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해녀박물관] 제주 해녀(海女) 사료집

Gijuzzang Dream 2009. 12. 6. 16:02

 

 

 

 

 

 

『제주 해녀사료집』

 

- 역사의 바다속 해녀 -

 

 

제주 해녀 관련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 연대순 정리 

 

 

 

 

 

고난과 강인한 생활력의 대명사인 제주해녀들은 역사에 어떻게 비쳐졌는가.

제주해녀박물관이 해녀들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옛 문헌이나 과거 신문자료 가운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선정해 <제주해녀 사료집>을 펴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몸으로 목숨 걸고 바다 속에서 전복 등을 캐야 했던

제주 해녀들의 고달픈 삶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거센 파도 집채 같은 흰 물결은 뭍에 서서 보아도 무섭거늘 

  (중략)

휘익 길게 한번 내뿜음에 고기밥 면한 걸 그제야 알겠구나"

- 이학규 '전복을 따는 여인(採鰒女)' 중. 1819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어사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이증(李增)의 <남사일록> 등의

사찬 읍지류에는 진상품으로 전복을 따서 공납했던 남성 포작인(鮑作人)에 대한 애환 어린 기사와

캐내는 전복의 종류와 수량 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제주목사 이건(李健)은 1629년 <제주풍토기>에

“해녀들은 생전복을 채취해 관가에 바치고, 그 나머지를 팔아서 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못된 관리가 욕심을 내면

1년간의 조업으로도 관청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또 "(해녀들이) 전복을 잡아 관에 바치다 남은 것을 팔아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데,

탐관을 만나게 되면 여러가지 명목으로 빼앗겨 해녀 무리들이 거지가 돼 얻어먹으러 돌아다닌다" 하였다.

<남사일록(1680년 刊)>에는 "수령이 수산물을 헐값으로 억지로 사들인 뒤 육지에 2배로 비싸게 팔아

자기를 살찌게 하는 밑천으로 삼아 해녀들이 곳곳에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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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상(李衡祥)의 장계(狀啓),『병와전집(甁窩全集)』(1702) <濟州民弊狀>

 

一各道漁戶只應水役若干進上又有給價之時而本島則皆兼他役島中風俗男不採鰒只責於潛女女人官役對荅者惟獨本州爲然况大靜旌義兩官則牧子羣頭皆以女保定給卽此推之境界可想夫以鮑作兼行船格等許多苦役妻以潛女備納一年內進上藿鰒其爲苦役十倍於牧子槪以一年通許則鮑作所納之價不下二十疋潛女所納亦至七八疋一家內夫婦所納幾至三十餘疋.

 

각도의 어촌에서는 단지 수역(水役)에만 응하고 약간의 진상에도 값을 치르는 때가 있는데 본도는 모두 다른 역(役)을 겸합니다. 이 섬의 풍속은 남자가 전복을 채취하지 않고 그 책임이 해녀에게 있을 뿐입니다. 여자가 관역(官役)에 나오는 것은 유독 본 주(州)만이 그러합니다. 더구나 대정(大靜)과 정의(旌義) 두 관서에서는 목자(牧子)의 우두머리를 모두 여자로써 정원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볼 때 그 경황을 짐작할 만합니다. 지아비는 포작(鮑作)에 선원(船員)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해녀생활을 하여 일년 내내 진상할 미역[藿]과 전복[鰒]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란 목자(牧子)보다 10배나 됩니다. 일년을 통틀어 합산하면 남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것이 20필(疋)에 못지않으며, 해녀가 바치는 것도 7, 8필에 이르니 한 집안에서 부부가 바치는 것이 거의 30여필에 이릅니다. 해녀들의 고통스런 삶을 사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자료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잠녀들 고통의 원인은 노동의 심함인데, 이는 진상 혹은 관리들에게 바치는 상납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1695)

 

進上搥引鰒專責於採鰒潛女九十名而老病居多不能支堪採藿潛女多至八百游潛水中深入採藿無異採鰒女而稱以不習抵死謀避均是潛女若歇懸殊爲慮將未採鰒無人且欲均役而勸習採鰒分定搥引鰒於藿潛曾前一女之役十女同力每朔每名所捧不過一二介鰒而訴猶紛紜行之一年稱便者多而仍習採鰒者間有之庶見成效瓜期已迫或言當罷終未堅執更使鮑作百餘名備納 進上所封搥引鰒而其妻潛役無論鰒藿官納之物幷爲全减以俟後之善變通也.

 

진상하는 추인복(搥引鰒 : 말린 전복)을 전복 잡는 잠녀 90명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지워왔는데, 늙고 병들어 거의가 담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백 명에 이르는데, 물 속에 헤엄쳐 들어가 깊은 데서 미역을 캐는 것은 채복녀(採鰒女)나 다름없다. 익숙지 못하다고 핑계를 대어 위험한 것을 고루 피하려고만 한다. 이 잠녀들의 괴로움의 차이는 현격하게 다르다.

장래에 전복 잡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을 염려하고, 또한 균역(均役)을 시키려고 하여 전복잡이를 익히도록 권장하여 미역잠녀에게 추인복을 나누어 정하였다. 종전에 한 잠녀가 함께 힘을 합치면 매달 매 사람에게 받는 게 한두 개 전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호소하며 오히려 분운(紛紜)스럽게 일년을 하고 나더니 편리하다고 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 다음에는 전복 잡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거의 효과를 보기에 이르렀는데 임기가 이미 임박하자, 간혹 말하기를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끝까지 단단히 붙들고 전복잡이 백여 명에게 준비하여 바치도록 하고는 추인복을 봉하여 진상하였다.

 

 

◎ 위백규(魏伯珪)의『존재전서(存齋全書)』중 금당도선유기(1791)

海女 전남 완도군 평이도(平伊島)의 무레꾼을 보면서 기록

順風流到平伊島統浦觀海女採鰒其裸身佩瓢到入深淵...

(순풍이 불자 배를 띄워 평이도에 이르렀다. 온 포구에서 해녀들이 전복 따는 것을 구경했다.

이들은 벌거벗은 몸을 박 하나에 의지하고, 깊은 물속에 자맥질했다.)

근대기 이전, 일본식 용어가 아닌 ‘해녀’라는 명칭이 나타난 책이다.

 

 

 

김춘택(金春澤)의 <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 등의 개인문집에 실린 해녀(潛女)에 대한 기사에서는

당시 해녀들의 작업실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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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春澤의『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1670년) <潛女說>

 

吾就浦邊置薪而爇火吾赤吾身着匏於胸以繩囊繫於匏以舊所採者鰒之甲盛于囊手持鐵尖以游以泳遂以潛焉及乎水底以一手撫其厓石知其有鰒而鰒之黏於石者堅而以甲伏焉堅故不可卽採伏故其色黑與石混乃以舊甲仰而置之以識其處爲其裏面光明在水中可察見也於是吾氣甚急卽出而抱其匏以息之其聲劃然久者不知凡幾然後得生遂復潛焉以赴其嘗識處以鐵尖採之納於繩囊而出至浦邊則寒凍戰慄不可堪雖六月亦然遂就溫於薪火以得生或一潛不見鰒再潛不果採者有之凡採一鰒其畿死者多且水底之石或廉利觸之則死其虫蛇惡物噬之則死故與吾同業者以急死以寒死以石與虫物死者相望吾雖幸生而苦病焉試觀吾容色也.

 

갯가에 가서 땔감을 놓고 불을 지피어, 나는 내 몸을 빨갛게 달구고는, 가슴에 곽(테왁)을 붙이고, 끈으로 짠 주머니(망사리)를 곽에 묶습니다. 이전에 잡았던 전복껍질을 주머니에 채우고, 손에는 쇠꼬챙이(빗창)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마음 내키면 물 속에 잠깁니다. 물 밑에 이르러 한 손으로 바윗돌을 쓸어보면 전복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복이 돌에 붙어있는 것은 단단해서 껍데기로 엎드려 있어, 딱 붙기 때문에 즉시 딸 수가 없게 되어버리므로 그 색깔이 검어서 돌과 혼동하게 됩니다. 바로 묶은 껍데기를 올려다 놓아 그곳을 알 수 있게 하면 그 뒷면이 빛을 받아 물 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때 나는 숨이 급해지면, 즉시 나와 그 곽을 안고 숨을 쉬게 되는데, 그 소리가 '휘익'하며 오래 나는 것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그런 후에 생기가 돌면 곧 다시 물에 잠깁니다. 그 먼저 알아두었던 곳에 가서 쇠꼬챙이로 따서 끈으로 짠 주머니에 넣고 출발하여 갯가에 도착하면 추위에 얼어서 오돌오돌 떨려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6월이라도 또한 그렇습니다. 드디어 땔감 불이 따뜻한 데 가면 생기가 돌아옵니다.

간혹 한 번 물에 잠겨 전복을 발견 못하면 다시 물에 잠기곤 하는데, 결국 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릇 전복 하나를 따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물 밑의 돌은 간혹 모질고 날카롭기도 하여 접촉하였다가 죽기도 합니다. 거기에 있는 벌레와 뱀 같은 악한 동물에게 물리면 죽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므로 나와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급히 죽거나 얼어 죽거나 돌과 벌레 같은 동물 때문에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비록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시험 삼아 제 얼굴을 살펴 보십시요"

金春澤著 (金益洙譯), 『北軒集』(전국문화원연합회제주도지회, 2005), 원문155-158쪽, 265-267쪽.

 

이 자료에서는 1670년경의 해녀들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불턱에서 몸을 데우고, 테왁과 망시리, 빗창을 사용했으며, 본조갱이로 전복껍질을 사용하는 것,

물밖에 나와서 참았던 숨을 숨비소리로 토해내는 것은 현재와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물안경이 없었으므로 손으로 더듬어 작업하고,

그리고 병들어 고생하는 모습을 외지인에게 소개한다. 곧 일이 고통스럽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특히 정조 임금은 제주 해녀의 피폐한 삶에 유독 신경을 많이 썼다.
"매번 전복 캐는 수고로움을 생각해보니 어찌 전복먹을 생각이 나겠는가(每想採鰒之苦 豈有啖鰒之思)”
정조 임금의 애민정신은 머나먼 땅, 제주의 해녀까지 미쳤다.

깊은 바다 속에서 전복을 따다가 조정에 공물로 바쳐야 하는 제주 해녀의 고통을 헤아려

전복을 먹지 않은 것이다.

정조는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공물로 바쳐지는 전복값이 단 수십량”이라고 한탄하면서

“이제부터 전복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14년(1790) 기록은 “제주의 절인 전복을 특별히 공납에서 면제하라”고 적고 있다.

정조는 전복을 공물에서 면제하는 조치도 내렸다.

정조 18년(1794)에는 “강제로 큰 전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구멍이 뚫리지 않은 전복까지 요구하여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어찌 밉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하고 있다.

비단 정조 임금뿐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해녀들의 고달픈 삶을 ‘긍휼히’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6년(1460) 기록에는

“중추원 기건(奇虔 · ?~1460년) 목사가 제주를 안무(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全鰒)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按撫濟州民病所貢鰒魚亦三年不食鰒)”라 하였다.


조관빈(趙觀彬 · 1691~1757년)의 문집인 <회헌집(悔軒集)>에는

조선시대에 제주 해녀들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질하는 여인이여, 물질하는 여인이여

  추위더위 아랑곳없이 알몸으로 물에 드네

  (중략) 

  몸을 던져 하는 일이건만 관에서는 그저 재촉하기만

  (중략)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어 한번 탄식을 발하노라

  전복이랑 나의 소반에 올려놓지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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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관빈(趙觀彬)의『회헌집(悔軒集) 』(1731) '잠녀(潛女)를 탄(嘆)한다'

 

歎潛水女潛水女赤身潛水無寒暑臘月海氣冷徹骨手摘決明于彼渚昨日摘今日摘決明大小不盈百女兮女兮何自苦身投又兼官令促爺孃桎梏郎亦笞不及明朝大患隨水寒病作未暇顧往往驚墮腹中兒苦無如苦無如何必決明海多魚海雖多魚皆讓味誅求最急一村漁豈獨黃堂鼎俎侈爲是朱門苞苴美苞苴多少生愛憎黜陟分明判於此女本弱力力已竭欲訴天門遠未達客莫笑客莫笑在昔紅顔今赤髮耽羅謫者舊達官目見不覺發一嘆我則仁心未忍啖莫將決明登客盤.

 

"해녀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이 바닷가 저 바닷가에서 잠수하여 전복을 따는데 자주 잡다보니 전복도 적어져 진공(進貢)의 양에 차지 않는다. 그런 때에는 관부(官府)에 불러들여져 매를 맞고 심한 경우는 부모도 붙잡혀서 질곡(桎梏)에 신음하고 남편도 매 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과된 수량을 모두 납부하기까지는 용서받지 못한다. 그녀는 드디어 무리를 해서 바다에 들어간다. 때문에 낙태를 하는 수도 있다.

더구나 이런 고생이 단지 국가에의 진공을 위한 것일 뿐 관장(官長)들이 상사에 대한 뇌물로 쓰기 위해서다. 이것을 왕에게 호소하려 해도 왕문(王門)이 겹겹이 닫혀있어 도달할 방법이 없다.

나도 지금 축신(逐臣)이 되어 이 섬에 유배되어 있지만 해녀들의 신세를 생각하면 전복을 먹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나의 밥상에 전복을 올려놓지 말라..."

 

잠녀들의 현실적인 고난을 이해하면서, 국가 진공뿐만 아니라 관부(官府)의 상사들에 바치는

뇌물에 의한 수탈에 대해서 탄식하며 자신은 해녀들이 잡은 전복도 먹지 않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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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3-1775) <탐라록((耽羅錄)>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3-1775)는 영조 40년(1764) 53세의 나이에 영조의 탕평책의 일환으로 제주에 의금부도사로 와서 약 40여 일간 머무르면서 50여 편의 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탐라록(耽羅錄)>이라는 이름으로 <석북시집(石北詩集)>에 있다. 특히 그의 ‘잠녀가(潛女歌)’는 잠녀의 실상과 관리들의 횡포를 담고 있으며 잠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구슬프게 느껴지는 풍속시이다.

 

‘이곳 풍속에 잠녀(潛女)가 신부감으로는 제일, 부모들이 옷과 밥걱정을 안한다고 자랑 한다’

‘뒤웅박 하나로 알몸에 물소중의를 입고 부끄럼 없이 깊고 푸른 바닷물에 펄펄 떨어지는 낙엽처럼 빈 공중으로 뛰어내린다.’ 이 모습을 본 ‘북쪽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남쪽사람들은 좋아서 웃는구나’고 탄식을 하고 있다. 그는 잠녀를 오리나 따오기에 비유하며 잠녀들의 숨비 소리가 멀리 수궁(水宮)에까지 메아리친다면서 참으로 슬프게 여기고 있다.

그는 또 ‘인생에 하필이면 이같은 험난한 업을 택해 한갓 돈 때문에 죽음을 소홀히 한단 말인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물 말고 또 있던가’

‘잠녀, 잠녀, 그대들 즐거워 떠들고 있다마는 보는 사람은 너무나 서글프구나’

‘어찌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농락하여 입맛을 돋우고 고픈 배를 채우리오’라고 읊고 있다.  

 

숙종대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 1653-1733)이 1704년 편찬한 <남환박물(南宦博物)>을 보면 외지인이 바라본 제주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남아를 낳으면 ‘고래밥’이라 말하고 여아를 낳으면 기뻐한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매년 패가 패몰하여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까닭에 남자가 귀하고 여자가 천한 것이다. 아주 잔약한 자 또한 2~3인의 처를 가지게 되고, 혹은 10여인의 처를 둔 사람도 있다. 남아를 낳으면 즉 고래밥이라 말하고 심히 애중하지 않는다. 오직 여아를 낳는 연후에야 기뻐 말하기를 이는 우리를 봉양할 것이라 하니, 정상(情狀) 또한 측은하다."

 

이형상이 바라본 제주남성은 ‘고래밥’이라고 제주사람 스스로 말할 만큼 바닷일을 하다 물에 빠져 죽는 희생자로서 그 또한 측은한 삶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오직 여아를 낳은 후에야 기뻐했다는 말 속에는 제주여성들의 탄생이 진정한 기쁨이 아닌 남성가장이 없는 가정을 평생 꾸려나가야 할 그 무거운 짐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음도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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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 1653~1733)은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조선후기 숙종 · 영조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50세이던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로 부임한 뒤 <탐라순력도> <남환박물> <탐라장계> <탐라록> 등 제주 관련 저술을 다수 남겼다. 그는 관직에 있었던 12년을 제외하고는 말년까지 학문에만 전념해 다방면에 걸쳐 142종 326책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남환박물(南宦博物)>은 제주 목사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이 기록한 제주 박물지이다. 흔히 <탐라순력도>의 자매편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은 제주의 역사 · 지리 · 물산 · 자연생태 · 산업현황 · 풍습 등을 3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형상은 제주 곳곳을 다니며 직접 체험하고 들은 내용과 <탐라지>(이원진), <제주풍토록>(김정), <남사록>(김상헌), <표해록>(최부) 등의 기존 기록을 더해 제주에 관한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놓았다.

특히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때문에 육지와 달리 사계절이 온난해 뱀 · 땅강아지 · 나비 등이 사계절 내내 머문다' 등과 같이 일반 읍지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기후적인 특징과 동식물의 현황까지 기록한 점이 인상적이다. 남해 밖에 펼쳐진 섬과 제주의 독특한 산악인 오름들의 현황부터 제주도 밭농사의 형태, 귤 농원의 현황, 말 목장 관리, 역대로 제주에서 이름난 인물이며 명승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지리적인 면모에서부터 일상적인 제주민의 생활사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300여 년 전 제주방언에 대한 기록도 들어있다. 이형상은 제주어에 대해 "제주방언은 알아듣기 어려우며 앞소리가 높고 뒷소리가 낮다. 숲을 곶이라하고 손톱을 콥이라 한다"고 기술해 제주어의 편린을 알수 있게 했다. 제주의 동식물과 산업에 대한 기록과 제주사람들의 애환에 대한 기록도 들어있다.

'남환'(南宦)이란 글자 그대로는 남쪽 벼슬아치라는 뜻. 여기서는 제주를 의미하며, '박물'(博物)이란 종합정보를 뜻한다.

"혼인하는 저녁에 사위될 사람이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를 배알한다. 음식을 조촐하게 차리면 신부가 나오지 않는다. 술에 취한 뒤에 신랑이 신부 방으로 들어간다."

제주는 독특한 풍습이 많다. 단순히 제주라는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라기 보다는 섬문화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유교 문화가 일반적이던 시절이었지만 제주에서는 동성혼이 빈번했고 혼례 때에는 불교식의 관습을 행했으며 여인이 나체를 드러내는 데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등 육지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는 성리학자였던 이형상에게는 야만스런 행태로 보였고 실제 그는 제주문화를 '교화'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진다.

<남환박물> 이형상 원문, 이상규와 오창명 완역, 도서출판 푸른역사. 2009년

방언학자인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과 제주 지역학 전문가 오창명 제주도문화재전문위원이 한글로 옮겨냈다.

 


조선시대 해녀들이 벗은 몸으로 목숨을 걸고 ‘물질’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있다.

정헌 조정철(靜軒 趙貞喆 · 1751~1831)이 제주 유배기간 자신의 심정을 시와 수필로 기록하였는데,

제주의 풍속 등을 기록한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는

“알몸으로 만경파도에 무자맥질”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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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철은 순조 때 제주목사인데 유배지에 다시 목사로 부임하였다. 1777년(정조 1) 정조의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조태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감형되어 제주에서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624년 간행된 <정헌영해처감록> 가운데 '탐라잡영(耽羅雜詠)'은 제주의 풍속과 풍광을 읊은 칠언절구의 시로서 '其十六'은 남소여다(男少女多)의 풍속을 '其十七'은 약 180여 년 전 우리네 잠녀의 모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글이다.

"탐라는 멀리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이 예부터 변함이 없고, 테우리나 농부나 오막살이에 살아도 부인과 첩을 거느리는 것이 풍습처럼 되었다"고 하면서 당시 제주의 인구를 남자는 5만여 명, 여자는 7만여 명이라고 부기(附記)하고 있다.

 

잠녀들은 속옷만 겨우 걸친 채(潛女衣裳一尺短)

알몸으로 너른 바다 물결 속을 오고 가네(赤身減沒萬頃波)

진상 때가 가까워 오면 고기 얻기 어려울까봐(邇來役重魚難得)

아문들은 함부로 발길질하네(靴尋常幾處衙)

 

잠녀(潛女)는 잠수(潛嫂), 녜 라고도 하며, 잠녀들은 삼베로 속옷을 만들어 그것으로 음부를 가리는데 사투리로 '소중기'라 하는 것을 입고 알몸인 채 바다에서 물질을 한다(潛女以布爲少其陰俗謂小中衣赤身出沒海中)고 조정철은 당시의 잠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해녀박물관은 제주해녀들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고문헌이나 신문기사 중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선정하여『제주해녀 사료집』책자를 발간했다.

이러한 고문헌의 기사를 원문과 함께 독원문(讀原文), 국문해석을 실어서 일반인들도 자료를 쉽게 찾아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920-1930년대 구좌, 성산, 우도를 중심으로 일제의 수탈에 맞서 생존권 투쟁을 벌였던 제주해녀항쟁 해녀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제주해녀항일 운동 등에 관한 국내 신문기사들은 중앙지인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자세하게 게재되어 당시의 해녀항일의 전개 및 역사적 사실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료집에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1월 7일 구좌면 하도리에서 해녀 300여명이 일본인이 만든 해녀조합의 착취에 항의해 호미와 비창을 들고 해녀조합과 경관 주재소를 습격한 사실을 비롯한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자세히 전하는 기사 등이 실려있다.

 

1950-70년대의 제주신보(문), 제남신문 등 지방지에 실린 기사들은 다른 지방으로 출가한 해녀들이 그 지역에서 겪는 어려움과 분쟁, 어장관리 등 해녀권익 및 경북재정지구관련 기사, 어장관리 등 이 땅에서 숙명적으로 살아야만 했던 해녀들의 삶의 편린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제주해녀박물관 측은

“‘저승의 돈 벌어 이승의 자식 먹여살린다’는 제주 속담은 바로 해녀를 두고 한 말”이라며

“해녀사료집이 해녀문화의 역사적, 학문적 기초자료로 활용돼

해녀문화의 전승 보존 필요성을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 2009.12.03  해녀박물관 http://www.haenyeo.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