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1950, 서울... 폐허에서 일어서다

Gijuzzang Dream 2010. 6. 23. 17:03

 

 

 

6.25전쟁 60주년기념 특별기획전

 

 1950..서울.. 폐허에서 일어서다

 

 

 

 

 1950.. 서울..폐허에서 일어서다

 

 

 시기간 : 2010-06-17 ~ 08-08

 

 전시장소 : 기획전시실 B

 

 

 

<1950.. 서울.. - 폐허 속에서 일어서다> 특별전시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달라진 서울’,
즉 전쟁 이후 서울사람들의 의식과 생활방식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이 전시는 5개의 주제로 이뤄져 있는데,

폭풍전야의 서울, 폐허의 서울, 내가 겪은 6·25, 6·25전쟁을 보는 제3의 시선, 달라진 서울 등 이다.

전쟁 전후의 서울의 모습을 사진, 컬러 슬라이드 등을 통해 보여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우리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6ㆍ25전쟁이 발발하였다.

사흘 후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고,

3년 동안 계속된 남북한 군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수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의 전개
1950. 6. 25. 한국전쟁발발
1950. 6. 27. 북한군이 의정부를 통과하여 서울로 진격함.
1950. 6. 28. 북한군 서울 점령.
1950. 6. 28. 김일성, 이승엽을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서울시청에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가 들어섬
1950. 7. 서울 9개구 전체에 구 임시인민위원회 들어서고 정무원(공무원) 임명
1950. 6.28~9.9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주요활동
- 인민군 원호위문 편지 및 위문품 헌납
- 도로, 교량복구, 분뇨, 오물 처리 등에 시민들‘자발적’노력동원
- 민주선전실 설치, 문화선전사업 및 의용군 출진 대규모 시위
- 김규식, 안재홍 등 주요인사 포섭, 방송을 통한 대민 선전선동
- 인민재판소 설치, 반역, 반동분자 숙청
1950. 9. 15.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실시
1950. 9. 23. 국군, 연희고지를 점령함
1950. 9. 28. 서울 완전 수복. 서울시정 재개
1950. 12. 7. 중공군 참전
1950. 12. 24. 이승만 대통령, 서울시민에게 피난을 명령함.
1950. 1. 4. 서울이 중공군에게 점령됨. 정부, 부산으로 이전(1ㆍ4후퇴)
이때 서울시 잔류 시민의 수는 13만 3,094명.
1950. 2. 6. 유엔군 중공군을 맹공, 공산군이 한강선에서 후퇴
1950. 2. 10. 연합군, 인천과 영등포를 탈환하고 서울에 돌입함.
1950. 3. 14. 서울 재탈환,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함.
1950. 4. 8. 당시 서울인구는 32만 7,705명으로, 매일 평균 6천명이 뚝섬에서 시내로 잠입함.
1953. 7. 27.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함. 개전(開戰) 후 3년 1개월만의 협정.

 

 
 

 전쟁으로 파괴되기 전 한강철교

 

 

 

 폐허가 된 세종로 일대

 

 


 피난행렬 -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인구 1,693,224명 중 1,117,009명(약 66%)의 서울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연희고지 전투(1950년 9월21일)

서울 수복(9ㆍ28)을 앞두고 국군과 미군은 수도 입성의 관문인 연희고지(서대문구 연희동 연희고지길)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고지점령 이후 군인들이 도심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영순의 [연희고지](1951,정민문화사)

이영순(1922-1989)은 6.25전쟁 때 미8군 연락장교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가했는데,

연희고지는 당시 연희고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작가가 전장을 직접 체험하고 쓴 시이다.

 

 

“적을 삐라로 파묻어라” 25억장 살포
고향의 가족 생각나게 하거나 투항하면 환대한다는 내용
月 5000만~8000만 장 뿌려 北참모장 등 104명 투항 효과

 

 

 

6.25 전쟁 때 유엔군과 북한군이 심리전의 일환으로 삐라들이 뿌려졌는데,

유엔군이 뿌린 삐라는 25억장, 북한군 등 공산군이 뿌린 것은 3억장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연합회는 미군에게 북한의 무모한 침략에 대해 반항하는 귀국을 원조하라고 요청하였으므
우리는 적극적으로 원조하겠습니다. 침착 대담하며 맹렬히 적을 대항하십시오.
우리는 한국과 힘을 합하여 침략자를 귀국으로부터 격퇴하겠습니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인 1950년 6월 28일 남한 전역에는 이 같은 내용의 전단(삐라) 1200만 장이
미군 37수송비행단 소속 C-46 수송기에서 뿌려졌다.
유엔 로고와 함께 영문 타자체와 국한문 혼용 펜글씨체로 인쇄된 이 전단은
380장 중 6·25전쟁 때 사용된 첫 전단이다.
이 전단은 6·25전쟁 중 하루에 가장 많이 뿌린 전단으로도 기록됐다.

전쟁기념관은 현재 380장의 심리전 전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00장이 개인이나 단체에서 기증받은 것이며
나머지는 정부기관 등으로부터 이관을 받거나 구입한 것이다.
6·25전쟁 때 사용된 전단은 모두 162장으로 이 중 129장은 기증을 받았다.
기증자는 모두 23명으로 외국인도 5명이 포함됐다.
 
 
○ 보이지 않는 전쟁 ‘심리전’

6·25전쟁 때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인 ‘심리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적군의 사기를 꺾고 투항시키기 위해 양측은 병사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내용의 전단을
대량으로 살포하고 확성기와 라디오를 통한 방송도 했다.

프랭크 페이스 미 육군장관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적을 종이(전단)로 파묻어 버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심리전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기념관 측에 따르면 유엔군은 전쟁 발발 이후 휴전까지 모두 25억 장의 전단을
한국군과 한국민, 북한군과 북한 주민, 중공군을 향해 살포했다.

시기별로 개전 초기에는 주로 한국군과 한국민에게 전단을 뿌렸고
이후 점차 북한군과 중공군에 대한 살포가 늘어났다.
전쟁 발발 직후 1개월간 북한군을 대상으로 한 유엔군의 전단 살포는 단 한 차례에 불과했으나
이후 점차 늘어났다.
1951년 중반 이후부터는 매달 5000만 장 이상의 전단이 살포됐고
1952년에는 매달 8000만 장으로 늘었다.

심리전의 효과는 적지 않았다.
국군심리전단이 펴낸 ‘미 육군 전투 심리전의 역사’에 따르면
서울 근처에서 104명이 전단을 소지한 채 항복했다.
이들 중에는 북한군 13사단의 참모장도 있었다. 그는 전단을 통해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았고
북한에 승산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항복했다고 진술했다 한다.
 

○ 주요 메시지는 ‘고향의 식구를 생각하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9월부터 1951년 11월 말까지 살포한 전단 가운데 그림을 활용한 전단은
모두 219종이었다. 이 중 북한군을 대상으로 한 전단이 118종이었고 중공군 대상 전단은 101종이었다.
전단은 주로 가족을 생각나게 하거나 투항하면 환대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향수’라는 작전명으로 뿌려진 전단의 메시지는
‘고향의 식구들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또 작전명 ‘나이팅게일’ 전단은 ‘당신은 포로로서 환대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고,
작전명 ‘불도저’ 전단은 ‘유엔군은 강대하다, 당신들은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밖에 ‘당신의 상관, 우군, 전쟁 목적, 공산주의자를 믿지 마라’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다’
‘전단 내용대로 따라 하면 안전하게 투항할 수 있다’는 내용의 전단도 뿌려졌다.

북한군도 전단을 살포했다.
북한은 제공권을 유엔군에 빼앗겼기 때문에 소년 등을 시켜 배낭에 담긴 전단을 뿌리도록 했다.
미국 크리스마스 잡지의 맥주광고와 북한 지역에서 후퇴하는 해병대원의 모습을 담은 전단에는
‘크리스마스-집-행복.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희가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를 원한다.
도망갈 길을 궁리하라’라고 적혀 있다.
유엔군을 특히 동요시켰던 전단은 ‘한국은 한국인들이 알아서 하도록 두어라’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 2010-06-11 동아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심리전을 위해 북한군과 중공군을 대상으로 살포한 전단.

북한군 장병들에게 김일성을 위해 헛된 죽음을 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한글 전단(위)과 소련의 사주를 받은 중국 공산당이 중공군 병사들을 전화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중국어 전단(아래).

 

한국전쟁 삐라 실물 445점 공개
청계천문화관 6월15일부터


‘제군은 이 이상 더 목숨을 희생하지 말고 유엔의 평화 행진에 참가하라!’(1951년 7월 6일 유엔군이 북한군 및 남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뿌린 전단).

‘Darling, I will dream that you are coming back to me this Christmas’(당신이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돌아오실 거라 믿어요. 1950년대 초 중공군이 유엔군을 상대로 뿌린 전단).

 

‘청계천문화관(서울 성동구 마장동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15일부터 8월 22일까지 ‘보이지 않는 전쟁, 삐라’ 특별전을 연다.

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이 민간인과 상대방을 향해 실제로 뿌렸던 전단(삐라) 445점이 한자리에 공개된다.

전단 실물이 대규모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6·25전쟁 때 한반도에 뿌려진 전단은 약 28억 장으로 추정된다.

유엔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뿌린 25억 장은 주로 정치적 비판 및 포로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엔군이 발행한 전단에는 한국어 외에도 중국어와 영어 등 3개 국어가 사용됐다.

 

 

북한군은 심리전 요원들인 ‘적군와해공작요원’들이 직접 전단을 뿌렸다.

유엔군을 대상으로 한 전단은

주로 고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당대 유명 화가들이 전단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바우’로 잘 알려진 김성환 화백이나 ‘코주부’ 김용환 화백 등은 유엔군 측 전단을 만들었다.

반면 북한군 측 전단 제작에는 월북한 화가인 정현웅 임홍은 정관철 씨 등이 참여했다.


  

 

(1) 폭풍 전야의 서울

6ㆍ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 군정기를 중심으로 한 서울의 모습을 조망하였다.

전쟁의 조짐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서울시민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박물관이 입수한 컬러 슬라이드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2) 폐허의 서울

전쟁이 발발하자 3일 만에 북한군이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함으로써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 남북한 군의 치열한 공방 속에 서울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으로 서울인구 약 170만 명의 7%에 해당하는 약 13만 명이 사망, 납치, 행방불명되었으며,

서울시 총 주택 191,260호 중 29%에 해당하는 55,082호가 파손되었다.

연희고지 전투와 같이 남북한 군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으며,

엄청난 폭격으로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박완서의 소설)’ 의심이 될 정도로

서울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을 연출모형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내가 겪은 6ㆍ25전쟁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고,

이후 9.28 서울수복 때까지 90일 동안 서울시민은 북한 인민군의 점령하에서 생활하였다.

시민들은 각종 부역이나 궐기대회에 동원되거나 전출(轉出)과 인민재판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자발적’ 의용군 입대를 강요당하였다.

서울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쌔액 쌔액' 쌕쌕이(6.25 때 전투기를 일컬음) 소리가 심장을 오그라들게 했다.

평화로운 일상은 일순간에 파괴되고 서울시민들에게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었다.

 

 

전쟁의 발발부터 1.4후퇴까지는 서울에 남아 생활의 터전을 지켰던 이들도 많았다.

6.25 당시 서울사람들은 인민군의 배급으로 연명하거나, 마루바닥을 뜯고 들어가 숨어 지내기도 했다.

더욱이 서울수복 후에는 ‘잔류파’나 ‘부역자(附逆者)’로 낙인 찍혀

다시 한 번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는 점에서 전쟁은 더욱 치가 떨렸다.

 

6·25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영상을 상영한다.

그들의 60년 전 기억을 통해 서울 속 전쟁의 삶을 되돌아본다.

김용배 장군의 기증유물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중인 김용배 장군 유물을 통해 본 6.25전쟁 이야기

 

'김용배 장군을 찾아서'

 

김용배장군사진

김용배장군 사진

북한군의 탱크를 뒤로 하고 발 아래 인민군의 시체 위로 젊은 병사들이 해맑게 웃고 있다.

좀 전의 악전고투 끝에 얻은 달콤한 승리감에 도취된 이 사진은

1997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한 노병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옛 전우를 찾기위해 소지했던 사진이다. 바로 당시의 젊은 연대장 김용배 장군이다.

 

 

6.25 세대와의 대화

"새벽 3시 지나서 개성에서 비상이라는 무선이 들어왔습니다.

공휴일인데다 새벽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됐어요.

계속 정신없이 비상이다, 후퇴한다는 말에 또 그저 그런 충돌인줄 알았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진짜 전쟁이 났습니다."

- 당시 철도경찰 무선통신병 조중태 -

 

재봉틀

"정신없이 짐을 꾸려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꼭 챙겨간 물품이 뭔 줄 아세요? 미싱입니다.

그 무거운 걸 머리에 이고 가다 등에 지고 가다 결국에는 가장 마지막에 포기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딱하지만 그땐 미싱이 너 나 할 것 없이 소중히 여겼던 물건이었어요."

- 갓 중학생이 되었던 장은영 -

피란민증피난민증(1950년 12.14)

전쟁기간 중 피난민증은 생명증과도 같았다.

피난을 가기 위해, 식량배급을 받기위해, 부역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4) 6ㆍ25전쟁을 보는 제3의 시선

전쟁 당시 미국의 <라이프(LIFE)>, 프랑스의 <르 파트리오트 일뤼스트르(LE PATRIOTE ILLUSTRE)> 등

외국 주요 언론들이 6ㆍ25전쟁을 보도하였다.

<르 파트리오트 일뤼스트르(LE PATIRIOTE ILLUSTRE)는, 188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창간된 주간신문이다.

 

당시 6ㆍ25전쟁을 취재한 외국특파원의 수는 약 600여 명으로,

항시 175-250명이 일본 도쿄와 한국에 상주하였다.

이들은 폐허가 된 서울과 그곳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모습을 본국으로 생생하게 전하였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공산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한국"

미국을 포함하여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 외신들은 6.25전쟁의 급박한 상황을 이렇게 알렸다.

아직까지 생소했던 평화로운 동방의 작은 도시, 서울은

6ㆍ25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담은 앵글을 통해 세계무대에 노출되었다.

 

 

(5)달라진 서울

6·25전쟁으로 3년간의 피난살이와 두 차례에 걸친 ‘적치(敵治)’는

서울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치열한 생존의 위협 속에서 불법과 편법,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가 판을 쳤다.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식생활이 달라지고

맘보바지와 퍼머넌트 머리가 유행하였으며 사교댄스가 장안을 강타하였다.

반면 뿌리 깊게 남아있었던 신분적 계급의식이나 남존여비와 같은 전근대적인 질서의식이 사라진 것은

전쟁이 가져다준 생각지 못했던 효과였다.

 

 

6·25전쟁은 서울의 인구 및 도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당시 서울 인구 169만3224명의 7% 정도인 12만9908명이 인명 피해를 입었다.

시내 주택 19만1260채 중 중구와 용산구, 영등포구를 중심으로 전체의 29%인 5만5082채가 파손되었다.

장세훈 동아대 교수는

"궁궐과 문화유적이 집중된 종로 지역은 정부가 맥아더 사령부와 협상을 통해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켜

문화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반면, 일본식 도시 경관이 주로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시민의 66%인 111만7000여명이 피란길을 나섰으나, 종전 이후 인구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 직전 169만3224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51년 64만8432명으로 감소했으나,

종전 후 피란민 귀환과 이농(離農) 인구 유입이 본격화된 1954년 100만명을 넘겼고,

1959년 200만명을 돌파했다.

 

 

1955년 당시 월남민은 18만8541명으로,

전쟁 당시의 피난인구와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실향민들의 발길이 서울에서 묶이면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급증했고,

실향민들의 강한 공동체 의식이 해방촌 같은 실향민 마을을 구성하게 만들었다.

 

- 가치관과 세태의 변화

3년 동안 극도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예의와 염치, 명분과 의리 등과 같은 기존의 가치관이나 질서의식을 버리고,

오직 생존을 위한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에 집착하게 되었다.

반면 전쟁의 와중에 신분적 계급의식이나 남존여비와 같은 전근대적인 질서의식은 물론,

36년 동안의 식민통치의 잔재인 왜색을 일소하는 효과도 있었다.

 

핵가족제도 역시 6.25의 산물이다.

전쟁과 이념의 혼란 속에서 대가족 제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상황이 불러온 현실적인 대안이 핵가족 형태였던 것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핵가족 형태가 도시화와 함께 전국적으로 번져가면서

근대화의 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 미제물품의 선호와 유통

미군과 접촉하면서 양풍, 특히 미국문화가 빠른 속도로 유입되었고,

‘미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유행어처럼 미제 선호경향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미군 PX 물건들은(당시 동화백화점, 현재 신세계백화점 일대에 PX가 있었다)

고급 사치품을 의미하였으며,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는 불법으로 유출된 미제 물건시장이 형성되었다.

 

- 19공탄 사용의 일반화

도시의 가정생활에 있어서의 급속도로 변화된 것은 19공탄의 사용이었다.

6ㆍ25전쟁 이후 산림녹화목표에 따른 임산(林産)연료의 사용이 제한되고,

대신 국산 무연탄을 원료로 하는 19공탄의 사용이 점차 일반화되어 갔다.

1957년에는 서울시민의 90% 이상이 가정용 연료로서 연탄에 의존하게 되었다.

장작이 아니면 땔 줄 몰랐던 가정의 주부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 새롭게 등장한 생계형 직종들

미 군정기와 6ㆍ25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났다.

슈샤인보이(Shoeshine Boy), 지게꾼, 넝마주이, 달러아줌마, 유엔마담, 양공주 등이 그러한 직종들이다.

이러한 직종은 주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홀로된 전쟁고아나 전쟁미망인, 월남민,

전후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직종들이었다.

 

- 반공의식과 국가에 대한 불신의 고착화

전쟁을 통하여 시민들은 상당한 가치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북한군 점령 하에서 극도의 불안과 혼란, 극심한 생존의 위협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부정을 낳았다.

반면 예고 없는 한강인도교의 폭파로 피난길을 끊어놓고는 서울수복 후에는

도리어 ‘적치(敵治) 하의 부역자’ 색출 등 정치적 보복을 가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 높은 교육열

전쟁으로 많은 학교가 문을 닫고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노천수업, 천막교실에서 오전반 오후반 저녁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는 등 교육은 계속되었다.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만은 학교에 보낸다”는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전쟁 이후 폐허를 딛고 고도성장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근대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달라진 서울 달라진 서울 

피란지에서의 노천수업 · 천막교실

전쟁 이후 부족한 교실로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을 받거나,

오전반 · 오후반 · 저녁반 등으로 2부제 · 3부제 수업을 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 6ㆍ25전쟁이 남긴 새로운 말과 유행어

3년 동안의 전쟁과 피난생활을 통하여 서울에는 새로운 말과 유행어들이 등장하였다.

 

피난살이, 인민군, 학도병, 완장, 부역, 빨갱이, 원조, 재건, 삐라, 깡통, 라이타돌, 꿀꿀이죽, 부대찌개,

피엑스(PX), 초콜릿, 빠다, 시레이션, 양키, 양공주, 유엔사모님, 미제아줌마, 슈샤인보이(Shoeshine Boy),

양아치, 오라이(all right), 맘보, 비로도(벨베트), 나이롱, 사바사바, 빽, 얌생이질, 도깨비시장 등 ...

 

언어가 한 사회의 사고방식과 문화,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만큼

6ㆍ25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언어나 유행어를 통해서

전쟁으로 변화된 의식과 세태, 다양한 사회상을 살필 수 있다.

 

예의와 염치, 명분과 의리 대신, 속임수와 '빽' '사바사바' '새치기' 등 불법과 편법이 만연했다.

남대문 · 동대문 시장에는 불법 유출된 미제 물건 시장이 형성되었고,

단속반이 나오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해 '도깨비 시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밀가루 원조로 수제비 · 국수 · 찐빵 등 '분식센터'가 거리에 등장했으며,

미군부대의 남은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죽'이 선보였다.

전쟁 이후 슈샤인 보이(구두닦이), 지게꾼, 넝마주이, 달러 아줌마, 유엔 마담(미군 상대하는 윤락여성),

양아치(넝마주의 또는 좀도둑) 등 새로운 직종이 생겨났고,

군을 통해 전해진 맘보 리듬은 춤바람을 일으켜 ‘자유부인’을 낳았다.

퍼머넌트 머리와 맘보리듬, 카바레, 나이트클럽, 미장원, 이발소 등이 유행을 선도했다.

'오라이'(all right), '오케이', '쏘리' 등을 미군과 접촉하면서 들어온 말들이다.

 

6·25전쟁 직후 서울시내에는 다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광복 당시 60여 개였던 다방이 1953년 휴전 직후 214개로 늘었고, 1960년에는 1041개로 다시 5배 증가했다.

전쟁 동안 미군의 인스턴트 커피가 확산되면서 커피가 대중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명동(58%)과 종로 일대(23%)에 대부분 몰려있던 다방은

사무실이 없는 중간 상인이나 문인 · 화가 등 문화인들의 사무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 6ㆍ25전쟁으로 생겨난 새로운 여성의 모습

전시회에 출품된 사진 작업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여성들이다.

편을 잃은 전쟁 미망인과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생존을 위한 투지는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평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6·25전쟁 직전에만 해도 서울은 '남초(男超)' 도시였다.

1950년 당시 서울 거주 인구의 성비(여성의 수를 100으로 했을 때 남성의 여성에 대한 비)가 101 이었으나

20~30대 청장년층 피해가 커지면서

1951년에는 남성이 여성의 79.5%로 급감할 정도로 전쟁 당시 '여초(女超)' 현상이 두드러졌다.

전쟁미망인은 1952년 기준으로 전체 미망인의 34.7%인 10만1845명에 이르렀다.
많은 여성은 부모 혹은 남편과 자녀를 잃은 채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는데,

이러한 ‘남성 부재의 현실’은 존 리치의 사진에도 잘 나타나 있다.
 

▲ 달구지를 끌고 피란 떠나는 어머니와 아이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전시회, 청와대 사랑채, © John Rich)

 

또 다른 6·25전쟁을 다룬 전시로 청와대 사랑채에서 열리고 있는

‘최초 공개,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이 공동 주최하는 이 전시는

당시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의 특파원으로 6·25전쟁에 파견된

종군기자 존 리치(92)의 사진작업 70여 점을 공개한 것이다. 

달구지에 아이들을 태우고 피란 가는 여성 가장의 모습을 렌즈에 담은 존 리치(John Rich)는
“생필품만 챙겨 어디론가 떠나는 피란민 가족, 어머니의 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 남자는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 쪽으로부터 징집을 당했고,
이는 피란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전쟁 기간에 이 여성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을까.
전쟁 시기의 많은 여성 가장은 전문적인 기술이 없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음에도 생계유지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재산이 없거나 친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경우 화장품 · 담배 · 달러 · 음식 장사 등을 했으며
바느질 · 행상 · 식모살이 등 일용직에 종사한 여성들도 많았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갈길을 재촉하는 전쟁미망인의 모습

 

‘전쟁미망인’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머리에 살림살이를 이고 가는 여성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전쟁미망인이라 불리던 여성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역사학자인 이임하씨는 저서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서해문집)에서

“남성들이 군대 혹은 각종 노동 현장으로 동원되자 여성들에게는 이것이 빈곤과 성폭력문제로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성인 남성의 부재로 인한 빈곤과 가정 해체가 큰 고통 중 하나였다”고 지적한다.
고단해 보이는 한 전쟁미망인의 이면에는 한 장의 사진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1952년 전쟁미망인은 10만 명에 이르렀다.


 

▲ 전쟁고아의 모습

어린이들 또한 엄연히 전쟁을 겪어낸 당사자였다.

실제로 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거리에서 유랑하곤 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아동보호시설에 수용된 아동 수만 1953년에 5000여 명에 이르렀다.
 
▲ 구호차에 설치된 우유죽 무료 급식소 풍경

전쟁기간 중에도 전재민 구호를 위해 여러 곳에 구호소가 설치되었다.

  

 

쌀배급받는 서울시민
전쟁이 일어나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서울시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생활고였다.

인민위원회 소속인 듯한 완장을 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있다.

 

 
 

달라진 서울에서는 전쟁은 인명이나 재산 피해뿐만 아니라
서울시민들의 의식과 생활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음을 각종 그래프를 통하여 보여준다.
여초(女超)의 남녀성비, 가족제도의 분화,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적 심리의 팽배,
서구적인 생활방식의 유입과 맘보댄스의 유행, 반공의식의 고착화, 엄청난 교육열,
전근대적 질서의식의 붕괴, 새로운 말과 유행어의 등장 등
서울사람들의 의식, 생활방식 전반이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ㆍ25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리고 세계 최빈국의 수도라는 오명 속에서

서울은 불과 50년 만에 인구 1천 만의 거대도시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수도로,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다.

 

지난 60년 동안 서울의 엄청난 성장과 변화를 가지고 온 역동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6ㆍ25전쟁 60주년을 맞아 서울 반세기를 회고해 보면,

바로 전쟁의 아픔을 딛고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불굴의 투지가

바로 오늘날의 서울을 일으킨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6ㆍ25전쟁 그 자체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서울시민들의 달라진 의식과 생활방식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이 바로 현대 서울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보여주며,

6ㆍ25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6·25전쟁 그 자체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서울시민들의 달라진 의식과 생활방식에 초점을 맞췄고,
그것이 현대 서울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이번 전시는 6·25전쟁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박물관 관계자는 전했다.

- 2010-06-18 여성신문 1087호

- 2010-06-23  독서신문, 조선, 한국, 동아, 연합 등 일간지 참고




 

 

 

 

 

 

 

 

6ㆍ25.. 6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1950.. 서울.. 폐허 속에서 일어서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전쟁은 만 3년 1개월 2일, 곧 1,172일 동안

낙동강에서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북한 공산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전쟁이다.

6ㆍ25전쟁 발발한 지 60돌을 맞이하였다.

분단체제는 그대로인데 민족의 비극을 기억하는 세대는 얼마 안지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생활환경이 변화하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실제로 이런 현실을 반영한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있다.

2010년 6ㆍ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6ㆍ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서 국민의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33%가 6ㆍ25전쟁 발발연도를 잘못 알고 있거나 아예 모른다고 응답했다.

연령대별로 보면 19-29세가 47.4%, 30대 24.4%, 40대 212.3%, 50대 24.5%로 나타났다.

 

그러나 6ㆍ25에 대한 역사적 인식수준이 저조함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92.1%가 6ㆍ25의 역사적 의미를 새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89.3%가 참전용사와 참전국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응답해

6ㆍ25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 국민적인 수준으로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에게 6ㆍ25는 무엇인가?

전쟁발발 60주년을 맞아 6ㆍ25가 서울과 서울시민에게 무엇인지,

6ㆍ25는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남겼는지 묻는 특별회고전을 개최한다.

파괴와 폐허의 시간, 서울, 서울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이다.

 

6ㆍ25는 공전의 대재앙이었다.

그러나 들불 속에서도 생명은 부지되고 화산재에 덮인 숲도 다시 살아난다.

참혹한 폐허 속에서도 서울사람들의 삶은 지속되었고

잿더미 속에서 서울은 다시 일어나 오늘날 번성하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6ㆍ25는 서울의 1/3을 파괴했다.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 당했으며,

서울시내 한복판에 탱크가 진출하고 항공폭격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전쟁기간에 서울에서는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모든 생업이 일시에 중단되었으며

학생들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숱한 주택, 관공서, 공장이 잿더미가 되었다.

(물론 폭격의 대상인 공장지대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여서 서울에서 왜색을 없애는 효과도 있었다).

 

많은 젊은이가 죽고 서울 사람, 서울 말, 서울 문화가 사라졌으며 전통적인 사회질서가 붕괴되었다.

파괴된 자리에 6ㆍ25는 많은 새 것을 앉혔다.

전국 8도의 주민이 몰려든 서울은 이제 전국의 축소판이 되었다.

공터에는 판잣집이 들어차면서 공지는 사라지고 무허가 주택과 무허가 점포가 양산되었다.

 

전통윤리 대신 오발탄, 자유부인의 ‘아프레게르’문화와 현실주의, 평등주의가 풍미하였다.

(‘아프레게르(Apres Guerre; 戰後派)’는 ‘전후(戰後)’라는 뜻으로

1차대전후 프랑스에서 전전(戰前)의 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역이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전위운동으로 표출된 것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무궤도한 젊은 세대나 혼란된 전후풍습 그 자체를 말한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전후문학,

혹은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깡통같은 국적불명의 언어가 표준어가 되고 미국 대중문화가 퍼졌다.

 

취약한 속에 복구사업이 추진된 결과 서울의 파괴는 새로운 서울의 창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많은 부분이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고,

복구사업의 종료가 선언된 1958년 서울의 상태는 여전히 열악했다.

그러나 1960년 4ㆍ19혁명을 추동한 평등주의, 70ㆍ80년대 압축 성장을 뒷받침한 에너지를

6ㆍ25 잿더미에서 자라난 문화유산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해석일 것인가?

 

다른 모든 면에서나 마찬가지로 6ㆍ25 파괴의 복구는 아직 미완의 과제이다.

강남과 강북의 불균형 발전이 단적인 예이다.

지금 시점에서 1950년의 서울을 되돌아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사진자료, 모형, 문서 등을 중심으로

6ㆍ25의 파괴와 그 속에서의 삶, 6ㆍ25 이후 복구를 살펴본다.

많은 어린이들이 고생했던 거적 바닥의 천막교실도 재현된다.

유소년 혹은 청년시기에 전쟁을 겪었던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보여줄

‘내가 겪은 6ㆍ25’ 코너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전쟁 당시와 전후에 만들어진 6ㆍ25의 기억을 담은 대중문화, 노래와 문학 그리고 영화를 통해

알고도 지나쳤던 문화를 향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시에서 주목한 점은 외국의 시선이다.

국내전에서 시작하여 국제전 형태로 막을 내린 6ㆍ25전쟁에는

미군과 중공군의 적극적인 개입과 UN 16개국 참전국이 있었다.

이에 주목하여 그들의 눈에 보인 서울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전시를 통해 전쟁은 파괴와 동시에 재건이라는 단초를 인식할 수 있다.

서울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극한으로 내몰린 서울시민은 지금도 전쟁을 통해 체득한 눈빛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폭격에 쓰러진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모습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자리가 될 것이다.

전쟁의 교훈은 한결같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 평화의 시기를 더욱 더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박현민(서울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 SEMU 2010년 봄호,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정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