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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며(시,서,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그림들

Gijuzzang Dream 2010. 2. 20. 02:37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그림들

 

희망을 그리던 붓, 격렬한 비판 도구로

 

 

 

18세기부터 19세기 스페인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고야가

궁정화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돈에 대한 경제관념이었다.

그는 돈만이 화가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생각해 평상시에도 재정 관리에 힘을 쏟았으며,

고정 수입이 보장되는 궁정화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결국 출세주의자였던 고야는 카를 3세에 의해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쥘 수 있는 궁정화가가 된다.

하지만 고야는 풍자적이고 사실적인 자신의 화풍을 궁정화가가 되었다고 바꾸지는 않았다.

 

 

 



고야의 유머 돋보이는 <카를 4세의 가족>

궁정화가로서 고야의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 <카를 4세의 가족>이다.

황혼 나이의 왕과 그의 가족 14명이 유령처럼 서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이 초상화는

고야가 남긴 500여점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카를 4세의 가족

1880-1881년, 캔버스에 유채, 280×336,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화면 중앙 왼쪽은 왕비 마리아 루이스 중심으로,

오른쪽은 카를 4세를 중심을 배치해 전체적으로 균형을 주었으며

인물들을 양쪽 끝에 몰아 가운데를 중심을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

공식초상화에 맞게 등장인물들은 왕과 왕비에게 수여받은 훈장을 착용하고 있다.

배경에 있는 큰 그림에는 고야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늘진 부분에 그려 넣음으로서 빛을 받고 서 있는 인물들과 구별되게 했다.

고야가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의식해서다.

금실과 은실로 장식한 비단과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여자들과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늘어서 있는 것은 그들의 보이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물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현실 정치적 불안을 상징한다.

고야가 화면 중앙에 왕비를 배치한 것은

왕비는 무능한 왕을 대신해 애인이었던 재상 고도이와 더불어 국정을 관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도이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왕비 사이에 자리를 비워 둔 것이다.

귀금속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왕비의 옷차림은 당시 왕비의 행실과 함께 웃음거리였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왕비의 경박함을 보석으로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만 생동감이 없이 표현된 인물들은

왕족의 우아함이나 귀족적인 분위보다는 거만함과 세련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야는 대망의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후 첫 의뢰받은 이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1개월 동안 등장인물들을 스케치했으며

1년 동안 구도와 인물의 위치와 자세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제작했다.

 


전쟁의 공포 규탄한 <1808년 5월 3일>

한편 말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면서 나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고야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희생자들의 고통을 극명하게 폭로했다.

고야가 전쟁의 공포를 규탄한 작품이 <1808년 5월 3일>이다.

이 작품은 왕이 나폴레옹 정권에 대항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의뢰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을 휩쓸면서 스페인은 페닌술라 전쟁(1808~1814)에 휘말리게 된다.

프랑스 군대가 명목상으로는 포르투갈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연합국 자격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1808년 5월 2일 프랑스 점령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거대한 봉기를 일으키고

다음날 반란을 진압한 프랑스 군대는 봉기에 가담한 마드리드 시민 가담자들을 처형했다.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8×347,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1808년 5월 3일에 있었던 마드리드 시민들의 처형 장면을 담은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 포병들은 오늘날 몬클로이라고 불리는 도시 외곽에서 봉기에 가담한 중요 인물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이 있은 발생 한 6년 후, 전쟁이 끝나 갈 무렵 고야는 처참했던 그날을 두 개의 그림으로 남긴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작품으로서 구성은 미구엘 감보리노가 1813년에 제작한 판화를 토대로 삼았다.

바닥에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는 땅 위로 처형된 세 구의 시체가 서로 겹쳐져 있고

그 뒤로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양팔을 벌린 채 프랑스 군대 총구 앞에 서 있고

프랑스 군대의 총구 모두 그를 향해 있다.

이 작품의 중심은 흰 셔츠를 입은 남자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남자의 자세는 인류의 죄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연상시키고 있다.

흰 셔츠의 남자 옆으로 몇몇의 시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군인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과 달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똑같은 자세로 서 있다.

고야는 군인의 모습을 통해 무고함과 잔인함을 표현했다.


배경의 3/1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하늘과 불빛 하나 없는 도시 풍경은 참혹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고야는 전쟁의 영웅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더 강조하기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실제의 사건은 낮에 일어났지만 고야는 배경을 밤으로 택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는 초창기에 스페인의 희망을 담기 위해 밝고 경쾌한 그림을 그렸다면

후기에는 온갖 사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다룬 어두운 그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야는 궁정화가로서 초상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인간 심리와 반군국주의를 탐구했다.

심하게 앓아 청각을 상실하지만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자 사라고사 민병대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10여 년 간 나폴레옹 침략에 대항하는 스페인 투쟁을 그림으로 남겼다.

고야는 억압받는 인간성의 저항의 외침을 붓을 매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칼럼니스트

- 2010년 02월 10일 [명화산책]ⓒ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