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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개관기념특별전] 김육과 대동법

Gijuzzang Dream 2009. 11. 19. 19:42

 

 

 

 

 

실학박물관 개관기념특별전 "김육과 대동법"

가. 일시 : 2009.10.23 - 2010. 4.30.

나. 장소 : 실학박물관 1층 특별전시실

다. 내용

- 전시개요 -

조선조의 최고 관료가 김육(金堉, 1580∼1658)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최대 개혁은 대동법(大同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육이 최고 관료가 되고 대동법이 최대 개혁이 된 것은 무엇보다 그 인물과 그 개혁이 조선후기 사회변화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진실로 조선왕조 세제개혁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이었다. 조선의 조세는, 원래 조용조(租庸調)로서, 戶를 부과대상으로 하는 공물은 조세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큼에도 불구하고 수백 가지의 현물로 수취되기 때문에 그 품질이 일정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자의적 수탈을 가능하게 했던 방납(防納)의 폐단이 인민들의 절골지환(折骨之患)으로 되었는데, 대동법은 이러한 공물(貢物)을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단일품목인 쌀로 징수함으로써 인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면서도 정부의 재정수입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대동법의 실시는 조선후기 상업발전의 커다란 계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김육은 대동법의 실시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의 도입과 실시에 있어서도 앞 장서고 수례, 수차 및 동전의 도입과 활자의 제작을 위해서도 진력했다. 여기서 김육과 대동법이 실학탄생의 진정한 배경이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전시내용 -

김육(金堉)의 생애

김육 초상 (金堉 肖像)
조선후기, 작자미상, 견본채색, 272×119.5cm


대례복(大禮服)을 입고 사모(紗帽)를 쓴 전신의 초상이다. “노인의 모습임에도 마치 신선의 풍채를 볼 수 있으며, 마음을 다해 체국(體國)했다”는 숙종의 어제(御製) 찬(贊)이 있다.

김육 초상 (金堉 肖像)
조선중기, 작자 미상, 견본채색, 17.4×26.3cm

잠곡의 60대 후반 모습을 그린 유복본(儒服本)의 반신상이다.


갑회첩 (甲會帖)
1641(인조 19), 필사본


김육이 61세 때인 1640년(인조 18) 한준겸(韓浚謙)의 아들인 한회일(韓會一)이 주도한 동갑계(同甲契)의 계첩이다. 우의정 강석기(姜碩期), 호조참의 김육, 나주목사 김광욱(金光煜) 등 모두 12인으로 구성되었다.


대동법(大同法)의 시행과 성과


김육 교서 (金堉 敎書)
1638(인조 16), 필사본, 복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김육을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로 삼는 교서이다.

이후 김육은 충청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곳에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추진하였다.

충청도대동사목 (忠淸道大同事目)
17세기, 목판본 복제, 1책,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33.5cm×21.7cm


일명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으로 충청도 지역의 대동법 시행에 따른 제반 원칙 등을 기록한 책이다. 1654년(효종 5) 김육(金堉)이 편찬하였다.

대동법시행기념비 탁본 (大同法施行紀念碑 拓本)
1659(효종 10), 탁본,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관료의 귀감

십전통보 (十錢通寶)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계명대박물관 소장


1651년(효종 2) 김육의 건의로 개성 지방의 민간인에 의해 사주(私鑄)되었다.

구황촬요와 벽온방 (救荒撮要) (辟瘟方)
1639년(인조 17), 목판본, 복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실학 속의 천문학

 

실학자들이 서양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필터는

재정립된 성리학적 인식 체계였다. 

  

 

 

 

실학 속의 과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종래의 성리학적 자연인식 체계를 비판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수정해 재정립한 새로운 체계이고, 또 하나는 17세기 초 이후 중국을 통해 수입한 서양과학의 새로운 지식정보이다.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전통적 자연지식과는 상당히 다른 서양과학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새로이 정립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리학적 인식체계에 기반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실학자들이 접하고 선택적으로 수용한 서양과학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천문학 지식이었다.

 

조선의 실학자들이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접한 통로는

전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해 들여온 한문으로 변역 정리된 서양과학 서적이었다.

17세기 초 이후 주로 사신 일행에 들여온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와 같은 서양 천문학 책을 통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새로운 천문학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조선 유학자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지구설 이었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믿어오던 '땅이 평평하고 모나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부정되고,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은 '공과 같이 둥글어 저 반대편 쪽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인 천체 운행의 계산과 같은 천문학은 실용적인 차원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

1644년에 중국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서양식 역법 시헌력을 곧이어 수용하기 시작해

불과 10년 만인 1653년에 독자적인 자체 노력과 능력으로 시헌력으로 개력할 수 있었던 것이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서양식 천문도의 도입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다.

1623년에 제작된 아담샬의 『적도남북양총성도』가 1631년에 수입되었으며,

1723년에 제작된 쾨글러의 『황도총성도』는 1742년에 수입되었다.

이후 관상감에서는 그것들을 모사해 사용했다.

또한 민간에서도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목판으로 제작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천문학 전문가가 아닌 대부분의 조선 유학자들이

천문학 서적이 아닌 가시적인 형태의 천문도를 보면서 신기한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 천문학을 접한 조선 실학자들은

객관적 지식 정보는 긍정하면서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전체 우주의 생성의 원리, 우주의 구조와 운동의 원리 등에 대한

자연 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아가 새로운 천문학 지식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유럽인들이 해석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비판적이고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실학자들이 서양 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필터는

재정립된 성리학적 인식 체계였다.

크게 나누어 홍대용과 최한기의 기론적 메카니즘을 이용한 해석의 방식이 하나이고,

김석문과 서명응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수학적 서양과학 읽기가 또 하나였다.

홍대용의 지구설과 지동설, 최한기의 기륜설로 이해되는 뉴튼 천문학 이해가 그것이었다.

또한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가장 정합적인 우주론을 펼쳤고,

홍대용 이전에 지동설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김석문의 우주론은

다름 아닌 상수역학과 서양과학 지식의 결합으로 태어난 독창적인 우주론 사색이었던 것이다.  

- 문중양교수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실학과 사회

 

<소현세자의 외교활동>

 

 

볼모로 심양에 가다

 

1636년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한달 여를 버티다가 성을 내려와

삼전도에 주둔하던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을 하면서 청과 12개조로 된 조약을 맺었다.

역사책에서는 이를 ‘성 아래에서의 맹약(城下之盟)’이라고 기록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가 항복하는 자리에 동석하였다가 바로 볼모의 길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청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 국왕의 장자와 차자, 여러 대신의 아들(아들이 없는 사람은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문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와 두 대군의 부인들이 모두 인질의 몸으로

심양으로 갔던 것이다. 삼학사로 알려진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붙잡혀 간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심양관의 조선인 정부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이었다.

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직후에는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머물렀고,

5월에 심양관(瀋陽館)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1644년까지 심양관은 소현세자 일행의 숙소이자,

조선과 청의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대표부로 활용되었다.
심양관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비롯하여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운 조선인이 거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곳에서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공방(工房) 기구를 조직하였고,

각 기구가 은의 출입, 물품 및 의약의 공급, 사람과 말의 관리, 물건 제조 및 수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렇게 보면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대표로 하는 조선인의 미니 정부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심양에는 볼모로 잡혀온 조선 고관들의 자제가 있는 질자관(質子館)이나

조선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던 동관과 서관이 있었으므로,

심양은 조선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활발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외교활동을 벌이다

 

청이 소현세자를 볼모로 둔 이유는 조선과 명의 긴밀한 관계를 끊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 군대와 물자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과 맺은 조약에는 조선이 명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이 명나라 군대가 머물던 가도를 정벌하거나 명 본토를 공격할 때 구원병을 파견해야 한다는

조문이 있었다. 과연 청은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면서

소현세자를 통해 군대와 병선, 군수 물자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소현세자는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조선 정부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인조대의 조선 정부는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광해군은

명과 청의 상반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군사적인 충돌을 피해 가는 실리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한다(崇明排淸)’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이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하였지만,

명 왕조의 재기를 기대하며 청과 맺은 조약의 실행을 연기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 대한 청의 불신은 날로 깊어졌고,

소현세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639년(인조 17) 청이 명나라 금주를 공격할 때,

조선에서 마지못해 파견한 임경업 장군의 군대는 명의 군대와 내통하여 청 군대의 동태를 알렸고,

이를 알아차린 청 태종이 소현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엄중하게 항의했던 것도,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소현세자는 청과의 교섭을 담당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하는 모든 사무를 조선의 승정원에 알려 인조의 지시를 받았으며,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세자가 직접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에게 명령을 내려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파악된 주요 정보를 조선 정부에 알려 대책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세자가 보고한 내용에는

만주 지역 팔기군의 동향, 산해관과 북경 일대의 청 군대 동향, 심양과 의주에서의 무역,

청 황실의 후계자 문제, 청이 일본과 외교를 맺으려는 의도, 청과 몽고의 관계 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정세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소현세자는 특별히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기밀 문건을 별도로 작성하거나

사람을 통해 구두로 전달하였는데, 이는 청 정부 쪽으로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청 군대는 조선인 포로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하였고,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의 군대는 일반 백성보다 종실이나 양반집 부녀자를 많이 잡아가려 하였는데,

이들을 풀어줄 때에는 거액의 보상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포로가 몰려든 심양에는 포로를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났고,

보상비가 싼 경우에는 1인당 25-30냥, 보통은 150-250냥이었고,

귀한 신분의 사람이면 천냥을 상회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재력을 가진 친척을 둔 포로들은 돈을 내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가난하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구제될 길이 없었다.

풀려나지 못한 조선인 포로들은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으로 몰려들었고,

국가에서 공금을 내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날마다 울부짖는 조선이 포로를 보며 살아야했던 소현세자는

청과의 무역이나 농업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활용하여 많은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 때 심양관의 경제 활동은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아담 샬과의 만남

 

1644년 청이 북경에 입성하자 소현세자 일행은 청 군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청 태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소현세자를 연회석이나 전쟁터로 불러들였다.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세자에게 날로 강성해지는 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세자와의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면서 청 조정은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마다 청에 바쳐야했던 공물을 줄이고, 조선에 귀화한 한인이나 여진인의 송환을 면제하며,

상당수의 조선인 인질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9년 동안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청이 북경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루었으므로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인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아담 샬은 1628년 북경에 들어와 명 의종의 신임을 얻었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예수회는 중국의 황제에게 접근하여 문화적, 종교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시키려는 포교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는 천문학, 수학, 역학 등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이들의 과학 지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담 샬 역시 예수회 소속의 신부로서 시헌력을 만들어낸 과학자였는데,

소현세자가 바로 그를 만난 것이다.


아담 샬은 조선인이 만난 최초의 독일인이자 과학자였다.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 신부인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이수광이 명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그가 만든『천주실의』만 구입하여 돌아왔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는 청에서 간행된 천주교 서적과 서양 문물을 세자에게 주었고,

세자가 귀국을 할 때에는 천주상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을 선물하였다.

소현세자는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종교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아담 샬(Joemes Adam schal von Bel, 1591-1666)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과학자로서

1622년 중국으로 파견된 이후 선교 및 <숭정역서>의 편찬 등

과학활동에 힘쓴 인물인데,

'탕약망(湯若望)'이란 중세 서양천문학과 역법보급에 대한

큰 공을 세웠던 그의 중국식 이름이었다.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다

 

1645년 1월 18일, 소현세자는 서울 땅을 밟았다.

오랫동안 이국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온 세자였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2개월 후 소현세자는 갑자기 사망하였다.

실록에서는 ‘세자의 시신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기록하였다.

독살의 혐의가 크다는 말이다.


정국의 흐름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외교 노선은 당대 집권 세력의 노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정부는 청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청 황실과 긴밀한 친분을 맺고 청에 협조적이었던 소현세자의 개방 노선이

국왕 인조의 왕권까지 넘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세자가 사망한 후 세자빈 강씨는 국왕 독살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했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가 막내아들만 살아남았다.

- 김문식 (문학박사, 서울대규장각)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