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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 표출했던 뭉크의 작품들 - <달빛> <마라의 죽음>

Gijuzzang Dream 2010. 1. 22. 07:14

 

 

 

 

 

 자의식 표출했던 뭉크의 작품들

 

쓰디쓴 사랑의 아픔, 화폭 위에 수놓다

 

 

 

<절규>로 잘 알려진 화가 뭉크는

작품을 통해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과 공포를 통렬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어린 시절 병마로 가족을 잃었던 경험에 기인한다.

뭉크에게 가족이 지울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주었다면,

사랑은 독신이었던 그에게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그는 또한 사랑 때문에 평생 방랑벽을 얻게 되었으며

여자는 남자를 고통에 빠뜨리는 존재로 여기는 여성관을 갖게 되었다.

 

뭉크는 작품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사랑의 감정을 독창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는 세기말 분위기의 새로운 사상 ‘보헤미아(사회문제와 성도덕 예술의 혁명.

철저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이념)’운동에 공감하고, 철저하게 빠져든다.

암울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반항으로, 이 때 형성된 인생관, 여성관, 예술관이 뭉크의 평생을 지배한다.

보헤미안적 자유연애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뭉크에게

카메라 셔터의 섬광처럼 다가온 첫 번째 여자는 헤이베르그 해군 군의관 부인이었다.

뭉크보다 세 살 많은 헤이베르그 부인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며

자신의 욕망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연상의 유부녀와의 불륜은 뭉크에게 새로운 쾌감, 육체적 욕망을 선사한다.

하지만 뭉크는 첫사랑의 설렘과 새로운 정열로 빠져들수록 거침없는 그녀의 행동에 고통받았다.

그는 연애 기간 내내 순수한 자신의 사랑과 달리 자유연애주의적인 헤이베르그 부인의 행동으로 인해

의심과 질투에 휩싸였으며, 그녀의 거짓말에 뭉크는 끊임없이 격분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뭉크가 파리 유학을 떠날 때까지 지속된다.

뭉크는 사랑 뒤에 숨어 있는 여자의 거짓을 알고부터 6년간의 사랑을 끝낸다고 그의 일기에 썼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가? 다른 어떤 그림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첫 키스를 빼앗아 갔고 나로부터 ‘생의 향기’를 빼앗아 갔기 때문인가?”

뭉크는 3살 연상 유부녀와의 금지된 사랑으로 전율하지만

애욕의 허무함으로 그 이후 여자를 불신하게 된다. 

 

 

 

 

 


순수했던 첫사랑 표현한 <달빛>

뭉크가 그녀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달빛>이다.

나무로 지어진 집을 배경으로 달빛을 받은 여인이 뒷짐을 지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거의 전신상으로 그려진 여인이 뭉크의 첫사랑 헤이베르그부인이다.

<달빛>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40×135,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이 작품에서 나무로 된 갈색의 벽과 창문의 밝은 색은

화면 왼쪽 깊은 밤을 묘사한 어두운 녹색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오른쪽에 꽃 몇 송이가 보이고 왼쪽 화면에는 붉은색을 띤 인물이 보이고 있는데

인물은 뭉크 자신을 암시하고 있다.

뭉크는 첫사랑과 헤어진 후 1889년부터 1892년 세 차례에 걸쳐 국비유학생으로

파리에서 2년 정도 지내고 노르웨이로 돌아와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2번째 개인전은 뭉크에게 파리에서 유학으로 결산함과 동시에 화가로서 새로운 길을 여는 전시회였다.

전시회의 성공으로 뭉크는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난다.

베를린에서의 뭉크 스캔들을 계기로 뭉크는 베를린에서 머물게 된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순조롭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지만,

정신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생활을 했다.

1900년 경 병마와 고독에 시달리던 뭉크는 튤라 라르슨과 사랑을 하게 된다.

관능적인 매력이 넘쳐흘렀던 그녀는 부잣집 딸로서 세기말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뭉크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뭉크는 결혼에 자신을 옭아 메기를 거부했다.

젊은 날의 연애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그에게 결혼은 두려움이었다.

 

 

 

 


 

애인과의 총기 오발사건 표현한 <마라의 죽음>

 


그녀의 결혼 독촉으로부터 피해 다니던 중에 라르슨은 거짓으로 중병에 걸린 것처럼 꾸며

뭉크를 병실로 불러들인다.

결혼을 원하고 있던 그녀는 뭉크가 병실에 들어오자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권총으로 자살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뭉크는 그녀의 자살을 막으려고 애를 쓰던 중에 권총 오발로 인해

뭉크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르웨이 전통에 따르면 가운데 손가락은 결혼반지를 끼는 손가락이다.

뭉크는 그날의 사건을 5년 후 <마라의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라의 죽음은 1793년 7월 13일 프랑스 급진파 혁명가 마라가

귀족출신 샬롯트 코르도네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 화가 다비드는 작품 <마라의 죽음>을 통해 마라를 순교자적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다비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여자에게 당한 자신을 프랑스 혁명가 마리의 죽음과 동일시했다.

<마라의 죽음>

1907년, 캔버스에 유채, 153×149,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피를 흘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의 남자는 뭉크 자신이며

침대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은 튤라 라르슨이다.
사랑과 미움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이 작품에서

뭉크는 역사적인 사건을 생략하고 남자를 배신하는 여자를 주제로 삼았다.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는

튤라 라르슨과의 사건 후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강해지고 여자로부터 쫓긴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더 보헤미안 생활에 빠져들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유랑하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고통과 방황으로 보내면서도 말년의 뭉크는

자신의 현실과 대조적으로 건강하고 밝은 세계를 펼친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10.01.2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