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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탕평정치와 21세기 대한민국

Gijuzzang Dream 2009. 12. 21. 20:34

  

 

 

 

 정조의 탕평 정치와 21세기 대한민국


 

 

 

 


  이경구 (중세사 2분과)

 

 

 

성군(聖君)을 지향했던 정조마저도 영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척신에게 기대게 되는 동일한 전철을 밟았던 것을 보면, 국왕조차도 거역할 수 없었던 시대 흐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흐름 중 하나가 필자의 견해로는 서울 집중 즉 ‘경향분기(京鄕分岐)’이다. 경향분기는 서울과 지방의 학파 분기에서 비롯한 말이지만 서울 사족과 지방 사족의 갈림 즉 서울 중심 특권 세력의 대두와 지방의 소외를 포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 서울의 성장은 괄목할 만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전후(戰後)의 상처가 아물면서 인구, 공간, 행정 체계가 증대하고 또 복잡해졌다. 생산력이 회복되고, 물화가 풍부해지고, 상업이 발달하고. 총체적으로 보면 긴장이 이완되고 사회의 활력이 자라났다. 활력과 문물 융성을 이끈 주역이자 그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는 이들은 서울의 사대부와 그 주변의 계층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의 성장과 긍정적 여파의 이면에는 조선 사회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현상 또한 자라고 있었다. 서울 중심의 명가(名家)가 형성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익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혼인, 교육, 과거 급제, 관직 진출 등을 통해 차츰차츰 그리고 구조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에서 많이 지적했듯이 과거와 관직 진출에 관한 통계에선 집중화 경향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요직에서 밀려났거나 진출이 차단된 당대 지식인의 저술에선 비애와 원망을 느낄 수 있다. 힘있는 요직을 특정 지역, 가문의 사람들이 독식하면 그들을 중심으로 이익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 또한 필연적 수순이었다.

 

그들 외곽에 서리, 역관과 같은 중인층이 포진하고 그들은 특정 상인과 결탁하고 늘어난 사회의 재부를 공유하였다. 물론 그 고리는 매우 은밀하여서 사회 문제를 야기할 때만 종종 드러났다.

 

필자는 18세기의 그 같은 경향, 그리고 그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에 대한 고찰이 지금 대한민국의 앞날을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회의 중요한 관습과 제도들, 문화 등의 영역에서도 좀 더 성숙한 사회로 차츰차츰 진전하긴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흐름을 기본적으로 낙관하긴 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전망을 어둡게 하는 흐름을 하나 들라하면 필자는 두말 없이 서울 특히 강남 중심화의 경향을 들겠다. 

물론 이 때의 ‘서울’은 공간을 넘어 계층과 재화의 고착화 경향을 함의한다.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몇몇 직업들에서 21세기판 벌(閥)이 형성되고, 토지와 주택, 교육, 의료와 같은 공공 영역에서 공공성과 사유성을 둘러싼 가치 충돌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새로운 특권층의 형성과 그 대물림이 고착화하는 사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공정한 기회 균등의 사회적 기제에 바탕하여 빈부, 지역 등으로 나뉘는 다양한 집단이 고루 어울리고 소통하는 사회로 갈 것인가.

 

영조와 정조는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는 있었다고 보인다.

지방의 한미한 선비를 등용하려 무던히 노력하였고 백성과 소통했던 장면은 확실히 이전 국왕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넓게 보면 서울 특권화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명백하다.

 


<그림 1> 국보 제153호 일성록(日省綠)

:  영조 36년(1760) 1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일기이다.

(출처: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척신에 기대고 백성을 피치자로 보지 않았던 한계 또한 명확한 것이다. 그런 구조에 대한 전복을 포함하는 개혁은 정조가 아무리 노력했다해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결국 정조의 개혁 정치를 평가하려면 그의 지난한 노력이나 문화 방면에서 이룬 성과와는 별개로, 사회가 전체적으로 나아가는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하겠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은 정조의 개인적인 면모에 매료되긴 한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 근면과 노력, 백성의 삶에 대한 염려는 자못 비감하기조차하다. 그런 면모를 십분 인정하더라도 시대의 동향과 같은 거시적 문제에서 오히려 우리는 정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듯하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 우리가 정조를 개혁 군주로 고정시키고, 지금의 개혁 과제를 그에게 투사해서 뭔가 극적인 개혁을 바라는 것은 너무 편한 길이지 않을까 쉽다. 지금도 심심찮게 나오는 정조 관련 기사를 보면, 보수 신문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비교적 진보적인 신문조차 정조의 개혁 정치가 보수 세력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개혁 정치가 음험한 보수 세력에 의해 좌절되는 이미지의 형성인 셈이다.

 


<그림 2> 정조대왕상(출처: 문화재청 http://www.cha.go.kr/)

 

개혁을 바란다해서 편리한 역사 해석을 덥석 물 수는 없다. 역사는 쉬운 결론 대신에 반성과 성찰의 부재에 기반한 개혁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그 과정을 보며 현재의 전망을 이끌어내는 것은 엄연한 우리의 몫이다.

 

따라서 정조의 개혁과 그 좌절에서 배우는 교훈은 사회 구조의 변화와 그 기저를 이루는 많은 영역과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자, 변화는 오직 풀뿌리같은 많은 이들에 기반할 때만이 지속적이라는 평범한 진리의 확인일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2009년 5월 17일 웹진의 글 <소설 『영원한 제국』, 정조가 꿈꾸던 세상과 개혁 사상>의 후속 글입니다.)

 

 

- 필진 : 이경구/ 등록일 : 2009-10-20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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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영원한 제국>, 정조가 꿈꾸던 세상과 개혁사상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