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

Gijuzzang Dream 2009. 12. 21. 17:52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  


 

 

 

 

박은숙(근대사 분과)


 

 

갑신정변은 1884년 10월 김옥균ㆍ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9시경 시작되어

10월 19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으니,

이른바 ‘3일천하’ 세상은 46시간 정도로 이틀이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 등은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인사를 단행하였으며,

자신들의 개혁구상이 담긴 정령을 반포하기까지 하였다.

김옥균 등은 언제 철수할지 모르는 일본군의 퇴각에 대비하여

매우 신속하게 권력기반 구축 작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그들의 숨가쁜 일정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 첫날 : 보름달이 환한 10월 17일 저녁

  

▷ 우정국 만찬장, 정변의 시작

 

김옥균 등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국 개업축하 만찬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으며, 그 시각은 별궁방화가 개시된 9시경이었다.

 

우정국 만찬은 10월 17일 견평방(堅平坊: 현 종로구 견지동)에서 예정대로 저녁 7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는 우정국 총판인 홍영식을 비롯하여 김옥균ㆍ박영효 등의 정변주도세력이 참석하고 있었고,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민영익ㆍ한규직ㆍ이조연 등이 자리하였으며,

미국공사와 영국영사ㆍ청국총판 등 각 국 외교관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만찬 진행 중 별궁 방화에 실패한 소식이 전해오고 있었으며,

김옥균의 잦은 출입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진 1) 우정총국 :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로, 현재 체신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최근 발견된 기념우표를 보면 실제 우정국 자체가 개설된 것은 10월 1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도화서, 전의감이 있었다. <ⓒ최은진>

 

저녁 9시경, 만찬도 거의 끝나 다과가 나오고 있을 즈음에 ‘불이야~~’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정국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다. 민영익이 제일 먼저 나갔는데,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등은 원래 계획대로 창덕궁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 왕세자의 혼례처, 안동별궁 방화

 

원래 계획에는 연회가 진행되는 도중 8시 30분~9시경에 별궁에 방화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시도한 별궁 방화가 발각되어 순라군과 포도청 포졸들이 불을 끄는 동시에

경비순찰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별궁에 방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행동대원들은 김옥균과 연락을 취하여 별궁 옆 초가를 찾아 방화하였다.

이 때 별궁방화는 사관생도와 장사 등이 주도하였으며, 석유와 자기황을 사용하였다.

안동별궁은 1881년 왕세자의 가례를 위해 지었으며, 바로 옆에 정변을 주도한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 일본공사관에 들러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별궁 방화와 우정국에서의 4영사 처단 등 제1단계 계획이 차질을 빚자,

김옥균은 박영효ㆍ서광범과 함께 일본공사관에 들러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태도를 확인하였다.

일본측의 이상 없는 준비를 확인한 후, 이들은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김옥균ㆍ박영효 등은 창덕궁의 서쪽 문인 금호문에 도착하여 문을 열게 하고,

숙장문 안에서 김봉균 등을 보내 30분 후에 화약을 터뜨리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협양문(協陽門) 밖에 가 파수보던 무감을 밀치고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계획대로 개화당 소속 전영 소대장인 윤경완이 병정 50명을 이끌고 호위하고 있었다.

 


(사진 2) 숙장문에서 찍은 사진 : 앞쪽의 문 진선문,

진선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문이 금호문이다. 김옥균 등은 이러한 직선 코스를 따라 움직였다.

<ⓒ백선례>  

 

김옥균 등은 편전 안으로 들어가 환관 유재현(柳載賢)에게 고종을 깨우도록 종용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김옥균을 불러들였다.

이에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은 고종의 침실로 들어가 우정국의 변란을 알리고,

잠시 정전을 피해 이어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은 별 이의 없이 김옥균의 의견을 따를 생각으로 옷을 입었으나, 민비는 의심을 품고

“이 난이 청에서 나왔습니까? 일에서 나왔습니까?”라고 캐물으면서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때 밖에서 예정된 포성소리가 나자 고종과 민비는 급히 경우궁으로 행차하였다. 

 

 

▷ 방어에 유리한 고지 경우궁으로 

 

창덕궁을 나서 궁궐 밖 경우궁으로 가는 도중에 김옥균은 고종에게

“일본병을 요청해서 호위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일본군사를 요청하려면 친필칙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금문 내의 길 위에서 친필로 ‘일사래위(日使來衛)’ 4글자를 써 주었다.

<갑신일록>에는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朕)’이라는 7자였다 한다. 이때가 밤 10시였다.

 

조금 후 궁궐에서 숙직 중이었던 후영사 윤태준(尹泰駿)과 심상훈(沈相薰)이 변란의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어가가 경우궁 정전(正殿) 뜰에 이르렀을 때,

고종의 친필칙서를 받은 일본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호위에 들어갔다.

 

 

 

 

■ 이튿날 10월 18일, 이리저리 바쁜 하루

 

▷ 경우궁, 피비린내 나는 반대파 숙청과 개혁 인사 단행

 

자정 넘어 10월 18일 경우궁에 대한 경비를 정비한 후 김옥균은

행동대원들로 하여금 고종을 알현하러 오는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조연(李祖淵)ㆍ한규직(韓圭稷)ㆍ윤태준(尹泰駿)ㆍ민영목(閔泳穆)ㆍ조영하(趙寧夏)ㆍ민태호(閔台鎬)

살해되었다. 개화당 간부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 또한 처단하였다.

 

그리고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李載元)을 불러들여 협조를 구하였으며,

왕명으로 친군4군영 군사 2천여 명을 소집ㆍ동원하여 경우궁 수비를 맡겼다.

 

이어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고, 그 내용을 조보(朝報)를 통해 알렸다.

이때의 인사에서 영의정 이재원, 좌의정 홍영식, 전후영사ㆍ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서광범,

호조판서 김옥균 등으로, 전체적으로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왕실 외척과의 연대를 도모하였으며,

의정부세력과 범개화세력을 동반세력으로 설정하였다.

 


(사진 3) 체신기념관 내 홍영식의 사진 <ⓒ최은진>

 

 

그리고 새벽 4시경에 각국 공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위문하게 하였다.

경우궁에 들어온 미국공사와 영국영사는

“세계 모든 나라는 사소한 변동이 없지 않으며”라고 하면서 대체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 다시 계동궁으로, 또다시 창덕궁 관물헌으로 

 

오전 10시경에 이르러 경우궁의 남쪽에 이웃하여 있는 계동 이재원의 집으로 이어하였다.

그것은 비좁다는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민비의 요청을 배겨내지 못하여

이루어진 임시방편의 조처였다.

 

그럼에도 민비는 김옥균을 자주 불러 창덕궁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김옥균은 민비의 황궁 요구를 묵살하였지만,

고종의 부탁을 받은 일본공사는 창덕궁 환궁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이에 김옥균이 거칠게 항의하자, “수비가 한결같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장담하였다. 

 

결국 오후 5시경 고종은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겼다.

이 때 창덕궁의 경비는 전내(殿內)는 행동대원들과 사관생도들이 맡고,

중간 수위는 일본 병사가 맡았으며, 바깥 수위는 친군4영의 군사들이 맡았다.

 

밤이 늦어 창덕궁의 대궐 문을 닫으려 할 때,

청국 병영에서 선인문(宣人門, 창경궁 동남문)을 잠그지 말라는 통보가 왔다.

이에 전ㆍ후영군을 불러 요지에 주둔하게 하고, 일본군에게도 경계태세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 셋째날 : 마지막 날의 행보와 뼈아픈 퇴각 

 

▷ 개혁구상을 담은 정령(政令)의 반포

 

10월 19일 자정 무렵부터 김옥균 등은 개화당의 구체적 개혁구상을 담은 정령을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오전 10시경에 정령을 반포하였다.

이때 공포된 정령은 원래 80여 개 조항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 14개 조항만이 <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입헌군주제의 정치체제와 개화파 중심의 국가권력의 운영방안에 대한 비중이 높았으며,

국가재정의 확보와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고, 청으로부터의 독립 구상 등이 담겨 있었다.

 

 

▷ 청군의 진격과 개화당의 패퇴

 

날이 밝은 후 김옥균은 군권을 담당한 박영효와 서광범을 각 영에 보내어,

각 영에서 보유하고 있는 총과 칼을 정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총과 칼이 모두 녹슬어서 탄환을 장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공사가 이재원ㆍ홍영식에게

“일본군사가 오래 주둔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오늘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자립하는 방안이 설 때까지만 이라도 기다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며,

결국 일본공사는 김옥균의 방안을 수용하여 당장 철수는 미루어졌다.

 

오후 2시 30분~3시경에 청국진영으로부터 일본공사에게 서찰이 전달되었는데,

채 뜯기도 전에 포성이 울리면서 동ㆍ남문으로 청군이 협공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개화당의 행동대원들과 일본군은 청군과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전ㆍ후영군은 총을 분해 소제하던 중이라 모두 맨손으로 도망친 상태였고,

창덕궁 바깥의 수비를 맡고 있었던 좌ㆍ우영군은 청군에 합류하여 일본병을 공격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옥균은 일본공사에게

“대군주를 모시고 급히 인천에 가서 다음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 사이에 청군의 공격이 계속되어

개화파와 일본군은 다섯 번이나 자리를 옮겨가면서 창덕궁 동북의 궁문 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개화파는 고종을 강제로라도 인천으로 모실 것을 주장한 반면,

일본공사는 군대를 철수하려 하였다.

 

결국 사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정변주도층과 일본공사는 모두 철수하기로 하였다.

다만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관생도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였는데,

이들은 청군과 조선군인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

김옥균은 박영효ㆍ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공사를 따라 일본공사관으로 후퇴하였다.

이때가 저녁 7시에서 7시 30분경이었으니, 정변은 46시간여 만에 실패로 끝났다.

 

 

 

■ 지도로 본, 갑신정변 당시 주도세력의 이동경로

 


(우정국→일본공사관→창덕궁→경우궁→계동궁→창덕궁)

 

 

 

 

 


<참고문헌>

- 김옥균, 《갑신일록》
- 윤치호, 《윤치호일기》
- 어윤중, 《종정연표》
- 김윤식, 《음청사(陰晴史)》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日韓외교자료집성》
-《조선교섭자료》
- 井上角五郞,《漢城之殘夢》(한상일 역, 1993《서울에 남겨둔 꿈》49-50쪽, 건국대출판부).
-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 2005, 역사비평사 등

 

- 필진 : 박은숙 / 등록일 : 2009-05-20

- 한국역사연구회 -  2009년 인문학강좌 제8강-갑신정변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