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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萬人疏) - 영남 남인의 꿈, 삶, 그리고 좌절

Gijuzzang Dream 2009. 12. 21. 20:57

 

 

 

 

 

 만인소(萬人疏)

 영남 남인의 꿈, 삶 그리고 좌절


 

 

 


 

이 욱(중세사 2분과)

 

 

1. 영남 남인의 꿈 - 만인소(萬人疏)

 

선비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기 위해 집단상소인 유소를 올렸고, 그것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은 만인소였다. 만인소는 말 그대로 만 명의 선비가 서명하여 올린 상소를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만인소를 보면, 그 길이가 95M에 달할 정도이다. 이러한 만인소가 올라가게 된 것은 역시 영남남인들의 정치적 실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림 1> 만인소(@이욱)

 

서인과 남인의 경쟁은 현종, 숙종 연간의 예송을 거치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특히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영남 남인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특히 갈암 이현일의 정치적 패배는 영남 남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689년(숙종 15),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영남유림을 대표한 이현일은 산림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는 이황에서 김성일로 연결되는 퇴계학통을 계승하였고, 정구와 장현광 이후 영남유림을 규합하여 갈암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현일은 근기남인과 결합하여 영남남인의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허적과 윤휴 등 경신환국 때 죽은 남인의 신원, 노론 핵심 인물에 대한 처벌, 김성일의 시호 개정 등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는 민비 폐출이 논의될 때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하고,  ‘중전으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스스로 하늘을 끊었다’ 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림 2> 이현일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영덕충효당(출처: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이 때문에 이후 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광해군때의 폐모론자와 동일선상에서 의리죄인의 취급을 받았다. 그는 윤휴와 함께 노론정권으로부터 가장 철저히 박해를 받았다.

 

거기에 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은 가뜩이나 정치적으로 취약해진 영남 남인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무신란은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소론과 남인의 명문가 자제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물론 모든 영남 남인들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조연간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고 중앙정계로의 복귀가 요원해져버린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그들은 중앙정계에 복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품게 되었다. 정조의 호의를 감지한 안동 유림이 중심이 되어 1792년 4월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만인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정조의 왕권강화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도 정치적 복권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정조대의 영남 남인은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조는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벽파에 의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영남남인은 정조의 사망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결국 정조가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200년을 격한 지금까지도 안동 유림의 뇌리에 박혀있고, 그것이 안동출신의 젊은 작가에 의해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로 형상화되었다.

 

이후에도 1855년(철종 6)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가 안동 예안의 이휘병(李彙炳)을 소수로 하여 올려졌다. 1875년(고종 12)에는 안동의 류도수(柳道洙)를 소수로 하는 만인소가 올려졌는데, 이때는 대원군의 복귀를 청원하는 상소였다. 이러한 만인소는 남인의 정계복귀를 염원하는 바가 강했다.

 


2. 만인소의 빛과 그늘

 

영남남인들이 올린 만인소를 비롯한 각종 유소의 내용과 그 경위, 그리고 이후의 전개과정을 보면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담은 유소를 올린다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였다. 예를 들어 대원군의 봉환을 청원하는 류도수의 만인소가 작성된다는 소문이 들리자, 고종의 친위세력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만약 복합상소를 단행한다면 대원군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배형을 각오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림 3> 흥선대원군 초상(출처: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이처럼 만인소를 보면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위해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개가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의병운동으로 떨쳐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또 한 켠에는 그늘도 있다. 선비는 대의와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는 기개가 있었다. 그러나 시대적인 과제를 미리 감지하고 이를 선도해가지는 못했다. 19세기말의 조선 사회는 변화의 국면에 있었고, 이에 적합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야 할 시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질서를 옹호하면서 위정척사론을 전개하였다. 국가가 망하고 나서야 새로운 논리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한 국권회복에 나섰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더 일찍 시대적 대세를 감지하고, 그에 맞게 역량을 결집시켜 대응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필진 : 이  욱/ 등록일 : 2009-11-04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4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