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 원형복원

Gijuzzang Dream 2009. 11. 20. 11:30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381호’ 원형 복원 전시

 

1930~60년대 서울시민의 발 , 서울전차 , 41년 만에 부활되다!

 

 

 

 

'트램(Tram)'이란 노면전차를 말하는데,

길바닥에 궤도를 설치하고 전기차량을 달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1960년대까지 트램이 운행되었다.

지금도 일제강점기 등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트램을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은 1930년대부터 1968년 11월 29일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시민들의 발이 되었던 전차 381호를

41년 만에 원형대로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 서울 전차의 역사와 전차 381호의 연혁

 

- 일본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전차가 등장하다.

: 110여 년 전 대한제국기 시절, 딱히 대중교통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던 때에 처음 등장한 전차는

매우 놀라운 근대 문물의 상징이었고, 동양에선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빠른 등장이었다.

   

- 전차 381호, 서울 시내를 달리다.

: 전차 381호는 1930년경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日本車輛製造株式會社)에서

제작한 반강제대형보기차(半鋼製-大形Bogie車)이다.

이 전차는 길이 13.7m, 너비 2.4m, 높이 3.2m, 무게 약 18ton, 탑승인원 100명으로,

전차사업의 최전성기인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제 부품의 적용과 함께 가능한 승차인원을 늘리고자

차량의 내, 외부가 대부분 개조되었다.

 

381호 전차의 행선지는 보존처리 과정 중 전차 내부에서 수습된 표지판으로 보아

을지로를 중심으로 운행한 것으로 보이나, 효자동에서 용산까지 운행하였다는 증언도 있어

여러 노선에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68년 11월 30일 서울 시내에서 모든 전차 운행이 정지되면서 대부분 전차들은 폐기처분되었는데,

다행히 381호는 1973년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개장 때 공원에 전시되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 복원, 보존 처리과정과 성과

 

 

 

 

- 전차 381호, 복원과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되찾은 옛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12월 어린이대공원으로부터 전차 381호를 인수하였다.

인수 당시 전차의 상태는 외부는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으며,

지붕과 내부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이 심하였다.

   

: 서울역사박물관은 전차 381호가 더 이상 손상이 진행되지 않도록 보존처리를 진행하는 한편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자료조사와 고증작업을 실시하였다.

먼저 전차에 대한 각종 사진자료를 확보하였으며,

차량제조회사인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381호 전차의 제조형식인 반강제4륜보기차(半鋼制四輪 Bogie車) 도면을 입수하였다.

또한 일본철도박물관, 일본국립과학관, 신주쿠역사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는

전차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 전차 원형복원 작업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으며,

가급적 차량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부품이 망실되었거나 부식이 심하여 재활용이 불가능한 경우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였다.

내부는 전차의 제조사인 일본차량주식회사에서 입수한 도면과 보존처리 전의 남아있던 상태를 근거로

실시하였다.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차량의 색깔은 (주)삼화페인트에 의뢰하여

하부는 녹색, 상부는 아이보리색 등 원래 색으로 복원하였으며,

주요부품인 집전장치(뷔겔, Bügel)와 주간제어기(Master Controller)는

국립서울과학관과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에 남아있는 실물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복원, 보존처리 전 / 복원, 보존처리 후 

 

제조시기 - 1930년경

운행기간 - 1930년경~1968년 11월29일

제 조  사 - 일본 차량제조주식회사 (일본 나고야)

 

 

 

 

 

 

 

 

 

 

 

 

 

 

 

 

- 잃어버린 세월의 흔적을 찾다.

 

: 한편, 복원 · 보존처리 과정에서 6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계몽문구들

벽면의 구 페인트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출입구 막지말고 좌석은 노유에게'

'불평따라 간첩오고 자랑속에 비밀샌다'

'노약자와 어린이는 보호석으로 안내합시다'

'전차 안은 서로서로 깨끗이’

당시 전차승객들이 지켜야할 공중질서와 사회적인 관심사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서울시운송사업부(66년~68년 전차 운영부서)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금속 명패

출입문과 창문에 부착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전차를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는 점 이외에도

당시 사회적인 관심사항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전차 381호의 역사적 가치와 활용 계획

 

: 그 동안 약 1년 8개월간에 걸쳐 복원 · 보존처리 된 전차 381호는

당초 예상하였던 것 이상으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전차의 구조나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1899년 5월부터 운행이 시작되어 1968년 11월까지 약 70년간

서울 시민의 발이 되어왔던 전차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국립서울과학관에 전시 중인 363호 전차와 함께

이번에 복원되어 공개되는 381호 단 2대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차 381호'는 최근 원형으로 복원돼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서,

'전차 363호'는 국립서울과학관에서 각각 전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 희소성에 있어서 매우 귀중하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당초 전차를 실내까지 완전 개방하여 시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전차의 보존 상태나 역사적 가치, 희소성 등을 고려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전차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외부는 전면 개방하더라도

실내의 경우 전면 상시개방 보다는 가이드 투어프로그램이나 교육프로그램 등을 마련하여

제한적으로 개방할 예정이다. 아울러 전차 381호를 등록문화재로 지정 신청할 계획이다

 

 

  

우리나라 전차의 역사

   

서울 시내에 전차운행이 처음시작된 것은 대한제국 때인 1899년 5월 17일부터로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였다.

그 이유는 고종황제의 청량리 홍릉(명성황후의 능) 행차를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을 빈번하게 행차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림으로써 한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 보스트위 등이 고종에게 접근하여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고종도 여기에 동감하여 한미합동으로 전기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어 1898년(광무 2) 2월 19일 황실에서 40만원과 35만원을 두 차례에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고,

칙명을 받은 대한제국 육군총장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 간에

전기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콜브란은 서울의 전차, 전등 및 전화 가설과 운영에 관한 특허권을 얻게 되자

우선 전차가설을 계획하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1898년 2월 17일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5일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궤도공사를 준공하였다.

또한 동대문 안에 발전소 부지(현 동대문종합쇼핑센터 자리)를 선정하고

75kw 직류 600V 1대, 100마력의 증기발전시설을 병행하였으며,

차량 조립도 마쳐 1899년 5월 17일, 음력 4월 초파일을 기하여 성대한 전차 개통식을 가졌다.

 

참고로 도시교통수단으로 노면전차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81년 독일 베를린에서 였으며,

동양에서는 1894년 일본 경도(京都)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1899년, 부산에 1915년, 평양에 1923년 각각 전차가 개통되었다.

 

이후 전차운행은 새로운 노선이 신설되거나 기존 노선이 연장되는 등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전차는 큰 호황을 누렸고

1950, 60년대 까지 대중교통수단으로 서울 시민들의 발이 되어왔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버스, 자동차 등과 경쟁하면서 적자가 누적되어 운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차량이 노후화 되고 속도도 느려 오히려 버스나 자동차 운행에 방해가 되자 운행이 중단되었다.

1968년 11월 29일, 전차개통 69년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600년사(史)’는 전차 도입 배경을 이렇게 전한다.

 

1899년 5월 17일(음력 사월 초파일), 서대문∼청량리 간을 잇는 전차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귀족 · 고관 · 각국 사신 등을 태우고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가 줄지어 “댕 댕”거리며

종로거리를 지나자 이 ‘기묘한 괴물’을 지켜보려는 사람들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대,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탑승객이 증가하면서 노선도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1899년),

다시 남대문에서 용산까지(1900년1월) 연장됐다. / 조선일보

 

1899년 5월에 열린 서울전차 개통식 모습

 

1904년 당시 경성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난생 처음 보는 전차를 뺏어타고 있는 장면의 삽화

 

  

1899. 5.4 국내 최초로 동대문-흥화문 간 전차 개통식

 

이날 오후 3시 개통된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전차 운행을 맡은 한성전기회사는 고종과 미국인 공동 소유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고종이 단독출자한 황실기업이었다.

고종은 1896년말 이래 주한 미국공사 앨런 및

경인철도부설공사의 청부인으로 조선에 온 콜브란과 만나

황실기업으로 하되 건설과 운영은 콜브란이 맡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 등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이근배, 김두승의 이름으로 1898. 1. 18에 회사를 세웠고

1898. 9.15 경희궁에서 기공식, 12.25에 서대문 - 홍릉간 10km 공사를 끝냈다.

당시 홍릉에 명성황후능이 있어 고종이 홍릉까지 노선을 주장했다.

 

일반시민이 전차를 이용하게 된 것은 5월20일부터인데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거장이 따로 없어 승객이 손을 들면 전차를 세워 타고 내릴 수 있었다.

5.26 파고다공원 앞에서 철로를 건너던 어린아이가 치어 죽는 첫 교통사고가 일어나

성난 시민들이 전차를 부수고 불태웠던 일도 있었다. / Google

 

국내 최초의 전차 개통식을 찍은 사진이 발견됐다.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개통식을 구경하려고 구름 같은 관중이 동대문 성벽까지 올라가 있다.

동대문 앞의 지붕 건물은 전차 보관소.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에 화보 형식으로 실린 것을

근현대사 사료 수집가인 김영준(54)씨가 최근 캐나다에서 입수했다. / Google

 

1899년 5월 4일 오후 3시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된 전차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

동대문에 구름처럼 모인 당시 한성 백성들. 동대문 아래쪽에 지붕을 세운 건물은 전차 보관소이다. 

사진제공=김영준씨  

 

 

 

1899년 최초의 전차개통식 사진 첫 발견

 

우리나라에 도입된 최초의 전차(電車)였던 한성전기회사 전차의 개통식 사진이 발견, 공개됐다.

사진은 당시 미국에서 발행되던 주간지 ‘콜리어스 위클리(Collier’s Weekly)’ 1899년 7월 15일자에

화보 형식으로 실린 6장으로, 근현대사 사료 수집가 김영준 시간여행 대표가

최근 캐나다에서 입수했다.

잡지는 ‘한국인의 폭동과 악마의 차’라는 제목의 화보에서 1899년 5월 4일 동대문에서 열렸던

전차 개통식 때 동대문 성곽에 구름처럼 모인 구경꾼 등을 담고 있다.

‘폭동’이나 ‘악마의 차’라는 단어가 제목에 사용된 이유는

전차 개통 며칠 뒤 어린 아이가 전차에 깔려 죽으면서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잡지는 “한국인들은 전차를 악(惡)의 음모(machination)로 보았으며,

나라와 민족에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했다”고 적었다.

 

조선 황실이 단독 출자해 세웠지만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이 운영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성전기회사가 당시 한성에 전차사업을 추진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서울에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이 황후의 능인 청량리 홍릉(현재는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에

행차할 때마다 10만원의 비용이 들었는데, 전차를 타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에 따르면 당시 10만원은 80㎏ 쌀 1만 가마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기공식은 1898년 9월 15일 경희궁 앞에서 열렸다.

1899년 4월 26일 콜브란이 사회 저명인사에게 보낸 초청장에는

‘대중이 익숙해질 때까지 전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5마일(8㎞)로 운행할 것이며,

그 뒤로도 시속 15마일(24㎞)은 초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전차는 5월 4일 오후 3시 동대문-경희궁 흥화문 간 첫 운행에 성공했으며,

5월 20일부터 정상 운행에 들어갔다.

 

당시 독립신문 등에 따르면 전차는 정거장이 없이 손을 흔들어 탈 수 있었고, 5세 이하는 무료였다.

요금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상등칸은 엽전 3전5푼, 하등칸은 1전5푼으로,

당시 쌀 1㎏ 가격이 4~5전인 점으로 볼 때 요금은 비싼 편이었다.

 

개통 초기 전차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일단 타면 동대문과 서대문 사이를 왕복하면서 좀처럼 내리지 않았고,

전차만 타다가 재산을 탕진한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신문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개통 직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장안에서는 전차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개통 1주일째 되던 1899년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에서 어린이 한 명이 전차에 치여 죽게 되자

전차에 대한 군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군중은 전차를 세운 뒤 일본인 운전사와 차장에게 뭇매를 가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고로 전차는 3개월 가까이 운행을 멈추기도 했었다.

서울의 전차는 이후 70년 가까이 운행되다가 1968년 11월 30일 운행을 멈췄다.

사진 소유자 김씨는 이 사진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 조선일보 2004-05-18, 신형준기자

 

한편 일본에서 전차는 1890년 일본 동경 우에노박람회에서 먼저 첫선을 보이는데,

영업용이 아니라 단지 전기의 효율성을 시험하기 인한 PR용으로 제작된 것이고

영업용으로 일본 최초의 전차는 1895년 교토(동경)에서 시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경은 인구가 많고 말 등 다른 교통수단이 많았고

또 전차선로를 까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1904년에 영업용전차를 운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