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초상
익재공 영당 안에 봉안되어 있는 초상화로
이것은 정본이 아니라 묘사한 부본인데 정본과 부본에 대해 약간의 다른 견해가 있다.
정본은 익재 이제현 선생이 33세 되던 해인 1319년에 충선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명화가인 진감여(陳鑑如)가 그리고, 석학인 탕병용(湯炳龍)이 찬을 쓴 초상화였는데
말미에 묵기와 낙관이 있어 79세의 상(像)임을 알 수 있다.
익재영정(益齋 影幀) - 국보 제110호
고려 충숙왕 6년(1319), 세로 177.3㎝ 가로 93㎝ 종축
비단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은
고려왕조 7대에 걸친 중신으로서 주자학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이자 시서화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1314년(충숙왕 1)부터는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세운 만권당(萬卷堂)에서
활동하면서 서화 · 전적 수집에 관여하며 조맹부를 비롯한 당시 원나라 유명한 학자,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세차례에 걸쳐 중국대륙 깊숙이까지 먼 여행을 하였는데,
1319년(충숙왕 6)에는 충선왕이 절강성 보타산(寶陀山)의 사찰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데
시종하였다.
익재영정은 바로 이때 제작된 것으로 화면 우상(右上)에 한모(韓某)라는 사람이 받아 쓴
익재의 자찬문(自讚文)의 내용에서 초상화가 그려진 연유를 소상히 알 수 있다.
충선왕은 익재 등과 함께 절강지방을 여행하면서 신하들에게 여행지의 승경(勝景)을 기술(記述)케 하여
행록(行錄) 1권을 지었으며, 항주(杭州)에 사는 일급 초상화가인 진감여(陳鑑如)를 불러
익재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당시의 석학인 북촌(北村) 탕병용(湯炳龍)으로 하여금 찬(讚)을 쓰게 하였다.
(탕병용의 찬은 화면 왼쪽 위에 쓰여있다.)
그러나 귀국할 무렵 이 영정을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이 그림을 잃어버렸는데
32년 만에 국서를 받들고 다시 연경(燕京)에 갔다가 우연히 이 자신의 영정을 다시 찾게 되었다.
30여 년 전의 젊은 얼굴이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것에 놀라고,
만나고 헤어짐 역시 때가 있음을 느껴
그 연유와 감회를 글로 표현하고 이를 한운(韓雲)으로 하여금 40자의 시(詩)로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 자찬문은 『익재집(益齋集)』에도 실려 있는데
『익재집』에서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를 오수산(吳壽山)이라 하여 화가 이름이 서로 다르나,
이것에 대해서는 『익재집』의 내용보다는 실제 그림에 쓰여 있는 내용이 인정되고 있다.
흰색 심의(深衣)차림에 공수(拱手)자세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의 모습과
회청색 옷과 매듭 장식이 걸려 있는 접는 의자, 서책과 청동정(靑銅鼎),
6줄짜리 금(琴)이 놓여 있는 검은 색 칠기 탁자 등이
한눈에 우리나라 초상화 전통과는 전혀 다른 형식임을 알 수있다.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얼굴은 선염없이 선(線)으로만 묘사하였는데,
단조로운 철선묘(鐵線描)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운용을 달리하여 부드럽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얼굴과 탁상 일부분만이 원작이고
전신 초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체와 옷ㆍ의자ㆍ족대 등은 조선 후기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정이 낡게 되자 후손들이 얼굴과 한 두 군데를 제외하고
대부분 새롭게 보수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유학자의 온화한 성품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고려인의 그림은 아니지만, 당시 한 · 중 문화교류의 생생한 증거이자
원대 초상화 양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참고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제현은 충선왕이 원나라에 세운 만권당에서 조맹부 등과 함께 고전을 강론하였고,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으며, 말년에는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는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익재난고』·『익재집』·『역옹패설』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선생의 초상화는 모두 4점이 전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로, 왼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소매가 넓고 비단으로 테두리를 두른 심의(深衣)를 입고 있으며, 손은 맞잡아 소매 속에 넣고 있다.
작자는 알 수 없으며, 전하는 바로는 조선 숙종 13년(1688)에 제작하여
구강서원에 보관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그려놓은 국립중앙박물관본이나 가산서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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