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과 자존의 시각에서 본 세종시대
정재훈(중세사 2분과)
무릇 문화는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끊임없이 외래문화 혹은 타문화와 교류하는 가운데 외래문화의 수입과 교섭, 갈등을 거치면서 자기문화를 반복하여 재생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 역시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었다. 외래문화의 수입이라는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조선의 문화는 크게 두 번의 변화시점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 한계를 드러낸 조선초기의 성리학 질서에 대해 사림이라는 새로운 주체는 원과 명의 성리학이 배태하였던 특징인 국가적 성격이 강하였던 점을 반성하였다. 이에 종래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양명학 등 새로운 조류에 대한 검토 끝에 주자성리학을 보다 심화하여 이해하고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로 하여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고, 특히 명의 멸망으로 청나라가 등장하면서 조선은 ‘소중화’에서 ‘조선중화’ 로까지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성리학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에는 학문적으로 내적인 반성을 하는 형태에서부터 외부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수입하려는 노력까지 포함되었다.
조선의 건국 자체가 원ㆍ명의 교체과정에서 이성계가 소속된 군벌의 모태였던 원나라와 결별하고 독립하였고, 반대로 신흥세력이었던 주원장의 명나라와 결합하는 새로운 외교노선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성계의 외교노선은 곧 당시 원ㆍ명교체기라는 국제적 변화상황에서 명으로부터 독립적인 왕가의 경영을 보장받는 새로운 상호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한 것이다. 곧 중국의 명나라와 한반도의 조선이라는 두 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관계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시대는 고려말의 혼란에 이어 조선이 건국된 지 채 한 세대, 30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맞이한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많은 성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조선 문화의 기틀을 잡았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문화를 창조한 힘은 바로 당시 보편세계였던 중국의 문명을 최대한 주체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아프리카까지 지도의 영역으로 포괄한 예는 동양에서 없었으며, 이 지도는 현재 전하는 당시의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당시 조선이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늘 ‘상호교류하였던 문명국’이라는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 바로 원나라라고 하는 몽골제국의 영향권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이라는 세계제국의 문화를 충분히 소화하였던 흔적이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이다.
- 필진 : 정재훈/ 등록일 : 2009-10-17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1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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