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기(현대사 분과)
(1) 왜 다시 5.18을 이야기해야 하나?
역사는 어제를 통해 오늘을 비춰보고 내일을 전망한다.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5.18은 부당하고 과도하게 남용된 공권력이 국민들에게 어떤 피해와 고통을 주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이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으며, 엄격하고 준엄한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2005년 12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은 시위농민 사망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경찰의 과잉행위로 농민 두 분이 사망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시위대의 폭력 앞에 노출된 경찰의 사기와 안전을 염려하면서도 경찰에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비판에 대해,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고 했다.
위정자들은 너무 가볍고 쉽게 말한다. 국민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므로 공권력을 사용해 불법행위를 근절시키고 사회기강을 확립해야 한다고. 그렇게 사용된 공권력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며 헌법을 조롱한다.
(2) 5.18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됐나?
시계의 추를 1980년 5월 광주로 돌려보자. 전국의 대학이 시위 중단을 결정했을 때인 5월 16일 광주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횃불을 들었다. 생업에 종사해야 할 시민들이 왜 다른 일을 놔두고 위험스런 횃불을 들었을까?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1961년 5월 16일부터 시작된 박정희정권은 보릿고개를 넘게 했지만 국민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강요했다.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의 구호 속에 국민들은 최소한의 인권마저 부정당한 채 기계처럼 일해야 했다.
그 때문에 노동자 전태일은 제 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요구는 단순했다.
국민들의 희생과 요구가 있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맞지 않고 ‘국민총화’와 ‘국력배양’에 도움되지 않는다며 1972년 10월 17일 유신을 단행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라던 ‘10월 유신’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헌법’은 대통령의 무제한적인 권한만을 보장한 채 삼권분립이나 국민의 기본권 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광고사태’에서 보여지듯 언론 자유는 국가권력의 공세 아래 무너졌다.
대통령의 명령인 ‘긴급조치’가 헌법 보다 우선했고, 국민들은 국가의 일상적인 금지와 감시 및 통제 아래 살았다. 금지곡이 넘쳐났고 영화 필름이 가위질 당했고 작가들은 작품 때문에 구속당하고 현대판 ‘단발령’이 실시됐고, 국가가 치마 길이를 관리해줬다. 의로운 인사들은 개헌청원운동을 벌였다는 죄 아닌 죄로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재판받았다. 그래서 시인 양성우는 이 체제를 ‘겨울공화국’이라고 비판했다가 교단에서 쫓겨난 뒤 중앙정보부에 연행됐고 ‘노예수첩’을 발표한 뒤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함성은 각지에서 터져 나왔고, 그 때마다 박정희 정권은 국토방위에 전념해야 할 군대를 사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정권을 지키는 기구로 전락시켰다.
흔히 신군부가 처음으로 공수부대를 계엄군으로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박정희 정권이 먼저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투입했다. 계엄령으로 시작한 박정희 정권은 정권의 위기 때마다 계엄령을 선포했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항쟁’을 진압하려는 계엄령, 1972년 유신선포를 위한 계엄령 , 그리고 1979년 부마항쟁을 진압하려는 10월 18일의 계엄령이 그것이다.
1980년 다시 찾아온 봄은 4.19 직후와 같은 분위기였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민주주의를 되찾았고, 국민들은 유신독재 아래에서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했다. 그래서 그 때를 가리켜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서울의 봄’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했다. 박정희가 양성했던 신군부는 1979년 12.12쿠데타를 통해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유신독재의 연장을 계획했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실시해 국민적 요구를 무너뜨렸다. 당시 광주도 전국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부터 유신철폐와 민주회복을 외쳤으며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곤봉에 쓰러지던 시민들은 다시 일어나 계엄군에 적극 저항했다. ‘5.18항쟁’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5월 20일에는 차를 몰고 나와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저항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신들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함께 분노하고 함께 슬퍼했다. 모두 한 목소리로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했고 그들을 광주로 보낸 신군부에 규탄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으며 실패한 항쟁이 아니었다. ‘피 묻은 권력’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전두환 정권의 7년 내내 지속됐고, 그 결과물은 87년 6월항쟁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80년의 염원이자 87년의 요구였다. 이후로도 계속된 국민들의 투쟁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등 12.12와 5.18 관련자들은 재판정에 섰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국가가 주도한 과거사 청산은 한계를 남겼다. 무엇보다 반성 없는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5.18은 진상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등 많은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3) ‘화려한 휴가’와 5.18
5.18은 다른 어느 역사적 사건보다 매력적인 소재이다. 시민들의 건강함과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부당한 공권력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과 ‘공동체’의 모습이 잘 드러났기 때문이다.
‘화려한 휴가’는 국민들의 건강함과 역동성을 잘 그려냈다. 국민들이 권력자들보다 낫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또 해일처럼 밀어닥친 역사의 물결이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줬다.
좋은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역사로 밥벌이 하는 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시비를 걸어본다. 대체로 사실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띤다.
우선,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은 없었다. 이 작전명은 ‘5.18항쟁’의 진실을 알리려했던『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1985)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당시 군에서는 이러한 작전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진압작전은 ‘충정작전’이었고, 5월 27일 최후의 진압작전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 광주전남 계엄분소가 설치된 곳이 상무대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상징적인 표현이라면 상관없지만 5.18 때의 진압작전의 의미라면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의 과장도 보인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및 시민군과의 교전, 5월 27일 전남도청 앞 상황 등은 지나치게 과장됐다. 당시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는 수만의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의 퇴각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영화에서처럼 공수부대원들이 대열을 지어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면 수백의 사람들이 사망했을 상황이다.
또 영화에서처럼 기관총이 공수부대를 향해 날아와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공수부대가 그냥 있었을 리 없었다. 실제로 당시 전남대병원에 기관총이 설치됐고 이것을 두려워한 공수부대는 특공조의 투입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기관총 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수부대도 5월 21일 오후 철수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5월 27일의 상황도 과장됐다. 5월 27일 사실은 다음과 같다.
새벽 공수부대의 특공조가 광주 시내 주요 건물에 진입했고, 특공작전을 시작한 지 불과 2시간 이내에 광주 시내를 장악했다.
몇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휴가’는 5.18을 정면으로 다루고 시민들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작품이다. 적어도 국민들에게 5.18이 왜 발생했고, 시민들이 왜 무기를 들고 저항했는가를 알려줬다. 그 점만으로도 ‘화려한 휴가’는 좋은 작품이다. 게다가 관객 동원에도 성공했다.
(4) 남는 이야기
5.18은 부당한 권력, 잘못된 공권력의 남용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다. 정부는 계엄군을 동원해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짓밟았다. 계엄군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국민들의 불법행위를 과감히 진압했다. 대한민국 최정예부대였던 공수부대원들은 평소 훈련하던 대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것은 야만이며 광기였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현실의 평가와 역사의 평가가 다를 수 있다”며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가치이며 앞으로도 발전시켜야 할 가치이다. 국민의 기본권은 시대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기이자 최소한 존중돼야 할 권리이다. 그런 까닭에 기본권인 것이다.
5.18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찾기 위한 시민들의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과도하게 사용되는 공권력은 절대 선(善)일 수 없으며, 공권력은 국민들의 재산과 안녕을 지키는 최후의 물리적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자랑스럽지만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됐던 4.19와 5.18의 아픈 역사가 한국사회에 주는 준엄한 경고이자 교훈이다. |
- 필진 : 노영기/ 등록일 : 2009-06-14
-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인문학강좌 제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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