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 서울의 ‘동회’ 살펴보기
김영미(현대사 분과)
총대(동장)제도ㆍ동회제도는 식민지하에서 약 30년 동안 유지되었다. 해방이후 사회에서도 동회는 주민지배의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오늘날 동사무소 역시 중요한 물리적 실체로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지역을 구분하여 동마다 동사무소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도시의 통치제도는 한국의 도시사회에만 존재하는 특수 현상이다.
유동성이 큰 도시사회에서 구지 작은 동 단위까지 행정기관을 존치시켜 통치비용을 들이게 된 역사적 과정이 무엇이었을까? 국가가 도시의 주민지배를 위해 시(市)의 하부에 행정조직인 구청을 두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그 하부에 행정기구인 동회(동사무소)를 두었다는 사실은 특수한 역사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동사무소와 유사한 일본 대도시의 주민조직이자 행정보조기구인 죠나이카이〔町內會〕의 존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죠나이카이는 전통 도시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치 기구였지만, 메이지 유신시기에 사라졌다가 1920년을 전후한 시점에 새로 부활된 것이었다.
새로 등장한 죠나이카이는 여전히 주민들의 자치조직이었지만 국가기구에 복속된 관치성이 강한 조직이었다. 한국의 동회란 한편으로는 전통사회 동민들의 자치조직에 기원을 두면서 또 한편으로 식민지 모국인 일본의 대도시 주민조직 죠나이카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일제시기 도입ㆍ정착되는 동회제도는 조선의 전통 동회의 식민지적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게 동회란 식민지 지배정책의 산물이면서 관념적으로 그들이 전통적으로 경험해온 주민자치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중첩된 것이다.
동회제도가 시작된 식민지시기부터 동회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는 1950년대 중반까지는 크게 보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이다. 이 시기 국가권력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개인에 대한 관리와 통제시스템이 대단히 불완전한 상황에서 행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해야만 했다. 이 시기 국가의 대민지배 방식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바로 주민사회의 역량을 활용하는 특징원’을 통한 지배였다.
여기서 ‘주민’은 단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 즉 거주지와 결합된 존재로서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주민동원’이란 거주지를 단위로 하는 인력의 동원을 의미한다. ‘동원’은 본래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국가나 정치세력이 다른 목적으로 집중시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국가는 주민사회의 자치 역량을 활용하여 미약한 행정력을 보완하고자 하였으며, 도시지역에서 주민동원의 단위가 된 것은 동(洞)이었다. 근대로의 과도기에 국가권력은 이 단위의 자치적 활력을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그것이 도시의 대민지배방식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동회제도란 동을 단위로 지역주민들을 결속시켜 이 단위의 지역유지들의 정치적 욕구를 수렴하고 주민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도록 함과 동시에 또 주민사회의 자발성을 국가 행정에 활용하는 정책이었다.
동일한 정책을 경험한 일본과 한국에서 현재 동회 모습은 대단히 이질적이다. 한국에서 동회는 행정조직인 동사무소로 탈바꿈되었지만 일본에서 죠나이카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행정을 보조하는 주민기구이지 행정기구가 아니다.
즉, 일본의 죠나이카이는 식민지 시기 동회의 이중적 성격을 현재까지도 중요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자치와 행정의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 동회가 완전한 행정기구인 동사무소로 변화된 데는 해방직후 정치 상황과 새로 수립되는 국가의 성격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
식민지적 전통에서 기인하는 현재의 현상들은 그 식민지적 기원으로부터 직접 유래한다고 볼 수 없으며 해방이후 국가수립 과정에서 한국적 혹은 현대적 특질들을 획득한 것이라는 점은 중요한 문제이다. 동회의 동사무소로의 전환과정은 해방직후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해방정국에서의 좌우의 정치적 대립과 지역사회에서 주민들의 자치제에 대한 옹호와 동회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서울시 즉 미군정 및 대한민국 정부 사이의 정치적 충돌이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경합했던 정치주체는 기존 연구의 틀을 이용한다면 좌익, 우익, 국가로 삼분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 정치세력의 관계이다. 처음에 이 조직을 주도한 것은 좌익이었으며, 다음은 우익이었고, 그 다음은 국가였다. 국가가 동회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방식은 동회를 주민자치조직이 아니라 행정기구인 동사무소로 바꾸는 것이다.
동회의 자치성을 거세하려는 국가의 움직임에 대해 좌익과 우익 모두 반발하였던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직후 사회운동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만이 아니라 주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과 이를 해체하여 최 말단까지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시도가 또 하나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부는 동회를 매개로 하여 주민사회에 대한 지역엘리트들의 영향력을 봉쇄하고 주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1949년 지방자치법에서 자치기구인 동회의 폐지와 동사무소 설치를 규정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 (ⓒ 4.19혁명 기념도서관)
이 규정은 예산문제로 유보되었다가 한국전쟁이 종결된 1955년에야 동사무소의 설치조례를 통해 시행된다. 이로써 자치조직이자 행정조직이라는 이원성을 가진 동회는 완전한 국가기구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의 끝은 아니다. 전쟁이 종결되고 불가 7년 만에 발발한 도시봉기인 4월 항쟁은 도시 주민사회의 역동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1990년대 동사무소폐지론의 대두와 동사무소가 실질적으로 주민자치센터로서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볼 때 도시에서 동(洞)이라는 공간이 주민자치의 공간으로서의 속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 필진 : 김영미 / 등록일 : 2009-11-07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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