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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과 자존의 시각에서 본, 세종시대

Gijuzzang Dream 2009. 12. 21. 18:51

 

 

 

 

 

 개방과 자존의 시각에서 본 세종시대


 

 

 

정재훈(중세사 2분과)


 

무릇 문화는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끊임없이 외래문화 혹은 타문화와 교류하는 가운데  외래문화의 수입과 교섭, 갈등을 거치면서 자기문화를 반복하여 재생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조선의 사상과 문화 역시 이러한 과정의 반복이었다. 외래문화의 수입이라는 기준을 놓고 보았을 때 조선의 문화크게 두 번의 변화시점을 중심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시점으로 중국으로부터 성리학이 수입됨으로써 이전의 불교문화를 대체하여 본격적인 유교문화를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건국은 대륙에서 원나라에서 명나라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맞물리어 원과 명 사이에서 신흥국가였던 명나라를 조선이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여기에는 사상적으로도 주자성리학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던 고려말 조선초 지식인들의 고뇌가 배어 있었다. 
  
즉 새로운 문화와 지식체계로서 성리학은 신사상으로 들어왔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종래 문화의 큰 전환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주자성리학 관련 서적의 수입 증가, 각종 유서(類書)의 수입, 새로운 과학 기술의 도입 등의 현상은 중원에서의 주도국가 교체라는 현실 속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나타난 것이었다. 
  
이후 조선은 원나라로부터 수입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명나라의 모델을 참고하면서 조선 초 국가의 전형을 만들어갔으며, 국가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5세기 문화는 이런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 한계를 드러낸 조선초기의 성리학 질서에 대해 사림이라는 새로운 주체는 원과 명의 성리학이 배태하였던 특징인 국가적 성격이 강하였던 점을 반성하였다. 이에 종래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양명학 등 새로운 조류에 대한 검토 끝에 주자성리학을 보다 심화하여 이해하고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로 하여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되었고, 특히 명의 멸망으로 청나라가 등장하면서 조선은 ‘소중화’에서 ‘조선중화’ 로까지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의 시점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친 시기이다. 약간 넓게 잡으면 19세기 초기까지도 포함하는 시점이다. 이 시기는 고려말 조선초의 시기에 들여온 성리학이 국가와 개인을 추동해 간 동력으로서 작동하였던 힘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이다. 동시에 최고조에 이른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문화는 비판과 변화의 요구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성리학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여기에는 학문적으로 내적인 반성을 하는 형태에서부터 외부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수입하려는 노력까지 포함되었다. 
  
육경(六經) 등의 고학(古學)을 연구함으로써 주자성리학 위주의 학문에 대해 반성하며, 유학의 외연과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내적인 반성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18세기에 들어서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수입함으로써 변화의 계기를 삼으려는 노력은 외부의 계기를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세종시대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래 민본이라는 단일한 코드로 설명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조선사의 전개과정을 고려하여 왜 민본을 이데올로기로 삼았을까? 성리학과는 어떤 관련이 있으며, 이후 조선사의 전개과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음을 설명해야 한다.

 

조선의 건국 자체가 원ㆍ명의 교체과정에서 이성계가 소속된 군벌의 모태였던 원나라와 결별하고 독립하였고, 반대로 신흥세력이었던 주원장의 명나라와 결합하는 새로운 외교노선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림 1> 주원장상

 

이러한 이성계의 외교노선은 곧 당시 원ㆍ명교체기라는 국제적 변화상황에서 명으로부터 독립적인 왕가의 경영을 보장받는 새로운 상호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한 것이다. 곧 중국의 명나라와 한반도의 조선이라는 두 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관계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 2> 이성계어진
  

세종시대는 고려말의 혼란에 이어 조선이 건국된 지 채 한 세대, 30년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맞이한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많은 성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방면에서 조선 문화의 기틀을 잡았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문화를 창조한 힘은 바로 당시 보편세계였던 중국의 문명을 최대한 주체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에는 한반도와 중원의 대륙, 일본이 표현되어 있어 동아시아가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가 망라되어 있었다.

 


<그림 3>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아프리카까지 지도의 영역으로 포괄한 예는 동양에서 없었으며, 이 지도는 현재 전하는 당시의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우수한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유럽과 아프리카 등 구대륙 전체를 망라하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 조선에서 그러한 점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당시 조선이 독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늘 ‘상호교류하였던 문명국’이라는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 바로 원나라라고 하는 몽골제국의 영향권에서 아직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이라는 세계제국의 문화를 충분히 소화하였던 흔적이 이 지도에 반영된 것이다.

 

 

- 필진 : 정재훈/ 등록일 : 2009-10-17

- 한국역사연구회, 세번째 인문학강좌 제1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