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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만주붐과 식민통치

Gijuzzang Dream 2009. 12. 21. 18:08

 

 

 

 

 

 

 일제시대 만주붐과 식민통치 


                                   

 

 

이송순 (근대사 분과)
                                      

 

 

1. ‘만주’ - 좋은곳 나쁜곳 이상한곳

 

만주는 한국 역사에서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처럼 결코 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질 수도 없는 그런 공간이다. 고대 고조선에서부터 고구려의 영토에 속했지만 삼국통일 이후에는 공식적으로는 우리의 영토 밖이었다. 그러나 발해의 역사와 고려, 조선시대에도 한민족의 공간에서 만주지역은 분리하기 어렵다. 
  
현재 만주지역은 소속 및 행정적으로 중국의 영토로서 동북3성 -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 지역을 말한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만주라는 명칭과 더불어 ‘간도’라는 명칭도 익숙하다.

 

간도는 압록강ㆍ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과 접해있는 지역으로 두만강 건너편 지역의 북간도와 압록강 건너편 지역의 서간도로 나누기도 하는데, 17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건너가 정착촌을 마련한 지역은 훈춘-연길-길림의 북간도로서 이 지역을 ‘간도’로 통칭하기도 한다.

 


<그림 1> 만주 지도 (출처 http://www.gando.or.kr)

 

 

동아시아에서 근대 이후 만주는 관련국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시선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청 왕조 성립이후 만주지역을 자신들 ‘조종(祖宗)의 발상지’라 하며 ‘봉금지역’으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거주와 활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경지가 부족한 조선 북부지방의 가난한 농민들은 만주지역으로 월경하여 인삼 채취나 경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만주(간도) 이주는 근대로의 이행기인 19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속에서 더욱 가속화되었고, 결국 20세기 초 만주는 중국, 한국만의 공간이 아닌 제국주의적 야심을 가진 러시아와 일본까지 개입하는 정복과 혼돈의 공간이 되었다.
  
근대사에서 만주는 ‘동양의 서부’라 불리며 개척과 정복, 기회와 가능성의 공간으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만주는 환타지의 공간에서도 활용되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서부영화는 195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미국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에 전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한국에서도 1960년대~70년대 초까지 ‘동양의 서부’라는 광활한 만주평원을 무대로 하는 ‘만주대륙물’ 혹은 ‘만주웨스턴’ 영화가 제작되었다.   만주 독립군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를 돕는 여성과의 로맨스, 이들을 방해하는 일본군 및 마적과의 활극을 내용으로 이국적 풍경 속에서 권선징악, 정의감으로 무장한 주인공의 강인함을 그려냈다.

 

이것은 할리우드 서부영화의 이데올로기 - 미개지를 정복하는 문명의 힘과 선함으로 포장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팍스 아메리카나의 정당화 - 의 한국판으로 반공민족주의와 산업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할리우드 서부영화도 그러했듯이 자본주의하에서 적자생존을 위한 추악한 경쟁과 권모술수가 횡행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하여 ‘만주웨스턴’ 영화에서도 만주를 혼돈과 기회의 공간을 설정하여 ‘독립군’과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적 욕심에 따라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군상들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림 2> 황야의 외팔이 (김영효 감독, 1970)

 

 
<그림 3> 쇠사슬을 끊어라 (이만희 감독, 1971)

 

1970년대 후반 이후 할리우드 서부영화의 쇠퇴와 맞물려 한국 영화에서도 만주물은 자취를 감췄다. 2008년 김지운 감독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놈놈놈)’은 만주웨스턴‘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주목을 받았다.(2008년 8월 2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만주웨스턴 특별전’ 개최) 

 

그렇다면 일제시기 만주는 어떠한 곳이었는가.   - “좋은곳 나쁜곳 이상한곳 ? ”  

 

 


 

2. 일제시기 만주와 식민통치

 

일제시기 만주에 대한 인식 및 이미지다양하고 중층적으로 그려진다. 가난과 궁핍의 상징 (간도 이주의 역사), 저항의 공간 (항일운동의 근거지), 기회와 가능성의 공간 (만주붐, 동화와 지배의 환상), 야만의 공간, 혼란과 미개의 공간 (아편, 마적의 소굴) 이 그것이다.
  
17세기 이후 청의 봉금정책 하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이주하여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1, 2차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에 직면하게 된 중국(청)은 만주지역 역시 자신의 영토로서 배타적인 지배 관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에 청은 만주의 조선인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지배에 들어갔고, 이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은 조선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토록 하였고, 조선과 청의 국경은 백두산 정계비의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이며 따라서 토문강 이남의 간도는 당연히 조선의 영토라는 견해를 보고함으로써 조선과 청 사이에 간도영유권을 둘러싼 국경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되었다.

 

조, 청 양국은 1885년, 1887년 2차례에 걸쳐 국경교섭을 진행하였으나 결렬되었고,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청의 세력 약화와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간도문제’를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5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하였고, 이범윤은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여 조선인을 보호하고 세금도 수납하였다.
 



<그림 4> 백두산 정계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해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8월 일본은 간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하였는데,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는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1908년 일본과 청 사이의 ‘간도협약’ 체결로 드러났다. 즉 일본은 간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이를 청에 넘겨주는 대가로 安奉線 개축권, 무순탄광 운영권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80년 이래 조선인들이 되찾으려 했던 간도는 일본의 일방적 조치로 청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한 후에도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계속되었다. 1909년 간도의 조선인이 98,500인(100)이었는데, 1929년에는 382,405인(388)으로 거의 4배나 증가했다. 그러면서 간도지역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간도협약 체결로 만주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후 호시탐탐 만주, 나아가 중국대륙으로의 침략을 준비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일본군(조선주둔군 포함)이 저지른 만행으로 간도지방에는 35,000여인의 농민이 생활근거지를 잃게 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피난민의 구호와 생활 안정을 명분으로 ‘안전농촌’을 건설하여 계획적인 조선인 이주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간도지역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의 항일무장투쟁이 격심했던 곳이라 계획을 바꿔 ‘조선인민회’를 앞세워 ‘집단부락’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차에 걸쳐 간도에 조선인 집단부락을 건설되었는데, 이 집단부락 입촌(入村)에는 반공 사상이 투철하고 영농능력이 있는 자를 선발하였는데, 입촌을 거절하면 공산주의자로 몰려 참수당하기도 했다. 
  
만주국의 집단부락 정책과 조응하여 조선총독 우가키는 조선농촌 사회의 피폐와 몰락을 개선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에서 매년 3만호 15만인, 15년계획으로 225만호를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정책 구상을 밝혔고, 이에 따라 1932년부터 1941년까지 90여만 인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일본의 정책에 따라 집단이주한 조선인들은 간도를 넘어 북만, 중만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이주해 간 조선인들은 황무지에 맨손으로 정착하여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만으로 논을 개간하며 고통스럽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이러한 농민들의 집단 이주정책과 함께 조선총독부는 ‘조선공업화’ 정책을 실시하며 조선의 자본가들을 만주로 진출하도록 독려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경제적 호황의 기대와 함께 만주가 가진 가능성에 주목하며 ‘만주붐’이 형성되었다. 또한 만주는 ‘가능성의 공간’ 으로 떠올랐다. 경제ㆍ정치ㆍ사회적으로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를 느끼고 그 한계를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제국의 위치에 올라 설 수 있는 기회의 공간으로 선전하였다.
(‘왕도낙토(王道樂土)’)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을 꿈꾸었던 세력 역시 만주는 우리 민족의 역량을 배가시키고, 독립을 쟁취하는데 필요한 공간이라 인식하였다.
  
이러한 선전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만주는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일제의 대륙 침략과 만주국 건국으로 식민지 조선인에게 만주가 새로운 ‘유토피아’처럼 여겨지며 만주붐이 조성된 이면에는 만주의 어두운 현실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아편과 타락의 소굴”)

 

이 시기 재만 조선인의 아편 중독 및 밀매문제는 심각했다. 만주사변 이후 북만이나 동만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인들 중 상당수가 아편 밀매를 생활수단으로 삼거나, 그에 중독되어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신경(장춘), 하얼빈 등 만주 도시지역으로 이주한 지식인들의 아편 문제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조선에서 식민지 피지배민으로서의 좌절을 겪고 만주를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건너갔으나, 실업문제와 사회적 불안정, 민족적 갈등 등으로 아편에 탐닉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만주의 치안 부재는 심각했다. 경찰력은 조선인ㆍ중국인을 막론한 항일세력을 잡아들이는데만 주력했고 일반 민생치안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마적’ 이라 불리는 갱집단이 횡행하며 이들은 아편 밀수ㆍ밀매를 주도하며 세력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만주는 기회와 가능성의 공간이면서도 아편과 타락의 소굴, 범죄가 횡행하는 위험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다. 
   
'놈놈놈‘은 1930년대 만주공간을 배경으로 열차털이범 윤태구(이상한놈) , 마적단 두목 박창이(나쁜놈),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좋은놈)이라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놈놈놈’이 만주의 역사적 현실을 그려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되지만, 그간 우리가 잊고 있던 한 시대와 공간을 새롭게 불러낸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930년대 만주의 현실은 국가로는 조선과 일본(만주국), 국민당의 중국, 공산당의 중국 등이 겹쳐있었다.

 

이념적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친일 등이 얽혀있었고, 또 독립군, 비적, 토적, 공비, 공산당 정규군, 일본군 등이 혼재했다. 그 속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밤이 더 길지 않았을까.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의 아픔이 1930년대 만주와 더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다.    

 

- 필진 : 이송순/ 등록일 : 2009-06-08

-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인문학강좌 제10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