 가장 많은 지역이다.

당시에 건설되었던 80Km 길이의 라쿰브레 수로는 현재도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세워졌던 고대왕국들은 풍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나 신전을 축조할 수 있었다.

또한 뛰어난 예술적인 토기들을 만들었으며 금, 은, 동의 합금이나 세공, 야금술도 발달하였다.

 

트루히요 모체계곡의 돌 언덕 경사면에는 신비로운 벽화로 가득한 달의 신전이 있고

500m 거리를 마주하여 태양의 신전유적이 있다.

태양의 신전은 약 1억4000만개의 흙벽돌로 만들어졌으며

달의 신전은 약 5000만개의 흙벽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이다.

1987년 람바예케 계곡의 시판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시판왕 무덤 속에서 나온 부장품은

모체의 뛰어난 문화를 보여준다.

 

<시판왕 피라미드>

시판왕은 모체의 왕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와 두 개의 제단은

기원후 300년경 시판왕이 페구 북부 람바예케 지역의 맹주였음을 보여준다.

이 피라미드는 1987년 조사가 시작됐다. 서쪽의 피라미드는 길이 140m, 높이 35m의 규모이다.

장례용 제단은 6번에 걸쳐 만들어진 일종의 피라미드 형태다.

시판왕, 늙은왕, 제사장, 장군, 왕비, 전사 등 시기와 계급이 다른 10개의 무덤이

각 층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었다. 수많은 황금 부장품과 초자연적인 모습의 각종 신상들,

왕에 의해 수행된 희생의식의 장면들은 모체왕의 힘과 권력을 보여준다.

 

시판왕은 동으로 만든 고리로 결합된 나무관에 안치되었다.

세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전사와 한 명의 아이와 한 명의 파수꾼, 다리가 잘린 문지기,

두 마리의 야마와 개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가까운 다른 5개의 작은방에서는 수백 개의 토기와 음식물이 있는 부장공간이다.

그리고 남측 벽감에는 무덤을 지키는 남자가 앉아 있다.

왕의 몸은 황금, 은, 금동, 구리로 만든 옷, 무기, 홀, 딸랑이, 머리꾸미개, 가슴꾸미개, 목걸이, 코걸이,

귀걸이, 왕관, 부채 등 수많은 부장품으로 덮여 있다.

또한 권력의 상징으로 에콰도르의 해안에서 가져온 스폰딜루스 조개가 함께 있다.

 

늙은 왕의 무덤은 시판왕과 견줄 만큼 부장품이 화려하다.

장신구와 복식으로 꾸며진 부장품 자체만으로도 16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된 무기와 깃발에는 펠리노 신, 문어, 게, 인간 등이 표현되어 있다.

각각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얼굴모양의 목걸이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음과 양, 삶과 죽음, 태양과 달을 상징한다.

그리고 늙은 왕은 이러한 세계를 통제하는 강력한 지배자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늙은 왕의 관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것은 펠리노 형상을 한 금동제 신상이다. 펠리노 신은 모체문화에서 가장 숭배되었던 신으로

늙은 왕 또한 이 신의 힘을 현실에서 구현한 지배자였음을 보여준다.

 

(3) 레쿠아이문화(Recuay, A.D. 100-800)

모체문화의 남쪽에 레쿠아이문화가 있었다.

초기 차빈문화의 중심지였던 페루 북부 중심지 우아라스에서 번성하였다.

이들은 고원과 연해지역을 넘나들며 이 지역들의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그러나 모체 등 주변강국에 둘러싸인 긴장된 환경은 레쿠아이문화와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석조예술은 차빈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건축물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두상이나 동물상은 레쿠아이문화의 독창성을 확연히 보여준다.

이들도 차빈문화처럼 반인반수상을 섬겼다. 최고의 신 역시 펠리노가 주요 모티브였다.

 

(4) 나스카문화(Nasca, B.C. 100-A.D. 600)

레쿠아이문화보다 남쪽, 페루 남부해안 일대 이카, 친차, 나스카, 피스코, 아카리계곡에서 번성하였다.

기본적으로 파라카스의 문화전통 위에 성립하였고, 나스카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나스카문화는 사막 위에 그려진 거대한 지상회화로 유명하다.

회화적인 감각이 뛰어나 다양한 색상을 이용한 나스카의 토기는

동시기 북부의 모체인들이 주로 두 가지 색상으로

사실적인 토기를 만든데 비해 나스카인들은 12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으며,

바닥이 둥글고 두 개의 병목이 다리모양 손잡이로 연결된 모양이 많다.

직물은 파라카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죽은 이의 몸을 구부려 이를 다채색 직물로 감싸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의례용 토기와 직물에는 전리품 머리와 같이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모티브들이 표현되었다.

페루 남부의 나스카 지역은 물이 부족한 건조한 기후로

농경을 위해서는 지하수로와 관개 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아울러 토지의 비옥함과 생산물에 대한 숭배가 강해졌다.

 

<나스카 지상회화>

나스카인들은 토기와 직물에 그림을 그리듯 지면을 캔버스 삼아 건조한 사막 위에 그림을 그렸다.

리마에서 남쪽으로 약 400㎞ 떨어진 페루 남부해안 이카계곡과 나스카계곡 사이다.

지상회화는 막대기 등으로 지표면을 파낸 뒤 아래의 밝은 흙이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일년내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기후조건으로 현재까지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그림들은 너무 커서 땅 위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

1300㎢에 이르는 지면 위에 20여 개의 벌새, 고래, 원숭이, 거미, 개 등의 동식물과 인간의 형상과

직선, 삼각형, 사각형, 사다리꼴 등의 기하학적인 도형 100여 개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형태는 나스카인들이 만들었던 토기나 직물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 그림들의 의미와 그린 목적 등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별자리의 표현, 지하수의 물길 등 그림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물과 관련된 제례를 행했던 신성한 의식지라는 주장이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미라>

나스카문화 대의 미라는 몸통 형상의 곤포 안에 구부린 자세의 미라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 겹의 천으로 미라를 싸서 몸통을 만들고 다시 면으로 만든 그물로 이를 단단히 묶었다.

몸통 위에는 튀어나온 코를 가진 가짜머리를 만들어 붙였다.

 

(5) 티아우아나코문화(Tianuanaco, B.C. 200-A.D. 1300)

나스카문화의 조금 더 남쪽에 있었던 티아우아나코문화는

훗날 와리문화(A.D. 600-900)가 안데스 고대문명을 평정할 때에도 살아남았다.

600년경에는 그 세력이 모체와 나스카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다.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호수의 고원 해발 3842m에서 시작되었다.

‘티아우아나코’라는 이름은 원주민어로 ‘가운데 있는 돌’이라는 의미로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자 우주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처음 티아우아나코 문화의 명칭은 그 이름을 딴 사원에서 비롯되었다.

사원은 총 6개의 신전으로 되어 있다.

이들 사원에 있는 도안들은 기하학무늬, 펠리노 머리, 양식화된 콘도르 등 차빈문화와 관련이 깊다.

특히 큰 돌을 정확히 맞추어 쌓는 기술은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후대 잉카의 전형적인 건축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안데스 고대문명 - 南部

 

 

(1) 쿠피스니케문화(Cupisnique, B.C. 1200-B.C. 200)

페루 북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발전된 문화로

차빈 문화보다 먼저 시작되었으나 차빈 문화의 영향을 받아 흡수되었다.

예술양식의 모티브는 차빈문화와 같이 펠리노와 콘도르와 뱀이 기본 도안이나

돌절구, 병, 접시, 곤봉 등이 독특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쿠피스니케 토기는 대개 회색이나 검은색, 짙은 밤색, 붉은색, 주황색을 바탕으로 한 단색이다.

그릇의 기본 형태는 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렸다.

쿠피스니케 최고의 권력자는 펠리노로 표현되었으며

이들은 정치, 종교, 경제적 권력이 합쳐진 힘을 가지고 생산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2) 파라카스문화(Paracas, B.C. 1000-A.D. 200)

화려한 문양이 있는 수천의 미라 망토로 유명하다.

파라카스반도를 중심으로 건조한 남부의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미라는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망토를 감아 알과 같이 만들었다.

토기는 남부지역의 전통적인 요소의 두 개의 주둥이를 다리로 연결한 손잡이형태가

나스카문화에까지 연결되었다.

 

남부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지하수를 사용하는 등 세련된 문화를 이루었다.

토기와 직물에서 나타난 신의 모습은 북부의 차빈문화의 큰 영향을 볼 수 있으나

보다 인간적이고 유연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보통 큰 눈을 가지고 혀에서는 뱀이 나오며 전리품 머리 등이 달린 흔들리는 장식품을 들고 있다.

또한 파라카스문화의 직물은 뛰어난 직조기술과 다채로운 색과 모티브들의 표현으로 유명하다.

껴묻힌 직물의 수량과 질은 무덤주인의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소박하고 거친 면으로 만든 상의 하나만을 입었고,

신분이 높은 귀족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직물로 겹겹이 쌌다.

어떤 것은 직물의 길이가 무려 20m에 달한다.

1927년에 콜로라도 공동묘지에서 발굴한 429구의 미라를 감싸던 직물은 거대한 망토로서

모두 합치면 200~300m나 되며 하나하나의 직물은 폭이 1m가 넘고 길이도 2.5m 정도라고 한다.

 

(3) 차빈문화(Chavin, B.C. 1000-B.C. 400)

페루 북부 고원지대 차빈데우안타르(Chavin de Heantar)유적에서 시작하였다.

페루 전역의 2/3지역에 걸쳐 있으며, 안데스 고대문명의 기틀을 다진 문화이기도 하다.

이국적인 신들의 도안이 그려진 사원석조물로 유명하다.

차빈의 사원은 강력한 종교적 조직을 보여주는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신으로 숭배하였던 반은 펠리노, 반은 인간모습을 한 란손(Lanzon)석상과 라이몬드신상이 대표적이다.

시각적으로 복자한 차빈예술은 펠리노처럼 사납고, 매나 독수리같이 가볍고, 뱀처럼 무서운

초자연적인 신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 모습은 이미 멀리 퍼져 있었던 고대 안데스의 전통 모티브를 결합한 것이었다.

차빈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페루 북부 고지에 위치한 파코팜파 신전 유적도 있다.

 

 

   

■ 와리제국(Wari, A.D. 600-900)

 

페루의 남부 산악지방에 있는 와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이곳이 정치, 종교, 행정, 군사, 경제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피라미드제단, 사원, 거주지, 공공건물, 수공예품 작업장, 지하회랑, 장례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3만에서 4만명의 인구가 있었다.

 

700년경 와리는 페루의 해안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최초의 통일된 대제국을 건설하여

주변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고 조공을 받았다.

800년경에는 점차 정치적, 경제적으로 쇠퇴하였고

결국 북부 산악에서 치무문화, 다른 지역에서는 여러 소부족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900년경에 찬카이에게 수도를 점령당하면서 와리제국은 붕괴되었다.

붕괴된 이후 지역적으로 특색을 가진 개별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북쪽해안의 람바예케와 치무, 중앙해안의 찬카이, 남쪽의 친차, 추라흔, 치리야바, 아리카,

중앙고원의 우안타, 창카, 동북 안데스의 차차포야스, 남부 고원의 추키밤바, 코야, 루파카, 쿠스코 등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금속세공 기술은 정형화되고 더욱 완벽해져 갔다.

기본적으로 농업과 목축경제였으나 주요 수입원은 상업, 시장, 군사 정복을 통해 이루어졌다.

안데스 고대문명 처음으로 북부와 남부의 문화양식을 혼합하여 각지에 영향을 준 제국이다.

 

(1) 람바예케(Lambayeque, A.D. 750-1375) / 치무문화(Chimu, A.D. 1300-1470)

A.D. 750년경 페루 북부해안지역에 세워진 람바예케와 1375년 이를 통합한 치무왕국은

크게 찢어진 눈과 끝이 뾰족한 귀를 가진 인간형상의 신을 숭배하였다.

페루 북부 해안지대에서 과거 모체문화를 계승하고 와리문화와 람바예케문화를 혼합하여 발전했다.

창시자는 '타카이나모(Tacaynamo)'라고 전하며 이후 여러 왕이 있었다.

민찬사만(Minchan Saman)왕 통치기에 최대 팽창을 이루었다.

14세기 초에는 당시 북쪽에 있던 시칸(Sican)을 정복하고 남쪽으로 리마까지 확장하여

잉카와 세력을 다투었으나 결국 잉카에 멸망하였다.

 

람바예케문화와 치무문화 토기는 대부분 검은색을 띤다.

이 문화의 토기들은 형태를 중요시하면서 토기에 표현된 신의 모습 또는 인간에 가까워진다.

반면 페루 남부의 와리문화 토기는 파라카스와 나스카의 전통을 이어받아 화려한 색채를 띠고 있다.

 

특히 고도의 제련기술과 세공기술과 도금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이 기술을 활용한 각종 농기구가 발달하였다.

후에 잉카인들이 치무문화의 금속기술 장인들을 잉카제국의 수도인 쿠스코로 데려갈 정도였다.

   

<의례장면 모형>

치무, 기원후 1300-1470, 달의 신전 출토,

나무, 사탕수수 줄기, 면, 스폰딜루스 조개, 터키석

트루히요 국립대학 인류학박물관 소장

 

 

찬찬의 주요왕궁에서 벌어지는 의례장면을 재현한 모형으로

물고기 모양이 장식된 담장 안에 케냐(피리) 연주자, 북 연주자, 딸랑이 연주자, 흑인,

치차를 서빙하는 인물, 잔을 든 인물 등 29명의 인물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인물들의 몸에는 모두 조개껍데기를 박아 장식하였다.

왕궁의 한쪽에는 지붕이 달린 건물아래 몸이 하얗게 칠해진 인물이 담요 위에 앉아있는데

이는 의례의 주인공인 죽은 왕의 미라다.

 

 

<장례행렬 모형>

치무, 기원후 1300-1470, 달의 신전 출토

나무, 사탕수수 줄기, 면, 깃털, 조개껍데기

트루히요 국립대학 인류학박물관 소장

 

 

장례행렬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모체시대의 유적인 달의 신전에서 출토되었다.

달의 신전에서 한참 뒤인 치무시대의 장례상이 묻혔다는 것은

태양과 달의 신전이 모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사탕수수 줄기로 만든 판 위에 천을 덮고

목조로 만들어진 14명의 장례 수행 인물상들의 발을 묶어 고정하였다.

가운데의 2명은 미라가 담긴 타원형의 물체를 앞뒤에서 짊어지고 있다.

이러한 장례식은 주로 북부해안 예술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사자(死者)숭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2) 찬카이문화(Chancay, A.D. 1200-1470)

람바예케/치무문화의 남쪽에 있던 찬카이문화는 회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인형 같은 토기와

미학적으로 최상의 수준을 보여주는 세밀한 레이스로 널리 알려진 문화이다.

와리문화가 쇠퇴하자 페루 중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떨쳤다.

토기는 주물과 도구를 이용해서 만들었다.

직선, 지그재그선, 점을 이용한 삼각형의 모티브는 모두 직물에서 보이는 기법이다.

직물은 파라카스의 직물과 더불어 안데스 직물문화를 대표한다.

섬유색의 농도와 씨실, 날실의 밀도 차이를 통해

이들의 신과 풍요에의 기원과 희망하는 대상을 직물에 표현하였다.

 

<쿠치밀코(Cuchimilco)>

이 여성모양의 토기는 나쁜 액을 몰아내는 초자연적인 신을 나타낸다.

남성모양의 토기와 함께 쌍으로 발견되는데 이는 선과 악, 해와 달 등 세계의 이원성을 나타내고 있다.

보통 몸통에는 옷을 걸치고 있으며 지배층의 무덤에 껴묻거리 용도로 사용되었다.

혹은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집안에 걸어두기도 했다.

이 토기에는 머리 위에 벽에 걸기 위한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주술사>

찬카이문화의 유물 중 특히 ‘환자를 치료하는 주술사’ 인형은 사탕수수 줄기와 천으로 만들어졌다.

 

(3) 치리바야문화(Chiribaya, A.D. 1200-1470)

찬카이문화의 더 남쪽에 있었던 이 문화는

페루 남쪽 일로(Ilo) 항구로부터 7㎞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파라카스문화(B.C. 1000-A.D. 200)와 나스카문화(B.C. 100-A.D. 600)의 맥을 잇고 있다.

이 지역은 사막이 발달하고 토양에 소금이 많아 미라가 잘 보존되는 지역이다.

대단위 도시나 신전이 발견되지 않아 이 문화가 강력한 통치국가로 성장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치리바야 지역은 해양자원이 풍부한 바닷가에 위치하여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이를 위해 여러 종류의 선박도 만들었다.

야마 사육 등 목축도 성행했으며 농업에서도 많은 종류의 직물을 재배했다.

특히 코카잎은 종교의식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음식과 함께 항상 시신에 부장되었다.

 

<안데스의 미라>

안데스에서는 자연 상태의 미라들이 사막과 동굴, 혹은 만년설에서 냉동된 채 남겨졌다.

가장 오랜 미라는 칠레 북쪽의 아리카(Arica)에서 발견된 B.C. 9000년경의 미라로

멍석과 동물가죽으로 감싼 채 발견되었다.

인공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전통이 B.C. 8000년경부터 40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시신의 내장을 꺼내고 피부에는 황토와 망간으로 그림을 그리고, 아마포를 둘렀다.

이들은 이집트 미라보다 40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다.

 

A.D. 900년에서 A.D. 1440년 사이 페루남쪽 일로(Ilo)지역에서 성립한 치리바야문화에서도

미라풍습이 있었다. 치리바야인들은 죽은 이의 몸에 옷을 입히고 여러 가지 직물을 함께 묻어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자 하였다.

또한 사람의 미라뿐만 아니라 평소에 길렀던 가축을 비롯하여

저승에서 먹고살 수 있게 곡물도 함께 묻었다.

특히 이 지역은 사막이 발달하고 토양에 소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미라가 잘 보존될 수 있는 환경적 요건이 갖춰져 있었다.

   

 

 

■ 잉카제국(Inca, A.D. 1430-1532)

 

우리는 잉카문명이라고 하면 흔히 안데스 지역의 고대 문명 전체를 생각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잉카(Inca)는 15세기(1430)에 성립되어

16세기(1532) 초까지 중앙 안데스를 중심으로 약 100년간 존속한 왕국이다.

그러나 서구에는 잉카문명으로 알려졌고 이 지역의 문명을 대표하고 있으며

잉카 이전의 프리 잉카시대에도 태양의 아들이라는 신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4개지역 연맹체인 잉카제국과 그 이전의 고대문명을 모두 잉카문명이라고 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잉카 문화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천 년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5000년 전 고대 제사 유적인 카랄을 비롯해 기원 전후의 강력한 모체왕국,

그리고 신비의 나스카 문화가 있었다. 또한 와리제국(AD 600~900)과 치무 왕국(Chimu, 1200~1400경) 등은 이후 잉카 제국이 세워질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기원전 1800년부터 고대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장 괄목할만한 것이 차빈문화(B.C. 1000)였다.

조각품들이 나타나고 종교적인 건축물들이 보이며

제사장이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적 권력자로 등장한다.

 

모체문명(B.C. 100~700년)

피라미드, 고분 등 종교와 제의에 관한 자료들과 권위를 나타내는 건축물들도 등장한다.

황금유물을 간직한 시판왕은 사회적 계층화가 진전되었으며,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조금 늦은 나스카 문화(B.C. 1세기-8세기)

특히 지면에 거대한 선과 면으로 연결된 조형성이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상회화의 성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스카 문명은 군사력과 무력을 통해 확장해 나갔으며

이는 일부 유적지에서 발굴된 나스카 도자기, 요새의 축조,

무덤에서 발견된 다량의 무기, 두상을 전리품으로 남긴 관습 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와리제국(600~900년)은 여러 지역의 문화를 통합했다.

도시가 정비되고 종교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장례를 통하여 문화를 전수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10세기가 되면 다시 지역으로 분할되어 각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람바이예크 문화, 치무 문화, 잉카 문화 등 10여 개의 지역으로 세력이 분화되고 문화가 각각 발전한다.

 

그러다 15세기(1430)에 4지역 세력의 연맹체인 잉카제국(A.D. 1430-1532)이 성립된 것이다.

잉카는 차빈, 모체, 나스카, 티아우아나코 문명들로 시작된 지역의 국가들을 정복하여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및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잉카의 왕은 태양의 신전을 통하여 ‘태양의 아들’을 내세워 강력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수도는 쿠스코(Cusco)였다. ‘우주의 배꼽’이라는 의미의 쿠스코는 그들의 수도이자 세계의 중심이었다.

도시는 당시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던 퓨마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잉카인들의 정신적인 중심이었던 태양의 신전 ‘코리찬카’와 ‘삭사이우아만’ 유적 등이 있는 곳이다.

 

‘잉카(Inca)’는 원래 왕을 칭하는 단어로

정작 잉카인들은 자신의 제국을 ‘타우안틴수유(Tahuantinsuyu, 4개로 나뉘어진 제국)’라 불렀다.

잉카는 제국을 수도인 쿠스코를 중심으로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쿠스코의 동쪽은 안티수유(Antisuyu), 서쪽은 쿤티수유(Kuntisuyu), 남쪽은 코야수유(Qullasuyu),

북쪽은 친차이수유(Chinchaysuyu)였다.

잉카제국은 중앙 고원인 쿠스코에서 기원하여 연안 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관료 조직은 11개의 왕족계층에 속하는 관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꼬야 혹은 여왕과의 근친혼을 통해서 권력을 세습하였다.

잉카의 왕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군사면에서는 최고의 통수권자,

종교면에서는 최고의 제사장으로 고대 국가의 신성왕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행정 방식과 함께 에콰도르 키토에서 칠레 딸까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회구조와 행정시스템의 구축, 도로망의 건설 등이 이루어져야 했다.

정보의 전달, 물자의 수송을 위한 거대한 도로망인

동서남북으로 38,600Km(3240마일)에 이르는 도로 ‘잉카의 길’을 만들었으며

잉카제국의 전령 차스키(Chasqui)제도, 역참인 탐보(Tambo)제도를 운영하였다.

이 도로망과 역참제도는

아무리 멀어도 단 며칠 만에 그 지역의 정보가 잉카의 중앙정부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제국의 힘을 유지하는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지만,

후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제국을 쉽게 정복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잉카제국은 1532년에 스페인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잉카인들은 ‘비라코차(Viracocha)’가 세계와 사람을 만들었다고 믿고

비라코차를 자신들의 창조신으로 섬겼다.

비라코차는 케추아어로 지방, 피, 샘, 호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비라코차와 함께 최고의 신은 바로 태양신 ‘인티(Inti)’였다.

 

잉카의 기원설화에 의하면 잉카는 태양의 아들로

그 상징인 황금을 태양의 땀으로, 은을 잉카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여성귀족으로 여겼다.

잉카인들은 또한 임신과 출산을 주관하는 달의 신 마마키야(Mamaquilla),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Pachamama), 물의 신 마마코차(Mamacocha)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번개, 바람 등의 자연현상과 산, 바위와 같은 특정대상물에도 신성을 부여했다.

우아카(Huaca)라 불리는 신성한 장소에 제단을 마련해놓고

라마나 알파카 같은 제물을 그대로 바치거나 금, 은, 돌로 작은 상을 만들어 바쳤다.

라마상과 함께 주로 바쳤던 제물은 옥수수로 만든 치차주와 코카잎이었다.

 

잉카제국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른 부족에게 잉카의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 모시게 하고,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가르쳐서 종교와 언어의 통일과 함께 제국의 통치권 아래에 편입시켰다.

사회구조는 아이유(씨족공동체)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수도 쿠스코를 비롯하여 제국 곳곳에 뛰어난 석조건축물을 건설하였으며

역, 법, 제, 종교의례 등 국가체계를 정비하였다.

또한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여 제국의 영역을 늘려나갔다.

당시 제국은 안데스 일대 약 4000㎢ 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하였으며 인구는 약 600만 명 이었다.

잉카제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산지대의 기후조건 때문이다.

고산지대인 잉카제국의 자원은 라마(Lama), 알파카(Alpaca), 비큐나(Vicuna)로 제한되어 있었다.

 

태양의 신화를 가진 태양의 아들 잉카문화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태양과 함께 항상 달이 짝을 이루며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이 공존한다.

햇빛을 관측하기 위한 시설과 그림자를 관측하는 시설이 공존하며,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와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가 공존한다.

정치적 중심지 쿠스코가 있어 정치를 행하고, 종교적 중심지 마추픽추가 있어 종교적 의례를 주관한다.

태양을 숭배하여 태양에 대한 축제를 벌이지만

산신에 대한 숭배도 동서남북 지역별로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잉카제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를 노리지만 4개 지방 연맹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토기에 새겨진 네모 모양의 마름모 문양이 중심지를 상징한다면

동그라미 모양의 나선문은 변화와 발전을 상징한다.

토기에 조각된 사람들의 모습도 남자와 함께 반드시 여자가 등장하며,

남녀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들도 조각되어 있다.

또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이후 가톨릭이 국교가 되었지만 종래 그들의 토착 신앙을 그대로 믿고 있다.

 

음과 양의 조화, 중앙과 지방의 조화, 잉카문화와 서구문화의 조화를 이루며

안데스의 고대 문명과 잉카 문화는 변화 발전했고, 현재 페루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잉카제국의 역대 왕>

잉카제국에는 잉카의 시조인 망코 카팍(Manco Capac)으로부터

마지막왕인 아타우알파(Atahualpa)까지 총 13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망코 카팍부터 8대까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는 전설의 시대다.

통치기간을 1250년부터 1438년까지 약 188년가량이라 추측하고 있다.

 

구체적인 왕은 1438년 9대왕으로 등극한 파차쿠텍(Pachacutec, 1438-1471)왕부터 시작된다.

파차쿠텍은 잉카제국의 역사시대를 연 인물로, 부족국가였던 잉카를 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445년 티티카카 지역까지 정복하면서 잉카의 문명과 정복지역의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시켰는데

치무문명이 그 좋은 예이다.

 

1대: 망고 카팍(Manco Capac, 11세기말-12세기)

2대: 신치 로카(Sinchi Roca)

3대: 요케 우팡키(Uoque Yupanqui)

4대: 마이타 카팍(Mayta Capac)

5대: 카팍 유팡키(Capac Yupanqui)

6대: 잉카 로카(Inca Roca)

7대: 야와르 우아칵(Uayuar Huacac)

8대: 비라코차 잉카(Viracocha Inca)

9대: 파차쿠텍 잉카 유팡키(Pachacutec Inca Yupanqui, 1438-1471)

10대: 투팍 잉카 유팡키(Tupe Inca Yupanqui, 1471-1493)

11대: 우아이나 카팍(Huayna Capac, 1493-1527)

12대: 우아스카르(Huascar, 1527-1532)

13대: 아타우알파(Atahualpa, 1532-1533)

 

<잉카제국의 건국신화>

잉카제국에는 다양한 건국신화가 있다.

창조의 신 티키 ‘비라코차’에게 8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4명의 형제(아야르 카치, 아야르 오코, 아야르 아이카, 아야르 망코)와 4명의 자매들은

다른 곳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빠까리 탐보를 떠난다.

여행 중 망고와 오꼴로 사이에 신치 로카가 태어나고 신치 로카는 이들을 쿠스코로 인도한다.

그들은 쿠스코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망고 카팍’이 쿠스코의 지도자가 된다.

 

또 다른 건국신화는, 태양의 신 ‘인띠’는 깊은 호수 티티카카에서 망고와 마마 오꼴로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명한다.

지하동굴로 쿠스코까지 여행한 망고와 오꼴로는 쿠스코에 그들의 첫 번째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들어와서야 기록으로 남겨졌다.

몇몇 학자들은 잉카인들이 이러한 신화를 매듭문자(quipus)로 기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데스문명은 약 B.C. 1000년경 현재 푸나라고 불리는 페루의 고원지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의 잉카족들은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거주지의 지리학적 위치는 잉카족들을 왜소하고 땅딸한 형태로 만들었다.

남자의 평균키는 약 157㎝, 여자의 평균키는 약 145㎝ 였다.

그들의 폐활량은 다른 종족들보다 3배 이상 뛰어났고,

다른 종족들보다 심장박동 속도가 느렸으며 혈액도 2ℓ 이상 많았고,

핏 속에서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 수치 또한 다른 종족보다 2배 이상 높았다.

고고학자들은 해발 5300m 만큼 높은 알티플라노의 온대지역에서 안데스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잉카족들의 신체구조상 스페인 정복자들보다 키가 작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 엄청난 고도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전시대의 최고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의 수준일 뿐,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잉카제국이 첫 번째 문명 같지만, 잉카는 분명 다른 문명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 발전했던 다양한 문화에서 이미 잉카문화에 견줄만한

혹은 그보다 더욱 우수하였던 많은 문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잉카 황금유물’이라고 통상적으로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잉카 이전시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안데스 학자들은 잉카제국 이전에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

약 500년간 종교의식과 행정의 중심도시로써 매우 번영했던 띠와나꾸 문명을 발견했다.

 

<마추픽추>

잉카 제국의 대표적 유적으로 쿠스코에서 약 100㎞ 떨어진 마추픽추가 있다.

잉카의 귀족, 남여 사제와 선택받은 여성(아클라스)에게만 허락된 성역으로 여겨져 왔다.

‘잃어버린 도시’ ‘공중의 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는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다.

 

햇빛을 관측하기 위한 시설과 그림자를 관측하는 시설이 공존하며,

늙은 봉우리 마추픽추와 젊은 봉우리 와이나픽추의 두 산 능선에 형성된 이 도시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교 출신 사학자 하이렘 빙엄(Hiram Bingham)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약 400년간 베일에 싸인 채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마추픽추의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추정에 불과할 뿐이고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마추픽추 유적에 대해선 대체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최근에는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공간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결국 마추픽추는 정치의 중심지 국읍인 쿠스코와 달리 종교와 제의를 담당하던 종교적 중심지 별읍으로

우리나라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16C 후반 잉카인들에게 의해 갑자기 버려진 마추픽추의 신비를

유적의 정상에 있는 안티우아티나 돌기둥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키푸(Quipu)>

 

잉카인들에겐 문자가 없었다.

정보의 전달과 기록은 ‘키푸’라는 다양한 굵기와 색깔의 끈 여러 위치에 여러 종류의 매듭을 만들어

정보를 기록한 일종의 결승문자로 하였다.

노란색 끈은 황금을, 하얀색 끈은 은을, 붉은색 끈은 군인을 의미하였다.

또한 감은 매듭의 수에 따라 1부터 10까지 10진법을 표현했으며,

매듭의 위치에 따라서 십 단위에서 만 단위까지 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키푸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은

‘키푸 카마욕(Quipu Camayoc)’이라 불리는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전문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리발로(Aribalo)> 

  

잉카문화의 대표적인 토기다. 주로 물이나 치차주 등 액체류, 옥수수 이삭, 콩 같은 작물을 보관했다.

몸통과 목 사이에는 동물머리 모양의 장식을 붙였는데

이는 등에 아리발로를 짊어질 때 밧줄을 지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또한 바닥 부분이 원뿔 모양으로 되어있는 것은

큰 아리발로를 힘들이지 않고 눕혀 액체류를 따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인물상>

풍요를 기원하며 하늘의 신과 땅의 신에게 바쳤던 인물상은 금으로 만들어졌다.

천으로 만든 옷을 입혀 바치기도 했다.

남자 인물상은 원통형의 머리장식을 쓰고 귓불이 길게 늘어져 있다.

늘어진 귓불은 크고 화려한 귀걸이를 달았던 귀족남자를 상징한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 귀족들을 ‘귀 큰 자들’이라고 불렀다.

약간 불룩한 왼쪽 뺨은 코카잎을 씹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차스키(Chasqui)와 탐보(Tambo)>

지역 간의 정보 전달을 위해서 ‘차스키’제도와 역참인 ‘탐보’제도가 있었다.

차스키는 중앙의 지령이나 지역의 정보를 수도로 전하는 일종의 릴레이 파발꾼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귀족 젊은이들이 차스키로 선발되었으며,

‘잉카의 길’ 위에는 약 20~30Km 간격으로 차스키를 상주시키는 ‘탐보’라는 역참을 운영함으로서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중앙 정부와 2~3일 내에 소통이 가능하였다.

 

잉카제국의 통치자와 그의 수행원들을 위해서 매 4.5마일마다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매 12마일마다 휴게소, 객사 같은 탐보가 있었다.

또 잉카제국의 전령인 차스키가 쉴 수 있도록 매 5마일마다 작은 우체국이 있었다.

한 명의 차스키는 하루에 약 150마일을 달린 후에 교체된다.

구두 전언은 결승문자나 매듭문자로 보충되었다.

 

<코리찬카>

코리찬카 신전의 벽은 모두 금으로 덮여있었다.

정원과 실내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옥수수, 야마, 인물상 등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스페인들이 잉카를 정복할 당시 모두 헐어 약탈하였고, 그 위에 산토도밍고 성당을 새로 지어 놓았다.

 

<삭사이우아만>

쿠스코 북쪽에 지어진 수도 쿠스코를 지키는 방어 요새다.

요새는 세로로 긴 지그재그 형태의 3단 성벽으로 되어 있다.

성벽을 이루는 거대한 돌들을 주변 바위 모양에 맞추어 세밀하게 깎고 다듬어 올려놓았다.

 

<잉카의 멸망>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와 180여명의 병사들이 페루 해안가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미 안데스에는 유럽으로부터 온 질병인 천연두가 퍼져

수백만 명의 목숨이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왕위 싸움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황금에 눈 먼 스페인 군대와 피사로는 왕을 납치하였고

석방의 대가로 방 하나에 황금을 가득 채울 것을 요구하였다.

잉카인들이 황금을 가져오자 황금만을 빼앗고 잉카의 왕을 교수형에 처해 버렸다.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말을 탄 군대의 모습에 놀란 잉카인들은 맥없이 무너졌고

5000년 넘게 이어졌던 안데스 문명도 여기서 종말을 맞았다.

고도의 사회구조와 행정 체계, 그리고 뛰어난 건축 기술로 거대한 제국을 일구었던

잉카 제국의 허무한 최후는 결국 구대륙과 대륙의 문명의 발달 차이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자연 환경적인 영향에 의한 지역적인 고립으로 인한 폐쇄성이 주원인이겠지만,

잉카에는 인류 문명의 발전에 꼭 필요한 3가지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것은 문자와 원의 개념 그리고 철이다.

문자가 없었으니 기술의 축적이 제대로 될 리 없었고,

바퀴를 사용하지 못함으로서 문물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지역 문명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철을 사용한 무기와 농기구 등의 개량으로 인한 풍족한 문화를 이루지 못한 채

구대륙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막을 내린 청동기 문화에 계속 의지할 수밖에 없어

구대륙의 철기 문명과는 경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