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기부’를 통해서 주민의 공동체의식을 본다
한상구(근대사 분과)
1. 우리나라는 기부문화가 매우 취약하다고 한다. 소액기부, 공익을 위한 기부, 기부의 생활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기부는 대체로 불행한 사람이나 재해를 입은 사람을 돕는 자선의 성격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익을 위한 기부는 대학교 등에 재력이 있는 사람이 거액을 희사하는 정도에서 좀처럼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역 주민이나 시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단위의 공공적 사업이 많지 않다 보니 그에 대한 자발적인 자금의 조성방법인 기부도 널리 행해지지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 사회의 취약한 기부문화는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었을까. 눈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천만 뜻밖에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찌보면 가장 건강하고 활발한 기부문화가 꽃피었던 시기는 바로 우리 민족이 가장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겹고 암울했던 일제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제시기 동아일보만 살펴보았을 때 각급 지역관련 각종 기사는 사건 사고기사까지 포함하여 대략 20만여 건으로 추산되는데 거기에서 기부, 의연, 자선에 관한 기사는 1만여 건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역기사 20건 중에 하나는 지역주민들이 돈을 염출하고 그것으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920년부터 1940년까지 2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평균 2건정도의 기부관련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2. 그렇다면 그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지역주민의 기부는 어떤 성격의 것들이었을까. 그리고 누가 그리 기부들을 하는 걸까. 돈 많은 지주나 재력가들이 춘궁기에 밥먹기가 어려운 불쌍한 마을사람들에게 쌀가마를 풀어주는 식의, 자선의 의미가 강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을까.
동아일보 기사에서 일정정도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독지의 성격이 강한 기사들 3000여 건만을 분석해보면, 빈민들,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는 경우는 1000여 건 정도이다. 이것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선이나 시혜의 성격을 지닌 기부가 이들 개별적인 개인적 독지에서조차 가장 주된 부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공익적 성격의 사업이나 시설, 활동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략히 살펴보자면 이들 3000여 건의 약 반수는 각종 교육기관의 설립이나 유지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 500여건은 청년회와 같은 각종 지역의 사회단체의 회관건립이나 운영자산에 대한 기부이거나 지역의 공회당, 고아원, 유치원, 도서관의 건축, 교량이나 도로의 수축을 위한 것들이다.
이와 같이 재력있는 사람들의 개인 독지에서조차 그 공익적 성격은 뚜렷한데, 이것은 곧 일제시기에 각급의 지역들이 지역주민이 주체가 된 각종의 공익사업과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의 직접적인 반영인 것이다.
3. 지역 청년회의 발족, 도로설치기성회의 개최, 동리 야학이나 보통학교설치기성회의 출범등이 있는 날은 어쩌면 지역의 큰 축제의 날이었다. 조직의 취지를 모인 청중들 앞에서 설명하고 조직의 임원을 선거하여 조직활동의 개시를 선포하면 내빈들의 축사나 초청자의 강연이 이어지고 식이 끝나면 여흥의 자리가 베풀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의연(義捐) 곧 그 조직을 위한 기부의 ‘답지’였다. 몇백원부터 시작해서 ‘이하 략’ 앞의 1원에 이르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2~300명에 달하는 기부자들의 명단은 지역의 공익적 활동 곧곧에서, 거의 양식적 행위로 보일 정도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몇백원을 낸 사람들이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그 1원씩 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보통면의 호수는 대략 평균 1~2000호인데 예를 들어 작은 동리 야학의 출범과 발전을 위하여 돈을 낸 사람 200여명은 해당 면 전체로 보아도 다섯 집에 하나이거나 열 집에 하나이어야 하는데, 이 숫자는 소작농과 자소작 겸영농이 농가 호수 전체의 약 70~80%임을 감안하면 자작 이상 또 상공업 글 기타 호수 전체가 참여해야 하고도 넘치는 호수인 것이다. 여기에서 지역의 공익적 기부에는 경제적으로 유족한 계층에 대체로 한정될 것이라는 단정을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교적 재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위의 3000여 건 기부기사의 기부자 3600여명에서조차 일정한 재력이 예상되는 회사의 임원, 상점의 주인, 면협의원, 각종 단체의 임원의 경력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사람들이 60% 정도에 이른다. 이들이 모두 재력이 약한 층으로 볼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지역의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역의 공공적 사업와 활동 즉 학교를 세우고 지역단체를 운영하고 공공시설의 설치와 유지는 지속적으로 재원이 동원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몇몇 지주나 자산가의 재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수의 주민들이 푼푼이 돈을 모으는 것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소액기부의 일상화인 것이다.
공립보통학교 하나를 세우는 데도 부지와 교사, 기본재산 등 적게는 1만여 원에서 많게는 10여만 원 정도를 지역주민이 미리 만들어놓아야만 했다. 동리에 야학 하나를 제대로 운영하려 하여도 연 경비는 1000여원을 훌쩍 넘는다.
면이나 리의 평균 호구수로 나누면 1호당 5원에서 10원의 부담이 된다. 1920년대 중반 보통면의 1년 세입세출이 6~7000원이고 1930년대 소작농의 1년 총수입이 3~400원이고 자작농도 500원 전후임을 생각하다면 이것은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다. 더욱이 이런 건이 1년에 1건만 있는 것이 아님에랴!
4. 지역주민의 공공적 기부는 그것이 자발적이고 희생(!)적인 정도에 비례하여 지역사회 속의 주민 결합도, 사회적 참여도, 활동의 주체성을 크게 하고 넓게 한다. 기부가 필요한 곳, 사항, 활동에 대한 공유, 기부금을 모으고 투여하는 전과정에서의 조직, 기부로 이루어진 활동과 단체, 학교의 운영에 대한 주시와 참여 등은 모두 지역사회 주민 주체성의 생생한 활성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지역 주민의 주체성은 다만 리-면-군의 단위에서만 작동하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공성 활동이나 행위가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지고 있는 최대의 지점까지 확대될 가능성을 상시적이고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부에서도 전국적 단위의 기부가 일어나는 것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실상 대학설립을 기부금을 모으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이것은 서울의 몇몇 명사들의 민족주의적 호소로만 이루어진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다른 측면 즉, 군단위로 주민들이 기부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 동원하고 조직하는 활동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지역의 주민 활성도가 전국적 이슈와 만나고 결합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 주민대회 사례 예시
--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부 동아 19341116 (5)5 삼백구십명의 호세를 대납, 철원군 신서면 李元根 李鎭學양씨가 金柄裕씨 미거 빈민에 무이자로 곡물 대출(通川) 구장급료로 궁민을 구제 정선군 임계면 용산리 구장 金聖達씨 기근민에 동정 백미와 정조를 희사, 진위군하 李康憲씨 미거(平澤) 빈민 육십오명에 식량을 분급 경주 金秉鎔씨 미거 극빈자무료치료; 나주 姜奇卿여의 회갑연을 폐지하고 육백호의 세금대납 장성군 진원면 金冕奎씨의 미거 재민(災民)에 기부, 현금 오백원을 평양 金仁貞 여사가 소작료면제 고원 양 김씨가 ; 상산면 金容秀 金思彬 양씨의 독지
-- 단체에 대한 기부 회관을 기부, 金鍾遠氏 송북청년회에(開城) 북면 식포리 송북청년회는 회관이 없어... 동면 현리에서 상업을 경영하는 이종원씨가 이를 민망히 생각하여 자기 소유 전 숭면의숙 교사를 동회에 기부. 鄭載華氏, 진주청년회관 건축기금 이천원을 기부(晋州) 이십원기부, 송녕섭氏가 노동단체회관신축에(全州) 사백원을 기부, 순창청년동맹에 김영무씨가 회갑연 폐지하고 각 단체에 희사 安城 兪鎭英씨 미거 全錫泳氏 특지, 장련구락부에 운동장 용지를 기부 구기(救饑) 면민대회, 오백원을 모집하야 사백호균분(江景)//본적지에 동정 재경 金英基氏
팔순기념으로 교량을 가설, 시흥군 군자면의 李明奎씨 모친 辛敬孝氏 특지, 병원부지기부(竹山) 광혜원공회당 신축제공, 尹圭勳씨 孫致珏씨 기부로 양덕운동장 실현 지방발전에 가일편 申元寶氏 토지기부, 귀비포 전새(塡塞)공사에(永興) 金大男氏의 양로당건축, 이천원을 기부(元山) 삽교시장정리와 도로비에 천원 기부 예산군 삽교면 金昌秀氏가
빈궁민의 세금 천오백원 대납, 그의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울산 이근수씨 미거 (지국-1926, 면협의원-1939) 동아 19380528 조(4)1 교육기관 신설에 삼만여원 혜척 蔚山 李根守씨 쾌거(하동) 동아 19400313 (남7)10 주재소 신축비를 자진해 기부 蔚山 李根守씨 특지 동아 19281113 (4)1 수확은 반감인데 소작료는 불변, 全收의 7, 8할을 납부하라고 작인은 면의 중재 고대(함양) 남원 운봉면 동천리 박희옥...(민립대운동, 경제인, 도평의원-1924, 중추원참의-1933) 동아 19230126 (4)3 朴禧沃씨의 미거, 운봉녀자의숙의 기금을 위해 1만원 기부(全州) 동아 19290127 (4)2 사회기관에 천여원 기부, 남원 박희옥씨가 남원 제1 부호. 입선공보교 100원 인월공보교 200원 산내공보교 200원 운봉소방조 200원 입선근농회 200원 동아 19330926 (3)6 남원농잠교에 만원을 기부, 농잠학교의 실현은 미구에 운봉 박희옥씨 특지
영산 면민대회, 학교 설립 토의(羅州) --면장 이규봉 사회, 500명 운집. 해면은 나주에서 으뜸되는 포구일 뿐 아니라 8천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곳으로써 아직 보교 하나 설립 안 된 것을 유감으로 사(思)한 인사들은 열성을 다하여 도당국에 교섭. 다행 작년 3월에 인가 득하였으나 해면은 빈면이므로 설립 경비를 용이히 얻을 곳이 없어서 각호에 부담금을 정하여 수금하게 되어 작년 9월중에는 개교할 예정이었으나 해면 부호 하담 부자(父子)의 부담금 600여원을 내지 아니하므로 인하여 공사착수에 연기가 되어 아직까지 개교 못함. 그를 여러번 권유하였으나 종시 듣지 아니하므로 수차 성토회까지 열었던바 금년 3월경에 해 면민 6, 700명이 군집하여 금수(禽獸)와 같은 하가의 금전이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하며 자진하여 연출한 금액이 800여원에 달하였으므로 공사 착수 금년 10월 중순 개교할 터이므로 그에 대한 모든 점을 토의코자 하여 면민회를 열게 되었던바 양심에 찔린 하가 부자는 해회 석상에 참석하여 자기의 잘못한 점을 일일이 들어 사과한 후 해교에 1,000원을 연출하겠다는 승락을 쾌히 하였으므로 해회에서는 그 지은바 죄를 사하여 주었다 하며 10월 중순에 개교할 터이라고.
▶ 吳相喆씨 교육열, 노동야학을 창립(三嘉) --합천군 가회면 덕림리 오상철씨는 소작인으로 빈궁한 생활을 하면서 당지 노동자의 교육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기어 1923년 1월분에 당지 유지 허용한 김인석 양씨에게 동의를 청하여 즉시 삼씨의 주최로 가회면 덕림노동 야학을 발기... 오씨는 금융곤박을 불고하고 건축비 급 도서비 등 220원을 선대하여 전기 야학을 창립하고 활동한 결과 찬조가 330원에 지하며 학원이 200명에 달하는바 지방인사는 오씨의 교육열과 자선심에 대하여 송덕이 자자하다고. 동아 19351218 (7)4 ▶ 암야(暗夜)에 봉화, 고금(雇金) 칠십원 제공 노동야학 설치, 자기도 매야(每夜) 배우러 다녀, 문맹에 우는 독지(篤志) 청년(平澤) --일개 노동자로서 품판 새경돈 70원을 가지고 동리의 노동 야학을 설치하고 자기도 저녁마다 글을 배우는 보기드문 모범적 노동자가 있다. 평택면 합정리 최태경씨 집에서 고용살이 하는 양석철(26)군으로 군은 술과 담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동리 머슴 중에도 근실하고 명망이 높던 머슴으로 1년 4개월간의 고용임금 70원을 받아 가지고 140여 호나 되는 동리로서 배움의 기관이 없는데 느낀바 있어 야학당 설치비로 제공하였다 한다. 동아 19300221 (3)7 ▶ 피땀으로 저축한 사백여원 기부 노조해체, 선천 기청(基靑)에 기부, 이 돈을 기본사업으로 확대, 기청회장 담 --어떤 노동자 4명이 돈 432원을 가지고 선천기독교청년회를 찾아와서 동회에 기부를 하고 돌아간 사실이 있다. 장윤근 외 몇사람의 발기로 70여명 노동자를 모아 노동조합을 조직 상호부조... 푼푼이 모아 400여원... 그런데 노동자라는 것이 한곳에 오래 있지 못하는 처지라 5, 6년간 사방으로 흩어진 조합원이 많아지게 되므로 선천읍 이덕규씨 목공장에서 총회를 열고 조합 총재산 400여 원을 선천에서 사회사업으로 제일 유공하고 특히 무산교육에 힘쓰는 선천기독교청년회에 기부하여 동회의 기본적립금에 편입케 하기로 일치 가결한 후 대표자 장윤근 김성지 오기갑 박중채 선정 파송한 것...
▶ 염암강습회 설립 --영암군은 3면 1교는 고사하고 11개면에 3개소. 1개소는 사영이므로 실상 6면 1교. 금춘 읍내 보교입학상황은 지원자 약 300명 중 남녀 합 60명만 선발. 나머지 200여명은 필경 취학처가 무(無)하여 함루방황(含淚彷徨)케 되었다. 이를 도(睹)한 유지부로(有志父老) 제씨는 그 자제의 구제책을 강구한 결과 학술강습회를 설립하고 그 연령에 달한 아동에게 ... 회원은 특별 통상 양종으로 분하여 특별회원은 일시 의연금 1원 이상 출금자로 통상회원은 업무를 집행키 위하여 좌와 여회 임원을 선정 회장 김주우 부회장 하태숙 서무부장 김돈재 재부부장 하대두 의사부장 박평삼 사교부장 차주경 학감조방인 조극환 찬무원 기타이며... 의연자 방명... 금400원 낭산농사조합, 금200원 대삼색계, 금10원씩 ?성사 사포계, 금2원 천도교구, 금300원 하대두, 금200원 김주우, 금105원 김준원, 금100원 하태숙, 김이재, 김종규, 금60원 김룡선, 금50원씩 이원우, 이문화, 금30원씩 조화일, 이상운, 박용삼, 금25원 조병은, 금20원 진창호, 김상연, 김자삼, 천옥주, 김상선, 금10원씩 김문사, 조병호, 신인경, 김동재, 최필균, 김윤필, 김준승, 조윤환, 정석채, 박군일, 조숙환, 이태중, 강봉성, 강정구, 박채린, 금 5원씩 김신재 박경완 (이하략)
▶ 東村公普設置 五月一日 開校 --황해 곡산군 동촌면 동면장 이승욱 비롯 일반 면민 열성으로 수년전부터 ....교사건축비중 4,000원은 기부금, 1,185원은 국고 , 2,071원은 지방비보조이며 744원은 동군 학교비 지출이라더라.
▶ 사리원 인사 교육열, 사리원 덕성학교를 위해 의연--의연자 명단 수백명 동아 19220617 (4)3 ▶ 진잠면 인사의 미거, 학교를 위해 기본재산조성결의회 조직(大田) --대전군 진잠면에서는 년래 숙안이던 동학교기본재산조성결의를 일전 면내 유지 200여명이 동면사무소에 회집 결의한바 재산조성회를 조직하고 규약을 설하여 앞으로 5년간 각자 춘맥추조 각 5승씩을 모아 이것으로 1면1교제 실시를 할 시에는 동교 재원으로 제공하겠다는 데 회장은 면장인 송일호 추대하였고 기외 학교장 5인을 고문으로 하였다더라. 동아 19231011 (4)7 ▶ 춘천 동명학관 유망 --동내면 석사리 동명학관은 동내면장 박규철씨와 면내 유지의 진력으로 설립 성적 양호 800여호에서 매호에 정조 2두씩을 의연하여 동학관의 경비로 충용케 한다더라. 동아 19221208 (4)4 ▶ 북청 동명학교 설립계획 --북청군 평산면 용전리는 300여호의 가옥과 1,500여명의 인구......모신척구(慕新斥舊)의 사상 점증... 발분 열심... 초등교 경영코자 협의 결과 이구동성으로 학교설립 결의 쟁선(爭先) 기부금 1만 4, 5천원의 거금에 달하여.... 동아 19231215 (3)5 ▶ 의성숙 동정금(信川) --신천군 북부면 사호리 의성숙은 창설 이래 4개 성상... 원래 적립금이 부족 유지곤란.... 동교 졸업생 일동은 자기모교의 현상을 대안의 화로 사키는 난하다 하여 동교장 정규황 외 직원 일동의 후원하에 린근 10여소로 순회극연을 하였는데 일반유지의 동정금이 불소한 중 씨명은 여좌. 서호리 61인에게서 조 25석반 금 8언, 석당리 66인에게서 조 13석반 금 38원 50석, 구동리... 토성리... 승도리... 언내동... 조촌동... 용정촌... 신흥동... 남천리... 합계 조 79석 반 금 79원 동아 19270626 (4)6 ▶ 재단법인으로 선린회(善隣會) 창립, 구제사업목적(利川)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와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서는 유지 이민흥 심규택 외 수시의 발기로 구제사업을 목적으로 선린회가 세상에 탄생 4년 동안 40명 회원 700원... 회금을 가지고 남모르게 인근 3면에 제반 구제에 노력하여 오던중 일층 확대 위해 재단법인... 기본재산 적립 위한 기부한 인사 명단 (다수) 동아 19301111 (7)9 ▶ 비운의 학원에 물질동정 답지, 진흥소년회 경영 학원(烏山) --진위군 북면 봉남리에 있는 진흥소년회에서 지금부터 3년전 당지 무산아동의 ... 석유 1통 부성부인회 금릉학원 1원 50전 금릉학원 직원일동 1원씩 김진각 김영준 ...조선불교회 진위지회 길진갑 15원 30전 백미 2두 1승 정조 1두 임성준 외 69인 동아 19380112 朝(南7)7 ▶ 통영 화양강습소 보교 승격을 운동 기금 천원을 토대로 --통영군 산양면 신전리 화양강습소는 거금 15년전 동면내 미남리 연화리 삼덕리 곤리 남평리 영운리 신전리 저촌리 연곡리 9개리 일대 주민들이 적성(赤誠)을 다하여 동강습소를 창설하고 이래 1천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었고.... 동아 19400422 (2)3 ▶ 65만원 재단 확립 어랑중학을 설립 작일에 인가, 오월초 생도모집 경성 명천 4면민의 적성(赤誠) 결실, 제전(祭田)들을 합하여 오늘에 민립중학설립 기성회장 차영순 담 --경성군 어랑면이 중심이 되어 주남 주북면과 명천군 동면이 합심하여 65만원의 재단법인 어랑학원을 세워 이래 활동중 작 20일 어랑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는 희소식이 있다. 오늘에 어랑중학교가 설립되기까지 재단법인 어랑학원 기성회를 소화 14년 4월 30일 창립하고 이래 기성회회장 차영순 이사 정기환 양씨를 비록하여 유력한 30여 가문 318종파 1300여 관계자로부터 祭田을 기부하는 등 실로 눈물겨운 교육열과 열렬한 활동으로 이래 65만원이라는 거대한 재단을 확립하여 오늘의 빛나는 어랑중학교를 북조선에 뚜렷이 설립하게 되었다. .... 이제 동교의 토지재산과 다액 기부한 이의 방명은 다음과 같다. 토지면적 27만여평(평가 30만7천여원) 임야면작 54정보 봉강소비조합재산 4만3천원 가교사 3만5천원 현금 25만원 / 기부자 방명-현창건 최지환 이옥녀 각 5만원 박경재 4만원 한원석 2만원 차영순 양학룡 이철원 안영근 1만원 ...
지방학림 존폐문제로 안동에서 면민대회 --지방학림은 의성 고운사 경영, 설립당시 안동 면민이 1천원 보조, 이후 경영 어려움으로 폐문될 것인가, 주소지인 의성군민의 경영으로 될 것인가... 면민대회 결의 1.지방학림은 안동면민(일본인은 除)과 의성 고운사와 공동경영... 시대 무02(03) 19250121 戶別割로 유지, 고운사 지방 학림 중외 19271130 (2)7 생도는 굶고 교원은 절식, 학교문을 닫게 되어서, 학교측과 사찰측의 분규, 안동보광학교사건 / 생도대표 80명 고운사에 쇄도 진정 그러나 사찰의 태도 냉정 / 안동면 교주측 긴급총회 생명을 구하고자 위원 파견 --불교측 유지금 거절로 교원일동 동맹사표
동아 19380919 (2)5 ▶ 연변 군민대회 열고 全理事의 사임 요구 각 이사와 요로에 진정서제출 숭덕학교 분규진상(本社特派員 李昊濟) 결의문 : 1. 이사는 모두 무자격자이므로 전원이 인책 사임할 것 1. 재단법인 정관 제10조 24조 단서 제26조는 재단의 기본정신에 배치되므로 이를 개정할 것 가. 이사 급 감사를 선거기관을 이사회 외의 별기관으로 정할 것 나. 학교장을 기독교인으로 한다는 규정을 개정할 것 다. 만일 동교 재단이 해산되는 경우에는 그 재산 전부를 감리교회의 재산으로 한다는 규정을 개정할 것 敎會와 郡民對立 理事配定에 郡民側不滿 -- 30년 전에 선교사가 시작한 학교를 1923년에 군민이 궐기하여 16,000원의 기부금을 모집하여 현재 신교사를 건축하고 설비를 확충하여 동교 경영자인 선교사에게 장차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을 시켜주기를 희망하고 또 선교사측에서는 이를 노력하기로 선언한바 있다. 대공황에 선교회의 지원이 끊기고... 그러자 감리교와 군민유지들은 분기하여 이사 15인을 선정하고 각 이사는 학교경영을 위하여 매년 30원 이상의 의무적으로 지출하도록 되어 년 4, 500원의 경비를 충당하여 약 2년간 유지 중 전기 각 위원들의 의무금 갹출이 불성실하게 되고 말아 .... 교직원의 감봉 등 근근 연명. 1934년 김창현의 30만원 대금희사를 받고 최경일 홍재경 노진박 등의 발분 노력으로 원만한 수속을 완료하게 되었으며 전기 30만원 희사금은 우선 감리교회재단으로 들어갔던 것을 숭덕학교재단법인을 조직하면서 감리교에서 빼내와 다른 학교재산과 합하여 40만원 재단을 1937년에 비로소 완성... 이때 정관을 개정하면서...... 또 동교 40만원의 전재산이 영변군민의 손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측에서 전단함은 지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단정되어 축성기성회에서는 얼마 전부터 현 이사 전부를 배격코자 각방으로 분주하던 나머지 금번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별항 보도와 같은 결의안을 채택성명하고 요로당국에 진정을 하며 현 이사 8명에게 결의문을 발송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동아 19270302 (4)7 ▶「우리의 교육기관을 남에게 의뢰함은 치욕」공립 만들겟다는 군수의 말에 사립 輔仁校 부형 반대 내것은 내힘으로, 학부형의 결의 --논산 구자곡면 금곡리에 있는 사립보인학교는 1917년 3월에 금곡일대의 수삼 촌락의 모범서제로 차설하여 당지 유지 김원성 외 10여인의 협력으로 경영하던바 시대의 진운에 따라 당지 독지 윤길중씨가 선각하여 경비를 자담하고 1920년도에 학교인가까지 얻은 후 이래 다대한 경비로써 완전한 교육을 하여왔으나 필경에는 교사의 협착을 감케 되어 거금 3년 전에 7,000여원의 거재로 4학급의 교실을 증축하고 매년 5,500원의 경비로 유지하여 오던바 돌연히 군당국에서 지난 2월 5일. 설립자 겸 교장 윤길중씨를 청하여 보인학교를 군에서 인수하여 공립으로 경영하는 동시에 현재 학교 위치는 면세상 중앙지가 되지 아니 하며 군계로 보아도 변경이 되니 현재 금곡에서 약 1리 거리 되는 동면 야림리 근처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문한 사가 있었는데 윤씨는 자기 개인의 의사보다도 학부형의 의향을 들어 보아야 하겠으며 따라서 학교위치를 변경한다고 하는 것은 부지(不知)이나 해교를 공립한다는 것은 지방의 치욕이라 하여 힘있는 데까지 노력하기로 하고 1년 총예산 경상비 5,500원을 반부하여 설립자 급 학부형이 부담키로 하고 학교조합 같은 제도하에 안전하게 조직한 후로 충실회 경영하여갈 수가 있다는 결속을 하고 위원 박동내 김원성 윤지병 김원국 ...직접 설립자 윤길중 방문하고 군당국에 학부형의 결의됨을 발표케 하며 또다시 학부형회 개최
-- 순회 기부 모금과 기부 모금을 위한 행사 ▶ 龍仁 慕賢義塾에 同情(公州) --용인 모현의숙은 경비를 보충키 위하여 전조선을 순회 활동 사진대를 조직하여 순회하던바 일행은 지난 25일에 공주에 도착 당지 공주청년회급 본보 지국 이 각 단체 후원으로 활동사진을 영사하였다는바 매야에 만장의 성황을 이루어 동정금도 다수 동아 19251015 (5)4 ▶ 대동학원에 동정 --인력거차부의 교육기관인 대동학원유지회 주최의 조선고악연주회는 대성황으로 마치었다. 다음과 같은 여러 유지의 동정이 있었다더라. 기부자 명단 동아 19271110 (2)10 ▶ 대동학원 신축기념, 고악(古樂)과 명창 연주, 대동학원 유지회 주최로 동아 19280309 (2)9 ▶ 대동학원 확장, 고창한씨 십만원 기부, 근래 드물게 보는 독지가, 제일착으로 교사신축 동아 19280317 (2)1 ▶ 적성(赤誠)의 향연, 감격에 겨운 주빈 인력거군과 기생 등 백여 명이 모여 근래에 처음 보는 감격 넘치는 모임
- 필진 : 한상구/ 등록일 : 2009-10-27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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