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덕수궁미술관] 배병우사진전

Gijuzzang Dream 2009. 11. 30. 13:16

 

 

 

 

 

 

 

전시기간 : 2009년 10.01 ~ 12.06

전시장소 : 덕수궁미술관

관람시간 : 09:00am ~ 08:30pm /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6,000원 / 중고생 4,000원 / 초등학생 2,500원(덕수궁 입장료 포함)

 작품설명 시간 : 10시/ 11시/ 12시30분/ 14시/ 15시/ 16시/ 17시/ 18시30분

 

 

 

 

빛과 선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미감을 선보여온 배병우의

초기부터 최근작까지 97점이 공개돼 회화적인 사진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고향 풍경이 담긴 바다와 바위사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소나무 사진,

한국 자연의 부드러운 능선을 포착한 오름, 자연미와 인공미가 절묘하게 조화된 창덕궁 정원사진이

한국적인 감성을 담아냈다.

 

팝스타 엘튼 존이 2005년 당시 한국사진작품 판매최고가인 1만5,000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2,670만원)를 주고

구입하면서 소나무 사진이 유명해졌다.

2009년 6월 워싱턴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열화당)>를 선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배병우》展은

수묵화와 같은 소나무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 배병우(1950~ )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서

국제무대로 발돋움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

한국 현대미술의 궤적 속에 그의 사진의 진가를 살펴보고자 마련되었다.

 

2006년 '포토 에스파탸'의 개막행사로 동양의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스페인 티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배병우는,

이후 스페인 정부의 의뢰를 받아 세계문화유산인 알함브라 궁전의 정원을 2년간 촬영하는 등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 작가이며, 동시에 90년대 이후 국내 사진계가 급팽창하게 이르는 주역이기도 하다.

인도 타지마할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미궁(美宮)으로 꼽히는 스페인 알함브라궁의 숲과 정원을 찍고,

2009년 7월16일-9월13일까지 알함브라궁에서 <영혼의 정원(The Soul Gardea)-알함브라와 창덕궁> 전시를

하고 있는데, 알함브라궁의 디렉터는

'지난 세기에는 알함브라궁을 전 세계에 알린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이,

 21세기에는 배병우가 가장 중요한 트래블레였다'며 극찬했다.

 

배병우는 알함브라궁과 더불어 창덕궁을 함께 비교하였다.

알함브라궁과 창덕궁의 숲과 정원은 다른 듯 닮아 있었고 특히 양쪽 궁의 지붕기와가 놀랄 만큼 닮았다.

"알함브라궁은 15세기, 창덕궁은 16세기에 지어졌는데 양쪽 모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후원을 갖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정신과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또 알함브라궁 뒷산에도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을 이루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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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진가이기보다 예술가임을 자처하며 창작 활동과 후학 양성은 물론, 대규모 그룹전을 선도하면서

한국 현대사진계에서 사진이 단순한 재현의 도구에서 벗어나 예술적 표현도구로 인식되게 함으로써

다양한 확산을 이루도록 하는데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후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한 배병우는

모홀리 나기(Moholy-Nagy),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의 사진세계에 심취하였으며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안셀 아담스와 에드워드 웨스턴 등 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던

장소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을 붓 대신 카메라로 그린 그림이라 칭하며,

간결한 조화를 강조하는 한국 고유의 미감으로부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탐구하는 배병우의 작품은

물질과 속도를 쫓는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비록 그 역사적 배경과 문화가 다르더라도 명상으로 이끌며

사진 속 풍경에 몰입하게 한다. 동일한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의 창작 태도에 따라

시리즈별 구성 방식으로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상의 본질을 찾아내어 회화적 사진을 제시하는 배병우 작품세계의 여정을 돌아본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의 풍경을 담은 바다와 바위사진에서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소나무 사진, 한국 자연의 부드러운 능선을 포착한 오름,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에 있어 극치를 이른 창덕궁 정원 사진을 비롯하여

오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알함브라궁전의 정원 사진이 국내 처음 소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박영란 학예연구사는

“물질과 속도를 쫓는 동시대인들이 비록 역사적 배경과 문화가 다르더라도 한국 고유의 미감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조형언어를 제시하는 배병우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통해 앞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는

그의 행보를 한층 더 기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설명했다.

 

 

 

 

 

경주/1985 

 

경주/1985/27x27

 

경주/1985/50x50

 

 

경주/1985/125x100

 

정선/1985/35x27

 

하동/1987/27x27

 

경주/1987/35x27

 

 

경주/1990/27x27

 

  

 경주/1992/120x340

 

 

경주/1992/50x60

 

 

 

경주/1992/340x120

 

경주/1992/120x60

 

  

  

 

 

경주/1992

 

  

 

 

경주/1993/120x340

 

하동/1993/340x120

 

강릉/1993/27x35

 

 

제주도/1993/35x27

 

  

빛/1994/1997/1997

 

  

바람/1995

 

  

눈/1997

 

      

제주도/1981

 

제주도/1985

 

제주도/1992

제주도/1997

 

제주도/1998

제주/1999

 

산/1998 

 

 

산/1999

 

오름/1998

 

오름/ 1999

 

종묘(정전) 설경/1998

 

종묘(정전) 묘정월대/1998

 

종묘 신문(神門)에서 본 정전/1998

 

종묘 정전 전경/1998

 

종묘(정전) 판문/1998

 

종묘(정전) 동축 기둥열/1998

종묘(정전) 잡상/1998

 

 

종묘(정전) 공신당내부

종묘(정전) 공신당/1998

 

종묘(정전) 서월랑/1998

 

종묘 정전 동문, 전사청, 수복방/1998

 

종묘(영녕전) /1998

 

종묘(영녕전) 제기고/1998

 

종묘(영녕전) 후곽/1998

 

종묘(영녕전) 동문과 어로/1998

 

 

종묘(영녕전) 신로(神路)/1998

 

종묘(영녕전) 서월랑/1998

 

종묘 공민왕신당/1998

 

어숙실/1998

 

종묘 제정(祭井)/1998

 

 

 

창덕궁

 

 

배병우

195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74년과 76년에 각각 졸업하고,

88년에는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풍경을 넘어서(91. 서울), (11월 한국사진의 수평전(91, 92. 서울), 사진-오늘의 위상(95. 경주),

사진-새로운 시각(96. 국립현대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했으며,

최근에는 90년대 한국미술(96. 일본 국립근대미술관), Fast Forward(97. Power Planet, Toronto),

Alienation and Assimilation(98. Museum of Contemporary Photo, Chicago), 개인전 (98. OZ Gallery, Paris)등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주목받고 있다.

 

소나무, 바다, 산과 같은 한국의 정서를 사진에 담아 온 배병우는

평범한 소재를 탁월한 심도로써 표현해내는 작가이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배병우는 최근 제주 오름을 주제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수평에 대한, 아니면 경계를 이루는 선에 대한 그의 편애(偏愛)는 분명한 일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그 선이 단순한 구도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의 눈길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조용히 쏟아지고 있다.

그 눈길, 그 주시(注視)가 아주 강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을 찍은 사진에서조차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온다.

오름 사진에서는 과거의 어느 때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능선을 넘었고 살았고 그리고 죽어간 무수한 사람들의 어렴풋한 숨결이 느껴진다.

배병우는 산에서 바다에서 소나무 밭에서 그런 소리, 그런 기척을 수 없이 느껴온 것임에 틀림없다."

 

 

 

내 기억 속의 가장 오래된 그림은 - 배병우

 

내 기억 속의 가장 오래된 그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뒷벽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큰 나무 밑에 기와집이 납작 엎드려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크레파스화였다.

그동안의 사진작업도 그 그림을 닮아 있다. 어쨌든 나는 1970년 미술대학에 들어갔고,

그 해 낡은 니콘-F와 마미야 트윈렌즈를 메고 남해의 섬들을 떠다녔다.

그 해 보길도 앞의 봄바다는 윤선도 시상 바로 그 모습이었다. 고기잡는 돛배가 떠다녔다.

 

1974년 대학졸업부터는 사진을 찍고 가르치면서 살아왔다.

그후 여러 차례 바뀌어간 카메라들과 더불어 남해순례가 세계의 바다로 넓혀져 갔다.

사진가로 성장하는동안 만난 스승은 책 속에 있었다.

모흘리-나기(Moholy-Nagy)의 빛에 대한 새로운 : 사진은 빛 그림이다.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의 자연에 대한 태도와 삶의 실천 등이 내 사진관 형성의 기초였다.

30대 후반 노자(路資)가 마련되었을 때 그들의 고향으로 순례길에 나서기도 했다.

 

1985년 두번째 개인전 '마라도'는 우리땅 여행의 귀착점이었다. 점과 점으로 이어가는 선(線)적땅 보기였다.

그 무렵 동해 '양양'해변을 따라 남하하면서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소나무'를 봤다.

그후 반도 여러 솔숲과 밭을 전전했고 설악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 그윽한 솔향을 음미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소나무는 '반도등뼈인 태백산맥의 피와 살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경주 남산 기슭은 점과 점으로 이어가는 선적 여행의 종지부를 찍게 해주었다.

경애왕릉 솔밭은 선에서 깊이를 갖게 해준 곳이었다.

이곳은 신라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동학의 뿌리인 인내천 사상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직 실마리를 풀지못한 작업들을 계속하면서

태백산맥을 따라 개마고원, 장백산맥의 기상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

 

 

 

 

 

소나무의 춤 / '마음의 영역'전의 배병우

 

- 카미자와 가오리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매일매일 새로운 아침을 찍고 싶다'

배병우는 소나무를 찍는 작가다. 아침 안개로 자욱한 송림의 사진이 많기 때문에 촬영하는 시간대가 언제냐고 물어보니까 그렇게 대답해주었다.

그것을 듣고 나는 벨기에의 얀 파브르라고 하는 아티스트를 머리에 떠올렸다.

곤충기로 유명한 파브르의 손자이다. 이 위대한 곤충학자가 이름 붙인 청(靑)의 시간 - 밤의 생물이 잠들면서 낮의 생물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의 시간 - 에 착안한 BIC의 청색 볼펜에 의한 드로잉이 얀의 작품의 커다란 특징이다.

이 두 사람의 작가가 의식하고 있는 시간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장대하고 또 비밀스런 대자연의 리듬이나 호흡과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 있어서나 숲 속의 아침이 기분 좋은 것은, 그것이 새로운 날의 시작임과 동시에 새나 곤충이나 나무들의 친구가 되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솔직하게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은 가장 여유가 있고 관조적인 상태가 된다.

 

일본 미토(水戶) 예술관 현대 미술센타에서 90년대에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한국 작가 5인전 '마음의 영역'전이 개최되었고, 참가작가의 한 사람이 배병우이다. 그의 작품은 이전에도 본지에 소개한 적이 있는 '한국 사진의 새로운 바람' 의 심포지움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넓은 전시회장의 천정까지 뚫린 벽면에 걸린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의 이상하게 길쭉한 사진이 실로 강하고 인상적이었다. 전시 작품은 그때와는 반대로 송림에 군생하는 소나무의 기둥 부분을 찍은 사진이 병풍처럼 몇 장이고 옆으로 이어져 있다. 모두 한국의 경주 소나무들이다. 전경의 울퉁불퉁한 소나무의 껍질과 앞쪽에서 저 뒤쪽으로 이어지는 많은 소나무 기둥의 가늘고 꾸불꾸불한 아우트라인, 그 위에 그런 소나무들의 표정에 겹쳐서 축축하게 수증기를 머금은 두꺼운 공기의 층과 그 공기의 베일을 통해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찍혀져 있다. 순간을 잘라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을 확장해 놓은 것과 같은 농밀함이 있다. 특히 내가 끌려든 것은 꾸불꾸불하게 뻗친 소나무 기둥의 즐거운 듯한 표정이다. 작가는 '뱀들의 춤 같다.'고 말하며 웃는다.

 

우주를 받치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소나무와 만나고, 스스로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소나무를 찍기 시작한 지 10년여가 지난 지금은 친구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전람회의 카다록에 게재된 소나무와 함께 찍은 포트레이트에는 그런 소나무와의 우정이 느껴져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베베리 퓨티그라고 하는 화가가 미크로네시아의 포토에 섬에서 며칠씩 야자나무를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남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그녀에게 있어서 야자나무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이프를 써서 재빠르게 그려나가는 모양이 그때그때 그녀의 기분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의 소나무나 대나무의 존재가 그녀에게 있어서 야자나무일 것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나무를 향한 애착과 외경의 념을 가지고 결코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언제나 멀리에서 나무의 사진을 찍어오고 있는 단지 야스아끼(丹地保曉)라고 하는 일본의 사진가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 세 사람들의 표현에서는 나무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마음의 소통을 느낀다.

 

배병우는 소나무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하는 한국의 사상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처음 슬라이드로 본 작품은 문자 그대로 그 사상을 체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람회에서는 작품이 사상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감정이나 시점에서 생겨난 것처럼 생각된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더욱 호감이 간다. 그곳에는 생태사진가는 결코 찍을 수 없는 나무의 속삭임이나 나무끼리의 부딪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개성들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읽기 위한 단서

 

 

- 김승곤(사진평론가)

 

모든 예술가들에게 찰나적인 영감과 정동(情動)이 요구되는 것이라면, 배병우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감정이나 번뜩한 아이디어를 열 개도 더 가지고 있는 그런 유형의 사진가가 아니다.

 

그의 사진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 개인의 내면에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집단적인 의식(의식)가운데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주로 바다와 바위와 소나무들을 찍고 있지만, 그들은 물론 다른 풍경 사진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연에 대한 편집광적인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이 주는 트로머(trauma)는 일시적인 정념(情念)이나 아니면 반대로 차가운 이지(理智)의 힘에 의해서 끌어내어진 것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다. 가령 그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의 산수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자연의 형체를 애매하게 만들어 놓는 '안개'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배병우의 소나무를 읽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풍경사진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장르의 가장 보편적인 모티브는 자연이다. 정신에 대한 대립으로서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거나 또는 의식적인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비물질적인 현상이거나에 관계없이, 사진은 그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순식간에 이미지의 화석으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Medusa)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한번 인간의 의식에 노출된 자연은 더 이상 순수한 자연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의해서 제도화된 풍경으로 전환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흔들며 서있는 산수화의 소나무나, 배병우의 풍경사진에 나타나는 소나무들은 설사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도 할지라도, 한국인의 정서에 의해서 그토록 집요하게 반추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서구(西歐)의 자연은 인간의 의지에 힘에 의해서 순화(馴化)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고독했고, 자연과의 거리를 엄격하게 유지하려는 금욕적인 태도를 통해서 그들은 어떤 수준의 정신적인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지배되어야하는 격리된 객체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그 안에 몰입시켜야 할 통일된 우주인 것이다.

 

배병우가 소나무를 모티브로 선택하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들을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사 가운데에서 소나무들이 어떤 자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관솔불로 어둠을 밝혔고, 소나무 마디와 꽃가루를 넣어 술을 담갔다. 일년 중 달이 가장 원만하게 차 오르는 날을 기다려 솔잎으로 떡을 빚고, 소나무 숲 가운데서 정자를 지어 솔잎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를 읊었다. 비록 그 뿌리가 약하다 할지라도 소나무의 자태는 멋이고, 그 푸르름은 절개(節槪)다. 동짓날 밤에 솔뿌리를 넣고 빚은 술항아리를 소나무 아래 묻어 두었다가, 이듬해 낙엽 질 무렵에 파내어 벗과 함께 떠 마시는 송화주며, 솔가지를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으로 치는 그윽한 산수화는 또 얼마나 근사한가.

 

기품 높은 소나무에 인격을 부여하는 일도, 해와 달과 물과 돌과 똑같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나무에 부여하는 일도 서구는 못하는 일이다. 알버트 랭거 팻취, 폴 나다르, 알프렛 아이젠슈타트, 랄프 슈타이너, 윈벌록, 죠셉 수덱, 죠지 티이스. 폴 카포니그로.... 그들이 카메라에 담은 수많은 울창한 나무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풍성한 잎과 가지와 그늘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서구의 어떤 나무에서도 우리의 가슴 밑바닥을 때리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백두산 날머리 송화강에서 시작되어 길림과 부여와 하얼빈과 차무스에까지 뻗힌 아무르강 유역과, 아래로는 함경도 강원도의 튼튼한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남도의 외딴 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야에 널리 자생하는 소나무, 소나무는 우리에게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서러움과 미움과 원망과 그리움 같은 우리 민족의 정서적 근원이다. 한(恨)이고 얼이다.

 

배병우의 가슴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전생(前生)에서부터 자신에게 소나무가 점지된 것을 알고 있다. 소나무는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틈만 생기면 그는 카메라를 챙겨 들고 그 진한 바람 속을 뛰어든다. 언젠가 그로부터 이름 모르는 산모퉁이를 돌아나가면, 그 저쪽에서 소나무들이 늘어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예감할 때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풍경은 의례 사진가의 기대를 배반하는 일이 더 많은 법이다. 그러나 소나무에 관한 한 그는 오랜 경험을 쌓은 사냥꾼의 초자연적인 감각이나, 어둠 속에서 영적인 것을 읽어내는 무당의 능력과도 같은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그들과 교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나무에서는 잘 어우러진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빛, 그림자, 형태, 질감, 원근법 등의 사진의 어휘들을 구사하는 그의 독특한 수사법에 의한 것으로, 예를 들어 그가 안개와 함께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 새벽이나 해질녘의 광선을 고른 것도 그중 하나다. 그는 때로는 사물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기를 원하고 있고, 그 가운데 떠도는 사물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밝혀 내기 위해서는 사물을 일단 등가(等價)의 위치에 병열(倂列)시키는 평면적인 광선의 선택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의 소나무를 불명료한 형태로 떠오르게 만드는 대기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서서히 녹아들고, 어느 순간 소나무들은 광선이 닿은 표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뒤쪽에 드리워진 어둠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웅변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소나무들의 애절한 뒤틀림과 깊고 무거운 술렁거림을 유현(幽玄)한 품에 끌어안고 있는 바로 이 어둠인 것이다. 이 놀라운 배경(ground)과 그림(figure)의 전도와 반복 - 하나의 죽음과 동시에 탄생하는 다른 하나의 생명의 영겁(永劫)의 되풀이야말로 한국인의 생명관과 우주관의 원형(prototype)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안개를 찌르고 들어오는 광망(光茫)의 각도를 선택하는 일도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어떤 경우 그런 광선조건이 그 소나무가 가진 영적인 분위기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빤질빤질한 인화지 대신 표면에 유제를 바른 닥나무 종이를 사용하거나, 소나무들을 옆으로 눕혀 몇 개의 서로 다른 장면을 이어서 늘어놓거나 하는 식으로 사진의 어법(語法)을 늘려가고 있다. 물론 그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방법들이 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예측이 불가능했던 자의식(恣意識)적인 세계를 출현시키고, 셔터를 눌렀을 때 사진이 짊어지게 되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의 숙명적인 제약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유효한 방법이 되고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무릇 사진은 현실을 명시적(明示的)으로 말한다. 보는 일에 익숙해진 우리는 빛을 통해 현실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에 대한 산문적 서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적인 은유와 암시를 통해서 그 대상의 본질적인 의미에 더욱 명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병우의 사진에서 체험할 수 있다.

우리의 토속신앙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體)로서 소리와 색채와 몸짓을 구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연과의 직접적이고 초월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획득하고자 원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지니고 태어난 예술가적인 재능이나 또는 지적(知的)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상(現像)의 껍질을 꿰뚫고 그 안쪽에 내재하는 한국인의 정서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찾아내려는 그의 구도자적(求道者的)인 태도에 의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풍경은 한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동질성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지표(指標)다. 배병우가 그려내는 풍경은 그 소재가 무엇이간 현실적인 표상(表象)과는 무관하게, 일시에 먼 역사적인 장소를 향해 우리들의 시선을 이끌고 가는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가 추구하는 한국의 자연이 다른 문명권의 그것에 비해서 더 우월한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 사이에서 인정되는 차이에 관해서 그의 사진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배병우의 관심은 우리의 표현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풍경의 전형적인 몇 가지 범주들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적 정서(ethos)의 뿌리가 무엇인가, 그것이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밝혀내고자 하는 일에 거의 전적으로 기울여져 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뛰어난 교육자지만, 그보다도 먼저 따뜻한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씨울 생각도, 그럴만한 말솜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과묵하고, 어려운 선택에서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스포츠맨다운 공정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를 보고 있으면 " 알고 있는 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라고 한 동양 철학자의 말이 떠오르곤 한다.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그 일에 대한 의무감도, 또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열정도 가지고 있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 사진작가 배병우의 홈페이지 :  http://www.kcaf.or.kr/art500/baebi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