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의 백납병(百衲屛)
활짝 핀 진달래 사이로 나비 정겹게 날고, 사립 안 나무 아래 어미개가 새끼들 젖먹이고,
매화에 제비 깃드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노니는 양 바라보고,
누각에서 담소하는 선비로부터, 수령의 부인이 가마로 군졸을 대령하고 강을 건너려는 풍경까지…
산수에서 기명절지나 영모 등으로 여러 장의 소품을 하나의 병풍에 안배한 것을
'백납병(百衲屛)'이라 한다.
황후의 몸으로 무엇이 부러웠으며 무엇을 더 가질게 있었겠느냐마는
피난길에서도 다른 진보(珍寶)를 마다하고 이 병풍을 함께 가지고 부산으로 왔다.
겸재며 단원 등 도화서의 일품(一品)이 있었을 것인데
가장 깨끗하고 채색이 맑고 선명한 이 새 병풍을 더 아끼셨나 보다.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께서는 이렇게 간수하신 물건을
부산의 한 집안에 흔쾌히 내려 주시었다.
황후는 윤택영(尹澤榮, 1876~1935)의 딸로 영의정을 지낸 윤용선(尹容善, 1829~?)의 증손녀이다.
황후께서 사저에 계실 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 살아 계셨던 분이 바로 그녀의 증조부이셨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포로 들어오고 부산이 일본과의 교두보 역할을 맞게 되자
부산은 풍수적으로도 각광을 받게 된다.
윤용선의 묘소가 해운대 장산 자락의 배산임수한 곳을 택한 것이나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의 묘소가 부산 다대포의 아미산 자락인 남림(南林)에 자리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한국전쟁에 해운대의 장지마을로 피난 오게 된 황후는
증조부의 묘소가 전쟁 중에도 정성껏 유지된 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으로
이 병풍을 묘소를 관리하던 집안에 주었다.
이 병풍은 초상화로 유명한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열두 폭에 6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채용신과 해평 윤씨 집안과의 인연은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조어진모사의 주관화사로 발탁된 채용신은
모사할 어진을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에서 직접 이안해 온 도제조 윤용선을 뵙게 된다.
채용신의 작업을 가까이서 지켜본 윤정승은 부친상으로 관직을 그만 두고 향리로 돌아간 그를 천거하여,
충남 정산군수(定山郡守)의 보임(補任)을 맡기게 하였다.
채용신에게는 정산군의 군수직이 그의 마지막 실직이어서인지
이후의 그림에 '정산군수'라는 직함과 '정산(定山)'이라 호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 백납병은 황실의 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이 같은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더욱 정성들여 그려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 채용신, <미법산수도>, 견본담채, 33.8×15.0cm, 부산박물관
그림 2) 채용신, <소과도>, 견본채색, 26.5×17.6cm, 부산박물관
지금은 60점의 그림이 뿔뿔이 흩어져 9점의 그림만으로 이 병풍의 전모를 추정할 수 밖에 없지만
흥미로운 화목들이 눈에 띈다.
미불(米? , 1075~1151)를 배웠던 고극공(高克恭, 1248~1310)의 화의(畵意)로 그린 <미법산수도>,
청대 상해화풍의 산뜻하고 화려한 감각의 <소과도蔬果圖>,
은일풍취를 그린 <춘강선유도(春江船遊圖)>나 <누각산수도>,
그리고 평안과 장수(長壽), 집안번창 등의 기복적 바램을 담은 <화조도>, <묘두응도(猫頭鷹圖)>, <
수하유견도(樹下乳犬圖)> 등이 그것이다.
백납병은 원형(圓形), 方形(방형), 선형(扇形) 등등 갖가지 모양의 화면에
화훼, 괴석, 화조, 어해, 영모, 산수, 인물, 기명절지 등의 다양한 소재를 그려 붙여 병풍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는 대작이 아니므로 편하게 자신의 장기를 드러낼 수 있으며
설사 잘못 그렸더라도 대체(代替)가 가능하고 잘된 것만 골라서 구성이 가능하였다.
또 화면과 소재가 다양했기에 아기자기한 병풍으로 꾸밀 수가 있어 여성취향적인 것이었다.
그림 3) 채용신, <누각산수도>,견본담채, 15.7×23.5cm, 부산박물관
그림 4) 채용신, <여인도강도>, 견본담채, 31.9×29.0cm, 부산박물관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초상화의 대가로 알려진 채용신이 그 한 장르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회화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였고, 그 다재다능한 능력을 이 백납병 제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극세필과 음영법으로 핍진(逼眞)함을 추구했던 초상화뿐 아니라
현전하는 그의 화조영모화와 산수인물도 역시 구륵진채법(鉤勒眞彩法), 극세극채법(極細極彩法)으로
화려하고 섬세하게 작업한다는 것이 그에 대한 대체적 평가였는데
이 9점의 낱장 그림은 이러한 일반적 평가에 수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그림에 나타나 있는 남종화의 미법산수화풍, 소재와 색채에 있어서의 청대 해상화파 화풍과의 친연성,
풍속화적 제재와의 결합 등이 그것이다.
채용신은 여전히 극세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조선말기 유행하던 여러 화목과 당시 화단에 풍미하던 새로운 화풍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금까지 민화계열로 분류되던 채용신의 화조영모화 병풍 가운데
궁중회화로 재평가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그림 5) 채용신, <묘두응도>, 견본채색, 22.5×24.2cm, 부산박물관
그림 6) 채용신, <수하유견도>, 견본채색, 31.2×25.9cm, 부산박물관
그리고 백납병 수요층에 관한 재고(再考) 또한 필요할 것이다.
백납병은 조선말기에 특히 많이 제작되어 유행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저변화된 수요층의 양상과 그들의 고조된 서화애호취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존 백납병들은
유숙(劉淑, 1827~1873), 안건영(安健榮, 1841~1876) 등의 것으로 전하는 조선말기 문인적 취향을 보여주는
작품들 외엔 작자미상의 민화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순정효황후가 애장했던 이 병풍을 통해 향유층이 궁중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백납병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60여장이 넘는 낱낱의 그림이 인연 따라 병풍으로 만들어졌다가
또 인연을 따라서 한 장 한 장 흩어짐에 애틋함을 가진다.
아직 우리나라의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을 다른 그림들이
다시 인연을 따라서 한 곳에 모여지기를 마음으로부터 기다려 본다.
- 이현주,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10-01-25
<더보기>
채용신의 또다른 이면, 백납병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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