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광해군의 꿈과 좌절

Gijuzzang Dream 2009. 12. 21. 20:24

 

 

 

 

 광해군의 꿈과 좌절

 

 

 

 

한명기(중세사 2분과)

 

 

몇 해 전, 모 방송사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에서 재평가가 필요한 인물들을 꼽아보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교사들은 ‘재평가의 대상’으로 광해군을 가장 많이 거론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광해군이 ‘폭군(暴君ㆍ포악한 군주)’ ‘혼군(昏君ㆍ어리석은 군주)’으로 매도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뜻밖의 일이었다. 
 
광해군(1575∼1641)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살다간 인물이지만 오늘날 그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에서 외교문제와 관련된 현안들이 불거질 적마다 그는
‘부활’하고 있다. 
 

<그림 1> 사적 광해군묘(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지난 2004년, 이라크에 파병하는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에도 파병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를 불러낸 바 있다. 1618년, 명은 누르하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면서 조선에게도 파병하여 동참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당시 광해군은 명의 요구를 거부하려 했고, 마지  못해 파병한 뒤에도 누르하치의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명과 누르하치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며 중립적인 행보보였던 그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외교의 귀재’로 재평가 되었다. 요컨대 한반도에 미치는 강대국의 입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가 벌인 외교에 대한 관심 또한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외교의 귀재’로까지 재평가 된 광해군이지만 내정에서 나타난 한계 또한 분명했다. 그는 1608년 즉위했던 이후 1623년 권좌에서 밀려날 때까지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차자(次子)이자 첩자(妾子)의 처지에서 즉위했던 그는 끝내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비극이 발생하고, 수도 이전과 궁궐 건설 등 토목공사에 비정상적으로 매달리는 난정이 자행되었다. 사대부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백성들의 아우성이 빗발쳤다. 대북파(大北派)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西人)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었다. 당파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민심을 다독거려야 했던 ‘기본’을 제대로 다지지 못했던 귀결이었다.
  
하지만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쫓아냈던 인조와 집권세력들 또한 광해군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소리 높여 성토했지만 인조 또한 자신의 형제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인성군(仁城君)이 역모죄에 걸려 죽었고, 이괄(李适)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던 흥안군(興安君) 또한 반란 실패 후 비명횡사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에 대한 ‘배신’이자 ‘패륜 행위’라고 매도했지만 인조 자신은 병자호란을 맞아 청 태종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호란 당시 수십만의 포로가 심양으로 끌려갔다. 포로들 가운데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도끼로 잘리는 혹형을 받았고, 청군 장수의 첩이 되었던 조선 여인 가운데는 만주족 본처로부터 끓는 물 세례를 받는 고통을 겪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림 2> 사적 삼전도비(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임진왜란 이후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조선을 둘러싼 안팎의 환경은 엄혹했고 시대적 과제는 막중했다. 안으로는 왜란이 남긴 ‘굶주림’과 ‘체제 이완’을 해결해야 할 정치적 리더십이, 밖으로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격변과 일본의 재침 위협을 슬기롭게 넘어설 외교적 수완이 절실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이 맞닥뜨렸던 두 과제는 결코 별개의 사안이 아니었다. 내정과 외교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광해군은 두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투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그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가 펼쳤던‘탁월한 중립외교’도 내정의 실패 앞에서 빛이 바래고 말았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의 은인’으로 떠오른 명과 대다수 지식인들이 여전히 ‘오랑캐’로 여기고 있던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시도한 것은 원초적으로 위험한 도박이었다.

 

‘중립외교’를 제대로 펼치려면 반대파에 대한 배려와 설득, 그리고 소통과 통합을 위한 세심한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소통을 위한 노력 대신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궁궐 영건 등을 밀어붙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들어선 인조와 반정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두 가지 과제 앞에서 무너졌다.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철’을 되풀이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 결과는 더 비참했다.
  
17세기 초반의 ‘쓰라린 경험’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문득 17세기 초반의 당시와 21세기 벽두의 오늘이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는 여전히 강대국의 입김이 교차하는 와중에 ‘독도’, ‘동북공정’, ‘북핵’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안에서는 ‘4대강’, ‘미디어법’, ‘세종시’ 등 정책의 시행을 놓고 정치권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와중에 사회적 소통과 통합의 전망은 요원해 보인다. 
 

<그림 3>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다 끌려나가는 이정희 의원

(출처 : 경향신문 http://www.khan.co.kr/)

 

역사는 과연 반복되는 것일까?

‘당시’와 ‘오늘’을 떠올리면서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돌아보는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 필진 : 한명기 / 등록일 : 2009-11-02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3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