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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여우사냥'과 불편한 진실들

Gijuzzang Dream 2009. 12. 21. 17:41

 

 

 

 

 

<명성황후> ‘여우사냥’과 불편한 진실들 


 

 

 

장영숙 (근대사 분과)
 

 

권력욕에 불타는 사악한 여인, 집안을 망친 암탉, 시아버지와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 혼란을 일으킨 주범, 남편인 고종을 좌지우지하며 권력의 최전선에서 나라를 부패의 도가니로 몰고 간 여인...

이는 일제 식민지시기부터 1980년 정비석의 소설, ‘민비’가 출간될 때까지 역사소설에서 보인 명성황후의 공통된 이미지였다. 그런데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종 소설과 드라마, 뮤지컬에서 명성황후는 개화의 선각자요, 고종을 정치적으로 보필한 총명한 여성,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외교 책략가로 새롭게 태어났다.

 


<사진 1> 명성왕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왕후의 머리장식이 대수머리가 아니라는 점, 중전이 입는 홍원삼이 아니며, 왕실을 상징하는 보(補)가 양 어깨와 가슴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일국의 왕비가 다리를 벌린 채 사진을 찍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왕후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게 제기되고 있다. 
                                                  
 

황후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는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근대사를 새로이 보려는 노력으로 학계의 연구가 심화되었고,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가 적극화 되면서 전통적 가치관으로 여성을 바라보던 시각이 달라졌으며, 이를 영화 연극계가 담아내어 새로운 상을 만들어간 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사와는 다른 사실(事實)들을 양산함으로써, 또 다른 사실(史實)이 되게 하였고, 매체의 엄청난 위력은 결국 일반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역사에 더 익숙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교실 안 역사’와 ‘교실 밖 역사’의 경계를 허물지는 않으면서, 서로 소통하는 경로는 필요하다 할 것이다.

 

명성황후와 관련하여 한국인 또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썩 내키지 않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각종 드라마나 뮤지컬에서 민족주의적인 감상을 덧칠하여 구국의 영웅이자, 여걸 정치인으로 만든 명성황후의 상은 역사적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황후의 역할을 추수(追隨)해 보자. 황후는 1873년 10월 25일 대원군의 시폐를 들어 퇴진을 요구한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민승호ㆍ이재면ㆍ조영하 등의 반대원군파와 연대해 고종의 친정을 이끌면서 정계에 등장하였다.

 


<사진 2> 경기도 여주 생가에 세워진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탁본

 

그 후 왕비는 여흥민씨 세력을 결집하여, 고종의 개화정책을 선도해 나갔으며, 타고난 총명함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러시아에 의지해 청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방어하는(引俄拒淸, 引俄拒日) 균세외교를 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황후를 구심점으로 하는 민씨세력은 고종 친정 이후 급격히 늘어나 정부의 주요 요직을 독차지 하였다. 이들이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황후와의 연결고리 덕분이었으며, 왕비는 자신의 세력을 믿고 고종의 정치적 결단을 좌지우지하였다.

 

실로 ‘내조의 여왕’선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고종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여걸 정치인으로 상징화되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황후는 일본의 표적이 되어 시해되면서, 일본의 침략을 온 몸으로 막고자 한 구국의 영웅으로까지 묘사되는 가운데, 권력의 중심인 고종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다. 사실이 그러한가?

 


<사진 3> 고종과 외국 사신들의 시선이 왕후를 향하고 있어,

왕후를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삽화

 

고종은 22세에 친정을 시작할 무렵, 북경을 다녀온 연행사들을 통해 만국공법의 수평적 세계질서를 새로이 인식하였다. 서기의 우수성을 깨달은 후, 신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제도와 기구를 수차례 만들어 나갔다. 서양의 개화관련 책자를 수집하여 독서하면서 의식을 개명화해 나갔으며, 서기수입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키는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원군 10년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세가 약했던 고종은 자연스럽게 처족인 민씨세력을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민씨들을 확대기용한 것은 황후의 영향력 때문만이 아니라, 고종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서였다.

 

고종이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해 세운 기구인 내무부의 관료 중 다수는 민씨일족이었는데, 이들은 의정부의 의사결정구조를 거치지 않고 내무부 자체에서 추천ㆍ등용되었다. 이는 내무부 인사에 국왕의 의사가 쉽게 개입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정국운영에 필요한 인물들, 특히 민씨세력을 공식 인사선발 과정인 의정부의 의천(議薦)을 거치지 않은 채, 국왕이 낙점하는 중비(中批)형식을 통해 등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이는 고종이 주체적으로 처족세력을 활용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진 4> 왕후의 지원 속에 정치적 기반을 굳혀 간 고종.


<사진 5> 평복을 입은 고종의 모습.

 

황후를 배경으로 하여 민씨일족이 대거 등용되었다면, 황후 사후에는 민씨일족이 고위관직을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황후 사후인 대한제국기에 가서도 여전히 민씨세력은 전제황권을 구축하기 위한 물리력을 담보하는 부서인 원수부와 군부, 정권의 외곽에서 정부를 홍보하고 비호하는 주요 지방관직에 전방위로 등용되었다. 이는 왕가의 인척가문으로서의 능력과 정권유지 차원의 필요성이 상보적으로 어우러진 결과일 뿐, 고종을 능가하며 정권을 농단하는 형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왜 황후를 표적으로 삼아 시해했는가?

국왕에게 간접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황후를 선택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 점에서 황후에게 과도하게 주어졌던 그간의 평가와 민족주의적인 허상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황후를 구국의 영웅이요 탁월한 여성정치인의 반열에 올리기 보다는,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번째는 일본의 입장에서 인정하기 어렵지만, 받아들여야 할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동안 일본은 황후 시해는 일본의 우익 낭인들에 의한 우연한 살인사건이며, 대원군이 권력에 눈이 멀어 일본의 힘을 빌려 일으킨 조선 내부의 권력쟁탈전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얼마나 사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인가?

 


<사진 6> 왕후 시해장소인 곤녕합(坤寧閤) 주변의 작은 건물에 걸려 있던 왕후시해 장면도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을 계기로 고종과 왕후가 친러정책을 구사하자, 일본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왕비가 있다고 판단하여 왕비시해계획을 세웠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의 지도를 받으며 미우라 고로가 새로 부임한 후, 경성에 있던 우익낭인들과 국권당 패들인 한성신보사 관계자들을 규합하여 거사로 잡은 날짜는 10월 8일 새벽 4시경. 작전명 ‘여우사냥’에서 보이듯 일본은 황후를 간교하고 표독한 여우에 비견하며 꼭 없애야 할 장애물로 여기고 있었다.

 

완강히 거부하는 대원군을 설득하느라 궁성침입은 오전 6시로 미루어졌고, 현장이 외국인에게 목격되는 바람에 황후시해는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당국은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을 위시하여 무단적 성격의 미우라가 황후를 시해할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고, 이노우에는 사건의 실행과정에 깊이 간여하고 진두지휘까지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대원군의 정적 제거를 도와주었을 뿐이며, 사건의 핵심에 대원군이 있는 것으로 왜곡하여 왔다. 일본은 역사의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진 7> 왕후시해와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토 히로부미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은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개혁정치가로 알고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사실은 권력을 앞에 두고 아들과 며느리와 대립함으로써, 조선의 정치적 발전을 더디게 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대원군은 나이 어린 고종을 대리해 10년 동안, 임오군란 후 군란의 뒷수습을 위해 한 달여간, 갑오개혁 당시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일본에 이용되어 넉 달간, 총 세 차례에 걸쳐 집권 기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세자책봉문제, 개방인가 쇄국인가 하는 대외정책과 관련한 문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고종 및 황후를 비롯한 여흥민씨 일족과 정쟁을 빚었다.

 


<사진 8> 카리스마 넘치는 개혁정치가이긴 하나,

고종 및 왕후와 끊임없는 갈등관계를 빚었던 흥선대원군

 

그 결과 조선은 청ㆍ일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는 곧 국권약화로 이어질 소지가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노욕을 제어하지 못한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이 원로정치인으로서 고종과 황후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국가의 자문역만 충실히 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 필진 : 장영숙 / 등록일 : 2009-05-17

- 한국역사연구회, 【2009년 인문학강좌 제7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