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실학박물관] ‘다산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 특별전

Gijuzzang Dream 2010. 7. 29. 19:51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 

 

 

 

 

▶ 6월 12일(토)~10월 3일(일)

경기도 실학박물관

 

 

 

 

 


 

== ‘가장본 여유당집’ 최초 공개 등 관련 유물 전시 통해 다산 생애. 업적. 사상 재조명
== 다산의 ‘목민심서’ 주제 기념학술대회 개최 ‘현대 목민관’들에 다산의 메시지 전달
== 정약용의 실학은 조선 후기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개혁,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이 목표임.

    정약용의 개혁 사상을 통해 현재의 민주주의 원류를 이해할 수 있음
== 정약용은 회갑을 맞이하여 그 간의 저술들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했고,

    임종 직전에 총 182책 503권으로 정리한 과정이 가장본 여유당집에 나타나 있음.

    가장본 여유당집은 정약용의 개혁적 사상을 총괄한 저술로

    특히, 그의 학문 발전 과정이 잘 나타나 있는 가장본의 중요성이 부각됨.
==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및 미국 버클리대학 아사미 문고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본 『여유당집』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약용이 일반에게 공개하기를 원치 않았던 비본(秘本)과 다산이 직접 수정, 교열하였던

    초고본 『여유당집』이 공개됨으로서 『여유당집』의 편집과정을 조명하고 있음.

 


 

 

한국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재조명하는 특별한 전시가

경기도 실학박물관에서 열린다.
실학박물관(관장 안병직)은 6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茶山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與猶堂集)’ 특별전을 개최하고

이제껏 소개되지 않았던 다산의 <가장본 여유당집>을 최초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다산이 승례 혜장에게 지어준 시문첩인 <견월첩>을 비롯해

민간자치의 상비적인 방위체계를 구상한 <민보의>,

다산의 역작인 <경세유표>, <매씨상서평>, <매화도> 등 총 71건 2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다산 정약용은 18~19세기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고의 실학자로

그가 추구한 사상의 방향은 개혁 ·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민주주의 사상의 원시적 형태로서의 국가체제 개혁이었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1834년경 손수 정리한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남겨졌으며,

그의 총저작은 서목-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 64책 166권 등

모두 182책 503권에 달한다.

그 결과 1930년대 중엽에 이루어진 『여유당전서』는 거의 완벽하게 재편집될 수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본(家藏本)은

장서각(藏書閣)과 미국 버클리대학의 아사미문고(淺見文庫) 등에 소장되어 있다.

 

 


실학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본 여유당집> 등 실학 유물 전시를 통해

다산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해보는 한편 다산의 저작들이 어떻게 정리되어 왔는지를

체계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목민심서>는 다산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지방관들의 폐해를 방지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목민관 선임의 중요성, 청렴·절검의 생활신조, 백성본위의 봉사정신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어 현대의 관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문의전화 : 실학박물관 학예팀 양상훈( Tel.031-579-6011

 

 

 


□ 전시회 개요

○ 전 시 명 : “다산(茶山)과 가장본(家藏本) 여유당집(與猶堂集)”
○ 장     소 : 실학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및 로비 일부
○ 기     간 : 2010년 6월 12일 ~10월 3일
○ 전시대상 및 수량 : 총 71건 200여점
○ 전시목표 : ‘정약용의 유적지’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이라는 지리적인 배경을 토대로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함으로써

                     전시, 연구는 물론 체험을 통해 그 사상을 이해하는 자리를 마련.




□ 특별 강연회


○ 특별 강연회 1
- 강사 : 김태영(실학박물관 석좌교수)
- 주제 : 『經世遺表』에 드러난 다산의 변법적 경세론
- 일시 : 2010. 6. 12(토), 15:30~16:30
- 장소 : 실학박물관 강당

 

○ 특별 강연회 2
- 강사 : 송재소(실학박물관 석좌교수)
- 주제 : 다산 실학사상의 철학적 기반
- 일시 : 2010. 9. 4(토), 14:00~15:00
- 장소 : 실학박물관 강당

 

 

□ 특별전 기념 학술회의


○ 발표주제 : 朝鮮의 牧民學 傳統과 『牧民心書』
○ 일      시 : 2010. 6. 19(토), 13:00~18:00
○ 주      최 : 실학박물관, 한국사상사학회 공동 주최
○ 발표 및 토론자 : 발표자 5명, 토론자 5명, 사회자 2명

구분

성명

소속

직위

발표(토론)주제명

1

5명

정호훈

서울대학교

HK연구교수

15~16세기 牧民書의 출현과 牧民學

김용흠
연세대학교
HK연구교수
《牧民攷》와 地方 統治
백승철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8세기 牧民書에 나타난 賦稅制度 운영
김선경
서울대학교
규장각연구원
《牧民心書》와 茶山 牧民學의 성격
이숙인
서울대학교
HK연구교수
《牧民心書》속의 親族 · 家族

 

 


□ 전시 세부구성 및 내용

구 분

소주제

주요내용

프롤로그

 

실학의 종합

-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의 종합 · 국가체제의 개혁 [體國經野]
- 가계도와 연보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업적 설명

Section #1

 

수학과
관료생활

- 가학(家學)
- 성호학파와의 교류
- 대과급제와 임관(任官)
-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 화성의 설계

가학과 성호학파와의 연관성 설명
정약용의 관료로서의 면모와 정조와의 관계 설명

Section #2

 

강진에서의 유배생활과 경학(經學)

- 강진에서의 생활
- 학승과의 교유
- 강진 읍내에서의 생활과 교유
- 다산 초당에서의 생활과 교유
- 저술 활동

유배시기 학문과 사상 설명

Section #3

 

마현(馬峴)으로의 귀향과 경세학(經世學)

- 초천(苕川)에서의 생활
- 저술 활동
- 문인(文人)과의 교류와 학문 논쟁

귀향 후 학문과 사상 설명

에필로그

 

《여유당집 (與猶堂集)》편집

- 여유당전서의 간행
- 정약용의 초상들
- 정약용의 호

실학 집대성의 결정판인 《여유 당전서》의 간행과정 설명

 

 


□ 대표전시유물


1. 초계문신제명록 (抄啓文臣題名錄)
조선후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초계문신들의 명단을 정리한 자료이다.

초계문신은 정조가 문풍을 진작키 위해 37세 이하의 문신을 뽑아 열흘, 한 달 간격으로

경서(經書)와 시문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전최(殿最)로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1781년(정조 5)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약 190여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다산은 1789년(정조 13)년에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다.


 

 



2. 정조보묵 (正祖寶墨)

1795년(정조 19) 경기도박물관 소장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에서 진찬(進饌)하면서 관화곡(觀華曲)에 맞추어 지은 시이다.

봄날에 느릿느릿 북쪽 대를 오르니 (春日遲遲上北臺)
이번 행차는 꽃 핀 경치 찾아온 게 아니라네. (此行非是?花開)
새로운 시를 지어서 관화곡을 다시 잇고 (新詩更續觀華曲)
만세토록 길이 만세의 술잔 따르리. (萬歲長斟萬壽杯)


 

 


3. 정약용 초상 (丁若鏞 肖像)

김호석 작(2009) 96cm×178cm, 강진군 소장


지금까지 알려진 다산의 초상화는 5~6종이다.

모두 일제강점기 이후 그려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가장 최신작으로 안경을 쓴 다산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조선후기 서양문물의 영향과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려는 의지, 방대한 독서와 저술 등의 학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4. 정약용 편지

19세기초 , 강진군 소장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새로 보완한 『자휘(字彙)』(명나라 매응조(梅膺祚)가 편찬한 字書)의 선본과

『물명고(物名攷)』(일상의 어휘를 21개 분야로 나누어 한자와 한글을 표기한 사전) 등의 책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다산은 이를 빌려 필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경학 연구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5. 정약용 편지

1811년(순조11) 나주정씨 종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1811년 2월 그믐에 제자 중 한사람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1810년 큰아들 학연이 부친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해배의 움직임이 있자 자신이 강진을 떠나면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若銓, 1758~1816)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자산(玆山=흑산도)으로 머리를 돌리면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는 말에서

그의 형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할 수 있다.


 



6. 두강승유도(斗江勝遊圖)

조선후기, 이건필 작, 개인 소장


이건필(李建弼)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마현의 두강(斗江=두물머리)을

배를 타고 유람하며 그린 풍경도이다. 다산 역시 두강에서의 고기잡이, 유람 등을 즐겼으며,

특히 갈대 우거진 집 앞 초천(苕川)의 풍경을 사랑하였다.


 



7. 시경강의(詩經講義)

19세기 필사본(15권5책) 복제 /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1791년(정조 15) 가을 시사(試射)에서 성적이 나빠 왕이 북영(北營)에 있게 명하고,

『시경』8백여장의 조문(條問)을 내려 40일의 기한을 주며 대답하게 하자

이 조문 하나 하나에 대해 강술한 것이다. 본집 11권 4책, 보유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보유는 정조의 조문에 미치지 못한 것을 1808년(순조 8)에 다시 지어 합편(合編)하였다.

 

표지서명은 『시경강의』이고,

우측 상단에 책1부터 책 4까지는 ‘어문(御問)’과 그 권수가 표기되어 있으며,

책 5에는 보유(補遺)와 그 권수가 기록되어 있다.

각 권이 시작할 때마다 『여유당집』 권1~권15를 표시하여

여유당집 전체 체제에서 이 자료의 편차를 알 수 있게 하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두주가 있고, 몇 곳에서 내용 보충을 위해 첨가한 띠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열수(洌水) 정용(丁鏞) 저(著)’로 되어 있다.

내지에 ‘윤정기인(尹廷琦印)’, ‘방산(舫山)’, ‘경림(景林)’의 장서인이 찍혀 있어

다산의 외손인 윤정기의 소장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8. 매화도(梅花圖)

가로 54×세로 25㎝, 조선후기, 정약용 작, 고려대박물관 소장


묵지(墨紙)로 된 부채 위에 은니(銀泥)로 그린 매화그림이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잡은 나무와 양쪽으로 뻗은 줄기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가

조정과 멀어졌음에도 항상 그곳을 향한 다산의 마음을 그린듯하다.


 



9. 경세유표(經世遺表)

19세기, 필사본(가장본 13권5책)


‘경세유표’의 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에 해당하는 가장본이다.

표제는 『여유당집』으로 되어 있고,

측 상단에 ‘방례초본(邦禮艸本) 경세유표(經世遺表)’라고 쓰여 있으며

책4부터 책9까지 5책으로 되어 있다.

또 책1부터 책4까지는 각 책마다 ‘전제(田制)○’라고 하여 권1부터 권12까지 구성하였는데,

1책 3권으로 되어 있다.

또 책5는 ‘양전의(量田議)’ 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3종(終)’으로 표기하고 있다.

저자는 ‘부루(負累) 신(臣) 정용(丁鏞)’으로 되어 있고, 몇 곳에서 붉은색의 두주가 확인된다.

10. 목민심서(牧民心書)
19세기, 필사본(李家源先生蒐集本, 권7~9, 1책 영본),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목민심서』49권 16책중 7~9권 1책이다.

『목민심서』는 강진에서 이루어진 초고본과 마재에서 이루어진 완성본이 있는데,

이 책은 완성본에 가까우나 완성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사본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완성본의 본문에 들어가야 할 기사들이 아직도 두주나 보유로 가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아직도 『여유당집』이라는 표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1822년 자찬묘지명이 이루어지기 이전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

『목민심서』는 국내외적으로 현재 1백여종이 넘는 필사본이 존재하지만,

가장본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앞으로 새로운 가장본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이 책이 가지는 가치는 무한하다고 할 것이다.


 



11. 여유당집(與猶堂集) 상서평(尙書平)

19세기, 필사본(李家源先生蒐集本, 권1∼3 1책),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


채화정(菜花亭)은 다산이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의 집 부근에 새로 지은 작은 정자의 이름이다.

『여유당집』의 별칭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내용은 『상서평(尙書平)』1~3의 부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매씨서평』1∼3권인데,

1810년에 이루어진 초고본이다. (책 첫머리에 『여유당집』권16이라는 표기가 있으므로

이 책은 1822년의 자찬묘지명에서 『여유당집』의 서목이 정리된 이후의 사본으로 보아야겠다.

 

이 책의 뒷장표지에는 ‘근세우유풍희고문위상서(近世又有豊熙古文僞尙書)’라는 주기(注記)가 있는데,

이 주기는 이 책의 소유자가 뒤에 임의로 가필한 것 같다.

현재 『매씨서평』1~4권의 초고본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 가치는 무한하다 하겠다.


 



12. 여유당집(與猶堂集) 잡문(雜文) 8

조선후기, 필사본(가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가장본 중 ‘여유당집 잡문(雜文) 8’ 혼돈록에 해당한다.

다른 가장본과 비교하여 수정할 곳으로 지적한 부분이 가장 많은데,

대부분 삭제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오약산(吳藥山)」,「채류세겸(蔡柳世謙)」,「이참판만회(李參判萬恢)」,「이백주(李白洲)」,

「인묘피참(仁廟被讒)」등 20여 항목 이상은 아예 삭제를 뜻하는 ‘산(刪)’자를 내용 중앙에 크게 써놓았다.

간혹 추가되어야 할 내용을 두주에 밝히고 ‘∞’를 하기도 하였으나, 삭제되어야 할 부분에 비해서는 적다. ‘혼돈록’이 『여유당전서』에서 제외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3. 열수전서(洌水全書) 속집(續集) 8 (墓誌銘, 秘本)

19세기, 필사본(가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장서각 소장의『열수전서』속집 10책 중의 제8책이다.

이 책은, 이가환(李家煥), 이기양(李基讓),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및 정약용 본인의 묘지명이

실려 있는 것인데, 그들은 모두 신유사옥으로 장살(杖殺)되었거나 유배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묘지명은 그들을 박해한 자들을 원망하는 글이거나 원한에 찬 글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비본으로 처리한 것이다. 다산의 가장본을 검토하는 한 이 이외의 비본은 없다.

따라서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술」과 「비합법적 저술」이 있다거나 한간에 『경세유표』가 혁명적 저술이기 때문에

전봉준이나 호지명이 애독하였다는 풍설은 완전히 신화임을 알겠다.


 



14. 민보의(民堡議 )

조선후기, 필사본(가장본 3권1책),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조선후기 속오군제(束伍軍制)가 무너져 복원하기 힘든 상황에서

민간자치의 상비적인 방위체계를 구상한 자료이다.

민보군(民堡軍)이 민간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관군과 구분되고,

전략요충지에 민보(民堡)를 설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점에서 방위 체제의 새로운 구상이었다.

1812년(순조 12)에 저술하였다.

표지에는 『사암별집』이라 되어 있고, 우측 상단에 ‘민보의(民堡議) 전(全)’이라 표기하였다. 여

유당집 권181~권183에 편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경학과 관련한 저술들과 달리 ‘별집(別集)’으로 분류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

 

다산은 어떤 실학자인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9세기 초에 18세기 전반기의 경세치용학과

18세기 후반기의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다.

그가 한국 최대의 실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종래의 한국 실학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자기시대의 과제를 파악하고,

둘째 육경사서(六經四書)를 궁구하여 유학의 진수(眞髓)를 체득하고,

셋째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는 서양문물을 흡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총체적 개혁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향은 개혁 ·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다산이 이러한 개혁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그의 천품이 남달랐던 점도 있었지만,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까지도 학문을 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받아들이고,

40대 중반에 중풍의 병고(病苦)를 굳센 의지로 이겨낸 것과 같은 그의 참용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자연철학의 신봉자로서, 지구가 하루에 9만리를 돌듯,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해야 무엇인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통하여 간단없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의 개혁사상은 워낙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으므로 한 두 분야로써 소개하기가 어렵지만,

이를 국가체제의 개혁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 새로운 군신 관계의 정립이다.

왕조체제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주권이 군주에게 있는 것으로 이해되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래 통치자는 인민이 추대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주가 비록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통치권은 인민을 위하여 행사될 때만이 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자유주의와 인권사상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민주주의사상의 원시적 형태임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국가체제이다.

전통적으로 왕조체제하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는 정전법(井田法) 체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정전법 체제는 농촌 체제일 뿐이다.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존재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국가체제가 수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체제가 ‘체국경야(體國經野)’이다.

체국경야 체제에서는, 상공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되고, 농민군과는 달리 상비군 제도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농업은 상품작물의 재배를 기초로 하는 다각경영이 이루어지며,

상공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선진기술을 도입된다.
위와 같은 사상을 전개하기 위하여

다산은 500권 180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남겼다.

 

 

암행어사 다산(茶山)이 바라 본 민생(民生)
1794년(정조 18) 다산은 경기도암행어사가 되어 민생을 살펴본다.

그가 맡은 지역은 적성 · 마전 · 연천 · 삭녕 등 4곳이었다.

전 연천현감이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주고 재결을 도둑질한 사실,

전 삭녕군수가 지나치게 화전(火田)에 세금을 물리고 향임(鄕任)들에게 뇌물을 받은 사실 등을

발각하였다.


이때 다산이 본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세 살 먹은 아이가 군적(軍籍)에 올라 있고,

다섯 살 먹은 아이가 기병(騎兵)으로 등록되어 있어 두 아들의 세공(歲貢)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아무 것도 남지 않아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또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자 닷 말을 금년에도 갚을 엄두조차 내지 못해 살 길이 막막하지만,

관가에 끌려가 곤장맞을 일 보다는 갑자기 문밖에서 들이닥칠 나졸들 행패가 겁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개 팔자보다 못한 것이 백성들의 삶이었다.

 

 

다산과『여유당집(與猶堂集)』
1822년은 다산의 갑년(甲年)이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의 1822년 조(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올해는 공의 갑년이 돌아오는데, 육경사서지학(六經四書之學)과 경세실용지학을 끝냈으니,

천하에서 할 만한 일은 모두 끝낸 셈이다.

하늘 및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과 생 사 및 변화의 근본을 체험했으니,

다시는 저술에 마음을 쓰지 않고 「자찬묘지명(自撰 墓誌銘)」을 지었다”.

 

과연 그는 갑년에 저술활동을 마감하고 그의 저작을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회갑을 맞아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짓는다.

 

묘지명의 내용은 가계(家系), 관직생활, 18년동안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과 경학 연구,

1818년 마현으로의 귀향 등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고 있다.

 

지명에서 밝혀진 그의 저서는 육경사서에 관한 연구인 경집(經集)이 232권이요,

시문집과 정법집으로 구성된 문집(文集)이 260권으로서, 모두 492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경세유표」(49권)와 같은 미완성작품이나

「아방비어고(我邦備禦攷)」(30권)와 같은 미성립 작품이 들어가 있으므로,

완전한 서목(書目)이라 할 수 없다.

 

최익한(崔益翰)이 지은 『실학파와 정다산』에 실려 있는 「열수전서총목록」에는,

경집 88책 250권, 문집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 64책 166권으로서,

모두 182책 503권이다.

이 총목록은, 그의 「최후수정가장본(最後手定家藏本)」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하므로,

다산이 73세경에 최후로 손수 정리한 서목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산은 정말로 회갑 이후에는 저술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자연을 완상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생활했다.

그 때문에 그가 회갑 이후에 남긴 글은 주로 소수의 시와 기행문뿐이다.

그러나, 그 외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61세 때에 신작(申綽)과 나눈 육수육향(六遂六鄕)에 관한 논쟁과

66세 때에 홍석주(洪奭周)가 염약거(閻若璩)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을 기증해옴으로써

1834년에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과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을

『상서고훈』(21권)으로 합편하고 『매씨서평』을 수정한 것이다.

 

다산은 회갑 이후 그의 저서를 『여유당집』으로 정리했다.

『여유당집』은 『여유당문집』, 『열수전서(洌水全書)』, 『사암경집(俟菴經集)』 및 『사암별집』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고 있지만, 모두 『여유당집』의 별칭에 불과했다.

현재 남아있는 책 수가 많지는 못하지만, 장서각(藏書閣)과 버클리 대학의 아사미문고(淺見文庫) 등에

보존되어있는 가장본『여유당집』을 검토해보면, 이러한 점은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다.

렇기 때문에 1930년대의 중엽에 이루어진 『여유당전서』는

거의 완벽하게 재편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든가 ’,

『경세유표』를 호지명이 읽었다’든가 하는 등의 신화가 있어왔는데,

이는 가장본의 검토에 의하여 전혀 근거 없는 것으로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다산은 1822년에 지은 자신의 묘지명(집중본)에서 『여유당집』의 전체 체제와 권수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꾸준히 저술을 수정, 분합(分合)하여

만년인 1834년경에 최후 수정한 『여유당집』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산과 가장본『여유당집』


다산은 1801년의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된다.

그는, 유배를 학문을 완성하라고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유배생활 18년간을 오로지 학문탐구에 매진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아전 제자 6명과 양반제자 18명을 양성하고,

「저작연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유배기간 내내 한 해에도 수종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가 그렇게 왕성하게 저작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저술에 있어서 자료조사, 필사, 정서 및 제본 등의 작업을 제자들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과의 공동잡업 덕분으로

한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귀향 이후에도 『흠흠신서』를 저술하고 경세학에 관한 저술들을 수정하는 등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저술활동을 계속했으나,

회갑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정열적으로 행해오던 저술활동을 잠시 멈추고

그간에 이루어진 저술들을 『여유당집』으로 정리한다.

임종 직전의 1834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열수전서총목록」에 의하면,

유경사서(六經四書)에 관한 연구로 구성된 사암경집(俟菴經集)이 88책 250권,

시, 서 및 잡문으로 구성된 문집이 30책 87권 및 정법집으로 구성된 잡찬(雜纂)이 64책 166권으로서,

모두 182책 503권이다.

위와 같이 『여유당집』은 그의 생존시에 거의 완벽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출간된 『여유당전서』가 완전하게 편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유당전서』는 『여유당집』과는 목차의 순서가 조금 다르다.

현재 장서각, 버클리대학의 아사미(淺見)문고 및 기타 각 기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는

가장본『여유당집』을 가지고 이 점을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본 『여유당집』과 「열수전서총목록」은 그 편차(編次)가 경집, 문집 및 잡찬으로 서로 같으나,

『여유당전서』의 그것은, 시문집, 경집 및 잡찬에 해당하는 정법집으로서

시문집과 경집의 순서가 바뀌어있고, 각 편내의 목차도 다소 재조정되어있다.

그러나, 편차의 순서가 다르다고 혀여 수록된 저작들이 기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여유당전서』에서는 동일한 저작인 경우,

최후의 수정본을 수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여유당집』에는 있는데, 『여유당전서』에는 수록되지 못한 저작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보의(民堡議)』와 「혼돈록(餛飩錄)」이다.

 

『민보의』가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비어고(備禦考)』30권이 자료수집 단계로 아직 저술의 단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혼돈록』이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여유당집』의 단계에서 이미 불완전한 저서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가장본의 「혼돈록」에는 많은 곳에 붉은 글씨로 ‘산(刪)’ 또는 묵서(墨書)의 X표시가 있다.

만약 이러한 표기가 다산에 의한 것이거나 다산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이 가장본은 다산 재세시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가장본 중에는 유일하게 ‘비본(秘本)’이라 표기된 것이 있다.

『열수전서』속집8 「묘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가환(李家煥), 이기양(李基讓),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및 본인의 묘지명인데,

이들은 모두 신유사옥에서 장살(杖殺)되었거나 유배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묘지명들은, 원한에 맺힌 글이거나 자기들을 핍박한 자들을 비난하는 글로서,

비석에는 다 새길 수 없을 정도로 그 글의 분량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다산은 이것만은 「비본」으로 해 둔 것인데,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규장각 소장의 『여유당집』에는 이 글이 빠져있다.

그리고 가장본『여유당집』을 검토하는 한 이 이외의 비본은 없다.

그러므로 최익한 저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의 저서 중에는 「합법적 저서」와 「비합법적 저서」가 있다던가,

세간에서 널리 떠도는 바와 같이, 『경세유표』와 『목민심서』가 혁명적인 저술이기 때문에

전봉준과 호지명이 애독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완전한 신화(神話)임에 틀림없다.

 

 

 

 

 

 

 (冊 소개) 다산의 후반생 - 36년의 인생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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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후반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후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정조 대 초계문신으로서 승승장구하던 다산의 운명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01년 11월, 다산은 천주학쟁이라는 죄목의 칼을 쓰고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형 정약전과 함께 기나긴 유배의 길에 올랐다. 그 모진 세월이 18년이다.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다시 18년간 일민(逸民)으로서의 삶을 살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1801년을 정점으로 하여 마치 곧장 수직낙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산은 유배지에서 많은 제자와 지인을 두었고, 6백여 권에 달하는 수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이러한 다산의 후반의 삶을 낙척한 선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이 이루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위대한 업적을

단순히 ‘기적’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 속에는 다산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연민마저 느껴지는 다산의 면모,

그리고 다산 곁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준 사람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의 저자는 다산이 태어난 해와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같다는 묘한 인연으로

이 책의 서두를 열고 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해에 다산은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의 치세에 젊은 각신(閣臣)으로서 기량을 발휘하던 다산은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산 또한 사도세자처럼 질곡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을까.

이후 다산은 36년의 긴 시간을 유배와 해배의 삶으로 채워야 했다.


이 책에는 동문 매반가의 주모, 제자 황상, 혜장선사, 초의선사, 윤단 가족, 석천 신작, 부인 홍씨 등

다산의 후반생을 함께한 이들이 매 꼭지마다 거론되고 있다.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 이들에게 지어준 시문 등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만들어간 다산의 기적과도 같은 치열한 삶을 매 꼭지마다 보여주고 있고,

유배 직후부터 삶을 마감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다산이 남긴 시문집을 비롯해서 다산과 교유한 주변 인물들의 문집까지 모두 검토하여

사실을 바탕으로 다산의 후반생을 재구성하였다.


 

 

너무나 치열했던 삶, 다산의 후반생 36년

유배 18년 ― 감시가 창작의 원동력이요, 함정이 곧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를 앞세운 정순왕후와 노론(老論) 세력이 정권을 잡을 무렵,

궁에 남은 남인(南人)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노론 세력은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내몰기 위해 적당한 죄목을 찾던 중

천주교라는 기막힌 건수를 찾아냈다.
정약용은 비록 정조 생전에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어떻게든 옭아 넣으려는 그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형이 이승훈이었고, 외종형이 윤지충이었고, 그의 셋째형이 정약종이었다.

이들은 1801년 신유사옥 때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다산은 정조 승하의 슬픔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유배의 길에 올랐다.

북풍에 눈 날리듯
남쪽 강진의 밥집까지 밀려 왔네.
다행히 조각산이 바다를 가려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
근심이 많아서 밤에 술을 더 마시지.
한 가지 일이 나그네 걱정 겨우 잊게 해 주니
동백이 설도 전에 벌써 꽃피운 거라네
― 「객지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쓰다」( 28쪽 참조)


유배지에서 느꼈던 다산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그나마 씻어준 것은 남녘땅의 붉게 물든 동백이었다.

설날도 되지 않았는데, 남녘의 성급한 봄꽃은 벌써부터 꽃망울을 틔웠다.

지금도 강진 땅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세월의 켜가 쌓인 울창한 동백숲이 있다.

유배는 다산의 인생에서 불행의 시작이었다.

기어코 다산만은 죽여야 한다고 벼르던 그들은 유배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현감 이안묵을 강진으로 내려 보냈다.

게다가 강진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이 다산을 멀리했다.

천주학쟁이의 죄목을 쓰고 왔으니,

행여 다산과 가까이했다가는 함께 천주학쟁이로 몰릴까 두려웠으리라.

이런 갑갑하고 암울한 현실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준 건 동문 매반가의 주모였다.

그녀는 강진읍성 동문 밖에서 매반가 즉 밥을 파는 집을 운영하던 할멈이었다.

동문 매반가의 할멈은 다산에게 잘 곳을 마련해주었고,

이후에는 근처 마을의 학동을 가르치게 해서 다산 스스로 살 수 있는 길도 터주었다.
비록 동문 매반가의 주모가 보살펴주긴 했지만,

현감 이안묵의 감시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다산은

좁은 골방에서 자연스레 집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다산의 6백여 권 저서 창작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의 감시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동문 매반가 주모의 주선으로 학당을 연 다산은 그의 평생의 제자 황상과 이학래를 만나고

그의 집필에 도움을 준 혜장스님, 초의스님 그리고 여러 학인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승려에게 의지하는데
가엾은 그 승려 수염이며 머리카락 길어져 묶어야 했네.
이제는 불가 계율 타파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 국까지 끓인다네.
― 「다산화사」 중 ‘스님’( 163쪽 참조) 
 

 

위 시는 다산이 동문 매반가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겨 살다가 다시 다산초당으로 옮겼을 무렵

혜장선사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혜장은 다산초당 옆에 초막을 짓고 직접 음식 수발까지 들었다고 하는데,

혜장 또한 큰 스님이었으니 직접 수발을 들었다는 건 과장이라 해도,

그만큼 정성을 들여 다산을 모셨다는 말일 것이다.

다산의 제자 이학래는 자그마치 20년간 다산을 모시고 그의 집필을 도왔다.

다산의 저서 상당수가 이학래에 의해 정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학래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말라고 했던 다산과 등지면서까지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욕을 불태우던

이학래는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 과거시험만 보다가 결국 마지막엔 우물에 빠져 죽었다.

자살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수로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다산의 업적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유배지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다산에게는 기적의 산실이었고, 기적의 거름이었다.

심지어 다산과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도 다산에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당시 손암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고,

다산은 손암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어 확인받고 질정하고 또 보완했다.
애초에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가게 된 것은 그곳에 천주교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산을 죽이려 했던 노론 세력은 죽일 명분이 없어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지만,

그곳에서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주교인이 많은 곳으로 보내 어떻게는 옭아 넣으려 했다.

강진 땅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세거(世居)였다.

처음엔 감시 아래 있었기에 이들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결국 다산은 해남 윤씨 집안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유배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집필에 필요한 자료도서까지 해남 윤씨 집안 녹우당에서 빌려다 볼 수 있었으니,

함정이라고 여겼던 강진이 다산에게는 학문의 산실이 된 셈이다.


해배 후 18년 ― 다산이 고개를 숙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던 유배의 시간도 결국 끝이 났다.

다산은 1818년 9월 14일 그의 아들과 제자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저술한 6백여 권의 책, 초서한 자료 등을 다 갖고 올라왔으니,

우마차 가득 짐을 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다산은 큰형님 정약현과 부모님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나는 정기를 늦게 받아 태어났기에
아버지께선 내 막내아들이라 하셨지요.
순식간에 30년이 흘렀는데
아버님 뜻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덤 속이 비록 저세상이지만
옛사람은 여묘 살며 모셨다는데,
아직도 생각납니다. 신유년 봄에
통곡하며 묘소를 하직했지요.
말 먹일 겨를도 없이 떠나면서
의금부의 관리에게 핍박당하고,
귀양지에서 떠돌다 보니
어느새 18년이 흘렀습니다.
봉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나무는
가지와 잎새가 예전처럼 푸른데,
사람의 생애는 저만도 못하여
버림받는 게 어찌 그리도 쉬운지요.
― 「어버이 무덤에 오르며」( 259쪽 참조) 

 

부모님 묘소 앞 나무는 여전히 푸르기만 한데, 자신은 어느새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다산은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이 한 편의 시로 풀어냈다.

물론 시 한 편에 그 세월의 한을 어떻게 다 풀 수 있을까마는

2백 년 뒤의 후손인 우리로서는 이 시를 읽으며 당시 다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뿐이다.

해배되어 돌아온 마재 집에서도 다산은 여전히 집필에 몰두했다.

이웃에 사는 심재 서용보가 끊임없이 다산을 떠보았고,

조정에서도 끊임없이 다산을 죽이려 했으니 마음 편한 노후는 못 되었다.
다산을 끝까지 죽이려 했고 다산의 석방과 해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서용보가

아직 완전히 사면되지도 않은 다산에게 사람을 보내어 두 번씩이나 안부를 전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심재 서용보는 당시 정승의 신분에 있던 실세였다.

그런 사람이 다산에게 안부를 물었다는 것은,

숙이고 들어오면 내 사람으로 받아주겠다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당시 다산의 지식과

국가경영 능력은 이미 그의 저서들을 통해서도 탁월함이 입증된 셈이니 말이다.

다산은 심재 서용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심재 서용보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면, 조선의 역사는 조금 바뀌었을까?

 

다산은 해배 후 철저히 조정에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고, 벼슬에 재임용한다는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한번 승지 임용의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파들의 거센 반발로 그것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재임용은커녕 다산을 죽이기 위해 반대파들은 두 번이나 다산을 조정으로 불렀다.

한번은 효명세자가 위독하니 올라와 치료하라는 것이었고,

또 한 번은 순조가 위독하니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만약 다산이 책임을 맡은 상황에서

효명세자나 순조가 죽게 되면 모든 책임을 다산이 뒤집어쓰고 죽어야한다.
다산은 한양으로 가는 발걸음을 최대한 늦추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산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죽고 말았다.


다산은 이제 정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국가경영을 위해 그동안 써왔던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런 힘든 시기에 다산은 대산 김매순, 석천 신작 등 이른바 열수(洌水-한강의 옛 이름)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다산은 자신의 『매씨상서평』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대산 김매순의 글을

그의 「자찬묘지명」에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으로 더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산은 해배 후 삶의 대부분을 저술의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자찬묘지명」을 썼다. 그리고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 등의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무덤 속에 넣을「자찬묘지명」이라 해도 조정에 알려진다면 큰 물의를 일으킬 것이었다.

하물며 저잣거리에 시체가 걸렸던 중죄인들의 묘지명을 쓰겠다는 것은

물의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묘지명은 실질적으로 다산이 죽은 후 52년이 지난 1888년에 공개되었다.

다산으로서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이들의 억울함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생의 마지막을 부인 홍씨와 함께했다.

젊어서는 과거시험 공부하는 다산을 대신해 가정을 꾸렸고,

유배를 떠난 뒤로도 계속해서 집안일을 떠안았을 불쌍한 부인에게

다산은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회근시」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회혼잔치 날 아침 다산은 영면에 들었다. 

 


 

“북풍에 눈 날리듯 / 남쪽 강진의 밥집까지 밀려 왔네.

다행히 조각산이 바다를 가려 /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 / 근심이 많아서 밤에 술을 더 마시지.

한 가지 일이 나그네 걱정 겨우 잊게 해주니 / 동백이 설도 전에 벌써 꽃피운 거라네.”
- 「객지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쓰다」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했던 다산 정약용은

적극적 지지자였던 정조 대왕과 정승 채제공이 사망한 뒤,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 땅으로 유배를 떠났다.

다산은 정조 승하의 슬픔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다산에게는 비극이었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된 유배생활 18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것 말고는 다산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프로 사진작가이자 아마추어 다산연구가가 글과 사진으로 <다산의 후반생> 36년을 답사했다.

다산이 쓴 시와 산문을 읽으며, 다산이 걸었던 길을 쫓아 카메라 렌즈에 담아냈다.

그간 학계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고증해가며 절묘하게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

다산의 후반생 36년의 인생길을 슬프게 펼쳐 보인다.

 

“나는 임술년(1802) 봄부터 곧 저술을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만을 곁에다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았다. 그 결과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마침내 폐인의 지경에 이르고, 시력이 아주 어두워져서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느냐?”

-「두 아들에게 보여 주는 가훈 」중에서

 

오로지 학문의 길이 성인의 길이었다.

유배 18년, 해배의 성은이 도착했다.

1818년 9월 14일 다산은 아들과 제자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저술한 600여 권의 책, 초서한 자료 등을 다 갖고 올라왔으니,

우마차 가득 짐을 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다산은

큰형님 정약현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에 참배를 갔다. 하지만 해배가 곧 영광은 못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유학자의 도리에도 힘들었다.

1830년 딱 한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다.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위독하자 다산을 부른 것이다.

탕제의 일이었다. 다산이 제조한 약을 먹고 효명세자가 죽는다면 다산은 책임을 져야 했고,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불충이었다.

다산이 필요한 약재를 가져오라고 백리 길이 넘는 마재 집으로 사람을 보내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효명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임시직이었던 다산의 벼슬도 날아갔다.

강진 유배시절 다산에게는 홍임이라는 딸과 부인이 다산초당에 함께 기거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다산이 강진을 떠날 때 딸 홍임은 8~9세 정도였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해배 후 부인 홍씨와의 사이가 한동안은 불편했을 것이다.

다산은 부인 홍씨와의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 「회근시」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회혼잔치 날 아침 다산은 영면에 들었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눠졌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 「회근시」( 383쪽 참조)

 


- 최재천, 변호사

- 2010 10/19위클리경향 896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