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는 차라리 큰 것이 낫고,
눈은 오히려 작은 것이 나으니...
전국시대에는 사람을 순장하는 풍속 대신에 사람의 형상을 만든 목용 제작이 성행했는데
한비(기원전 280-233)의 『韓非子』「顯學」에는
“사람모양을 백만개를 만들었다(像人百萬)”는 내용이 있을 정도이다.
이 시대 목용은 생략되었으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며,
이러한 예술적 감각과 풍부한 예술적인 경험을『韓非子』「設林」에는 환혁(桓赫)의 말을 인용해
조각기법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조각의 도는 코는 차라리 큰 것이 낫고 눈은 오히려 작은 것이 낫다.
코는 크면 작게 할 수 있지만 작으면 크게 할 수 없고,
눈은 작으면 크게 할 수 있으나 크면 작게 할 수 없다
(刻削之道 鼻莫如大 目莫如小 鼻大可小 小不可大也 目小可大 大不可小也).”
그 당시 장인이 목조를 다루는 경험과 안목은
모든 이가 “그렇다 ! ” 라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는 정확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다른 어떤 시기나 시대보다도 목조각품이 유행하였다.
특히 불교조각은 청동, 석조, 건칠 등 다양한 소재가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비들의 단정하고 소박한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양란이후의 궁핍한 경제적인 이유인지
불전에는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조각품이 산재해 있다.
심지어 목조상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불석(佛石)'이라는 석고와 같이 무르고 표면이 부드러운 돌이
유행할 정도이다. 아마도 불석이라는 돌을 선택한 데에는
중국 전국 시대의 장인들 못지않은 재료에 대한 경험과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조각승들은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환혁(桓赫)이 피력한 내용에 부합되는 조각승이 있다.
18세기 초 전후 활동한 진열(進悅)이라는 조각승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으로 활동 무대가 넓었다.
그가 조성한 불상은 공통적으로 방형의 상반신,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방형 얼굴,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주름 하나가 강조된 것이라든지 배 앞에 대칭을 이루는 듯한 편삼자락 등이 특징이다.
특히 군의주름은 직선과 곡선을 자유자재로 패턴화되지 않고 다양하게 변화를 주고 있는 점은
매우 개성 있다.
그런데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그가 중수한 불상의 모습이다.
부산 동래 금정구에 위치한 범어사 비로전에는 진열이 중수한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722년 중수되었으니 이 불상이 조성된 것은 적어도 17세기 전 · 중반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중수발원문에는 163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로전 불상은
같은 寺內 진열이 조성한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닮아 진열의 작품으로 의심할 정도이다.
비로전 불상은 과연 진열의 작품은 아닐까? 그 해답은 바로 비로전 불상의 모습에 있다.
비로전 삼존상은 관음전 불상과는 신체비례나 법의의 표현방법이 다르고,
실제 얼굴형 등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만 들어 보자.
비로전 삼존상은 상반신이 직사각형에 가깝다고 한다면,
진열이 조성한 범어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방형 신체이다.
조선후기 불상은 같은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면 신체비례가 거의 근사치를 보인다.
아마도 같은 밑그림은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보면 비로전과 관음전 불상은 서로 표현기법이 달라
서로 다른 조각승에 의해 조성된 불상임에 틀림없다.
또한 비로전 불상의 얼굴은 이마선이 넓으면서 턱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이다.
양 뺨에 살이 없이 밋밋하고, 턱의 볼록함도 적다.
그러나 진열이 조성한 관음전 불상은 턱이 둥글고, 이마선과 얼굴 폭이 거의 같은 방형의 얼굴이다.
뺨 양측과 턱도 볼록하게 양감을 보이며, 진열이 조성한 다른 불상에서도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
몇 가지의 사례이지만 비로전 불상의 전체적 모습과 인상은 중수의 결과로 생겨난 셈이다.
그렇다면 진열의 중수 방식은 무엇일까?
전라도 목포에는 진열이 중수한 또 하나의 불상이 있다.
달성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은 향엄(香嚴)에 의해 1565년에 만들어졌고,
1719년 범어사 비로전 불상을 중수한 진열(進悅)에 의해 수리되었다.
이 상의 특징 또한 방형의 얼굴과 부드러운 인상이 비로전 불상을 연상케 한다.
향엄의 작품은 달성사 목조지장보살상외 제주 서산사 목조보살상이 현존한다.
그런데 향엄이 조성한 서산사 불상은 달성사 불상과 달리 턱이 둥근 방형 얼굴에 양 뺨이 팽팽하고,
눈꼬리가 올라간 가는 눈매, 좁은 콧등으로부터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오똑한 코, 좁고 선명한 인중 등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인상 또한 침울해 명랑하고 밝은 인상의 달성사 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범어사 비로전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을 알 수 없지만
향엄의 달성사 목조지장보살상과 양감 있고 볼록한 얼굴을 이렇게 수정해 나갔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조각장들과 같이 예술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조선 조각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진열의 역량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비로전 불상은 중수가 벗겨진 금박을 다시 입혀 옛 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중수기의 내용처럼 옛 것은 삭제하고, 새 것은 보충하고, 옹졸한 것은 바꾸고 좋은 것으로 만드는
또 다른 조선후기 불상 중수의 방식에 대해 면밀한 시각이 필요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조각의 도는 코는 차라리 큰 것이 낫고 눈은 오히려 작은 것이 낫으니…” 라는 문구를
진열(進悅)이 보았다면 아마도 무릎을 “탁!” 쳤을 것이다.
- 이희정,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10-02-08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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