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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다 !

Gijuzzang Dream 2009. 12. 21. 18:00

 

 

 

 

 안중근(安重根),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다!


 

 

 

한성민(근대사 분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중국 동청철도(東淸鐵道)의 하얼빈(哈爾濱)역. 플랫폼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러시아군 의장대와 흥분된 기대감 속에 운집한 환영객들 앞으로 특별열차가 멈춰섰다. 왜소한 체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동양계 노신사가 만면에 웃음일 띠고 수행원들과 함께 걸어나오자, 의장대의 팡파레 보다 환영객들의 함성이 먼저 터졌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고 함성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진 1> 하얼빈역 플랫폼(@한성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일본의 최고 국가원로이자,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하는 등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사살한 것이다.

 


<사진 2> 이토 저격

 

이 사건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러시아 및 일본 관헌이 총출동하고 많은 인파가 모인 공개장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 청년이 단신으로 일본의 대정치가를 저격했다는 사건 자체도 매우 강렬한 것이었지만,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하여 관련국가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사진 3> 이토 히로부미

 

당사국인 한국과 일본에서 그 인식의 격차는 저격자와 사망자 만큼이나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끈 대정치가를 저격한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강하다.

 


<사진 4> 안중근

 

그런데 관심을 저격사건에서 그것이 끼친 영향으로 돌리면 한일 간에 묘한 공통점도 나타난다. 안중근의 이토 사살사건이 ‘한국병합’실행의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하는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평소 ‘한국병합’에 반대하고 한국에 대해 보호육성정책을 펴던 이토를 한국인이 사살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일본은 급격하게 ‘한국병합’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토가 ‘한국병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주역이었다고 반박하면서도, 이 사건은 ‘병합’의 명분을 찾던 일본에게 그 빌미를 준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진 5> 안중근과 동지들의 권총

 

당시 일본은 통감부(統監府)에 의한 한국보호통치를 일본의 문명적 시혜이며, 이를 통해 한국은 점차 문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동의 속에서 보호통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홍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1909년 7월 6일 각의(閣議)에서 ‘한국병합(韓國倂合)’을 결정하고, 그것을 무리없이 실행시키기 위해 한국 내에서는 반일세력 제거를 위한 ‘의병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외부적으로는 다른 열강(列强)들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있었다.

 

이토의 만주시찰은 만주에서 철도를 매개로 예상되는 미국과 러시아의 결합을 사전에 저지하고,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안중근이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를 사살한 것이다.


<사진 6> 단지동맹

 

이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계획하에 실행된 것이었다. 그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사살함과 동시에 재판 투쟁을 통해 일본의 허울 좋은 동양평화론의 실체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안중근은 체포된 직후 자신을 만국공법에 따라 일반 살인범으로 대우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고, 이토의 죄상 15개조로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사진 7> 여순감옥

 

하지만 ‘한국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은 이 사건의 여파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건이 부각되면 우선 한국에서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될 수 있고, 제2 제3의 안중근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그 결과 ‘의병대토벌작전’ 이래 감소추세에 있던 한국의 의병투쟁이 격화될 위험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병합’에 대한 민간의 강경 여론이 자극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일본정부가 조심스럽게 준비하던 ‘병합’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문제였다.

 

또 열강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의 한국침략 문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될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일본정부가 치밀하게 준비해 온 ‘한국병합’은 한국의 전면적인 반발이나 다른 열강의 개입으로 좌절되거나, 일본의 강경 여론에 밀려 일본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에서 민간 주도의 병합이 추진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은 안중근의 이토 사살사건의 파장이 되도록 축소되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사건의 파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안중근에 대해 불법적인 정치재판을 전개하였다. 사건 직후 한국인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수사를 받은 뒤 사건 당일(10월 26일) 일본 관헌에 넘겨졌고, 일본의 법정에서 일본법률에 의해 살인범으로 사형(死刑)을 받아 1910년 3월 26일 사망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본이 한국에 강제하여 체결한 조약마저도 위반하고, ‘사법권 독립’의 조항도 침해한 총체적인 불법재판이었다.

 


<사진 8> 안중근 면회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 한사람을 제거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정부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한국인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국내외의 한국독립운동 인식에 강렬한 영향을 준 투쟁이었다. 

 

- 필진 : 한성민/ 등록일 : 2009-06-02

-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인문학강좌 제9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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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안중근과 위인전의 안중근 : http://blog.daum.net/gijuzzang/8515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