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은평 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셋

Gijuzzang Dream 2009. 11. 10. 21:51

 

 

 

 

 

 

 

3지구 A공구 2지점 - 청담사(靑覃寺) 터

 

  

A-2지점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 4동(부속시설 포함)과 조선시대 건물지 1동이 확인되었다.

특히 1~3호 건물지는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기단부와 초석ㆍ적심 등이 비교적 양호하게 잔존하고 있다.

1호 건물지의 내부와 기단아래에서는 고려시대 청자편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1호 건물지 남쪽 기단부와 2호 건물지 북쪽 기단부 사이에는 상당한 양의 기와무지가 잔존하고 있다.

이들 기와편에서는 ‘三角山 靑覃寺 三宝草’ 자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 들이 다량 수습되었다.

 

 

 

 

 

[삼각산청담사 삼보초(三角山靑潭寺 三) 명문기와]

 

 

청담사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저술한『법장화상전』에서 신라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위치나 존치시기 등을 알 수는 없었다. 명문에 나오는 삼각산은 북한산의 고려시대 명칭이다.

청담사명 기와가 은평뉴타운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청담사와 직 · 간접적인 관계에 놓여있던 사찰이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된 건물지가 바로 청담사의 옛터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확인된 명문기와는

적어도 청담사의 위치나 존치시기 등을 추정하는데 단서가 되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청담사(靑潭寺)와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신라 중기에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것은 화엄종(華嚴宗)이었다.

이 화엄종의 승려가운데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義湘)과 그의 제자들의 활동이 뛰어났다.

그들은 전국에 10군데의 사찰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는데

이를 화엄10찰이라고 한다.

 

최치원(崔致遠)은 상의 화엄10찰로

「당대덕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德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에서

미리사(美理寺), 화엄사(華嚴寺), 부석사(浮石寺), 해인사(海印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화산사(華山寺), 범어사(梵語寺), 옥천사(玉泉寺), 국신사(國神寺)와 함께

한주(漢州) 부아악(負兒岳)의 청담사(靑潭寺)를 화엄학의 10산으로 꼽았다.

여기서 한주는 지금의 서울을 말하고, 부아악은 아이를 업은 듯 한 모습의 산이라는 뜻으로

북한산의 줄기인 북악(北岳)을 부르던 옛 이름이었다. 

 

 

 

 

 

 

 

금암참(黔巖站)과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428번지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유형문화재 제38호)

정조가 1781년(정조 5), 숙종의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인 영조를 회상하면서 친히 글을 짓고 세운 것이다(御製御筆).

 

“소자가 왕위를 이은 지 5년째 되는 신축년 가을 팔월 초 길일에 삼가 짓고 써서 15일에 세우다”

(小子嗣位之五年辛丑八月初吉日 敬製敬書 十五日立) 

   

비문의 내용을 보면,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 1721년(경종 원년)에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러 밤이 깊어 금암발참(黔巖撥站)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 내를 건너고 있었는데 뒤따르던 자가 자신의 소를 도둑맞았다고 하였다.

이를 본 영조가 불쌍히 여기며 참장(站將)인 이성신(李聖臣)에게

‘흉년이 들어 삶이 곤궁진 자가 저지른 짓이니 선처하여 심판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참장은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官에 고발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 경성에 도착하였을 때, 영조는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이후 1756년(영조 32)에 영조가 명릉에 가는 길에 발참에 머물렀을 때 이성신을 찾았으나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아들 이인량(李寅亮)에게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관직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영조에 대한 사적을 추념하여 정조는 경기관찰사에게 비석을 세우고

발참의 옛터에 비각을 건립하라고 명하였다. 비는 높이 148㎝, 폭 68㎝, 두께 26㎝.

비석 뒤쪽 50m 거리에는 비석 앞에서 말을 내려 걸어가게 했던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금암기적비와 하마비]

 

참(站)은 파발이 한 번 쉬어가는 구간이자 지나는 사람들이 묵어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금암참(黔巖站)은 서로(西路, 서울-의주)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길을 따라서는 파발(擺撥),

곧 말을 타고 가서 명령을 전하는 기발(騎撥)과 군졸이 걸어가서 전하는 보발(步撥)이 달렸다.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서로(西路)에는 기발을 두었는데,

첫 번째 참이 창릉천을 건너는 나루에 있던 금암참이었다.

이 금암참은 서북 제1로의 실질적인 출발 지점이요,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지금은 구파발이라는 지명과,

1781년(정조 5)에 정조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세운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가 이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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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제도가 설치된 것은 흔히 선조 30년(1597)부터라고 한다.

전란 통에 봉수제(烽燧制)는 거의 허구적인 존재로 되어 변보(邊報)를 미리 아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역로(驛路)는 주로 사람과 공용물자의 수송 임무를 맡았으므로

변방의 급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데다가 그 기능도 마비상태에 있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봉수제 대신에 발군(撥軍=파발)을 세워 변보를 신속하게 전달하자는 의논이

나왔다. 한편 임진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파발제를 실제로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자극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파발제를 실시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당장 실시하기는 어려웠다.

 

정작 파발제도가 조선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3, 4년이 경과한 후였다.

선조 34년(1601) 정월, 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은

'각 역(驛)이 탕패(蕩敗)하여 형체가 없고 변방의 위급함을 경계하여 알려줄 수단이 없다.

이제 경상 · 전라 2대로(大路)에 전일 명군(明軍) 파발이 막(幕)을 설치한 곳에 다시 파발막(擺撥幕)을

설치하고 파발군 6, 7명을 소속시키고 면세공첩(免稅貢帖)을 급여하여 도로 옆의 전답을 경작하게 하고

각 관(官)에 명하여 명군(明軍) 주둔 시에 방조한 마필수를 규례로 삼아 입마(立馬)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목도(目睹)한 명군 파발의 신속함을 설명하여 파발 설치의 불가피성을 거듭

역설하였다. 이로써 조선 후기사회에서의 신속한 통신수단으로 파발제도는 서서히 자리 잡아 갔다.

 

 

 

**조선 후기 서발 파발망【서발(西撥)<서북>(기발 서울―의주) 41참(站) 1,050리(里)

 

대표적 파발망(擺撥網)이었던 서울―의주간 파발(=발군, 撥軍)을 보면 총 41참(站) 1,050리(里)였다.

서울― 기영참(돈화문 밖)에서 시작해서 23리 떨어진 곳에 검암참(양주),

검암참에서 22리 떨어진 곳에 벽제참(고양), 벽제참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분수원참(파주)을 두었다.

서울 돈화문 밖에서 41개 참(站)이 의주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이 참(站)마다 건물이 있었다.

 

파발은 말을 타고 달리는 기발(騎撥)과 속보로 달리는 보발(步撥)로 구분된다.

파발이 교대하는 곳을 참(站)이라 하여 역과는 구별되었고 그 편제도 서로 달랐다.

기발은 25리마다 1참을 두었는데 곳에 따라서는 20리 혹은 30리인 경우도 있었다.

매 참(站)에는 발장(撥將) 1인, 색리(色吏) 1인, 군인 5인, 말 5필이 배치되었고,

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는데 곳에 따라서는 40리 혹은 50리인 경우도 있었다.

 

 

서울―기영참(돈화문 밖)23-검암참(양주)22-벽제참(고양)20-분수원참(파주)20-마산참(상동)20-동파참(장단)30-조현참(상동)25-청교참(개성)25-청석동참(자론참, 상동)25-병전기참(금주)20-관문참(상동)30-관문참(평산)25-석우참(상동)25-안성참(상동)30-관문참(서흥)23-서산참(상동)22-수산원참(봉산)25-관문참(상동)20-동선참(상동)20-관문참(황주)20-저복참(상동)25-관문참(중화)25-대정참[지돌참,(평양)]25-관문참(상동)30-관문참(상동)25-부산참(상동)25-관문참(순안)30-냉정참(영유)30-관문참(숙천)30-운암참(안주)30-관문참(상동)25-광통원참(박천)25-관문참(가산)30-구정참(정주)30-관문참(정주)30-운흥참(곽산)30-임반참(선주)30-청강참(상동)30-차련참(철산)30-양책참(자포원, 용천)30-소관참(의주)30-관문참(상동) : 숫자는 이수(里數)로 표시.

 

 

 

 

 

 

 

 

통일신라 가마 터

 

은평뉴타운 발굴지역 3지구 D공구 2지점에서 총 11기가 달하는 가마가 조사되었다.

이 가마는 유적의 동쪽에서 경사면를 따라 자리하고 있는데, 4기만이 양호한 상태로 조사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는 서울 지역에서 최초로 발굴조사된 것이며,

통일신라시대 가마의 구조와 기와 ․ 도기의 생산체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진관동에서 기와 및 도기를 굽는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마유적 인근에 위치하였을 기와 · 도기 소비지와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데

좋은 기초 연구 자료가 될 것이다. 

 

가마의 형태는 지하 1m정도까지 굴 형태로 파서 만든 지하식 혹은 반지하식 가마이며,

대부분 평면형태가 직사각형 혹은 타원형이다.

크기는 전체 길이가 3~5m정도, 소성부 최대폭이 1~1.5m사이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점토와 돌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연소실과는 평평하게 이어진다.

기와나 도기를 구워내는 소성실은 계단이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연도부는 굴식으로 수직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시설하였으며,

연도부 내부에는 연기 구멍을 막았던 개폐식 할석이 확인되었다.

일부 가마에서는 기와나 도기를 올려놓고 구웠던 돌이나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암키와가 대부분이나 수키와도 소량 출토되었고

사격자문(斜格子紋)계통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것이 많다.

도기는 대부분 회색 혹은 회청색을 띤 호(壺) · 옹(甕) · 병(甁) 등으로 다양하다.

이 유적은 일찍이 서울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신라시대의 대규모 가마터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3호 가마(탄요 전경, 소성실 벽면, 연소실)]

 

 

 

다른 지역의 신라요지

 

서울 · 경기지역에서 신라시대 토기요지가 최초로 보고된 것은 1973년으로 서울 사당동(舍堂洞)에서였다.

사당동 요지 발견 이후 한강유역에서는 더 이상 신라요지가 확인되지 않아

한동안 신라토기와 기와의 생산과 수급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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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가마터는 관악산에서 한강을 향해 뻗은 지맥의 동남사면에 위치해 있는 나지막한 구릉의

자연퇴적층상에서 확인된 8세기대의 토기가마터로, 사당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대지를 고르면서

구릉사면이 절토되었고, 이 과정에서 가마의 대다수가 파괴 · 결실된 상태에서 발굴조사 되었다.

가마는 구릉의 자연경사면을 이용하여 구축한 반지하식 굴가마(登窯)로 추정되는데,

조사당시 생토층이 적색으로 단단하게 소결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회청색으로 환원소성되었던 가마바닥은 이미 결실되었고,

가마바닥 아래의 적색산화층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편평한 바닥의 항아리, 둥근밑항아리, 병, 접시 등으로,

각종의 인화문(印花文)이 시문되어 있어, 경주 화산리(花山里)를 비롯한 출토유물의 양상이 비슷한

유적의 예로 볼 때, 8세기대에 조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출토유물 중 큰항아리의 목부분 파편에서 “□□縣器村 何支爲□□”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주변 일대에서 많은 토기편과 불에 탄 돌들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당시의 대규모 토기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 <舍堂洞 新羅土器窯址 調査略報 (金元龍 · 李鍾宣, 文化財 11, 文化財管理局, 1977) -

 

 

1973년 서울 관악구 사당동 461번지 사당초등학교 남쪽에 자리 잡은 한 야산에는

도처에 토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불에 탄 돌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당시 사당국민학교 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야산 일부를 파괴한 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때 당시 사당초등학교 재학생인 김종재 군이 집 근처 야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토기 파편 몇 점을

발견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3)이었다. 그는 이곳이 가마터 유적임을 직감했다.

서울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는 통일신라시대 토기 가마는

이렇게 해서 존재를 드러낸 유적의 정식 발굴조사는 1976년 3-4월이었다.

그해 3월26일-4월16일에 이루어진 사당동 신라가마터 발굴은 김원룡 교수 주재 하에

서울대 인문대학 고고인류학과와 국립문화재연구소 합동 발굴형식을 가졌는데

이곳이 신라시대 가마터라는 점 외에도

이 발굴이 안겨준 놀라운 성과는 명문 토기 2점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에는 '□□縣器村 何支爲□□'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나머지 한 점에서는 해서체로 '性音'(성음)이란 글자를 새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중에서도 '□□현(縣) 기촌(器村) 사람인 하지(何支)가 □□를 위해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縣器村 何支爲□□'라는 문구를 통해서

통일신라시대 이 일대에 그릇만을 전문적으로 굽던 마을인 기촌(器村)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중요성에 힘입어 이 사당동 가마터는 1976년 4월1일자로 사적 247호로 지정되었다.

다만 그 위치가 지금은 서울 관악구 남현동 538의 1번지로 바뀌었고,

나아가 지정 면적 또한 1천488㎡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서울 · 경기지역에서의 학술 · 구제 발굴조사가 늘어남에 따라

신라요지의 발견사례도 드물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신라통일 이전의 요지로는 문산 선유리(仙遊里)와 남양주 별내택지사업지구 내 가마가 있으며

신라통일 이후의 요지로는 용인 성복동(星福洞)요지와 이천 관고동(官庫洞)요지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선유리요지는 반지하식 오름가마로 능선방향을 따라 조성되었다.

용인 성복동에서는 토기 가마와 함께 기와 가마가 발굴조사 되었으며

정황상 기와와 토기가 같은 가마에서 구워졌을 가능성도 확인되었다.

이천 관고동에서는 지하식 오름가마 2기가 발견되었는데 기와 가마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역시 능선방향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번에 발굴된 은평뉴타운의 요지는 지하식 오름가마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토기와 기와가 함께 생산되었다. 입지도 앞의 두 가마와 마찬가지로 능선방향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경기지역에서 발굴된 일반적인 신라가마와 구조와 운영방식에서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들 가마는 당시 신라가 새롭게 확장된 영토 내에서 건축물을 짓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직접 토기와 기와를 생산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의 무덤,

회곽묘(灰槨墓)

 

  

조선시대 무덤은 크게 토광묘와 회곽묘로 나눌 수 있지만

석실묘(石室墓), 토광묘(土壙墓), 목관묘(木棺墓), 목곽묘(木槨墓), 회곽묘(灰槨墓), 옹관묘(甕棺墓),

화장묘(火葬墓) 등과 같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중 회곽묘는 조선시대를 특징짓는 무덤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로 대표되는 유교식 상장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은평뉴타운지역에서는 5,000기에 달하는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이 중 회곽묘는 발굴구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위치도 해발이 높은 곳이라든지 혹은 특정한 자리에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만든 방법 또한 다양한데,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먼저 회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한 다음

회곽 위에 횡대를 올려놓고 뚜껑에 회[天灰]를 덮은 방식 (2-b공구 1지점 3호 회곽묘)

 

둘째, 먼저 목관을 놓고 그 주변에 보강토를 채운 뒤 회로 조성한 천회를 올려놓은 방식 (뚜껑만 회를 사용)(2-b공구 1지점 9호 회곽묘)

 

셋째, 목관을 안치한 다음 소량의 회와 다량의 모래를 섞어 목관 주변을 보강한 방식

(2-b공구 3지점 9호 회곽묘) 

 

 

 

 

 

Ⅰ형식: ①회곽묘

 

 

 

Ⅱ형식: ②뚜껑만 회곽

 

Ⅲ형식: ③회와 마사토를 섞은

 

보강토

 

생토면

회+마사토

마사토

목관

횡대

 

 

 

 

 

 

[축조방식에 따른 회곽묘 양식]

 

  

회곽묘의 보급과 회만드는 법

 

중국 명나라 때 송응성(宋應星)이 쓴『천공개물(天工開物)』에 따르면

회를 만드는 방법은 석회석이나 굴 껍질을 불에 구워 자연스럽게 가루가 되게 하여 쓴다고 한다.

이때 석회석을 구운 것을 석회(石灰)라고 하고 굴 껍질을 구운 것을 ‘여회(蠣灰)’라고 하는데,

석회를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여회를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무덤을 만들 때 ‘석회 1 : 강모래와 황토 2’의 비율로 혼합한 뒤

찹쌀풀과 다래즙을 잘 섞어 사용하면 단단해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를 ‘삼화토(三和土)’ 혹은 ‘삼합토(三合土)’라고 하였다.

 

조선은 국초부터 회곽 장려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세종 즉위년에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온(沈溫)의 장례에 석회를 부의품(賻儀品)으로 하사한 이래

세종 26년에서 27년 사이에 이르면 대신이 죽었을 때 품계에 따라 석회를 하사하는 규정을 두었다.

 

장례에 사용할 회는 구입하기도 하였지만 묘역의 주변에서 직접 생산하기도 했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문집인『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에는

그의 숙부를 장사 지낼 때 여산(蘆山)에서 석회석을 캐서 산 아래에서 석회를 구워 부순 다음

묘역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회(灰)를 구웠던 회가마는 은평뉴타운에서 가까운 파주 당하리(堂下里)에서 발굴된 사례가 있고,

아산 산양리(山陽里), 보은 적암리(赤岩里)에서는 10여 기의 회가마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천공개물(天工開物)』

 

 

同穴 異槨

同穴

同槨

②-1

②-2

②-3

합장묘

형태

 

 

 

 

 

 

 

해당

유구

도면

 

 

 

 

 

[진관동 유적의 합장묘 형태]

 

은평뉴타운 지역 조선시대 무덤의 형식은 크게 토광묘와 회곽묘로 구분되며

‘내관(內棺)+외관(外棺)’인 이중관(二重棺)이나 외곽(外槨) 혹은 목곽(木槨)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무덤은 대부분 구릉의 정상부 쪽을 향하고 있으며, 토광묘가 많다.

회곽묘는 대부분 10% 내외이며, 아래쪽에는 회곽묘가 보이지 않는다.

Ⅲ지구 2구역은 능선 정상부에 해당하며, 무덤들은 심하게 중복되어 있었다.

특히 3지점에서는 7기의 토광묘가 중복되어 있었다.

시신과 함께 묻힌 부장품은 주로 무덤 바닥면에서 출토되었는데,

요갱(腰坑)이나 편방(偏房) 등 독립된 공간을 만들어 유물을 놓기도 하였다.

출토유물은 토광묘에서 청동 숟가락, 젓가락, 명기세트, 도기호, 구슬 등이 출토되었으며,

무덤 수에 비해 출토 빈도가 낮은 편이다. 회곽묘에서는 거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부장품 유물출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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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품이 발견되는 '요갱(腰坑)' 이란, 무덤의 매장(埋葬) 시설 아래 또는 무덤구덩이(墓壙) 바닥에

유물을 매납하기 위하여 피장자(被葬者)의 허리춤, 즉 무덤구덩이의 한 가운데쯤에

일정 규모로 마련해 놓은 소규모 구덩이를 말한다.

그리고, 봉분 오른쪽은 통상 '편방(便房)' 이 들어있는 자리로 편방에는 명기류가 주로 들어간다.

한편 왕릉의 경우 동구릉의 상설제도를 보면,

현궁(玄宮)의 문짝돌을 닫고 끝으로 문의석(門倚石)을 더 놓는다. 문의석 앞에

길이 2척 2촌, 너비 1척 2촌, 높이 1척 2촌의 작은 터널 모양의 편방(便房)을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회곽묘 합장(合葬) 형태]

 

 [토광묘 단장(單葬)형태] 

 

조선시대 양반 무덤은 대부분 회곽(灰槨)을 사용해서 조성했는데,

이는 시신의 손상을 막기 위해 회곽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

주자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받아들여서이다.

그런데 은평 뉴타운지역을 발굴해본 결과 회곽무덤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구덩이를 파서 목관을 놓거나 바로 유해를 안치했던 토광묘의 형태임이 밝혀졌다.

이는 곧 회곽을 사용해서 무덤을 조성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일반 평민들의 무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 평민의 무덤이 많았기 때문에 6천여 기에 달하는 무덤을 발굴했음에도 불구하고

묻힌 사람의 성씨와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몇 기에 불과하다.  

회곽 덮개에 글을 새겨 피장자를 알 수 있게 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자근동(金者斤同)의 무덤(2지구 B공구 2지점 24호 무덤),

백자 지석이 출토되어 피장자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조후빈(曹後彬)임을 알려주는

덤(3지구C공구 4지점 지표)이 있다.

그리고 또한 관 위에 올려놓은 명정의 글을 통해

본관이 신평(新平)인 학생(學生) 호공(扈公)임을 알 수 있는 무덤(3지구 A공구 2지점) 등이 있다.

 

 

(1)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자근동(金者斤同) 묘

 

2지구 B공구 2지점 24호 무덤에서는 특이하게도 회곽 덮개에 직접 글을 새겨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이름 역시 매우 특이하다.

성까지 합쳐 이름이 4자이고, 보통 이름에 쓰지 않는 ‘者’자를 사용하였다.

옛문서에는 작은놈(者斤老味), 어린이(於理尼), 돌쇠(乭金) 등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 자주 나오는데,

‘자근동’ 역시 ‘작은둥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아닐까.

 

김자근동의 회곽 덮개에는 <資憲大夫行同知中樞府事金者斤同之墓> <庚座甲向>이라 새겨

그의 품계가 자헌대부이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고 적었다.

그리고  ‘경좌갑향’은 경(서남) 방향을 등지고 갑(동북) 방향을 바라보며 누운 자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인 묘에는 <貞夫人德山崔氏之墓>라 새겨 정부인이고, 본관이 덕산인 최씨임을 밝히고 있다.

 

김자근동의 관직인 동지중추부사는 중추부 동지사를 말한다.

중추부는 고려의 중추원을 계승했지만 그 기능이 대폭 축소되어 실질적인 관할 업무가 없었다.

즉 일종의 명예직이었는데, 무관 · 역관 · 의관 등을 임명하거나,

80세 이상 노인을 우대하는 노인직, 또는 공명첩을 발급하여 임명하기도 했다.

김자근동의 경우, 그 이름으로 보아 노인직이나 공명첩을 통해 관직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김자근동이란 이름이 역사자료에도 상당수 보인다.

선조 38(1605)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청난원종공신(淸難原從功臣) 2등에 임명되었던

보인(保人) 김자근동이 있고, 영조대에 무과에 응시했던 별효위(別驍衛: 기마부대) 김자근동이 있다.

이 밖에도 의궤(儀軌)에 장인(匠人)이름이 올라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 중 누가 이 무덤의 주인공인지 알 수 없지만, 매우 흥미로운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2) 청화백자 지석-통정대부(通政大夫) 조후빈(曹後彬) 묘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무덤에는 돌이나 자기로 만든 지석을 사용하거나

회로 만든 벽돌에 글자를 적어 만든 지석을 무덤에 묻어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밝혔다.

이말산 발굴에서는 6천여 기의 무덤 중 1기의 무덤에서 백자지석이 발굴되었다.

지석의 양 측면에는  <有明朝鮮國通政大夫曹公諱後彬墓誌> <淑人大丘徐氏合葬>이라 썼고,

정면에는 피장자의 내력을 실어 그의 가계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조후빈(1608~1663) 지석에 따르면, 자(字)는 여장(汝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조부는 귀현(貴賢), 증조부는 숙정(淑正), 조부는 한량(漢良)이고, 부는 액정서 사약을 지낸 悌建이다.

그는 대구서씨(大邱徐氏) 서계남(徐繼男)의 딸(1611~1670)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의 이름은 무진(戊振)인데 일찍 죽었다. 장녀는 통덕랑 최동환(崔東渙)과 혼인하여 6남을 낳았다.

... 등이 백자지석에 새겨진 조후빈의 가계인데,

그들의 관직은 내수사 별좌, 액정서 사약 · 사알 등의 하위관리, 만호 · 부사직 · 부사과 등의 무관,

그리고 역관 등 주로 중인층들이 도맡아 하던 관직들이다. 이를 통해 중인 신분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지석에는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조후빈의 아들이 일찍 죽어 그 후사를 큰외손자인 통훈대부 내수사 별좌 최승조(崔承曹)가 이은 것이다.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한 것이다.

외손봉사는 조선 전기에 성행하다가 16세기 이후 종법이 강화되면서 점차 사라진 제도이다.

이후에는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지석의 제작 시기는 조후빈 부부 사후 50여 년이 지난 1721년(경종 1)인데,

이 시기에도 외손봉사가 이루어지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외손이 무덤을 다시 조성하면서 이 지석을 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지석에서 사용한 연호이다.

'강희60년신축7월 일(康熙六十年辛丑七月 日)'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에 연도를 표시할 때에는

明의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明을 숭상하고 淸을 배척하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석에서는 淸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하여

숭명의식과는 무관했던 실무관료로서의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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