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천재성을 증명하다
렘브란트의 예술성 입증한 두 작품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일찍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인기화가가 되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모델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묘사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모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요구한 것은
모델의 지위가 나타나는 초상화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어 했던 렘브란트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작품만 그렸다.
비극적 운명 암시하는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
렘브란트는 주문이 점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멈추지 못했다.
계속된 낭비 때문에 렘브란트는 파산했고 채권자들은 빚을 받기 위해 그를 법정에까지 세운다.
당시 무역이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 무역이 발달한 네덜란드는 상인의 나라였다.
금융시장과 은행과 상거래가 활발한 암스테르담 사회에서 낭비하는 그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그를 비난했다.
더군다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렘브란트는 아내 사스키아를 잃는 비극을 겪게 된다.
한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렘브란트는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외모가 사스키아와 닮은 헨드리키에 빠져들었다.
헨드리키에는 사스키아와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티투스의 보살피기 위해 유모로 고용된 여자였다.
렘브란트는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착하고 19살의 여자였던 헨드리키에와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사스키아의 유산은 렘브란트의 최소한의 생활비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병약한 사스키아는 일찍 죽으면서 유언에 렘브란트가 재혼을 하면 유산상속 자격이 없다고 명시했다.
사스키아의 유산으로 살고 있는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에와 결혼하지는 못하지만 사실혼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는 사회의 추문을 일으켜 교회 재판소에 소환을 받게 된다.
소환에 응해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이유를 말해야만 했었다.
두 사람은 소환을 거부했지만 1654년 칼뱅교 교회 법원은 헨드리키에만 소환한다.
결국 그녀는 “렘브란트와 간음한 것을 고백하고 엄한 처벌을 받으며 참회하라”는 교회 선고를 받았고
렘브란트는 ‘혐의 없음’ 선고를 받는다.
렘브란트가 교회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는 헨드리케에의 심정을 담은 작품이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Bathsheba with King David's letter)>다.
구약성서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의 모델은 헨드리케에다.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 Bathsheba with King David's Letter. 1654년, 캔버스에 유채, 142×142,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고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다윗왕은 궁전 옥상에서 산책을 하던 중
목욕하고 있던 용맹한 군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발견한다.
다윗왕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밧세바를 불러들인다.
결국 밧세바의 임신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들통 난다.
다윗왕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이용해 우리야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다윗왕은 그 죄로 인해 신의 분노를 사 아들을 잃게 된다.
아들을 잃은 다윗왕은 죄를 뉘우치고 신의 용서를 받게 된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이다.
밧세바는 편지를 들고 하인에게 발을 씻기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밧세바는 풍만한 육체를 과시하고 있으나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표정이다.
이 작품은 누드화이나 렘브란트는 에로티즘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밧세바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렘브란트의 예술성 입증한 <툴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에게 두 번째 해부학 강의
<데이만 교수의 해부학 강의(The anatomy lesson of doctor Joan Deyman)>가 의뢰 들어온다.
<툴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Doctor Nicolaas Tulp demonstrating the anatomy of the arm)>를 그린 지
23년만이었다. 당시 데이만 교수는 튈프 교수의 후임으로 암스테르담 의과 대학 검시관이었으며,
그의 해부학 강의는 튈프 교수의 그림이 걸린 교실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로 암스테르담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면
<요하네스 다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손상된 자신의 예술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 당시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동업조합은 명성이 드높은 의사 한 명을 초빙하여 조합원들 앞에서 인체를 해부해보이는 행사를 연례적으로 가졌는데 이 그림은 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주문제작 되었다. 이 대형 단체초상화는 제작된 이후 줄곧 사람얼굴을 순서에 따라 한 줄로 배열하는 규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렘브란트는 피라미드 구도와 강의 자체의 실제과정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극적인 조명을 통해 주제를 살렸으며, 또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그의 상징이 된 암시적 심리상태를 그들에게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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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다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56년, 캔버스에 유채, 100×134,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
1723년 화재로 3/4가 소실된 이 작품의 원본은 시체를 중심으로 양쪽에 여덟 명이 그려져 있었다.
남아 있는 작품에서는 시체 위 다이만 교수의 손이 보이고 두개골을 들고 있는 조수만 완벽하게 남아 있다.
작품의 초안을 보면 렘브란트는 첫 번째 작품보다 더 정확하게 상황을 전달하고자
다이만 교수가 해부하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전작은 팔의 근육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부학 보다는 초상화 성격이 강했다면
후작은 시체의 뇌를 끄집어내는 순간을 포착했다.
두개골이 절개된 시체의 머리를 다이만 박사는 뇌를 끄집어내려고 하고 있고
조수는 절개된 두개골 뚜껑을 들고 있지만 시선은 시체의 머리에 있다.
내장을 그러낸 시체의 배는 뚫려 있다.
시체 하반신에 하얀색 시트는 렘브란트가 화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실제로 시트가 없었다. 당시에 시체는 하나의 물건을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배려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전작과 다르게 실험을 한다.
시체의 발을 앞으로 배치해 인물의 실제 모습보다 더 짧게 보이게 하는 단축법을 사용했다.
(단축법은 평면 화면에 색상으로 공간에 깊이를 주어 실제의 길이보다 짧게 보이는 기법)
이 작품에서 시체가 누워 있는 모습은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를 연상시키고 있는데
렘브란트는 만테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결국 렘브란트는 전성기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지만 예술적으로는 성취한 셈이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칼럼니스트
- 2010.01.2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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